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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84화 (84/254)

84 화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붙잡고 그의 귓가 직전에서 속삭 였다.

"나, 피곤해."

혹사된 오른팔의 근육이 떨리고, 독니에 찔린 왼팔과 왼 어깨가 타 는 듯 고통스럽다. 재앙과 마주하 며 몸을 지배하던 긴장감이 한순 간에 풀리며 줄 끊긴 마리오네트

가 된 것만 같았다.

"이제 조금 쉬어도 될까."

여태껏 최선을 선택하며 살아온 것에 후회는 없다. 허나 힘들었 다. 무척. 잠시 누군가에게 기대 쉬고 싶을 정도로.

" 카슈미르......

얼굴을 일그러트린 라이너가 한 숨처럼 내 이름을 속삭였다. 굳은 살이 박인 손끝이 살며시 내 눈꺼 풀을 건드려 눈을 감겼다.

"수고했어. 쉬어."

귓가에 스며드는 다정한 목소리 에 몸에 힘을 풀었다. 확인해야 할 것도 많고, 여기서 쉬어선 안 됨을 알지만, 독에 중독된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조금은, 쉬어도 되지 않을까. 내겐 뒤를 지켜줄 라이너가 있으 니까.'

날 받쳐 주는 든든한 팔이 믿음 직한 동료의 탄생을 알리는 것만

같아,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 서도 계속 긴장이 풀린다. 한번 감고 나자 눈꺼풀이 뇌의 제어를 듣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정리되 어 있을 거야."

자장가와 같은 따스한 속삭임 아래, 나는 스르르 수마로 빨려 들어갔다.

타닥타닥.

피부로 닿는 따뜻한 온기와 장 작이 타는 평화로운 소리에 부스 스 눈을 떴다. 하라바나 독으로 인해 열이 펄펄 끓던 몸은 어느새 은은한 미열만 돌고 있었다. 욱신 거리던 근육들이 한층 가라앉은 것을 느끼며, 습관적으로 주위를 경계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스르륵.

몸을 움직임에 따라 몸을 덮고 있던 검은색 모포가 흘러내렸다. 내 것이 아니었기에 잠시 갸웃했

으나, 이내 코끝을 간질이는 향으 로 인해 모포의 주인을 쉬이 짐작 할 수 있었다.

'라이너 거네.'

짙고 묵직한 로즈우드 향. 올곧 고도 매력적인 그와 잘 어울리는 향이었다, 가까이에서 라이너의 기운이 느껴짐에 느리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누워 있던 곳은 아늑한 동 굴 속이었다. 짐승이 묵은 흔적이 없고, 약간의 이끼와 덩굴이 자리

한 것을 빼면 깔끔한 동굴. 독 기 운 때문에 기절하듯 잠든 나를 라 이너가 이곳으로 데려온 모양이었 다.

'......따뜻해.'

흘러내린 모포를 등 뒤로 두르 고 동굴 중앙에서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 가까이로 몸을 옮겼다. 조 금 비몽사몽인 채로 라이너가 피 운 것으로 추정되는 모닥불 앞에 서 열기를 쬐고 있을 때였다.

" 일어나셨군요."

동굴 입구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인하르트 경."

내 나지막한 부름에 그가 희미 하게 웃으며 모닥불 앞으로 성큼 걸어왔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미열이 조금 있는 것 빼곤 거 의 다 회복된 것 같습니다."

어깨를 휘휘 돌리며 몸 상태를

짐작했다.

이전이었다면 고열을 동반한 중 독 상태를 깡으로 버티든지, 해독 제를 달여 먹든지 해야 나았을 텐 데, 이젠 반나절 만에 자연 회복 으로 나을 수 있었다. 크리시스 가에 입적된 뒤부터 수련에 집념 하며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한 덕 분에 회복 속도가 전보다 훨씬 빨 라진 것 같았다.

"다행입니다. 허기지실까 싶어 하라바나 고기를 조금 해체해 가 져왔습니다."

"아, 제가 도와 드릴 게 있습니 까?"

"아뇨. 영애는 푹 쉬십시오. 제 가 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해도 역정 을 낼 것 같은 라이너의 표정을 확인하고 얌전히 있기로 마음먹었 다. 잠시 멀뚱히 라이너가 하는 양을 구경하다 느릿하게 동굴 벽 에 몸을 기대었다.

'라이너의 도움도 컸지만, 그걸 배제하고도 하라바나를 처치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어.'

원래였다면 하라바나를 처치하 기 위해서 1시간 이상을 싸워야 했다. 하지만 이번엔 겨우 20분 남짓 동안 끝냈으니, 내 경지가 높아진 것이 확실했다.

'게다가 많이 다치지도 않았고.'

원래였다면 하라바나를 처치한 이후 곧바로 독에 중독되어 몸도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 것 이다. 나는 방어를 하지 않았고, 체력도 약했으니까. 하지만 꾸준 한 방어 훈련과 체력 단련으로 강

해진 몸은 반나절 취침으로도 거 의 원 상태가 되었으니,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라이너의 공이 크고.'

모닥불 앞에서 부스럭거리고 있 는 라이너를 힐끔 곁눈질했다. 거 대한 초록빛 고깃덩어리를 나뭇가 지에 끼운 라이너는 조금 엉성하 게 만들어진 지지대를 통해 모닥 불로 고기를 굽고 있었다.

'라이너가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강해질 수 없었을 거야.'

매주 만나 함께 수련을 이어가 던 날들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라이너의 정성어린 가르침 덕에, 나는 소드 마스터의 평균치에 가 까워지며 방어와 체력에 있어서도 라이너를 뛰어넘을 날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참 고마운 사람이지.'

아무리 상사의 명령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정성껏 도와주기는 힘 들었을 거다. 상냥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으로 고기를 굽던 그가 시 선을 느꼈는지 느리게 입을 열었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늘 생각하지만 라이너의 목소리 는 참으로 무뚝뚝했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순간 움 찔할 정도로 감정이 없었지만, 이 젠 그의 목소리에 익숙해진 나는 그것이 라이너의 목소리일 뿐임을 알았다.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저 경에게 감사해서 말 입니다."

움찔.

'오, 붉어진다.'

붉은 물감을 푼 것처럼 삽시간 에 달아오르는 라이너의 양 귀를 보며 웃음을 참았다. 그는 조각 같은 얼굴을 가지고 기계 같은 태 도를 유지하는 주제에 부끄러움은 참 잘 탔다.

라이너가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 을 뱉었다.

"......감사하실 일이 아닙니다. 영애가 아니었다면 저는 하라바나 앞에서 살아남지도 못했을 겁니 다."

"오늘 일뿐만 아니라 여태껏 도 와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고 있는 겁니다. 시간을 내어 제 수 련을 도와주지 않으셨습니까."

내 작은 속삭임에 그의 입매가 살짝 굳는다. 그는 내가 스스로 미르임을 암시하는 말을 할 때마

다 이런 거부감을 보였다.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인 라이너 는 말없이 잘 구워진 고기를 손질 하기 시작했다.

'카르텔인 건 확실한데, 대체 왜 저러는 걸까?'

그는 우리의 과거 이야기를 하 려 하지 않았다. 내가 미르인 것 에 대해서도 일절 발언하지 않고. 난 입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턱을 쓸어내렸다.

'당신과 등을 맞대고 싸울 수 있 을 정도로 강해졌을 때. 그때 내 가 당신을 직접 찾아갈 겁니다.'

라이너와 결판을 냈던 날 그가 했던 말을 생생히 기억한다. 수많 은 감정이 뒤섞인 황금빛 눈이 나 를 곧게 응시하던 순간을.

'카르텔은 그때도 자신이 지켜지 기만 해야 한다는 것에 치를 떨었 지. 아직 나보다 약해서 정체를 밝히기 부끄러운 건가? 라이너는 아직 소드 익스퍼트고 나는 소드 마스터니까...... 소드 마스터가 되

면 그땐 얘기해 주려나?'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어 느새 요리를 끝낸 라이너가 나를 불렀다.

"크리시스 영애. 식사하시죠."

"아, 네."

기다리고 있는 라이너를 보고 퍼뜩 정신을 차린 채 자리에서 일 어났다. 그리고 일어남에 따라 펄 럭거리는 와이셔츠를 보고 멈칫했 다.

' 어?'

와이셔츠가, 내가 평소 입는 사 이즈보다 훨씬 컸다. 거의 이불보 를 입은 기분이었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내 상태를 훑어보았다. 이제 보니 원래 입고 있던 멜빵의 줄도 끊어져 바지만 남아 있고, 차고 있던 하네스도 보이지 않았 다.

무엇보다 내 온몸을 덮다시피 한 로즈우드 향. 라이너의 모포를 덮고 자서 그런 줄 알았건만, 이 제 보니 향기는 내가 입고 있는

와이셔츠에서 나고 있었다.

" 영애?"

라이너는 일어나다 말고 엉거주 춤한 자세로 멈춰 있는 내게 왜 안 오냐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머뭇거리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경. 혹시 제가...... 지금 경의 옷을 입고 있습니까?"

툭.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무언가가

떨어진다. 라이너의 얼굴이 삽시 간에 달아올랐다. 그가 벌떡 일어 나 성큼 내게로 다가왔다.

"그게 아닙니다. 영애가 생각하 는 게 아닙니다! 제가 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니, 저는 별생각 안 했습니다 만 "

"절대 불경한 짓을 하지 않았습 니다! 믿어 주십시오!"

내가 무언가 오해를 했다고 생 각한 건지, 라이너가 답지 않게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두서없이 말

을 뱉기 시작했다. 얼굴은 새빨개 진 채 내 몸엔 손도 대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그를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크게 웃었다.

'진짜 답지 않게 구네.'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지만, 라이 너는 사실 상당히 귀여웠다. 킥킥 거리는 날 멍하니 바라보던 라이 너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정말, 이상한 짓은 하지 않 았단 말입니다."

라이너가 제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채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 다. 그 모습은 첫사랑에 수줍어하 는 소년과도 같아서, 나는 짓궂은 장난기가 돌고 말았다. 나는 일어 나려다 만 자세에서 다시금 털썩 땅에 주저앉으며 팔짱을 끼고 그 를 올려다보았다.

"우선 제 옷을 갈아입히셨다는 것부터가 이상합니다만. 뭘 하신 겁니까?"

내 목소리엔 누가 듣기에도 장

난기가 잔뜩 서려 있었지만, 뇌까 지 열에 달아오른 것 같은 라이너 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자신을 추궁한다고 생각했 는지 동공을 흔들던 그는, 여전히 나와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영애가, 잠드신 후에 저는 영애 를 안고 사냥 대회의 진을 친 곳 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습니다."

" 어째서?"

당혹스러워 보이기만 하던 라이 너의 얼굴이 조금 진지해졌다. 그 는 여전히 붉은 얼굴로 조심스레 나와 눈을 맞췄다.

"영애와 제가 있는 곳에서 사냥 대회 진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엔 보라색 결계가 쳐져 있었습니다."

'보라색 결계.'

그 한 단어에 수많은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이걸 잊고 있었다니.'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생의 기억이 옅어지고 이에 따라 '요정의 밤' 의 내용도 슬슬 잊어가고 있었다 고 해도 이 사건을 잊고 있었던 스스로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마 영애께서는 깨뜨릴 수 있 을 것 같지만 제 힘으론 깨지지 않았습니다. 되는 대로 결계의 출 처라도 추적해 보려 했지만, 마나 로 만들어진 결계가 아닌 건지 이

상한 기운만 풍길 뿐 흔적을 드러 내지 않았습니다."

'하기야 원작에서도 소드 익스퍼 트 수준으론 깨뜨릴 수 없다고 했 으니까. 그 결계는 흑마법으로 만 들어 졌겠지.'

이제야 떠오르는 원작과 현재 상황을 접합시키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기억이 떠오르며 머리를 지배하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알렉산드로, 레오가 위험해.'

그가 위험했다.

"우선, 알겠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은?"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으니 라이너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피부 로 닿았다. 그를 걱정시키지 않으 려 애써 웃으며 여상스레 물었다. 그가 여전히 조금 달아오른 얼굴 로 입을 열었다.

"영애께선 독 때문에 고열을 앓 으셨습니다. 하라바나의 피가 온 몸에 묻어 청결 상태도 좋지 않으

셨기에, 저는 영애를......

"씻겨 주신 겁니까?"

'어쩐지 몸이 너무 깨끗하더라 니.'

물수건으로 닦아 주기라도 했나 싶었는데 아예 씻겼던 모양이었 다. 조금 가라앉나 싶었던 라이너 의 양 귀가 다시금 달아올랐다. 그는 기사임에도 피부가 하얀 데 다 머리카락은 또 밝은 은회색이 었기에 붉게 달아오르는 피부가 한눈에 보였다.

그 반응이 웃겨 조금 웃음기 서 린 눈으로 라이너를 보고 있자니, 금빛 눈동자가 나와 마주하지 못 하고 허공으로 굴렀다.

"......얼마 안 가 호수를 발견해 그곳에서 영애를 씻겨 드렸습니 다. 다른 건 몰라도 독이 피부에 계속 고여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 했습니다."

"호오••...

"......천으로 눈을 가리고 했고, 영애의 하의엔 손도 대지 않았습 니다. 믿어주십시오."

라이너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는 건 내가 더 잘 안다. 간곡하게 말하는 그를 보며 힘겹게 웃음을 참곤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평생 을 용병으로 살았던 탓에 상체를 보인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가슴엔 압박붕대를 두르고 있었으니.

"저는 당연히 경을 믿습니다. 경 께서도 전투 후에 지치셨을 텐데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속삭이니 시선을 피하던 라이너가 그제야

나를 마주했다. 그의 입꼬리가 희 미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올라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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