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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85화 (85/254)

85 화

하라바나의 고기는 역시 환상적 이었다. 라이너가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 야영을 위한 소품들과 향신료까지 챙겨 온 덕분에 나는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라이너는 집안일도 잘할 것 같 은데.'

뒷정리를 도와주려다 강하게 저 지당한 뒤, 모포를 어깨에 두르고

모닥불 앞에 앉아 주위를 정돈하 는 라이너를 구경했다. 나를 씻기 곤 그도 씻은 건지 청결한 라이너 의 몸 위로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상처들이 여럿 보였다.

'조금 더 지켰어야 했나.'

외이셔츠의 소매를 팔뚝까지 걷 은 탓에 드러난 그의 근육 잡힌 팔에 난 기다란 상처를 속상한 눈 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라이너가 소매를 끌어 당겨 팔을 가렸다.

"경께선 괜찮으십니까? 아프신 곳은 없습니까."

"하라바나를 정면으로 상대한 건 영애였고 저는 보조만 했을 뿐 이지 않습니까. 전 멀쩡합니다."

라이너의 목소리엔 살짝 날이 서 있었다. 자신은 멀쩡하고 나만 다쳤다는 점에서 불만이 큰 듯했 다. 눈을 허공으로 굴린 나는 그 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 그래도 우리 둘 다 살 아남았지 않았습니까. 이 기회에 경과 합이 꽤 잘 맞는다는 걸 알

게 되어 기뻤습니다."

라이너와의 수련은 라이너가 일 방적으로 날 돕는 형태라 그와 합 을 맞출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 싸움으로 라이너와 나는 손 발이 상당히 잘 맞는다는 것을 알 았으니, 한 명의 검사로서 꽤 즐 거웠다.

'이상적인 움직임이었지.'

내 주도로 양쪽에서 상대를 몰 아붙이다, 라이너가 길을 터 주면 내가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다. 라

이너의 검은 정직하면서도 하나하 나 묵직했기에, 변칙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내 검과 상호보완적이었 다.

"경은...... 정말 강해졌더군요."

다리를 모아 앉은 채 고개를 기 울였다.

진심이었다. 내가 조금 비정상적 일 뿐, 라이너는 충분히 천재라고 불릴 법한 이였다.

'그 약하던 몸을 여기까지 단련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

라이너의 과거를 아는 나는, 그 의 현재가 절대 허투루 나오지 않 았다는 걸 알았다.

뒷정리를 마친 라이너는 모닥불 을 사이에 두고 내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라이너의 환상적인 얼굴 위로 음영이 졌다.

"하지만 저는 더 강해지고 싶습 니다."

"지금도 충분히 강하실 텐데요."

그가 나를 바라본다. 분명 해가 졌음에도 라이너의 두 눈엔 여전 히 황금빛 노을이 물들어 있었다. 올곧은 그는 영혼의 창이라는 눈 에 늘 태양을 담고 있는 것 같았 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리쬐 는 태양을.

"나는, 카슈미르, 당신만큼 강해 지고 싶습니다."

또 그 말이었다. 입을 꾹 다문 채 턱을 쓸어내리다 입을 열었다.

"저만큼 강해지면 뭘 하실 생각

입니까? 저와 싸워서 이겨 보고 싶습니까?"

라이너가 희미하게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곤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나는 당신을 지키 고 싶습니다."

굳은 심지가 선 목소리로 속삭 이는 그를 지긋한 시선으로 응시 했다. 내 시선을 피하지 않은 라 이너의 눈동자 위로 잔잔한 불씨 가 타올랐다.

"압니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지 켜질 필요도 없고, 지켜지기를 원 치도 않겠죠.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지키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믿고 등을 맡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담백하게, 또 묵묵하게. 고백하 듯 말하던 라이너는 이내 멈칫했 다 입술을 열었다 닫은 그는 눈 을 내리깔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건 나중에 말 하는 것이 좋겠군요."

'뭐야. 사람을 가장 화나게 하는 건 말을 하다 마는 건데.'

말을 하다 마는 라이너를 어이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니, 그가 피 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꼭 말할 거 니까. 카슈미르만큼 강해진 뒤에 꼭 말할 겁니다."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두 눈 이 거세게 타올랐다. 그런 그를 보며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 고개 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무슨 말을 할지는 몰라도 기대 하고 있겠습니다."

나는 라이너의 웃음을 눈에 담 다 떠오른 질문에 입술을 뗐다.

"그런데 경. 이럴 땐 저를 잘도 카슈미르라고 부르면서 평소엔 영 애라고 부르시는군요."

"콜록."

눈을 가늘게 뜬 내 물음에 라이 너가 사레에 들린 사람처럼 기침 을 뱉었다.

"그건...... 함부로 이름을 불러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를 범했습 니다."

평민들이야 이름이든 성이든 아 무렇게나 부르지만, 귀족들의 경 우 성이 아닌 이름을 허락하는 건 가족이나 연인, 혹은 친한 친구뿐 이었다. 라이너의 정중한 사과에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질 책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은은하게 타오르는 모닥불 너머 로 그의 얼굴이 보인다. 내 친애 하는 친구의 얼굴이. 난 그를 마 주한 채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었 다.

"우린 이제 충분히 친해진 것 같은데. 언제쯤 제 이름을 불러 주실 겁니까?"

라이너가 입을 살짝 벌렸다. 조 금 놀란 것 같았다.

'라이너는 충분히 이름을 허락할 만하지.'

내게 있어 그는 소중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조금 웃음기 서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몽 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하, 하고 숨을 뱉었다.

"카슈미르."

"네."

" 카슈미르......

"그래요. 그게 제 이름이죠."

몇 번이고 내 이름을 중얼거리 는 라이너를 보며 푸스스 웃곤 장 단을 맞춰 주었다.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젖힌 그가 제 앞머리를 거 칠게 쓸어 넘겼다. 그의 크고 단 단한 손끝 아래 헤집어지는 은회 색 머리칼. 잠시 심호흡을 한 라 이너가 천천히 나를 마주했다.

"......이 이름을 당신 앞에서 얼 마나 불러 보고 싶었는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깊고 눅진한 감정이 배어나는 무거운 표정. 선명한 애정이 담긴 두 눈. 라이너의 목소리가 조금은 그르렁거리는 듯했다.

"제 이름이 그렇게 부르고 싶으 셨습니까? 그럼 말을 하지 그러 셨습니까. 이제부터 마음껏 부르 십시오. 카슈미르라고."

'부르겠다고 했으면 언제든 허락 해 줬을 텐데. 부끄러웠나?'

여태껏 봐 온 라이너는 얼음심 장처럼 생긴 주제에 수줍음을 잘 탔다. 지금도 은근히 붉어져 있는 목덜미를 보면 확실했다.

그가 수줍어 솔직하지 못했다고 확신하며 당당하게 웃으니, 나를

지그시 응시하던 라이너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 의 이름을 불러 왔습니다. 당신이 듣지 못할 곳에서요."

느지막한 걸음으로 걸어온 그는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굽히곤 상 체를 숙였다. 라이너가 한쪽 무릎 을 굽힌 상태임에도 나와 그의 키 차이는 상당했기에, 그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선 고개를 살짝 쳐들 어야 했다.

"정체불명의 용병, 미르. 당신이 미르라는 것 외에 아는 건 카슈미 르라는 이름뿐."

라이너가 천천히 손을 들어 내 뺨을 붙잡았다. 차갑게 식은 큰 손이 불 앞에 앉아 있으며 살짝 열이 올라 있던 내 뺨에 닿았다.

손을 통해 전해지는 냉기에 움 찔하다, 잔잔히 들끓는 황금빛 눈 동자와 마주하고 멍한 표정을 지 었다.

"나는 얼굴조차 모르는 당신을

그리워하며 수많은 밤을 지새웠습 니다. 내게 당신은 구세주이자 사 는 이유이며, 닿고 싶은 유일한 이상향이었습니다. 처음 만난 순 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할 말을 잃고 헛숨을 들이 켰다. 그의 눈동자가 조금의 애처 로움과 열기 한가득을 담아 번뜩 였다.

"그 긴 시간을 버텨 이제야 당 신의 이름을 부르는데, 난 아직도 당신만큼 강해지질 못했습니다."

뺨을 살짝 끄는 손길에 거부 없 이 이끌렸다. 라이너보다 낮은 시 야 끝엔 산홋빛 입술이 하얀 치열 에 아프도록 물려 있었다. 시야를 들면, 그곳엔 자기혐오가 가득 물 든 두 눈이 자리하고 있었다.

툭.

뺨에서 어깨로 손을 옮긴 라이 너가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내게 표정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숙인 그가 속삭였 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 시오. 금방 당신만큼 강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처럼 당신이 혼자 서 괴물 아가리에 뛰어드는 모습 을 다시는, 지켜만 보고 있지 않 을 겁니다."

내 어깨를 꽉 잡은 손이 미세하 게 떨린다. 어깨로 스며드는 짙은 숨결도 불안정했다.

"카슈미르. 차라리 다음부턴 날 버리고 도망가요. 제발 다시 는...... 내 눈앞에서 그런 짓 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구나.'

다시 한 번 느꼈다. 라이너 아인 하르트는 표정 관리에 놀랍도록 능한 사람이라고. 내 앞에서야 가 끔 포커페이스가 무너질 뿐, 그는 귀족들 사이에서 감정이 없는 기 계로 여겨졌다.

허나 나는 알았다. 그는 표정 관 리에 능할 뿐, 감정이 없는 게 아 니라는 걸.

일어나서 본 라이너의 표정이

너무 태연해서 잊고 있었다. 멍청 하게도.

나는 늘 혼자 하던 대로 거침없 이 하라바나 아가리로 몸을 던졌 고, 라이너는 그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걸.

그는 친구가 맨몸으로 사지에 뛰어드는 걸 무력하게 보고만 있 어야 했다.

'......내가 못할 짓을 했구나.'

입장을 역전해 내 앞에서 라이

너가 그런 짓을 했다면, 나는 라 이너가 하라바나 아가리에서 나온 직후 그를 떼려 눕혔을 게 분명했 다. 하라바나에 의한 부상보다 내 게 얻어맞아 생긴 부상이 더 많도 록

라이너도 나와 같으면 같았지 다르진 않았을 거라 생각하니 심 장 부근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 졌다.

"경."

"라이너. 라이너라고 불러주십시 오."

살짝 갈라진 목소리가 간절했다.

"......라이너."

옅은 숨을 뱉은 나는 내 이마에 맞닿은 라이너의 뒷머리를 부드럽 게 잡고 끌어당겼다. 그가 힘없이 끌려와 내게 안기듯 몸을 겹쳐 왔

"내가 미안합니다."

라이너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나는 살며시 눈을 감은 채 그를

꼭 안아 주었다. 그의 목덜미에서 퍼진 짙은 로즈우드 향이 내 후각 을 잠식시켰다.

"당신에게 못 볼 꼴을 보여줘서 미안해요."

"당신이 왜 내게 미안합니까."

크고 단단한 두 손이 내 양 어 깨를 꽉 붙잡고 살짝 뒤로 물렸 다. 물기가 없으나 울고 있는 두 눈이 나를 애절하게 응시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당신이 마음 써야 하는 대상은 내가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 스스로를 돌보지 못 했음에 마음을 썼으면 좋겠습니 다. 나는 카슈미르가, 조금만 더 이기 적이 었으면 좋겠습니 다."

사람들은 내가 영웅이길 바랐다.

약한 이들을 위해 거침없이 위 험으로 몸을 던지는 검은 재앙. 절망이 담긴 칠흑빛 오러를 오직 타인을 지키기 위해서만 사용하는 의로운 이.

사람들은 내가 내 피로 만든 강 함을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길 바

랐고, 나도 그것이 당연한 줄 알 았다.

'그런데 당신은 내가 이기적이었 으면 좋겠다고 말하는구나.'

한없이 정의롭고 올곧아 보이던 기사는, 내게 간절한 눈으로 이기 심을 간청했다.

느리게 속눈썹을 늘어뜨려 시야 를 차단했다. 눈을 감지 않으면 몰아치는 황금빛 파도에 침몰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는 데.'

내 입매가 곤란한 기색을 담아 굳었다.

타인을 희생으로라도 지키는 게 바로 내 이기다. 내게 있어 가장 큰 욕심은 내 주위 사람들이 평화 로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 이니까.

평화를 원한다면 필연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라이너, 나는......

그러겠다고 단순한 거짓말을 뱉 는 대신, 주저하며 그럴 순 없다 말하려 했다.

순간 라이너의 양팔이 내 허리 를 감싸고 끌어당겼다. 길고 단단 한 팔에 단단히 속박된 난 그 품 으로 속절없이 끌려갔다.

나를 으스러져라 안은 채 내 목 덜미를 숨결로 흐트러트린다.

귓가와 목덜미, 그 사이에서 끊

임없이 뱉어지는 조금 급한 숨. 내 와이셔츠에 밴 향과 동일한 향 을 뿜어내는 목덜미. 울렁거리는 목울대. 라이너의 모든 요소들이 자극적이었다. 온몸이 간지러웠 다.

"......그냥 말하지 마."

늘 정중하던 존대를 치워 버린 목소리는 거칠고 낮다. 그는 금방 이라도 사라질 무언가를 쥐고 어 쩔 줄 몰라 하는 아이 같았다. 나 는 그만 입을 닫았다.

나를 자신의 무릎에 앉힌 라이 너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내 목덜미에서 빠르게 뛰고 있는 맥 을 확인이라도 하듯.

그와 내 몸을 맞붙이려는 듯 내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팔이 사 실 내치지 말라는 듯 미세하게 떨 리고 있음을 아는 나는 한숨을 쉬 며 그의 목덜미에 손을 둘렀다.

때때로 침묵은 백 번의 혀 놀림 보다 더 많은 말을 했다. 농밀한 숨결과 함께 흐르는 침묵에서 라

이너가 바라는 것은 진실이 아니 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고요히 그 를 안아 주었다.

지금 라이너에게 필요한 것은 안정이었다.

"......네게서 내 향이 나."

숨을 크게 들이쉰 라이너가 한 참 뒤에 낮고 농밀한 목소리로 속 삭였다. 목덜미 직전에 있는 그의 입술은 내 목덜미에 입 맞추듯 움 직였다. 나는 작게 읏음소리를 내 뱉으며 속삭였다.

"당신에게서도 내 향이 나."

라이너가 더욱 강하게 나를 안 아 왔다.

침묵과 맞닿은 피부로 서로를 위로하며, 동굴에서의 밤은 그렇 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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