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86화 (86/254)

86 화

"으음......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뒤척였 다. 몸을 움직임에 따라 등 아래 에 깔린 천 자락이 부스럭거렸다. 심호흡과 함께 잠기운을 털어내고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켰다.

시야에 담긴 것은 역시 동굴 안 풍경이었다. 습기 없고 아늑한 동 굴 밖엔 이른 아침 해가 반짝이고

있었다. 잠시 햇빛이 비추는 숲 정경을 구경하다 기지개를 피며 일어났다.

'어제 깜빡 잠들었었지.'

위태로워 보이는 라이너를 달래 준다고 안고 있다가 품속에서 깜 빡 잠들었다. 그전에 한숨 자고도 여독이 남아 몸이 급박하게 휴식 을 원했던 것 같았다.

'이제 완벽하게 회복한 것 같 네.'

짧게 하품을 뱉고 스트레칭하듯 팔을 휘휘 돌렸다. 회복이 빠르다 는 점은 체력을 단련하며 가장 좋 은 점 중 하나였다. 한숨 자는 것 만으로도 맹독에 중독되어 있던 몸이 가벼워졌으니 말이다.

'라이너는 산책이라도 간 건가.'

라이너가 자의로 동굴을 나서는 걸 자는 중에도 얼핏 느꼈기에 동 굴 안에 라이너가 없다는 건 놀랍 지 않았다. 잠시 감각을 곤두세워 라이너가 멀리 있지는 않음을 짐 작하곤 동굴을 나서기 위해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카슈미르?"

"아, 오셨습니까?"

모포를 개다 말고 등 뒤에서 들 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여상스레 대답했다. 입고 있는 라이너 셔츠 에서 구겨진 부분을 대충 정리하 고 휙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상반신을 탈의한 채 젖 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는 상태 그대로 굳은 라이너가 있었다.

'••••••미친.'

그의 몸과 정면으로 마주한 나 도 그를 따라 굳고 말았다.

아마도 신은 라이너를 만들 때 엄격의 대천사 얼굴과 정욕의 악 마 몸을 접붙인 모양이었다. 솔직 히 어제 안겨 있으며 라이너의 몸 이 상당히 좋다는 것은 예상한 바 였으나, 짐작과 실제로 보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구릿빛도, 우윳빛도 아닌, 우유 를 많이 섞은 카페라테와 비슷한

색인 피부. 각 잡힌 몸선. 넓게 벌어진 어깨. 얼핏 보아도 단단한 근육들. 누가 자를 가져다 그린 듯 뚜렷한 복부의 근육. 소드 익 스퍼트 경지를 쉬이 얻어내진 않 았다는 게 엿보이는 온몸의 흉터 들

그리고 그 몸을 따라 흘러내리 는, 작은 물방울들.

'저 얼굴에 저 몸은...... 신의 불 공평함을 증명하는 가장 유력한 증거물 아닌가?'

라이너의 몸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용병으로 살아오며 근 육질 몸이야 거울만 봐도 볼 수 있었지만, 단언하건대 저렇게 조 각 같은 몸은 처음이었다. 거의 예술 작품을 보는 기분으로 라이 너의 몸을 바라보던 나는, 상체를 따라 시선을 느리게 올리다 당혹 스러움이 담긴 황금빛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오가는 시선. 잠시간의 침묵.

"그,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

"저는 카슈미르가 일어나 있을 줄 몰랐습니다!"

우리는 동시에 펄쩍 뛰며 변명 했다.

"그러니까, 저는 라이너를 희롱 한 게 아니라, 그, 갑자기 보여서 본의 아니게 본 것뿐입니다!"

"더러운 모습으로 카슈미르를 볼 순 없으니 일찍 일어나 호수에 서 씻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워낙 이른 아침이라 카슈미르가 일어나 있을 줄 몰랐습니다!"

"그, 그런데 솔직히 라이너의 몸

이 잘못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간 으로서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가는 몸 아닙니까!"

"카슈미르를 몸으로 유혹해 보 겠다는 불경한 생각 같은 건 일절 한 적이 없습니다! ......잠시 해본 적이 있긴 하지만...... 태양에 맹 세코 이번은 실수입니다!"

서로 할 말만 하는 상황에서 말 이 이어질 리 없었다. 라이너와 나, 둘 다 당황한 상태였던지라 이상한 대치는 계속 이어졌다.

' 미치겠네.'

라이너의 상체가 목덜미를 따라 붉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나까 지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얼굴 이 홧홧해짐을 느끼며 머리를 거 칠게 헤집었다.

용병으로 살며 남자의 몸을 본 경험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용병 이란 족속들은 조금만 더워도 옷 을 휙휙 벗으니까. 미르로 살며 의뢰를 혼자서 처리하는 경우가 많긴 했어도, 단체 의뢰를 맡은 경험이 없는 건 아니다. 우락부락 한 용병들과 함께 생활하며 남자

알몸 정도야 아무렇지 않다고 생 각해 왔다.

'그런데 왜......

겨우 옷을 벗은 상체를 보고 어 쩔 줄 몰라 하는 스스로가 어색했 다. 아무래도 라이너가 지나치게 당황하니 나도 덩달아 당황한 것 같았다.

"그, 몸에 물, 물부터 닦으십시 오! 음란하게 그게 뭡니까!"

뇌에 살짝 열이 오른 채로 빽

소리쳤다. 솔직히 각진 근육들 틈 새로 물방울이 흐르는 모습이 너 무 선정적이라 나도 모르게 눈이 갔다. 시선을 겨우 들어 라이너의 눈을 바라보니, 온몸이 붉어진 그 가 머리를 말리던 수건으로 빠르 게 몸을 닦기 시작했다.

'진정해, 카슈미르 크리시스.'

엇나간 이성을 다잡으며 애써 심호흡했다. 온몸이 불타던 라이 너도 슬슬 이성을 찾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옷을 입으십시오."

" 알겠습니다."

"제가 벗어 드려야 합니까?"

"네. ••••••네?"

넋이 나가 대답하는 듯싶던 라 이너가 순간 멈칫하더니 커진 눈 으로 반문했다. 뜨거운 목덜미를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답했다.

"제가 지금 라이너의 셔츠를 빌 려 입고 있지 않습니까. 옷이 필 요하다면 제가 벗어 드리면......

"무슨 미친 소리를 하시는 겁니

까!"

이성을 되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우리 둘 다 아직 제정신 이 아닌 모양이었다. 가라앉나 싶 었던 라이너의 얼굴은 다시 순식 간에 붉어지고, 나는 처음으로 라 이너의 입에서 험한 말을 들었다. 처음 듣는 그의 험한 말에 당황한 나는 뇌를 거치지 않은 헛소리를 하고 말았다.

"아니, 뭐...... 뭐, 옷 좀 벗을 수도 있지! 라이너만 근육 있는 줄 압니까! 나도 복근 있고, 이두

박근 있고! 승모근도 엄청 단단합 니다! 라이너한테 지지 않는단 말 입니다!"

"압니다! 이미 카슈미르의 몸을 봤으니까!"

' 어?'

라이너가 얼굴이 붉어진 채로 소리 치고, 나는 횡설수설하다 말 고 삐끗 멈췄다. 상당히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 어쩌다••••••?"

조금 멍해진 내가 허망한 표정 으로 물었다. 나를 보고 멈칫한 라이너는, 이내 자기가 한 말을 자각한 건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는 수건까지 내팽개치고 황급히 내게 다가왔다.

"그게 아닙니다!"

" 아니

"어제 카슈미르를 호수에서 씻 기다 불가피하게 봤단 말입니다! 옷을 벗겨 드릴 때만 더듬지 않으 려고 눈으로 확인하고 씻겨 드릴 땐 눈을 가렸습니다! 오해하지 마 십 시오!"

'아, 그때.'

그거라면 어제 이미 얘기가 끝 난 상황이었다. 몸을 봤다는 말에 순간 머리가 정지했던 나는 사실 을 알고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아, 알겠습니다. 우선, 우선 옷 부터 입으시죠."

잠깐 대치를 하며 하라바나를 사냥하고 나서보다 더 피곤해진 나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이 웃기지도 않는 대치의 원인을 지

적했다. 내 앞에 서서 안절부절못 하던 라이너도 이제야 슬슬 이성 이 돌아오는지 빠르게 등을 돌리 더니 주머니에서 여분의 셔츠를 꺼내 입기 시작했다.

'진짜...... 내가 왜 그랬지?'

같이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던 꼴 이란. 조금 전은 정말 나답지 않 았다. 자책과 수치심으로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덮었다.

"다 입었습니다."

라이너도 진정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던 건지, 옷을 열 번은 갈 아입고도 남았을 시간이 지난 뒤 에야 그는 느지막이 말했다. 그동 안 완전히 이성을 되찾은 나는 조 금 전 망언들로 의한 부끄러움을 애써 지운 채 얼굴을 가린 두 손 을 내렸다.

씻어서 보송보송한데다 깨끗한 새 셔츠까지 입은 라이너는 하얗 게 빛났지만, 가릴 수 없는 두 귀 는 여전히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라이너. 제가 조금 전엔 실언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이너와 나 사이에 어색한 사 과가 오갔다. 잠시 이어지는 침묵 을 먼저 끊어 낸 건 나였다.

"......그럼 이제 보라색 결계가 있었다는 곳으로 갈까요? 슬슬 막사를 찾아가야 하지 않겠습니 까."

"아, 네. 그래야죠."

퍼뜩 고개를 끄덕인 라이너는 빠르게 자신의 짐을 정리하기 시

작했다. 나는 그런 그를 기다리며 라이너가 씻었다는 호수로 가 세 수를 했다.

'......왜 이렇게 부끄러웠을까. 그렇게 부끄러울 만한 일도 아니 었는데.'

여전히 목덜미가 조금 뜨거웠다.

" 이곳입니다."

라이너를 따라 도착한 곳은 하

라바나와 혈투를 벌였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길목이었다. 오는 길 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라바나 와 혈투를 벌였던 곳도 들렸으나, 역시나 하라바나의 사체는 감쪽같 이 사라진 뒤였다.

'흑마법에 조종당한 마수는 존재 자체가 저주받은 탓에 숨통이 끊 어진 직후로부터 한 시간 안에 사 체가 산화되어 사라진다고 했지.'

안 그래도 저주받은 존재인 마 수가 저주받은 마법의 끝판왕인 흑마법과 만났으니, 흑마법에 조

종되는 마수는 태양신 라가 와도 구제하지 못할 최악의 존재일 터 였다.

'다만 그 마수에서 잘라낸 일부 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다고 했지.'

그것이 나와 라이너가 아무 문 제 없이 하라바나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거대하던 하라바나 사체가 혼적 도 없이 사라져 혼란스러워하던 라이너에게 간단히 설명한 뒤 그

를 이끌고 결계 앞에 온 참이었

'원작에서 나온 그 결계군.'

예상하던 바였기에 놀랍진 않았 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불길 한 진보랏빛으로 일렁이는 반투명 결계에 짧게 손을 대어 보았다. 전기충격 같은 자극이 오진 않았 으나, 잠시 손을 댄 것만으로도 상당히 불쾌해질 만큼 지독한 마 기를 띠고 있었다.

"강력한 결계군요."

"네. 제 오러로도 부서지지 않았 습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의 결계인데다 보기만 해도

"무척 불쾌하죠."

늘 같은 무표정이지만 미세하게 불쾌해 보이는 라이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라이너는 오러를 사용하는 검사. 오러는 마나를 일종의 파장 으로 치환시켰을 뿐, 마나의 순수 한 형태는 남겨 둔다. 때문에 오 러를 사용하는 이들은 가장 순수

한 방식으로 마나와 소통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마나는 대자연을 움직이는 흐름. 그래서 소드 마스터는 용과 요정 들과 더불어 자연 그 자체와 가장 가까운 존재 중 하나였다.

허나 흑마법은 마나를 저주받은 방식으로 가공해 변형시킨다. 흑 마법은 인간이 가장 쉽게 강해지 는 방법이지만, 사용할수록 술사 의 영혼을 망가트렸다.

'오러와 흑마법은 정반대 성향을

띠지.'

라이너와 내가 흑마법의 기운을 느끼고 불쾌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참아야지.'

속을 간지럽히는 역겨움을 참으 며 결계 위로 다시금 손을 올렸 다. 결계는 사후경직이 시작된 사 체처럼 차갑고 딱딱했다.

치칙.

결계 안으로 내 마나를 불어넣 어 결계 내 마나의 흐름을 읽기 시작했다. 흑마법을 읽어 내는 건 처음인지라 잠시 고전하긴 했지 만, 한 번 형식을 읽은 뒤로는 쉬 웠다.

"이곳은 결계 내부입니다. 이 결 계는 내부 기척이 외부로 새어 나 가는 걸 막는 동시에 내부에서 외 부로 이동하는 걸 막는군요. 외부 에서 내부로 오는 건 자유롭습니 다. 라이너가 망가트리지 못한 걸 보니 소드 마스터는 돼야 부서트 릴 수 있고요. 상당한 수준의 술

사가 전개한 것 같습니다."

불쾌함에 빠르게 손을 떼며 말 했다. 역시 원작 그대로였다.

'아버지와 노아 아인하르트 경은 숲 입구 쪽에서 사냥을 하고 있나 보네. 하기야 아버지도 황제에게 이끌려 어쩔 수 없이 하는 기색이 었고...... 아인하르트 경은 사냥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이 아니니 까.'

결계는 숲 깊숙한 곳에 전개되 어 있다. 만약 그들이 결계 가까

이로 왔다면 필시 이상한 점을 느 꼈을 테지만, 여태껏 아무런 소란 도 없는 것을 보아 숲 입구에서만 형식적으로 사냥하느라 결계의 존 재를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내 말을 조용히 듣던 라이너는 잠시 생각하더니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카슈미르가 말한 것이 정말이 라면 "

이곳은, 마치 함정 같군요.

들어오는 것은 자유로우나 나가 는 것은 소드 익스퍼트조차 할 수 없고,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 고 있는지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알 수 없다.

아주 정밀한 함정이 아닐 수 없 었다.

"그럼 문제는 하나죠."

차분하게 읊조리며 불길한 기운 이 느껴지기 시작한 북쪽 부근으 로 몸을 돌렸다. 라이너 또한 불 길한 낌새를 느낀 건지 얼굴을 굳

히며 나와 같은 방향으로 바라보 았다.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약 3km 너머. 사람은 둘. 그리 고.......

흑마법에 물든 마수 한 마리.

"이 함정의 희생양은 누구인가."

이것은 이미 예견된 이야기. 나 는 알고 있었다.

이 함정의 희생양은 내 친구였

나와 라이너는 누가 먼저랄 것 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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