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화
"슈슈! 계획을 말해!"
날아오는 바실리스크의 머리를 빠르게 피한 레오가 크게 외쳤다. 바실리스크의 뒤쪽으로 움직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바실리스크의 몸엔 이렇다 할 만한 약한 부위가 없어! 하지만 약점은 있지!"
서걱.
초승달 모양을 그리며 날아간 검은 오러가 바실리스크의 몸통을 베었다. 베인 곳에서 검은 피가 울컥 솟구쳤다.
캬아악!
바실리스크의 거대한 몸이 뒤틀 렸다. 꽤 깊게 베인 자국은 치명 상으로 봐도 될 것 같았다.
' 하지만......•'
전전히 붙기 시작하는 상처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바실리스크의 비늘은 하라바나 의 가죽만큼 두껍지 않다. 허나 바실리스크의 회복력은 어떤 마수 보다도 뛰어났다.
'바실리스크는 불태워 죽이는 게 가장 깔끔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 해. 바실리스크가 몸부림 쳐서 주 변 나무들에 불이라도 붙으면 바 로 산불이 나니까.'
마나로 산불을 잠재우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짓을 하느 니 오러로 지지는 게 마나 효율이 훨씬 좋았다. 검은 오러로 바실리 스크의 목 부분을 베어 내며 소리 쳤다.
"바실리스크는 체력이 약해!"
체력. 그것이 이 괴물을 공략할 틈이 었다.
"체력? 이렇게 팔팔한데?"
쾅
바실리스크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한 레오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 었다. 레오를 노린 바실리스크의 머리가 땅에 박히며 거대한 구멍 을 만들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곳에 자신의 키만 한 구 멍이 뚫린 것을 확인한 레오가 섬 뜩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체력! 바실리스크를 지치 게만 만들면 쉽게 처리할 수 있 어! 바실리스크가 지치는 순간 회 복 속도는 현저히 느려지니까!"
"허...... 우선 알겠어! 그럼 이 괴물을 지치게 하려면 어떻게 해
야 하는데? 이 짓만 계속하고 있 으면 돼?"
콰뢍!
바실리스크가 거칠게 휘두른 꼬 리로 인해 주위 나무들이 무너졌 다. 바실리스크는 집요하게 레오 만을 노렸다. 레오는 그런 바실리 스크의 공격을 피하고, 나는 바실 리스크가 레오를 공격하는 틈을 타 거듭 치명상을 내는 구도.
'확실히 이렇게 하면 끝낼 수는 있지. 하지만• ...•'
딱딱하게 굳은 눈으로 레오를 살폈다. 레오가 미끼가 돼 준 덕 분에 바실리스크를 공격하는 것이 쉬웠지만, 레오는 바실리스크의 집중 공격을 받으며 점점 더 다치 고 있었다.
'이러다간 레오가 크게 다쳐.'
게다가 옆에 있는 레오 때문에 광역기를 사용하기도 곤란했다. 레오를 잠시 피하게 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바실리스크는 레오만 따라다녔기에, 아예 주위를 뒤덮
는 공격인 흑풍이라도 사용하면 반드시 레오도 다쳤다.
'차라리 나 혼자 남는 게 제일 좋았을 텐데...... 하지만 순간이동 마석이 두 개밖에 없었으니까. 세 레논은 반드시 가야 했으니, 라이 너와 레오 중 하나는 남아야 했 어. 그렇다면 차라리 레오를 이용 해서라도 바실리스크를 처치하는 게 나으니까.'
분명 이것이 최선이었음에도 계 속 죄책감이 들었다. 흔들리는 마 음을 애써 정리하며 다시 마나를
다잡고 생각에 집중했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진행하면 돼. 그럼 레오도 크게 다치지 않 을 거야.'
이를 악물고 심호흡했다. 바실리 스크의 공격을 피하느라 고군분투 하고 있는 레오에게 외쳤다.
"잘 들어, 레오! 우린 이제부터 바실리스크를 지치게 할 거야!"
마나 회로가 타오를 듯 빠르게 돌아간다. 소드 마스터의 막강한
마나를 받아낸 검날이 시리게 울 린다. 마나를 더욱 활발하게 순환 시키는 검에 박힌 붉은 마석. 마 석이 핏빛으로 번뜩이며 검은 오 러를 폭발시켰다.
스읍.
숨을 크게 들이킨다. 마수의 역 겨운 악취와 숲의 상쾌한 내음이 라는 모순적인 두 향이 후각을 자 극했다. 검을 꽉 잡고, 범위는 좁 으나 파괴력은 꾹꾹 담은 오러를 바실리스크의 얼굴로 날렸다.
캬아아아악!
바실리스크가 이제껏 지른 비명 들보다 훨씬 시끄러운 비명을 질 렀다. 분수처럼 터져 나온 검은 피가 웅덩이를 만들 듯 땅 위로 고이고, 바실리스크의 붉은 눈동 자에서 눈물과도 같은 피가 터져 나왔다. 눈을 정면으로 공격당한 바실리스크가 미친 듯이 몸부림쳤 다.
"저쪽으로 전속력으로 달려! 지 금!"
북서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 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던 레오는 입술을 꾹 물더니 물음 없 이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해하지 못한 작전을 군 말 없이 따를 만큼 나를 믿고 있 었다.
레오가 달린다. 달리는 그의 주 위로 마나가 솟구치며 속도를 가 속시 켰다.
키아아아악!
그가 공터를 벗어난 지 얼마 지 나지 않아, 눈의 상처를 회복한 바실리스크가 분노 어린 비명을 지르며 거대한 몸을 놀라울 만치 빠른 속도로 움직여 레오를 쫓기 시작했다.
턱.
그리고 나는, 그런 바실리스크의 몸에 올라탔다.
'으 ,
역겨운 흑마법의 기운과 악취가 나를 괴롭혔다. 거대한 뱀의 몸에 서 스물스물 퍼져 나오는 독의 기 운은 내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바실리스크의 비늘에 닿은 구두 의 밑창이 천천히 녹기 시작했다. 클라키의 가죽으로 만든 구두였기 에 아직까지 신발의 형태를 갖추 고 있는 것이지, 평범한 구두였다 면 벌써 녹아 사라졌을 게 뻔했 다.
내쉬는 숨과 잿빛 비늘, 흘리는 침과 피까지 모두 맹독이 서려 있
다. 바실리스크는 온몸이 독 덩어 리였다.
'성기사와 사제들을 데려오라고 한 건 그 때문이지.'
목숨이 끊기는 순간부터 바실리 스크의 시체는 공기를 통해 체내 의 모든 독을 배출했다. 흑마법에 걸린 마수의 시체는 한 시간 안에 부식되어 사라지지만, 그 한 시간 동안 독으로 인해 숲 전체가 썩어 들어갈지도 모른다.
'신성력이 있는 이들은 독에 대
한 내성이 강해. 신성력은 마수의 독을 두 번째로 빨리 해독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고.'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마수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것은 요정들 의 치유력이었다. 허나 지금 당장 요정들을 부를 순 없었으니, 신전 의 인력들이 힘을 써줘야 했다-
마나 회로가 퍼져 오는 독을 해 독하기 위해 더욱 빠르게 돌아가 는 것을 느끼며 잠시 숨을 참았 다. 빠르게 움직이는 바실리스크 의 몸 위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선
집중해야 했다. 내가 몸 위에 탔 음을 모를 리 없음에도, 바실리스 크는 닭 쫓는 개처럼 레오만 쫓았 다.
' 레오••••••
거대한 바실리스크의 몸뚱이 사 이로 공격을 피하며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레오가 보였다. 그의 몸 은 벌써 오래 사용한 가죽처럼 너 덜너덜했다. 어쩐지 내가 더 아픈 것 같아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이젠 도와줘야지.'
검은 오러로 물든 검을 치켜 올 렸다.
푹
그리고 거대한 뱀의 몸통을 향 해 힘껏 찔렀다.
키야아아악!
바실리스크가 잠시 움직임을 멈 췄다. 검 손잡이를 잡은 손 너머 로 느껴지는 바실리스크의 몸부림 은 작살에 꿰뚫린 물고기의 필사
적인 파닥거림을 방불케 했다.
"••••••슈슈?"
내 오러의 기운을 느꼈는지, 필 사적으로 달리던 레오가 내 쪽으 로 몸을 돌렸다. 어둡던 연둣빛 눈동자가 해를 맞이한 듯 반짝였 다. 그는 나를 향해 반가운 듯 웃 었지만, 또 바실리스크가 레오를 공격할까 다급했던 나는 마주 읏 는 대신 크게 외쳤다.
"뭐 하는 거야! 다시 움직이기 전에 빨리 도망가! 뒤돌아보지
마!"
"••••••뭐?"
순간 레오의 표정이 빠르게 굳 었다. 연둣빛 눈동자가 세차게 혼 들렸다. 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죽 은 눈. 순식간에 심각할 정도로 창백해진 낯이 패닉으로 물들었 다.
'왜 저러지?'
과한 레오의 반응에 나도 덩달 아 당황해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굳어 버린 레오는 발을 움직여 보
려는 듯 애써 꿈틀거렸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바실리스크가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아 불안해하면서도 상태가 이상해진 레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저건 꾸짖음을 들 어서 속상한 수준의 표정이 아니 었다.
'분명 저건......
공포. 그것도 일생일대의 공포와 마주한 사람의 얼굴.
" 유모••••••
레오는 트라우마를 자극받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
머리가 지끈거린다. 레오의 무언 가를 잘못 건드린 것 같은데, 그 게 무엇인지 쉬이 떠오르질 않았 다. 되는 대로 인상을 찌푸리다, 꿰뚫렸던 바실리스크가 다시 꿈틀 거리기 시작함에 다급하게 외쳤 다.
"레오, 빨리! 빨리 가!"
지금은 달래고 자시고 할 시간 이 없었다. 비명과도 같은 내 외 침에 레오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 려 다시 달리기 시작했지만, 그의 몸이 덜덜 떨리며 속도가 느려졌 다는 것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젠장, 뭘 잘못 건드렸던 거지?'
어쩐지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 지 떠오르질 않아 답답했다. 나는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면서도 바
실리스크의 움직임을 느리게 하기 위해 검을 마구 휘둘렀다.
키아아악!
바실리스크의 끊임없는 비명이 숲을 가득 채웠다.
'징그럽군.'
뺨에 튄 검은 피를 거칠게 닦아 내며 역겨움을 담아 바실리스크의 몸 위로 침을 뱉었다. 라이너에게 빌려 입은 하얀 셔츠에도 온통 검 은 피가 튀어 차라리 검은 셔츠
같았다. 내 검에 몇 번이고 꿰뚫 리고도 금방 회복하는 바실리스크 의 몸은 대단하다 못해 징그러웠 다.
용병 미르로서 처음으로 바실리 스크를 상대했을 때, 바실리스크 를 죽이는 요령을 몰라 거의 사흘 간 사투를 벌였던 걸 떠올리며 잠 시 얼굴을 구겼다.
'그래도 확실히 움직이는 속도 도, 회복 속도도 느려졌어.'
뱀들의 왕 바실리스크라고 해도
소드 마스터의 맹공에 멀쩡할 리 는 없었다. 죽어 가는 지렁이 꼴 을 한 바실리스크를 보다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문제는 레오도 지쳤다는 거지.'
레오의 속도 또한 처음보다 현 저히 느려졌다. 게다가 내게 도망 치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 창백해 진 그의 낯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 지 않았다.
'이제 슬슬 끝을 내야지.'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곳에서, 바실리스크를 단번에 끝 낼 생각이었다. 나는 바실리스크 의 몸에서 뛰어내린 뒤 필사적인 속도를 내어 바실리스크를 따라잡 고 레오 옆까지 다다랐다.
"레오!"
"슈, TTTT-
답지 않게 말을 더듬은 레오의 연녹빛 눈동자가 나를 돌아본다. 동공이 확장된 멍한 눈이 그의 심 리 상태가 심각함을 표했다.
'뭘 잘못했던 거지?'
원인으로 예상되는 건 도망치라 고 했던 말뿐인데, 거기서 무엇이 그를 자극했는지 통 알 수 없었 다. 아니, 어쩐지 알 것도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 느낌이다. 그래 서 더 답답했다.
'우선 바실리스크부터 처치해야 해.'
다른 걸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마음을 굳게 먹은 채 레오에게 손
을 내밀었다.
"레오, 잡아!"
느려진 그를 잡아끌기 위함이었 다. 흔들리는 눈으로 내 손을 바 라본 레오는 이내 굳게 내 손을 잡았다.
검은 피로 얼룩진 손 너머로 닿 아 오는 따뜻한 온기. 이 대재앙 앞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 끼게 해 주는 피부의 촉감. 잠시 오간 시선에서 나를 향한 신뢰와 애정이 느껴진다.
으스러져라 내 손을 붙드는 커 다란 손을 마주 잡으며, 나는 뒤 도 돌아보지 않은 채 가까워진 바 실리스크를 향해 들고 있던 검을 내던졌다.
키에에에에엑!
보지도 않고 뒤로 던진 검이 명 중했다는 건 들려오는 소리만으로 도 알 수 있었다. 솟구친 검은 피 가 나와 레오를 덮었다. 눈가로 떨어진 핏방울만 급하게 닦은 채, 느려진 바실리스크를 뒤로하고 레
오를 이끌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슈슈!"
"왜!"
바실리스크와의 거리가 꽤 벌어 졌을까, 레오가 나를 불렀다. 숲 의 나무들을 피하며 정신없이 대 답하니, 그가 미심쩍다는 듯 물었 다.
"그런데 왜 하필 이쪽으로 뛰라 고 한 거야?"
어느새 앞으로 밝은 빛이 보인 다. 나무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태양이 저 너머를 비추고 있었다.
나와 라이너는 어제 하라바나를 상대한 뒤 꽤 깊은 숲속 동굴에서 휴식하고 오늘 아침 이곳까지 나 왔다. 오는 길에 어느 정도 숲의 지형을 확인했다는 소리였다. 나 는 레오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그야, 이 끝은 낭떠러지니까!"
그리고 곧 펼쳐진, 까마득한 절 벽
"......뭐?"
레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