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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82화 (82/254)

82 화

"......조종당하고 있다고 하셨습 니까?"

나무에 등을 부딪쳤던 라이너가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며 검을 뽑 고 일어났다. 잠시라도 하라바나 의 움직임을 묶어놓기 위해 미친 듯이 살기를 내뿜어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를 오러로 검 위에 출력하

는 것은 향수를 한 번 칙 뿌려 몸 에 향기가 남게 하는 것이라면, 마나를 살기로 변환하여 내뿜는 것은 마나라는 향수를 아예 뚜껑 을 열고 통째로 바닥에 부어 버리 는 것과 같았다. 실용성이 상당히 떨어진다는 소리였다.

거대 마수의 발을 묶어둘 정도 의 살기는 소드 마스터인 나라도 오랫동안 내뿜고 있을 수는 없었 다.

"자세하게 설명해 줄 시간은 없 습니다. 빨리 말을 묶어 둔 곳으

로 가 말을 타고 도망가십시오!"

다급하게 외쳤다.

하라바나는 수많은 종의 마수들 중 최강이라 불렸다. 마수들 중에 서도 가장 큰 몸집에, 무척 난폭 한 성정으로 개체 수는 희귀하다 싶을 정도로 적지만 한번 사람이 사는 마을로 내려오면 혼자서 마 을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위 험한 마수였다. 하라바나를 상대 하며 라이너까지 지켜 줄 자신은 없었다.

크릉...... 크아앙!

말하느라 내뿜는 살기가 조금 옅어지자, 살기에 억눌려 있던 하 라바나가 조금 숨통이 트인 것처 럼 크게 울부짖었다. 급한 마음에 라이너가 도망치는 것도 확인하지 못한 채 마나를 쭉쭉 소비하게 하 는 살기를 거두고 검 위로 오러를 씌웠다.

살기를 거둠과 동시에, 거대한 발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칠흑 같은 검은 오러와 갈고리 같은 발톱이 맞부딪쳤다. 서걱 하 는 소리와 함께 발톱과 발의 일부 가 베여 나갔다. 하라바나가 고통 으로 울부짖었다. 난 뒤이어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발과 이빨을 칼 로 쳐냈다.

'젠장. 하라바나가 왜 여기서 나 타난 거지?'

수많은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 웠다. 뚫린 어깨로 독이 스며드는 고통에 더욱 정신없었다. 북부인

들이 조종하는 마수가 왜 사냥 대 회가 벌어지는 숲 한복판에서 나 타난 건지, 이에 대한 원작의 내 용이 기억이 날 듯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우선, 하라바나부터 처리하자.'

생각이 어지러워지니 집중력도 흩어져 오러가 옅어지는 걸 느끼 자마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생각 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았다.

'하라바나는 보통 방법으로 잡기 쉽지 않다.'

하라바나는 몸집이 거대한 데도 속도가 상당히 빨랐고, 머리까지 좋았다. 소드 마스터의 오러로 같 은 곳을 세 번쯤 찔러야 치명타를 입힐 수 있을 만큼 가죽도 두꺼웠 으니, 가장 강력한 마수라는 이명 은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약점이 있지.'

내 마수 토벌 경력은 8년 남짓. 그 8년 동안 몇 번 마주한 하라 바나와의 치열한 접전 끝에 알아 낸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입천장.'

하라바나는 입천장의 피부가 무 척 약했다. 그곳에 칼을 쑤셔 박 으면, 하라바나는 99퍼센트의 확 률로 죽었다.

'하지만...... 독니에 물릴 각오를 해야 하지.'

어깨가 욱신거림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하라바나의 독은 치명 적이다. 내가 독의 내성이 있었기 에 망정이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물리자마자 죽었을 게 뻔했다.

'혼절 정도는 각오해야겠군.'

이미 라이너를 지키다 한 번 물 렸고, 입천장을 공격할 때 한 번 더 물릴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내가 소드 마스터라도 치명적인 하라바나의 독니에 연속으로 두 번 물리면 회복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스적.

날아오는 거대한 발을 피하며

거대한 몸뚱이로 최대로 출력한 오러를 날렸다. 입천장을 찌르기 위해선 하라바나의 움직임을 더디 게 만들어야 했다. 검은 오러의 난폭한 난도질에 하라바나가 기괴 한 울음소리를 내질렀으나, 두꺼 운 가죽은 조금 흠집만 났을 뿐 아직 멀쩡했다.

' 아파.'

서서히 독이 퍼지며 어깨가 부 풀어 올랐다. 물린 어깨도 하필 검을 잡는 오른쪽이라 검을 휘두 르기 위해 팔을 들 때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날아오는 발을 피하 며 검을 다시금 휘두르려 할 때였

서걱.

나를 향해 날아오던 발톱이, 내 뒤에서 날아온 금빛 오러로 인해 저지되었다. 성스럽다는 감상이 드는 황금빛 오러가 허공에서 산 란하는 것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 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때 그 병든 아이가 아 닙니다."

바람에 휘날리는 은회색 머리칼. 으스러져라 검 손잡이를 잡은 손. 강한 심지를 담아 번뜩이는 황금 빛 눈동자.

"이제 다시는 당신에게 지켜지 기만 하지 않을 겁니다."

라이너가 지난 시간에 대한 후 회와 다가올 시간에 대한 각오가 담긴 눈으로 나를 마주했다.

"더 이상 혼자 하려 하지 마십 시오."

"......아."

그의 눈과 마주하며 짧게 숨을 뱉었다. 혼자서 재앙과 상대하는 것이 너무 익숙해 잊고 있었다.

라이너는 더 이상 그날의 어린 아이가 아니며, 난 혼자 싸울 필 요가 없다는 것.

서걱.

새삼스러운 깨달음 사이에서도 하라바나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날아오는 하라바나의 거대한 갈고

리 같은 발톱을 살짝 피하며 빠르 게 잘라 냈다. 하라바나가 또 다 시 괴성을 질렀지만, 여전히 하라 바나의 몸엔 어떤 치명상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 발에 발톱이 10개. 하라바나 의 발은 4개. 총 40개의 발톱을 가진 하라바나의 발톱을 이제 겨 우 두 개 잘라냈다.

하라바나는 최강의 마수종으로 서 드래곤과 버금갈 만큼 강한 마 수다. 역시, 하라바나를 혼자 상 대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

한숨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나는 허공으로 뛰어올라 라이 너 옆에 섰다.

잘 벼려진 은색 검날 위로 칠흑 같은 오러가 덧씌워진다. 라이너 를 앞에서 지키고 서는 게 아니 라, 그의 옆에 서서 검을 앞으로 세웠다.

"당신은 더 이상 내가 지켜 줘 야만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지."

내가 일방적으로 지켜 주는 것 이 아니라, 함께 싸우는 구도였 다.

내 반응에 라이너의 얼굴 위로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황금빛 눈 동자 위로 감정의 파도가 넘실거 렸다.

"......맞습니다."

그리고 이내, 당당한 미소가 깃 들었다.

그의 검 위로 황금빛 오러가 씩 워진다. 내 오러보단 미약하지만 확실히 소드 익스퍼트의 끝을 보 고 있음이 짐작되는 강한 오러.

황금빛과 칠흑빛의 두 오러가 강하게 치솟아 끝에서 맞닿으며 기이한 색으로 융합되었다.

"전 이제부터 당신과 함께 싸울 겁니다."

성숙한 라이너의 얼굴 위로 미 숙하던 소년을 덧씩워 본다. 검 하나 잡는 것도 위태로워 보이던

소년은, 어느새 자라서 나와 검을 함께할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네.'

너무 자라 버린 것이 어쩐지 섭 섭하면서도 내가 키운 것처럼 뿌 듯했다. 복잡 미묘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긍정적인 감정이 강했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요.'

파란 눈을 동경으로 반짝이며

내게 속삭이던 소년. 소년은 나와 함께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나는 섭섭하단 표정을 짓는 대 신, 그때 그 소년을 향해 호쾌하 게 웃음 지었다.

"그래. 이젠 나랑 같이 싸워 줘."

쾅!

거대한 덩치가 나와 라이너 사 이로 달려들었다. 땅이 울리며 굉

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나와 라이너, 둘 다 발에 마나를 두른 채 어렵지 않게 양옆으로 물러서 하라바나의 공격을 피했다.

쾅 쾅

굉음과 함께 사방에 땅이 파였 다. 적수가 둘로 늘어나자 당황한 듯 다급하게 쏟아지는 하라바나의 공격을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게로 날아든 거대한 발의 발톱 을 거칠게 베어 내며 라이너를 돌 아보았다. 굉음 때문에 귀가 먹먹 해 의사소통을 위해선 크게 소리

쳐야 했다.

"마수를 상대해 본 적이 있으십 니까!"

"몇 번 상대해 본 적은 있지만 이 마수는 처음입니다!"

내게로 달려드려는 하라바나의 꼬리 부근에 오러를 날려 하라바 나의 시선을 끈 라이너가 소리쳐 대답했다.

'라이너는 하라바나를 모르나 보 군.'

입술을 짓씹었다. '하라바나'가 아니라 '이 마수'라고 호칭하는 것을 보아, 라이너는 하라바나에 대해 무지한 것 같았다.

'하기야. 고기는 맛이 좋고 영양 가도 높아 귀족들 사이에 희귀한 고기로 유통되지만...... 자세한 외 향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하라바나의 피부 위로 줄줄 흐 르는 기이한 진액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라바나는 무척 희귀한 마수로

서 그 고기 또한 상당한 값으로 거래되기 때문에, 하라바나의 고 기를 맛볼 수 있는 것은 귀족들뿐 이다.

허나 품위를 생명처럼 생각하는 귀족들이 보기만 해도 토 나올 것 같은 하라바나의 외향을 자세히 알게 되면 하라바나 고기를 원하 지 않을 게 분명했다.

때문에 상인들 사이에서 하라바 나의 자세한 외향에 대한 정보는 암묵적인 비밀로 취급되곤 했다. 그들도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나 같이 마수 토벌을 전문으로 하는 미친 용병이나 하라바나의 외향부터 특징까지 모두 꿰고 있 지.'

라이너에게 달려들려 하는 하라 바나의 두툼한 발등 위로 검 끝을 푹 찍어 내리며 소리쳤다.

"하라바나는 '깊은 숲속의 고요 한 폭군'이라는 이명을 가진 희귀 종의 거대 마수입니다! 이빨엔 치 명적인 독이 묻어 있으니 스치지 도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네! 그런데......

쾅!

하라바나의 빗나간 일격에 나무 가 단숨에 부서졌다. 굉음에 미간 을 찌푸린 라이너의 표정이 묘해 졌다.

"깊은 숲속의...... '고요한' 폭군 이 맞습니까?"

그의 말투엔 저게 어딜 봐서 고 요하냐는 뜻이 그득히 배어 있었 다. 네모난 원, 타지 않는 불과

녹지 않는 얼음처럼 상반된 두 명 제가 합쳐진 것을 본 사람처럼 아 리송한 라이너의 표정을 보며 쓰 게 웃었다.

"평소의 하라바나는 전혀 고요 하지 않지만, 자신을 위협하는 적 수를 만났을 땐 달라집니다!"

날아오는 공격을 피해 몸을 굽 히며 검을 옆으로 그어 하라바나 의 다리를 공격했다.

마수 토벌을 이골이 날 정도로 해 온 내게 사실 거대 마수 한 마

리를 상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만약 하라바나에게 날카 로운 독니와 갈고리 같은 발톱밖 에 없었다면 난 10분 안에 하라 바나를 깔끔하게 처리했을 것이 다.

그럼에도 내가 하라바나를 혼자 상대하기 버겁다고 생각한 건, 다 름 아닌 하라바나의 특성에 있었 다.

'곧 시작하겠군.'

나와 라이너를 버거워하던 하라

바나의 몸 위로 일렁이던 마기가 더욱 강해짐을 느끼며 검을 더 단 단히 잡았다. 라이너를 향해 아가 리를 벌리다 내 오러를 맞고 밀려 난 하라바나가 어느 순간 움직임 을 완전히 멈췄다.

"••...무슨."

난폭하게 공격하다 말고 갑자기 멈춘 하라바나를 보고 당황한 라 이너가 덩달아 멈칫했다. 심상치 않게 일렁이는 마기를 느끼며, 나 는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 하라바나는......•"

내가 운을 떼기 시작함과 동시 에 하라바나의 형체가 일렁이며 옅어지기 시작했다. 존재라는 것 이 스포이트에 빨려 들어간 듯 순 식간에 사라지기 시작했다.

강하게 느껴지던 마기와 존재감 조차 어느새 씻은 듯 사라지고, 하라바나가 서 있던 자리가 텅 비 며 완전히 주변 풍경과 융화되었 을 때.

나는 침묵 속에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일정 시간 동안,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없앨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라바나가 깊은 숲속의 '고요한' 폭군이라고 불리는 이유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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