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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88화 (88/254)

88 화

"......알겠네."

나와 시선을 교환하며 차츰 진 정을 찾은 세레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흔들림이 멎은 눈동자는 굳은 결심을 띠고 있었 다.

"사실 아직 공녀가 어떻게 그리 자신하는지 모르겠네. 공녀가 믿 을 만한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세레논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 언가를 가늠하듯 깊어진 눈동자. 그의 의심은 타당했기에, 나는 묵 묵히 그 시선을 받아 내었다.

"하지만, 그래도 믿어보려 해. 내 감이 그대를 믿어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거든. 내 감은 꽤 쓸 만 한 편일세."

'정말 괜찮은 감을 가진 모양이 네.'

희미하게 웃었다. 처음 보았을

때처럼 호쾌하고 밝은 웃음을 되 찾은 세레논이 작게 덧붙였다.

"무엇보다, 형님이 그렇게 좋아 하는 이가 나쁜 사람일 리 없거 든."

그의 덧붙임에 레오와 라이너의 기운이 일순 흉흉해졌다 빠르게 잠잠해졌다. 상당한 살기를 풍기 던 둘을 잠시 어리둥절하게 번갈 아 보다, 세레논은 역시 디에고와 사이가 좋은 것 같다고 짧게 생각 했다.

"좋습니다. 허나 계획을 진행하 기 전에, 한 사람의 허락만은 꼭 받아야 할 것 같군요."

살벌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바실리스크의 주위를 돌리기 위해 주위 마나 흐름을 헤집곤 목소리 를 죽였다. 모두가 내게 집중하는 가운데, 나는 한 사람에게로 시선 을 돌렸다.

" 레오."

내가 이곳에 당도한 순간부터 오직 나만을 집착적으로 담고 있

던 압생트 빛 눈동자가 깊어진다.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계획 은, 너를 이용하는 계획이야. 네 가 위험해질 거야."

바실리스크의 목표는 레오다. 나 는 이를 본격적으로 이용할 생각 이었다.

'물론 내가 필사적으로 레오를 지키겠지만.'

애초에 타인을 미끼로 사용한다 는 것 자체가 되먹지 못한 발상이 었다.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날카롭던 레오 의 눈매가 흐드러지게 휘어졌다.

"대체 뭘 주저하는 거야? 나는 네 손이 날 사지로 밀어 넣어도 기뻐할 텐데."

연둣빛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 였다. 지독히 유해하고 치명적인 웃음을 입가에 건 그가 속삭였다.

"네 뜻대로 해. 난 네 명령이라

면 뭐든 하니까."

사람의 심장을 건드리는 낮은 목소리가 맹목적인 빛을 띠었다. 맹수의 눈을 한 주제에 순종적으 로 눈을 깔아 내리는 레오는 제 스스로 목줄을 맨 사자 같았다.

" 그래. 한번 해 보자.''

이렇게 나를 믿고 있는 그를 위 험에 처하게 하는 것이 싫었지만, 역시 이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 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 고 설명을 시작했다.

"바실리스크의 숨결엔 독이 깃 듭니다. 치명적인 맹독이요."

"아, 그래서...... 이렇게 힘들었 던 건가."

"네. 독에 면역이 없는 이들은 바실리스크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 로도 위험합니다."

세레논이 지친 숨을 내뱉으며 나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그저 넘긴 채 설명을 이었 다.

"그래서, 전투에 앞서 저하를 대

피시키는 게 먼저입니다."

"나도 싸울 수 있......!"

"지금 안 피하시면 검을 들기도 전에 죽습니다."

반박하려 드는 세레논을 끊어내 며 고요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슬슬 보랏빛이 올라오는 그의 피 부는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다. 세 레논의 동공이 혼들렸고, 그는 입 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무겁게 고 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그의 순응에 나 역시 짧게 고개 를 끄덕이고 시선을 돌렸다.

두 쌍의 눈동자가 뜨겁게 나를 주시한다. 색채도, 눈빛도 사뭇 다른 두 눈• 그 사이에서 나는, 짦은 심호흡 뒤에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라이너. 2황자 저하와 함께 이 곳에서 도망치십시오."

"카슈미르!"

내 단호한 한마디에 얼굴을 일 그러트린 라이너가 믿기지 않는다

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무에 기대어 서 있던 레오는 라이너와 상반되게 밝은 낯으로 비죽 웃었 다.

"뭐, 슈슈의 계획엔 경이 필요 없나 보군."

레오의 비꼼에 라이너의 기운이 일순 흉흉해진다. 이 상황에서 하 나 도움되지 않는 도발을 하고 있 는 레오를 흘겨보다, 으스러져라 주먹을 쥔 라이너를 돌아보았다.

"라이너는 황궁 기사단장이지

않습니까. 황가의 일원을 가장 우 선시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당신입니다!"

라이너의 외침에 눈을 크게 떴 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황금빛 눈동 자에 피부가 그을리는 것 같았으 나 황급히 세레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황궁 제2기사단장이 황족 앞에 서 이런 소리를 하면 어떡해!'

저건 세레논이 불충죄로 벌을 내려도 할 말이 없는 발언이었다. 혹여 세레논이 분노했을까 봐 초 조했다.

" 호오••••••

허나 내 예상과는 다르게, 세레 논은 아주 흥미롭다는 표정이었 다. 번뜩이는 눈으로 라이너를 주 시하는 그의 모습은 분노보단 재 밌어 죽을 것 같은 듯했다.

'이걸로 라이너에게 벌을 주진 않을 모양인데.'

갑자기 맥이 빠져 숨을 뱉었다. 살짝 안심하며 라이너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라이너. 제게 계획이 있습니 다."

"또 혼자 사지로 뛰어드는 계획 말이십니까?"

"이번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단둘이 바실리스크를 어 떻게 상대하겠다는 겁니까!"

"우리 둘이서......

'하라바나를 처치했는데 레오랑 바실리스크를 상대 못하겠습니 까.'라고 말하려다 세레논이 나와 라이너를 흥미 어린 눈으로 바라 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입을 닫았다. 세레논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이리 깔끔하지 못해서야. 너무 구질구질해서 전연인인 줄 알겠 군."

고집이 가득해 보이는 라이너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떻게 보내야 하나 곤란해하고 있는데, 레오가 비죽 웃으며 불난 곳에 기름을 들 이부었다.

대놓고 모욕을 당한 라이너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사뭇 다른 기운의 두 살기가 허 공에서 치열하게 맞부딪쳤다.

"......낄 자리가 아니십니다."

"왜 낄 자리가 아닌가? 자네 때 문에 슈슈의 계획이 지체되고 있 는데."

"카슈미르와 제 일입니다."

"카슈미르의 일은 내 일이기도 해서."

'°1 새끼들이...... 지금 뭐하는 거지?'

저기 앞에서 바실리스크가 우리 네를 찾겠다고 숲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데 둘 다 위기감이 지 나치게 없었다. 이 시국에 이 대 치가 너무도 어이없어 잠시 둘을 번갈아 보다, 한숨을 쉬며 둘 사 이를 가로막았다.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 고...... 적당히 하고 둘 다 물러나 시죠."

그제야 둘이 살기를 거두었다. 나는 라이너를 돌아보았다.

"라이너. 번복할 생각은 없습니 다. 2황자 저하와 함께 가세요."

"하지만......

"라이너 아인하르트."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 을 읊조리며 위압감을 담아 그를 응시했다.

용병 일을 하며 가장 먼저 배운 것이 타인을 압도시키는 법이었 다. 덩치가 작았던 난 늘 무시당 했으니까. 시선으로, 눈빛으로, 작 은 움직임으로, 살기로 상대를 제 압한다. 상대가 내 말을 따르도 록.

약간의 살기를 푼 채 서늘한 시 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거부권은 없다고 했을 텐데요."

새하얀 치열이 불그스름한 입술

을 짓씹었다. 라이너의 입술에서 옅게 피가 새어 나왔다.

"이 이상 불복종할 시 강제로 하겠습니다."

나는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었 다. 세레논이 가는 길에 독에 중 독되어 쓰러지기라도 하면 누군가 하나는 업고 가야 한다. 레오는 미끼가 되어야 하고, 나는 메인 카운터가 되어야 하니 라이너가 가는 것이 맞았다.

" 대답."

무감각한 목소리로 대답을 재촉 했다. 입술에서 터져 나온 피를 삼킨 라이너는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갈라지는 목소리가 처참했으나, 숙여지는 고개는 순종적이었다.

' 누구 하나 잡아다 찢어 버

릴 기센데.'

허나 내 눈엔 보였다. 그의 넘실

거리는 황금빛 눈동자가 공포스러 울 정도로 번뜩이고, 그를 둘러싼 마나가 미친 듯이 날뛰고 있다는 걸. 그는 온몸으로 강한 거부감과 반항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마음이 약해지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사항이다. 라이너의 강렬 한 시선을 살짝 피한 채, 주머니 에서 은빛 마석과 하늘빛 마석을 꺼냈다.

"••••••이건?"

"순간이동 마석입니다."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귀족들의 장난과도 같은 사냥 대 회에 이런 것까지 가져왔다는 걸 놀라워하는 기색이었다.

'사실 나도 작정하고 가져온 건 아니지만.'

은빛 마석은 엘이 준 것으로, 이 제는 거의 분신처럼 소지하고 다 니는 것이다. 또 다른 하늘빛 마 석은, 얼마 전 아리아가 자신이 처음으로 제작했다며 내게 선물한

마석이 었다.

'내 처음은 언니에게 주고 싶었 어. 첫 작품이라 멀리는 이동하지 못하겠지만...... 위급 상황으로 대 피할 때 사용하긴 좋을 거야.'

'엘이 선물한 마석에 비하면 한 없이 떨어지지만...... 느껴지는 마 나의 양을 보아 결계 너머 5m 정 도까진 갈 수 있어.'

처음 만든 것인데 이정도면 대 단한 것이다. 역시 내 동생은 천 재라는 팔불출 같은 생각을 잠시

하다, 은빛 마석을 세레논에게, 하늘빛 마석을 라이너에게 건넸

"둘이 함께 다녀야 합니다. 황자 님께서는 라이너에게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서, 결계 앞에서 마석을 쓰 십시오. 같은 위치에 도착하는 걸 로 합의 보신 뒤에 최대한 빨리 공터로 돌아가 이곳 상황을 알리 고 지원을 요청해 주십시오. 올 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성기사나 신관들은 꼭 있는 대로 대동해 오 셔야 합니다!"

"소드 마스터인 크리시스 공작 도 아니고 성기사와 신관들? 왜 하필......

캬아악!

바로 직전에서 바실리스크의 울 부짖음이 들려왔다. 대화를 하다 보니 세워 놓았던 마나 막이 흔들 리며 바실리스크가 기척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바실리스크의 시체를 치울 때 그들이 필요합니다! 이 이상 자세

히는 설명 못 해요, 빨리 가십시 오!"

入 그르

■ O •

날 선 검이 살벌한 소리와 함께 검집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카이 사르에게 선물받은, 잘 벼려진 검 이 울었다. 아직 오러는 끌어올리 지 못한 채 세레논과 라이너를 돌 아보았다.

"빨리 가요, 지금! 레오! 공격해 서 시선을 끌어!"

" 알았어!"

내가 막을 해제하고 바실리스크 가 빠르게 우리를 돌아봄과 동시 에, 사납게 빛나는 레오의 오러가 바실리스크를 덮쳤다. 바실리스크 의 이지 없는 붉은 눈이 시리게 반짝거렸다. 바실리스크가 레오에 게 시선을 빼앗긴 틈을 타, 나는 주춤거리는 세레논과 라이너를 향 해 버럭 소리 질렀다.

"가! 어서!"

그제야 그들이 발걸음을 떼었다. 경계가 있는 쪽으로 달리는 그들

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 보았다.

그랬기에,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 는 라이너를 모를 수 없었다.

'카슈미르, 제발...... 다치지 말 아 주십시오.'

사라지는 인영 사이로 짧은 전 음이 내 머릿속을 울린다. 볼 것 도 없이 라이너의 전음이었다. 간 절한 그 울림에 한숨을 쉬곤, 검 을 꽉 잡았다.

콰아아앙!

온몸에서 폭발하듯 솟구치는 마 나. 그리고 검을 덮는 난폭한 검 은 흐름. 세레논이 간 이상 주저 할 이유는 없다. 내 온몸을 달구 는 심장의 박동과 마나의 방출을 느끼며, 요요한 눈으로 바실리스 크를 바라보았다.

이젠, 검은 재앙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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