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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81화 (81/254)

81 화

다정하게 라이너를 바라보자 그 가 입술을 계속해서 짓씹으며 내 시선을 피했다. 늘 생각하지만, 그는 무감각하기 짝이 없는 표정 을 한 주제에 내 앞에서 수줍음은 많이 탔다.

"......과찬이십니다."

"사실인걸요."

말고삐를 느슨하게 잡고 안장에

살짝 몸을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이 어느 정도 몰린 하늘은 비가 올 것 같기도 했지 만, 아직은 화창해 보였다. 익숙 한 숲의 내음 사이로 묵직하면서 도 향긋한 로즈우드 향이 섞이는 것을 느끼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

"보통 남자들은 그 상황에서 자 신의 기사도를 자랑하려 들었을 겁니다. 자신이 얼마나 강하고 정 의로운지 뽐내려고 저를 이용했겠 지요. 하지만 경께서는 스스로를 드러내기보단 저를 지지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예측하건대, 만약 라이너가 아닌 다른 영식과 그런 상황에 처했다 면 그 영식은 나를 위해 화내 주 는 척, 자신의 정의로움을 한껏 드러냈을 거다. 신사로서 나 대신 사냥을 해 주겠다고 하며, 사교계 의 모든 시선이 쏠린 이 내기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려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라이너는 진심으로 나를 위해 분노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주 목받을 주체를 자신이 아닌 나로

만들었다. 그는 조금의 욕심도 없 이 오직 나를 위해 나선 것이었

"제 편이 되어 주셔서 감사했습 니다."

나지막이 속삭이며 라이너를 향 해 싱긋 웃었다. 내 주위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무척 기뻤다.

"경과 인연이 생긴 것은 제 생 에 손꼽힐 만큼 커다란 행운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날 바라보던 라이너의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양 귀와 목 덜미까지 새빨개진 그가 휙 고개 를 돌렸다. 늘 무감각하던 얼굴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물들었 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 나.'

라이너의 흔치 않은 표정 변화 에 조금 신기한 눈빛으로 그를 곁 눈질했다. 수줍음 많은 소년 같은 표정을 지은 라이너는, 저절로 내 게 과거의 편린을 떠올리게 했다.

' 카르텔.'

짧게 다듬어진 검은 머리. 호리 호리하고 마른 몸. 병색이 깃든 창백한 얼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무감각 한 푸른 눈.

라이너의 과거이자, 어린 시절 내 친구였던 소년이다.

'그러고 보니 카르텔과 처음 만 났던 때랑 지금 상황이 비슷하 네.'

문득 든 기시감에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때는 가을이었고 지금 은 봄이라는 점과 그도 나도 훌쩍 커 버렸다는 점이 다르긴 했지만, 장소가 숲이라는 것도, 우리 둘뿐 이라는 것도 비슷했다.

카르텔과의 만남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일어났다. 14살이 되던 해 의 가을, 마수 토벌 의뢰를 받고 갔던 어느 숲에서 마수에게 둘러 싸인 카르텔을 발견했던 건 순전 한 우연이었으니.

'전 여기서나 제 일상에서나 모 두에게 폐가 되는 것 같아요.'

아예 감정이 없는 것처럼 무감 각한 얼굴이 우울로 깃들던 것을 기억한다. 15살의 소년은, 몸도 마음도 병들어 있었다.

'그 아이가 지금의 라이너라 니...... 진짜...... 많이 컸구나.'

기특한 마음 반, 놀라움 반로 라 이너를 새삼스레 관찰했다.

병 때문에 성장이 늦어 나와 비

슷하던 키는 어느덧 나를 훌쩍 뛰 어넘어, 눈을 마주치려면 올려다 봐야 했다. 병색이 짙던 여린 얼 굴은 생기가 감도는 강직한 얼굴 이 되었고, 심하게 말랐던 몸은 크고 튼튼해졌다. 어린 느낌이 강 하던 미소년은 완연한 성인의 미 인이 되었다.

무엇보다 눈에 띠는 변화는 소 름 끼치도록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던 푸른 눈이, 여전히 무감각하 지만 그래도 감정의 파동 정도는 담을 수 있는 황금빛 눈이 됐다는 것이었다.

마수가 가득하던 숲에서 만났던 공허한 소년은 한 사람의 기사로 단단하게 성장해 있었다.

'이젠 아프지 않은 거겠지.'

문득 든 생각에 라이너를 뚫어 져라 관찰했다. 내게서 시선을 피 한 채 식은땀을 흘리던 라이너가 한참 뒤에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와 마주했다. 푸른 하늘의 색을 그대로 대비시킨 듯, 그의 얼굴이 은은한 붉은빛을 띠었다.

"제가 상냥하다고 하셨지요."

그가 작게 속삭였다.

"공녀께서는 상냥한 사람을 좋 아하십니까?"

나지막한 물음과 함께 내게 닿 는 눈빛이 맹목적이었다.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는 충견과도 닮은 눈에, 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 작게 웃었다.

세상의 유행은 돌고 돌았다. 어 느새 사람들은 악과 차가움, 잔인

함 같은 것들을 꽤 멋진 것으로 미화시키곤 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좋았다. 애쓰며 사는 것을 비웃지 않고, 외로운 길을 묵묵하게 지지해 주는 이들 이 좋았다.

"네. 저는 상냥한 사람이 좋습니 다."

나는, 라이너 같은 사람이 좋았 다.

라이너가 웃는다. 그는 무심하던 낯을 벗어 던지고 꽃이 만개하듯 웃었다.

"그렇다면 크리시스 영애에게만 은 계속 상냥할 수 있도록 노력하 겠습니다."

태양을 등진 붉은 얼굴 위로 깃 든 웃음은, 무척이나 아름다워 오 래도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크리시스 영애.

" 네?"

"저희 이거 다......

쉬익!

무언가가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 는 소리와 함께, 호수 앞에서 물 을 마시던 노루가 픽 쓰러졌다. 정확히 심장을 맞춘 검은 화살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다 라이너를 돌 아보았다. 일반 화살이 아닌 내 오러로 작동되는 특별한 활은 대 상이 내 시야에 있는 한 아무렇게 나 쏴도 백발백중이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말씀해 주시 겠습니까?"

즉사한 사슴을 보고 살짝 입을 벌린 라이너는, 내 물음에 잠시 입술을 닫았다. 그의 목울대가 울 렁였다.

"저희, 이 사냥감을 다 가지고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의 물음엔 허탈함과 곤란함이 함께 묻어 있었다. 나는 그 말에 활에 묻어난 마나를 갈무리하며 나무 아래 모아 둔 사냥감을 곁눈

질했다.

'뭐, 세 시간 동안 잡은 것치곤 어느 정도 잡았군.'

무심한 눈으로 사냥감들을 품평 하고는 마나로 단숨에 호숫가로 달려가 사슴을 가지고 왔다. 사냥 감 더미 위에 사슴을 던져 놓고는 눈을 간지럽히는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푸른 리본으로 묶인 머리 카락이 바람에 따라 흔들렸다.

"걱정하지 마시죠. 제게 다 방법 이 있습니다."

쌓인 사냥감을 질린 눈으로 바 라보고 있는 라이너를 향해 자신 만만하게 웃곤 주머니에서 조그만 돌을 꺼냈다.

"그건 뭡니까?"

"칼에게 부탁해서 제작한 마도 구입니다."

짧게 대답하며 돌을 사냥감이 쌓여 있는 곳으로 던졌다.

파앗!

돌이 떨어진 곳으로 빛 무리가 퍼짐과 동시에 사냥감들이 모습을 감췄다.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은 라이너를 향해 자랑스럽게 웃었 다.

"대상을 무한 아공간 보관 창고 로 이동시켜 주죠. 칼이 저를 위 해 특별히 준비해 준 것입니다. 이건 저희의 첫 번째 거점이죠."

"그렇, 아니, 첫 번째 거점이라 면? 아직 돌아가실 생각이 없으 신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던 라이

너가 퍼뜩 되물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는 그를 향해 씨익 웃었다.

"물론입니다. 돌은 넉넉잡아 20 개까지 준비해 왔습니다."

사냥 대회는 내일 정오까지 진 행되며, 나는 다짐했다시피 사냥 대회를 완벽하게 집어삼킬 예정이 었다. 두 시간 동안 소드 마스터 의 뒤를 쫓느라 살짝 땀에 젖은 라이너가 존경과 경악이 함께 담 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힘이 드십니까? 그럼 먼

저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저는 더 사냥을 할 테니."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 는 라이너를 곁눈질하며 발 위로 마나를 덧씌웠다. 곤두선 직감이 주위에 짐승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사냥은 꽤 재밌구나.'

나는 거의 평생을 검을 휘두르 며 살았지만, 검을 휘두른 이유는 대부분 거대한 마수에게서 생존하 기 위해서였다. 사냥이라는 유흥

을 위해 검을 휘두르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시작은 아우디 를 물 먹이기 위해서였으나 하다 보니 내가 즐기고 있었다.

"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습니 다."

라이너가 거세게 부정하며 그도 발 위로 마나를 덧씌웠다. 황금빛 마나가 일렁이는 것이 꼭 금가루 가 휘날리는 것 같아 무척 예뻤 다.

"좋습니다. 조금 전에 계획했던

대로 이젠 오소리 굴로 가보죠."

" 네."

"흔적은 숲 오른편에 남겨져 있 었으니 우선 발자국을 따라서

쿵.

순간 심장이 떨어진다. 나는 말 을 잇지 못한 채 딱딱하게 굳었 다. 심장이 빠르게 방망이질 치기 시작하고,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따갑도록 울리는 머리를 느끼며, 확실한 답을 도출해 냈다.

'가까이에, 거대한 위험이 있다.'

소드 마스터인 나도 긴장할 정 도로 거대한 위험. 얼굴을 딱딱하 게 굳힌 채 직감이 경고하는 방향 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영애?"

라이너가 갑자기 말을 멈춘 나 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았 다. 그가 느끼지 못하는 것도 무 리는 아니었다. 이 기척은 나조차 도 방향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희 미했으니까. 라이너의 말에 답하

지도 못한 채, 빠르게 주위를 돌 아보았다.

'어디지? 무슨 존재지?'

눈을 부라린 채 직감을 날카롭 게 세웠다.

마수 사이에서 구르던 내 본능 은 다른 소드 마스터들보다 몇 배 는 더 날카로웠다. 몇 달쯤 토벌 을 쉬었다고 하여 무뎌질 감각이 아니었다.

짐승보다 더 날카로운 내 직감

이 가리키는 방향은 명확했다.

"라이너!"

크앙!

생각을 거치지 않은 채 오직 직 감만을 따라 재빠르게 몸을 움직 여 라이너를 거칠게 밀쳐 냈다. 라이너의 몸이 나무 쪽으로 밀려 남과 동시에, 거대한 울음소리와 함께 라이너가 있었던 자리에 허 공에서 거대한 아가리가 나타났 다.

라이너는 안전했지만, 그를 밀쳐 내고 그의 자리에 서게 된 내 상 황은 조금 달랐다.

콰득.

"카슈미르!"

살이 뚫리는 섬뜩한 소리와 함 께, 날카로운 송곳니가 박힌 어깨 에서 옅은 핏줄기가 솟았다. 라이 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지러워.'

다급하게 어깨로 마나를 씌워 뼈가 부러지는 것까진 막았지만, 그 찰나에 완벽하게 방어하는 것 은 무리였다. 송곳니에 묻은 독이 어깨 위를 적시는 것을 느끼며 재 빠르게 발검했다.

촤악

다음 순간 은빛 선이 길게 그려 지며 번뜩이는 칼날이 마수의 몸 통을 베어 냈다.

크아악!

귀를 따갑게 울리는 듣기 싫은 울음소리. 코를 혹사시키는 역겨 운 피비린내. 얼굴로 튄 검은색 피.

모두, 내겐 익숙한 것들.

'너무 풀렸구나, 카슈미르 크리 시스.'

눈매를 서늘하게 세웠다. 아무리 이 마수가 모든 기척을 귀신처럼 감출 수 있는 종이었다고 해도, 예민한 직감을 자랑하는 나로서 이리 뒤늦게 느껴 어깨까지 내어

줬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오랜만에 온몸을 지배하는 긴장. 미친 듯이 울리는 직감을 느끼며. 내 어깨를 보고 하얗게 질려 있는 라이너의 앞을 막아섰다.

"제 뒤로 물러서 계십시오, 경."

크르릉.......

상처를 입은 마수가 거칠게 으 르렁거리는 것을 들으며 검을 세 웠다. 날카롭게 빛나는 검날 위로 검은 피가 흘러내려 내 손을 적셨

다.

갈고리 같은 발톱과 초록색 털 로 뒤덮인 두꺼운 가죽. 독이 뚝 뚝 흘러내리는 송곳니와 투명 마 법을 건 것처럼 일렁이는 몸체.

일명 '깊은 숲속의 고요한 폭 군', 하라바나였다.

나보다 몇 배는 큰 덩치와 팽팽 하게 대치하며, 라이너에게 말했 다.

"°1 거대 마수는 조종당하고 있

습니다."

이지를 잃은 두 눈. 소드 마스터 가 내뿜는 살기에도 조금의 물러 섬도 없는 무모함. 그리고 은은히 풍겨 오는 흑마법 특유의 소름 끼 치는 기운.

북부인들에 의해 조종당하는 마 수가 사냥 대회가 벌어지는 숲 한 가운데에 출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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