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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83화 (83/254)

83 화

하라바나가 사라진 뒤, 나와 라 이너 사이엔 짙은 침묵이 감돌았 다. 표정이 심각하게 굳은 라이너 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단 말입니까?"

"네. 투명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웁 니다. 저조차 기척을 느끼지 못할 만큼. 아예 실체 자체가 사라진

거라 이 상태에선 검을 휘둘러도 타격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 라바나가 위험한 겁니다."

검을 세운 채 날카롭게 주위를 경계하는 라이너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바로 내가 하라 바나의 기습에 뒤늦게 대처할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아무리 나라도 실체가 없는 것 의 기척을 느낄 순 없으니까.'

투명 상태라면 색깔이 있는 무 언가를 뿌려서라도 존재를 확인하

면 되지만, 실체가 사라진 것의 습격엔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 었다.

"다행히 하라바나 또한 실체가 없는 상태에선 공격을 할 수 없습 니다. 또한 하라바나가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최대 1분이죠. 한 번 실체를 사라지게 하고 나서 다 시 실체를 사라지게 하려면 약 5 분간은 대기 시간을 가져야 하고, 이 상태를 유지하는 건 하라바나 에게 상당한 체력 소모를 가져옵 니다. 제가 상대한 하라바나들 중 아무리 힘 센 놈이라도 실체를 4

번 이상 없애진 못했습니다. 무적 같지만 절대 무적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주위를 경계하며 피로 얻은 정보들을 라이너에게 알렸 다. 이렇게까지 상세한 하라바나 의 특징은 직접 하라바나와 맞서 싸워 온 나만 알 수 있는 것이었 다. 마수와 싸우는 것에 한해선 난 이 대륙의 어느 누구보다도 풍 부한 경험과 뛰어난 실력을 가지 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기습이 최대 무기인 하라바나와 상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 반응 속도입니다."

"순간 반응 속도 말입니까?"

"네."

라이너가 주위를 경계하면서도 되물었다. 성실한 학생 같은 그를 향해 씨익 웃은 나는, 꽉 잡은 검 위로 오러를 폭발시키듯 불어넣었

"하라바나는 실체가 없는 상황 에선 공격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공격을 하는 순간엔 반드시 실체 를 드러냅니다."

실체가 나타나는 찰나, 내 감각 을 두드리는 익숙한 마기. 마수 특유의 역겨운 냄새. 오러를 발동 한 순간 그 어떤 짐승보다도 넓어 지는 시야.

"그리고 그 순간은 기습하기 위 해 무방비해진 하라바나를 역 기 습하기 가장 좋은 때입니다."

크앙!

나는 하라바나의 기척이 느껴진 찰나, 그곳을 향해 힘껏 검을 휘

둘렀다.

미친 듯이 날뛰는 검은 오러가 초승달 모양을 그리며 라이너 바 로 뒤에서 나타난 하라바나에게 날아갔다. 오러가 라이너를 삼킬 듯 벌린 아가리 속에 정확히 들어 가길 바랐지만, 아쉽게도 그 순간 하라바나가 고개를 튼 탓에 뺨에 상처를 내는 것이 전부였다. 검은 피가 솟구치고, 하라바나가 비명 을 지르는 것을 들으며 외쳤다.

"피하십시오!"

머리 위로 검은 피를 뒤집어쓴 라이너가 빠르게 마나를 개방하며 내 쪽으로 달려왔다. 우리는 함께 검을 겨누었다. 그런 우리 앞으로 조금 지친 기색의 하라바나가 대 치하고 섰다.

쉬익!

거센 돌풍과 함께 내 검 위로 검은 오러가 물들었다. 하라바나 가 한 차례 지치는 순간을 기다리 며 절제하던 오러를 풀어헤치자,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 큼 강한 오러가 검을 물들였다.

'이전엔 하라바나의 가죽을 뚫기 위해 세 번을 찔러야 했지.'

마나의 활력을 받아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즐기며 느리게 웃음을 흘렸다. 하라바나의 눈동 자 위로 비치는 내 눈이 붉게 번 뜩였다.

'하지만 이젠 두 번 안에 뚫을 수 있다.'

크리시스 가에 입적된 이후 마 수를 토벌하지 않았다고 해서 놀

고만 있었던 게 아니다. 나는 끊 임없이 수련을 거쳤고, 그 결과 한 단계 더 성장했다.

'하라바나가 한 번 더 형태를 없 애기 전에 끝낸다!'

콰앙

검은 오러가 허공을 가르며 하 라바나의 몸통을 베었다. 오러를 절제하던 이전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상처의 깊이. 검은 피를 철 철 흘리기 시작한 하라바나가 울 부짖었다.

"라이너! 하라바나는 입천장이 약점입니다! 그곳을 꿰뚫으면 즉 사해요! 입천장을 찌르기 위해선 움직임을 느리게 만들어야 합니 다. 제가 앞다리를 공격하겠습니 다! 라이너는 뒷다리를 공격해 주 세요!"

" 알겠습니다!"

하라바나의 앞다리로 빠르게 돌 진해 앞다리 근육이 있는 부분에 검을 꽂아 넣었다. 하라바나는 속 도까지 빠른 막강의 마수였지만, 확실히 덩치가 산만했기에 찌를

곳이 많았다. 라이너가 황금빛 오 러로 하라바나의 뒷다리를 지지는 것을 확인하며 검을 휘둘러 다른 앞다리에도 상처를 입혔다.

꾸엑!

괴상한 울음소리를 낸 하라바나 가 미친 듯이 발을 휘둘렀다. 여 전히 그 산만한 덩치에서 나온다 고는 믿기 힘들 만큼 빠른 속도였 지만, 확실히 전보단 속도가 많이 느려져 있었다. 나는 가벼운 장애 물 달리기처럼 느껴지는 공격들을 쉽게 피해 나갔다.

"라이너! 검기로 하라바나의 입 을 벌려 주십시오! 제가 하라바나 의 입 속으로 들어가서 입천장을 공격하겠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하라바나의 입은 무척 거대했기 때문에 입천장을 공격하기 위해선 직접 입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얼핏 들으면 미친 것처럼 들리 는 내 계획을 들은 라이너의 얼굴 이 차갑게 굳었다.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차라리 제가 할 테니 카슈미르가......!"

"라이너!"

하라바나의 공격을 피하며 크게 고함을 쳤다. 각자 빠르게 움직이 는 가운데 찰나의 부딪치는 시선. 흔들리는 황금빛 눈동자를 흔들림 없이 바라보며 말했다.

"더 강한 사람이 위험을 감수하 는 게 맞습니다. 길을 만들어 주 십시오."

강자는 자신의 강함에 책임을 져야 한다. 멍청하고 미련해 보일 지라도 그것이 내 신념이었다.

" 당신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무언가 말을 이으려던 라이너의 시도는 그를 향해 날아든 하라바나의 뒷발로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황급히 몸을 피한 라이너가 이를 악물더 니 참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 였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입

을 벌릴 테니 준비해 주십시오!"

하라바나의 뒤쪽에 있던 라이너 가 세차게 휘둘러지는 하라바나의 꼬리를 피해 내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일순 주위로 작은 마나의 돌풍이 일어날 정도 로 강한 오러를 끌어올린 그가 허 공으로 뛰어올라 거대한 입의 세 로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촤악!

금빛 오러에 지져진 피부에서 썩은 내가 난다. 확실히 라이너

또한 강력한 소드 익스퍼트였다. 하라바나의 두꺼운 가죽이 꽤 깊 숙이 베이며 검은 피를 울컥 쏟았 다.

크아아아악!

그리고, 하라바나의 입이 벌어졌 다.

내 차례였다.

콰과광!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막대한

양의 마나가 검을 쥔 손끝으로 집 중되며, 날 둘러싸고 태풍과도 같 은 마나의 폭발이 일어났다. 한계 까지 마나를 끌어들인 심장이 미 친 듯이 두근거리고 막대한 마나 가 집중된 오른손 손끝이 욱신거 렸다.

검은 재앙이라 불리는 칠흑 같 은 오러가 하늘을 뚫을 듯 솟구칠 때, 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하 라바나의 아가리로 돌진했다.

얼핏 보아도 백여 개는 넘을 것 같은 누런 이빨들엔 모두 맹독이

흐르고 있다. 토 나올 것 같은 악 취가 후각을 마비시켰다. 아가리 속에 뛰어드는 과정에서 섬뜩하도 록 날카로운 송곳니에 왼팔이 살 짝 긁히며 독이 흐르는 방향을 따 라 살이 녹는 것이 느껴졌으나 개 의치 않았다.

공포도, 악취도, 통증도, 불행의 늪에서 태어난 내겐 너무 익숙한 것들.

난 그곳에서 살아남았고,

푸욱.

이곳에서도 살아남을 것이다.

캬아아악!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여 전히 섬뜩한 살 뚫리는 감각이 검 을 쥔 손을 덮는다. 검에 꿰뚫린 입천장에서 검은 피가 터져 나오 며 내 온몸을 적셨다.

'귀 아파.'

하라바나의 거대한 울음소리를 직전에서 들은 탓에 귀가 먹먹했

다. 내가 소드 마스터가 아니었다 면 고막이 터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하라바나의 몸부림으로 미친 듯이 혼들리는 입속에서 애 써 중심을 잡았다.

캬아악!

' 지금!'

하라바나가 다시금 고통에 겨워 울부짖으며 입을 크게 벌렸다. 그 틈을 타 발 위로 마나를 덧씌우고 초인적인 속도로 밖으로 몸을 던 졌다.

" 카슈미르!"

허공에 날아든 나를 부르는 다 급한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착지 를 준비하기도 전에 단단한 팔이 내 몸을 으스러질 듯 감쌌다.

하라바나가 쓰러졌다. 거대한 몸 뚱이가 땅에 닿음과 동시에 지진 을 방불케 하는 울림과 흙 폭풍이 사방으로 몰아닥쳤다. 귀가 윙윙 거리고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그렇게 하라바나는 죽었다.

'이렇게까지 요란스러운데 외부 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이곳으 로 오지 않았다고.'

말도 안 된다. 거대한 하라바나 는 1km 밖의 일반인도 소란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요란을 피웠 다.

'게다가 사냥 대회에 참여한 이 들 중 두 사람이 소드 마스터인 데.'

내 아버지 카이사르 크리시스와 라이너의 아버지 노아 아인하르 트. 그들은 상당한 수준의 소드 마스터들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 면 그들이 여태까지 이곳의 상황 을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다.

'무언가 수작질을 해 놓았군.'

가볍게 결론을 내렸다.

분명 하라바나가 죽었는데도 여 전히 사방을 덮은 흑마법의 기운. 미간을 좁히며 주위를 둘러보았

다.

"카슈미르, 카슈미르......

그리고 내 관찰은 몸을 으스러 질 듯 안아오는 따뜻한 품으로 인 해 뻣뻣하게 멈춰야 했다.

역겨운 하라바나의 피 냄새를 비집고 퍼져 오는 진득한 로즈우 드 향. 덜덜 떨리는 단단한 팔. 내 속눈썹을 간지럽히는 은회색 머리칼.

절망이 물든 그의 얼굴을 올려

다 보다 한숨처럼 말했다.

"......아인하르트 경. 계속 절 안 고 계시면 몸에 피가 묻으실 겁니 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라이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라바나의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나를 꽉 안은 라이너의 옷은 당연 스럽게도 검은 피로 물들어 갔다. 나는 죄책감에 물든 그의 황금빛 눈동자를 직시했다.

"제 계획에 동의하셨으면서 왜

그러십니까. 이건 제가 하자고 했 던 일입니다."

"팔이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저 는 당연히 영애께서 스스로 다치 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 제의한 계 획인 줄 알았습니다! 왜 이렇게 스스로의 몸을 돌보지 않으십니 까'! 차라리 제가 했어야 했습니 다!"

나는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는 라이너를 오늘 처음으로 보았다. 야차 같은 얼굴을 한 그를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 눈을 느리 게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습니

내게 최선의 방법이란, 나의 희 생으로 사람들이 최소의 피해만 겪게 하는 것.

'이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니까.'

상대의 숨통을 끊기 위해선 나 또한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이것 이 내가 검은 재앙으로서 배워 온 삶의 방식이었다.

이전에 카이사르와 함께 대련을 했던 때를 떠올린다. 카이사르는 내게 다치지 말라고 했고, 아리아 는 나를 희생하지 말라고 했다.

그들이 얼마나 나를 걱정하는지, 얼마나 나를 사랑함에 그런 말을 했는지 알지만, 그래도 잘 고쳐지 지 않았다. 이렇게 살아온 생이 너무 길었으니까.

나는 이런 방식으로 살아남아 왔다.

아연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던

라이너가 슬픈 눈을 한 채 제 입 술을 꾹 물었다. 녹을 듯 처연한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처절하게 응시했다.

그 눈과 마주하기가 어려워 살 짝 시선을 돌리니, 라이너의 짙은 한숨이 내 목덜미에 스며들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라이너가 먼 지와 검은 피로 더러워진 이마 위 로 짧게 입술을 맞췄다. 경건하게 까지 느껴지는 조심스러운 입맞

춤. 그 짧은 입맞춤에서 범람하는 그의 감정이 흘러내리는 것만 같 아 나는 답지 않게 몸을 움츠러트 렸다.

"나는, 카슈미르."

한참 심호흡을 하던 그는 그르 렁거리는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 삭였다.

"네가 최선의 길이 아니라 가장 안전할 수 있는 길을 선택했으면 좋겠어."

거친 목소리와는 다르게 치밀도 록 다정한 한마디. 울렁이는 속에 헛숨을 들이킨 나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그 한마디를 곱씹었다.

이 한마디는 내가 여태껏 살아 왔던 삶을 위로하며 이제는 괜찮 다고 다독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저려 왔다.

"......카르텔."

오랜만에 혀 위로 올려 보는 추 억 뒤에 묻힌 이름.

라이너의 어깨가 살짝 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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