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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87화 (87/254)

87 화

발에 마나를 두른 채 전속력으 로 달린 이상 도착은 빨랐다.

사방으로 퍼지는 역겨운 마수의 기운과 역겨움을 한층 더해 주는 흑마법의 기운. 뒤틀리는 속을 애 써 억누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주위는 황폐화되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가뭄을 마주한 듯 말라 비틀어져

시든 나무들. 그을린 자국이 남은 풀들. 부서진 돌들. 사방에 묻어 난 정체불명의 점액질. 부서진 바 위들 사이로 보이는, 도망치는 뱀 들

거대한 뱀이 기어간 듯이 움푹 파인 땅.

'젠장.'

원작을 아는 나로서 어떤 마수 가 나올지 예상한 바이지만, 막상 그 마수의 흔적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니 착잡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긴장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과, 생명의 위험을 오싹한 스릴로 받 아들여 미친 듯이 흥분한 본능을 애써 잠재우며 더욱 더 마나를 방 출했다.

키에에엑!

점점 가까워지는 소름 끼치는 괴성.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소 리였다. 귀를 매만지며 얼굴을 살 짝 찌푸리던 라이너는 어느 순간 시선을 한 곳에서 멈추며 눈을 크

게 떴다.

"카슈미르, 이건......!"

"네. 뱀의 몸체입니다."

괴성이 가까워지는 길목에서 보 이기 시작한 건 건장한 성인 남성 둘을 겹쳐 놓은 둘레에 매끈한 비 늘이 덮여 있는 몸이었다. 역겨운 마기가 풍기는 잿빛 몸은 연신 꿈 틀거리며 끝을 모르고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몸을 이정표 삼아 더 욱 빠르게 달렸다.

캬아아아악!

마수 특유의 시체 썩는 악취에 숨을 참았다. 사방 나무들이 꺾여 숲 한가운데임에도 휘휘한 공터 같았다. 땅이 크게 울리고, 자욱 하던 흙먼지 바람이 한 차례 지나 간 뒤 맞닥뜨리는 것은.

키에에에......•

족히 80m는 될 법한 긴 몸체. 벌린 입 사이로 보이는 맹독이 깃 든 송곳니. 세로로 길쭉한, 섬뜩

한 동공에 소름 끼치도록 붉은 눈 동자.

숨결만으로 나무를 시들게 하고, 돌을 산산조각 내며, 풀이 타들어 가게 하는 공포의 주인. 하라바나 와 함께 드래곤에 필적하는 최강 의 마수라 불리는 대재앙.

"......저건, 마수 바실리스크입니 다."

뱀들의 왕, 바실리스크였다.

와락.

내 말을 듣고 크게 흠칫한 라이 너는 눈 깜짝할 새에 나를 제 품 에 가뒀다. 검을 꺼내려다 영문도 모르고 안긴 나는 표정 위로 물음 표를 띄웠다.

"무슨...... 뭐 하시는 겁니까?"

"바실리스크와 눈을 마주치면 석화되지 않습니까!"

제 가슴팍으로 내 시야를 차단 한 그가 내 뒷머리를 꽉 붙잡았 다. 라이너 가슴에 눌려 질식되던 나는 그를 살짝 밀어냈다.

'그 헛소문 때문이구나.'

수천 종에 달하는 가지각색 마 수들 중에서도 대재앙이라고 일컬 어지는 다섯 마수가 있다. 그 중 하나인 하라바나가 대외로 알려진 정보가 극히 적은 경우라면, 다른 하나인 바실리스크는 알려진 정보 들이 하나같이 헛소문인 경우였 다.

'나도 바실리스크와 싸워본 건 단 한 번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람들 사이에 퍼 진 소문들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들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진짜 귀엽게 굴어.'

안절부절못하는 라이너를 올려 다보다 입을 가리고 웃었다. 바실 리스크의 눈을 보면 석화가 된다 는 소문은 워낙 유명했기에 그의 반응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 다.

어떻게든 살려 보겠다고 나를 덮치듯 안은 라이너를 생각하면

웃음이 터질 것 같았으나, 꾹 참 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바실리스크의 눈과 마주한다고 해서 굳지 않습니다. 그건 헛소문 이에요. 오히려 위험한 건 숨결입 니다. 바실리스크의 숨결엔 맹독 이 묻어납니다."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굳으면 전 진즉에 굳었을 겁 니다."

진지한 목소리로 단언하고 나서 야 라이너는 나를 품에서 놓아 주

었다. 얼핏 본 그의 목덜미가 상 당히 붉었다. 또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애써 참고, 시들어 나뭇 잎이 다 떨어진 나무 뒤에 숨어 정황을 살폈다.

키에에엑!

바실리스크가 다시금 소름 끼치 는 비명을 질렀다. 귀가 먹먹했 다. 전투는 이제 막 시작한 모양 인지 바실리스크와 사람 모두 그 리 지친 기색은 아니었다. 바실리 스크는 몸에 잔상처가 조금 난 것 들 빼곤 멀쩡했다.

"비늘 난 지렁이 새끼가 아가리 가만 안 두고......

짜증스러운 중얼거림. 대재앙을 앞에 둔 사람치곤 상당히 태평한 낯을 한 남자가 검을 세웠다.

바람을 따라 짧게 나부끼는 연 갈색 머리칼. 날이 선 검날에 반 사된 빛을 받은 두 눈이 위험한 형광 연둣빛으로 번뜩였다.

서걱.

크고 단단한 손 아래에서 검이 허공을 갈랐다. 광포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형광 연둣빛 오러가 허 공을 날아 바실리스크의 몸통 부 근을 베었다.

캬아아악!

바실리스크가 또다시 비명을 질 렀다. 아직은 조금 불안정한 소드 익스퍼트의 오러는 바실리스크의 두꺼운 살을 뚫고 치명상을 입히 진 못했지만, 검은 피를 흘리게 하기엔 충분했다.

' 역시.'

내 예상대로, 이 공간에 자리한 두 사람 중 하나는 알렉산드로 아 타라, 레오였다.

'그가 목표물이야.'

분명 두 사람이 서 있음에도 바 실리스크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레오만을 공격했다. 레오는 집요 하게 쏟아지는 공격을 조금 버겁 게 받아내느라 나와 라이너가 가 까이에 있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저 사람은...... 여기 있 을 거라고 상상도 못 한 사람인 데.'

레오 옆을 차지한 인영을 바라 보며 침을 삼켰다. 이건 원작과 다른 부분이었다.

"이 괴물은 대체 왜 폐하만 공 격하는 겁니까!"

"시X,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 나!"

대상에게로 향하는 레오의 서늘

한 표정이 조금은 낯설다. 레오와 말다툼하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 닌 2황자 세레논 솔라티네였다.

'세레논도 레오가 국왕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그는 2황자이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긴 했다. 깍듯이 폐하라는 존칭을 사용하는 세레논을 보며 레오가 한 나라의 통치자라는 것 을 새삼 자각했다.

"황자, 그대는 가만히 있지만 말 고 저 파충류 새끼 움직임 좀 잡

아 놓고 있게!"

"그걸 제가 어떻게 합니까! 숨 막혀 죽을 것 같은데! 전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겹단 말입니다!"

"빌어먹을...... 여태껏 독 내성 도 안 기르고 뭐 했는가!"

"폐하께서야 소드 익스퍼트지만 전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세레논과 레오가 힘겹게 바실리 스크의 공격을 피하며 말다툼을 했다. 바실리스크의 숨결엔 독이 스며들어 있으니, 확실히 검의 경 지가 낮은 세레논으로선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게 뻔했

다.

'세레논은 먼저 대피시켜야겠 군.'

세레논은 가만히만 있어도 독에 노출되어 위급해질 가능성이 높았 다.

'그리고...... 아직 세레논에겐 내 가 미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으니까.'

세레논은 라이너, 레오와는 다르 게 내가 미르라는 사실을 몰랐다.

아직 세레논이 어떤 사람인지 확 실히 모르는 상황에서 내 오러를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폐하! 피하십시오!"

숨을 헐떡거리던 세레논이 새하 얗게 질려 외쳤다. 광포하게 날뛰 는 형광 연둣빛 오러로 두꺼운 비 늘을 지지고 있던 레오에게 바실 리스크의 아가리가 다가가고 있었 다.

"라이너!"

"네!"

짧게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라이너는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차리고 황금빛 오러가 깃든 검을 빼들었다.

쉬익!

키에에엑!

초승달 형태를 띤 황금빛 오러 가 허공을 갈라 바실리스크의 눈 을 강타했다. 눈을 질끈 감은 바 실리스크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었 다. 무방비한 상태로 위험에 노출

되어 있던 레오와 새하얗게 질려 있던 세레논이 동시에 나와 라이 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인하르트 경? 크리시스 공녀?"

" Z、Z、Q"

TTTT-

둘 다 멍하니 넋이 나간 얼굴이 었다. 라이너와 나를 번갈아 보며 휘둥그레 눈을 뜬 세레논과는 달 리, 레오의 시선은 오직 내게 고 정되어 있었다.

"설명할 시간 없습니다!"

검 손잡이를 꽉 쥔 나는 그들에 게 손짓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 □ □ x "

~r" I•

"빨리! 뛰어오십시오!"

내 엄한 외침에 레오와 세레논 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 고서도 마나를 풀어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바실리스크가 고통으로 정신이 없을 때 우리 넷은 공터 가장자리의 나무 사이로 숨어들었

"대체 자네들은 어떻게 이곳 에......

"그런 건 얘기할 시간 없습니 다!"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세레논을 버럭 소리 질러 가로막고 날카롭 게 뜬 눈으로 그 둘을 훑어보았 다. 흠칫한 레오와 세레논은 얌전 히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모두 잘 들으십시오. 저는 이제 한 가지 길을 제시할 겁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거부권도 없습니다. 제가 시키는 대로 하십 시오. 안 하면 모두 죽습니다."

'이곳에 나보다 강한 사람도 없 고, 나보다 바실리스크를 잘 아는 사람도 없어.'

나는 평생 이런 상황에 노출되 어 살았다. 사실 내게 있어선 귀 족처럼 차려입고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것보다 이런 상황이 훨씬 더 익숙했다.

내 위압적인 단언에 라이너와

레오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 덕였다.

"대체 공녀는 어떻게 자신

하는 거지?"

허나 아무것도 모르는 세레논은 쉽게 고개를 끄덕인 라이너와 레 오를 번갈아 보더니 복잡한 표정 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나를 평범한 공녀로 알 테 니 내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겠지.'

이해는 했지만 가타부타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서늘한 눈초 리에 위압을 담아 세레논을 응시 했다.

"긴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제겐 모두를 살릴......

내게 가장 익숙한 단어를 뱉으 려다 잠시 멈칫했다. 어젯밤 나눴 던 대화가 생각난 탓이었다.

내 옆을 지키고 선 믿음직스러 운 남자를 곁눈질했다. 사시사철 올곧은 황금빛 눈동자를 오직 내

게 집중하고 있는 라이너를.

잠시 옅은 헛숨을 들이킨 나는, 느리게 말을 이었다.

"......모두를 살릴, 가장 안전한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최선이란 단어 대신, 안전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내 안전을 바라는 사람이 내 곁에 있으니까.

라이너의 입가 위로 떠오른 옅 은 미소를 잠시 눈에 담다 세레논

에게로 눈을 돌렸다. 내 가라앉은 눈과 마주한 그가 살짝 몸을 움츠 렸다. 바실리스크의 숨결에 노출 된 세레논의 눈가가 점점 짙은 보 랏빛을 띠고 있었다.

"송구하오나 저하, 따르지 않으 시겠다면 강제하도록 하겠습니 다."

시간이 없다. 세레논의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고, 고통 의 몸부림을 멈춘 바실리스크는 살벌한 기세로 우리를 찾고 있었

'세레논이 죽게 할 순 없어.'

바실리스크가 우릴 찾으면 가장 먼저 죽게 될 건 세레논이다. 검 의 경지가 있어 독 내성이 있는 나와 라이너, 레오와는 달리 그는 독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힘겨워 보였으니까.

'그가 어떤 사람이든, 내 눈앞에 서 죽게 하진 않아.'

내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건 보 지 못하겠다. 그뿐이었다. 이곳에

서 벗어나면 벌을 받을 각오를 한 채, 세레논에게 강압적으로 말했

안개 낀 하늘처럼 뿌연 푸른색 눈동자를 올곧이 응시한다. 독에 노출되어 조금 멍해 보이는 눈동 자가 허공을 헤매다 내게로 초점 을 맞췄다.

'......아.'

나는 눈동자 깊은 곳에 깃든 두 려움을 읽는다. 세레논의 몸은 이 제야 발견한 게 놀라울 정도로 확

연히 떨리고 있었다.

평생 마수가 가득한 숲에서 구 른 나와는 다르다. 그는 가장 고 귀한 곳에서 축복받으며 태어난 황가의 일원이다. 이런 상황이 익 숙할 리 없었다. 겉보기엔 평정심 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두 렵고 혼란스러울 게 뻔했다.

"......저하."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며 세레논 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어깨가 파득 튀었다. 구름이 소용돌이치

는 우중충한 하늘을 닮은 그의 눈 을 똑바로 응시하며 단언했다.

"오늘은 아닙니다. 오늘은, 아무 도 죽지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 말을 따라 주세요."

오늘은 아니다. 적어도 내 눈앞 에선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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