소설리스트

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80화 (80/254)

80 화

"그 사람, 그 독살당할 뻔한 사 람이 누굽니까?"

가슴이 철렁한 나는 나도 모르 게 라이너의 옷깃을 확 잡아끌며 다급하게 물었다.

'설마 레오인가!'

분명 '요정의 밤'에서 이 사건이 기록된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날 듯 기억이 나지 않았다. 레오 일지도 몰라 초조해하고 있으니 놀란 나를 빤히 응시하던 라이너 가 입을 열었다.

"아이비 론. 아타라 왕국의 남작 되는 자입니다. 아마 영애께선 누 군지 모르실 것 같군요."

아이비 론. 확실히 모르는 이의 이름이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다 맥없이 라이너의 옷깃을 놓았다.

'레오는 아니야. 레오의 가명은 다른 것이었으니까.'

알아본 바, 아타라의 국왕이기도 한 레오는 '레오 블루벨 소백작' 이라는 가짜 신분을 가지고 제국 에 방문했다. 순간 놀란 심장을 심호흡으로 빠르게 진정시켰다.

"어쩌다 일어난 일입니까. 사건 의 경위는?"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이라 아 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범 인을 색출 중입니다만, 대외적으 로 알려지면 아타라 왕국과 제국 간의 불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사절단과 합의 하에 우선 비

밀로 붙이고 있습니다. 사절단이 늦는 건 이 일을 조사하기 위해서 고요."

'설마 엘이 늦는 것도 아이비 남 작을 치유하기 위해서인가.'

이제야 퍼즐이 조금씩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아이비 론은 남작의 직위밖에 되지 않지만 어찌 되었 건 왕국을 대표해서 온 사절단 중 한 사람. 교황이 신성력을 사용할 만 했다.

'그런데...... 누가? 왜 사절단을

해치고자 한 거지?'

중요한 사건을 잇는 가느다란 실마리 하나가 불타 없어진 것만 같았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기 억들이 맞물리고 뒤엉켜 터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크리시스 영애. 괜찮으십니까?"

얼굴을 찌푸린 나를 조용히 살 피던 라이너가 무미건조한 투로 물어 왔다. 메마른 목소리에 숨듯 이 깃든 걱정에 조금 마음이 따뜻 해짐을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끌

어올렸다.

"괜찮습니다. 잠시 생각이 많아 져서."

'우선, 우선 사냥부터. 레오가 도착하면 어떤 상황인지 한 번 더 물어보자.'

애써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고 고개를 들었다. 지금 가장 우선인 것은 사냥이었다.

'나는 그 자동차 새끼를 무릎 꿇 려야 하니까.'

다시금 마음을 다지며 말고삐를 꽉 잡는데, 어쩐지 표정이 어두워 진 라이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애께선 사절단 중에 마 음에 둔 이가 있으십니까?"

'사절단에서?'

그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저었다.

"친우는 한 명 있습니다만...... 마음에 둔 이는 없습니다."

'레오는 친구니까.'

잠시 고민하다 뱉은 내 대답에 라이너의 얼굴이 희미하게 밝아졌 다.

"그럼 됐습니다. 슬슬 들어가시 지요."

작게 중얼거린 그는 숲의 초입 쪽으로 말을 몰기 시작했다.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궁금했으나, 그래 봐야 별 이유가 있었을까 싶 어 얌전히 그를 따라 말을 몰았

다.

숲의 초입은 말을 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라이너를 따라 사람 들을 피해 말을 몰았다. 그와 함 께 숲으로 들어서려던 찰나, 등 뒤로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인하르트 경과 사냥을 나가 려 하나 봅니다, 카슈미르 영애."

내 옆에서 속도를 맞춰 말을 몰 던 라이너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 그러졌다. 늘 무감각한 라이너가 저렇게까지 생생히 불쾌해하는 걸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진정해. 검은 뽑으면 안 돼.'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몰려드 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고 심호흡 했다. 목소리만으로 내 야마를 돌 게 하는 경이로운 이를 향해 고개 를 돌렸다.

"난 그대에게 내 이름을 허락한 기억이 없네만, 프라마 영식."

이 사냥 대회에 파란을 일으킨 장본인, 아우디 프라마였다.

감정 한 점 담지 않은 차가운 내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 은 아우디는 회색 점박이 말을 몰 고 내게로 다가왔다. 내 옆을 지 키던 라이너에게서 슬슬 살기가 풍기기 시작했다.

"그리 차갑게 굴지 말아 주시죠. 앞으로 허락하게 되실 텐데."

'이 새끼가.'

오만하게 나를 내려다보는 아우 디에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저건

이미 자기가 승리해 내 연인이 되 는 미래를 확신했단 태도였다.

뱉는 말마다 내 심기를 거스르 는 그의 입을 조각 내 버리고 싶 다는 충동을 간신히 참으며 차가 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볼일이지?"

용건만 간단히 말하는 투로 그 를 압박했다. 아우디를 잠시 마주 한 것만으로 전투력이 상승하는 기분이라 빨리 사냥에 들어가고 싶었다.

"아, 다름이 아니라...... 카슈미 르 영애께서 아인하르트 경과 함 께 사냥을 가시려는 것 같아서 말 입니다."

"그럴 예정인데. 문제라도 있 나?"

눈썹을 꿈틀거리며 차갑게 대답 했다. 기분 나쁘게 웃은 아우디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오직 영애의 힘으로 사냥 을 하시겠다고 단언하셨는데, 아 인하르트 경과 함께 가시면 규칙

을 어기시는 게 아닌가 싶어서 요."

저건 내가 라이너의 도움을 받 으리라고 확신하고 있는 태도였 다.

'대체 나를 얼마나 물로 보면.'

웅성거리는 사람들 가운데서 입 술을 짓씹으며 간신히 퍼져 나가 려는 살기를 붙들었다.

아우디는 '카슈미르 크리시스의 분노를 이끌어내는 101가지 방법'

따위의 책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

"내 분명 연회에서 누구의 도움 도 받지 않겠노라고 태양에 대고 맹세했을 텐데. 내 맹세가 그대에 겐 우스웠나?"

침착하려 노력했으나 입에선 거 칠고 들끓는 목소리가 튀어나갔 다. 다른 것은 다 참아도 내 무위 를 저렇게나 무시하는 건 참기가 힘들었다.

"아, 물론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정의로운 기사인 아인하르트 경께 서 사냥감을 잡지 못해 곤란해 하 는 카슈미르 영애를 도와주시지 않을까 염려되었지 뭡니까."

어깨를 으쓱인 아우디가 능청스 럽게 말했다. 기저에 깔린 것은, 내가 라이너의 도움 없이는 사냥 감을 한 마리도 잡지 못하리라는 확신이었다.

분노에 겨운 헛숨을 들이켰다. 사람을 살살 긁는 아우디의 태도 는 내가 분노로 이를 악물게 하기 충분했다.

"이 이상 크리시스 영애를 모욕 하지 말아야 할 겁니다."

그리고 검을 잡을까 말까 고민 하던 나를 멈춰 세운 것은, 당사 자인 나보다 더 분노한 것 같은 라이너의 목소리였다.

'......라이너?'

라이너와 눈이 마주친 아우디가 흠칫하며 겁먹은 쥐새끼처럼 움츠 러들고, 옆에 있는 나도 순간 놀 랐다.

라이너 아인하르트는 뭐랄까, 자 로 맞춰진 완벽한 기사의 정석 같 은 사람이었다. 정직하고, 올곧았 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흥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라이너가 화를 낸다니.'

솔직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라 이너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어쩐지 주저되어 머뭇거리고 있을 때, 겁먹은 기색 이 역력한 아우디가 소심하게 반 론했다.

"아, 아인하르트 경, 모욕이라니 요! 저는 그저......

" 나는."

아우디의 소심한 반론은 라이너 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의해 끊겼 다. 감미롭던 목소리가 해저를 긁 고 분출하듯 낮고 거칠어진 것을 느끼며 천천히 라이너에게로 고개 를 돌렸다.

바람을 타고 부는 짙은 로즈우 드 향 사이로 살기가 불어왔다. 일반인들에겐 보이지 않겠지만,

소드 마스터인 내 눈엔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거친 마나의 파동이 보였다. 소드 익스퍼트에게서 살 기가 터져 나오니 자연스레 사람 들이 공포에 질렸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보았다.

"그대에게 닥치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프라마 영식."

진정으로 분노한 라이너의 모습

O

일직선으로 굳힌 입매. 분노를

억누르듯 말고삐를 꽉 쥔 손. 자 각하지 못하고 퍼트리는 것 같은 흉흉한 살기와 서늘한 눈빛을 띠 고 번뜩이는 황금빛 눈동자.

'그' 올곧은 라이너에게서 닥치 라는 소리가 나왔음에 놀라기도 전에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 다.

"한 번만 더 크리시스 영애를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라이너는 화가 나면 정말 무섭

다는 걸.

살기에 짓눌린 아우디가 무어라 덧붙이지도 못한 채 입을 턱 다물 었다. 라이너보다 강한 나조차도 형형하게 불타는 그의 기세에 눌 려 일순 눈치를 봤다.

'아니, 모욕을 당한 건 난데

나보다 라이너가 더 화난 것 같 았다. 나를 위해 화내 주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어쩐지 입장이 미묘 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크리시스 영애가 내 도움을 받 을 것 같아 염려된다고 하셨습니 까?"

"네, 네? 네......

라이너의 차가운 물음에 아우디 가 소름이 끼친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더듬거렸다. 라이너가 황금 빛 눈동자를 시리게 번뜩였다.

"그건 염려치 마시죠. 아인하르 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나 는 감히 크리시스 영애의 사냥을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

아인하르트의 차기 후계자가 그 가문의 이름을 걸고 내뱉는 맹세 의 말은 올곧고도 무거웠다. 일대 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아우디 가 입술을 콱 깨물었다 놓았다.

"그, 그래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아우디 의 반박 시도는 라이너에 의해 가 로막혔다. 차갑게 아우디를 내려 다본 라이너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를 곧게 응시하는 황금빛 눈 동자에 잠시 말을 잃었다. 굳건한 신뢰와 맹목적인 애정으로 가득 들어찬 두 눈동자를. 조금의 흐트 러짐도 없는 깊고 짙은 그의 눈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내려 앉게 만들었다.

소드 익스퍼트인 라이너는 소드 마스터인 나보다 강하지 않았다. 교황인 엘이나 국왕인 레오처럼 막강한 권력을 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소후작이었으니까. 황태자인 디에고만큼 사교에 능하지도 못했

"크리시스 영애께선 내 도움을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영애께 선 능히 혼자 해내실 수 있으니 까."

허나 라이너 아인하르트는, 내가 아는 어떤 이보다 올바르고 믿을 수 있는 이였다.

낮은 목소리에 든 확신이, 날 바 라보는 눈에 담긴 믿음이 들끓던 분노를 잠재우고 식었던 마음을 따뜻한 것들로 채웠다.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부드럽게 웃었다. 어린 시절 구 해 주었던 라이너가 이렇게나 좋 은 사람이 되어서 내 앞에 나타난 건, 불행했던 내 어린 시절이 그 렇게 헛되진 않았다는 위로 같았

"아인하르트 경의 말이 맞네."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입가에 띤 채, 말을 몰아 당당히 아우디 와 마주했다. 나는 당혹스러운 표 정을 지은 그를 향해 확실히 선포

했다.

"나는 내 힘만으로도 그대와의 내기에서 이길 자신이 있어."

검은 재앙은 위기를 벗어나게 해 줄 백마 탄 왕자를 필요로 하 지 않는다.

위기를 함께하고 도와주는 동료 가 있을 뿐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시끄러운 주위를 뒤로한 채 말 을 몰고 숲으로 들어선지 얼마나 되었을까. 뒤를 돌아봐도 공터가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라이너 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괜찮냐니.'

여태껏 침묵하다 갑자기 뜬금없 는 질문을 하는 라이너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말을 덧붙 였다.

"프라마 영식이 무례를 범했지 않습니까. 혹시 불쾌해서 저와 사 냥하는 것도 원치 않게 되신 건 아닌지 염려했습니다."

"불쾌했던 건 맞지만...... 왜 그 때문에 경과 사냥하는 것을 원치 않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아우디의 지랄과 라이너와의 사 냥은 다른 얘기였다. 미간을 좁히 며 고개를 기울이니 입술을 짓씹 은 라이너가 고개를 떨구었다.

"......어찌 되었건 저 때문에 그 런 모욕을 들으신 거 아닙니까.

괜히 제가 함께 가자고 하여 그런 말을 들으신 게 아닌가 싶어 죄송 했습니다."

눈을 느리게 깜짝였다. 라이너는 조금 전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 는 것 같았다. 모욕을 들은 당사 자인 나보다 더 심란해 보이는 그 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경께선 참 상냥하십니다."

"......네?',

짧은 한마디에 라이너의 얼굴이 급속도로 달아올랐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