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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90화 (90/254)

90 화

숲의 끝을 알리는 절벽은 까마 득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쭈뼛할 정도의 높이.

'이 정도는 뭐......

나나 레오같이 마나를 사용하는 자들에겐 가뿐한 높이였다.

"자, 잠깐, 잠깐! 잠깐 슈슈! 지 금 무슨!"

거침없이 절벽으로 돌진하는데, 창백해진 레오가 내 손을 꽉 잡았 다.

'......얘 왜 이래?'

소드 익스퍼트가 이 높이에서 뛰어내리지 못할 리 없었다. 그의 기이한 반응에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가 절벽 아래로 내려가면 바실리스크는 너를 쫓아 뛰어내리 겠지. 그때 절벽에서 끝내려고."

"그, 그럼, 여기서 뛰어내리겠다 는 거야?"

레오의 목소리가 꽤 다급했다. 맞잡은 그의 손이 바들바들 떨려 오는 것까지 느껴졌다. 의아해하 면서도 나는 절벽으로 향하는 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이지. 못 할 건 없잖아?"

곧이어 펼쳐지는 나무들의 끝. 나무들에 가려졌던 태양이 아찔한 절벽을 비춘다.

나는 끝조차 희미한 절벽 그 아 래로 몸을 던졌다.

툭.

그리고 동시에 내 손에서 떠나 가는 온기. 순간 무슨 일이 일어 난 것인지 자각하지 못했다.

' 어?'

까마득한 높이를 떨어지는 와중 에도 몸을 돌려 뒤를 확인했다.

그곳엔, 내 손을 놓은 채 공포에

질린 레오가 있었다.

' 아.'

그리고 섬광처럼 떠오르는 소설 속 어느 장면. 나는 떨어지며 빠 르게 마나로 몸을 보호하던 와중,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을 떠올 렸다.

'알렉산드로는 도망치는 것과 높 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것은 한 왕국의 힘없는 왕자

로 태어나 소중한 이의 목숨을 제 물로 살아남아야 했던 소년의 트 라우마였다.

'젠장! 어떻게 이걸 잊고 있었 지!?'

이걸 이제야 떠올린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발 위로 마나를 씌워 떨어지는 속도를 늦 추며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아무래도, 원작에 대한 기억은 뇌가 억지로 지우는 것 같아.'

원작의 분기점과도 같은 중요한 부분들은 모두 적어서 잘 보관 중 이었으나, 어쩐지 암기를 해 두어 도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어버리 고 말았다. 저택에 돌아가면 다시 암기해야겠다고 결심하며, 몸을 살짝 웅크렸다.

콰콰콰쾅!

수직 낙하하던 몸이 착지했다. 땅이 시원하게 파이며 발이 땅에 닿았다. 마나의 돌풍으로 흙먼지 를 거칠게 걷어 내곤 까마득한 절

벽 위를 휙 올려다보았다.

" 레오!"

내 쩌렁쩌렁한 부름에 그의 몸 이 움찔했다. 공포에 질린 레오가 가까운 나무에 등을 기대며 고개 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 못 해. 난 못 한다고!"

"젠장! 그건 알겠는데 해야 해!"

"못 한다고!"

"빌어먹을, 빨리......

"무섭단 말이야!"

거의 부르짖음에 가까운 외침. 그 목소리에서 공포가 절절히 드 러나서, 나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 다.

레오, 그러니까 알렉산드로 레오 네 아타라는, 왕위를 잇는 자질로 태어난 순서를 가장 중시하는 아 타라 왕국의 후계 서열 7위로 태 어난 막내 왕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천민 출신의 후 궁이었다. 그가 갓난아기였을 적 엔 왕의 사랑을 받은 어머니의 가 호가 있어 여차저차 살아남았지

만, 그마저도 5살이 되던 해에 어 머니가 독살당하며 6남매의 왕위 다툼으로 살얼음판인 왕궁에 방패 도 없이 덩그러니 남게 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침실로 암살 자가 들어왔다고 했지.'

알렉산드로의 다른 형제들은 안 그래도 개판인 왕위 다툼 판에 하 나가 더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 기에, 그의 목숨은 늘 위태로웠 다. 왕위를 노리긴커녕,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암살자들을 막아 내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

'왕자님. 반드시 제 말을 따르셔 야 합니다. 징징거리지 마세요. 살아남고 싶다면 강해지셔야 합니 다. 그런 태도로는 이 피바람 부 는 왕위 다툼의 희생양이 될 뿐입 니다.'

그런 알렉산드로를 도운 유일한 사람은, 바로 그의 유모였던 레이 샤였다.

레이샤는 상당히 특별한 유모였 다. 그녀는 상당한 수준의 마법사 로, 한때 제국의 마탑조차 탐냈던

천재였으니까.

'레이. 내 아이를 부탁해.'

그런 레이샤가 알렉산드로의 유 모가 되었던 건, 다름 아닌 알렉 산드로 어머니의 부탁 때문이었 다.

어째서 레이샤가 그 부탁을 들 어 주었던 건지. 이에 대해선 자 세히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소설에서 중요한 건 유망하던 여자 마법사가 어째서 한낱 7왕

자의 유모가 됐느냐가 아니라 그 녀가 어떻게 남주인공의 성장에 이바지했느냐니까 .

현명하고 강한 레이샤는 덩그러 니 남겨진 레오를 암살의 위험에 서 지켜 주었다. 그가 유년기에 왕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모두 레이샤 덕분이라고 해도 과 언이 아니었다.

'레, 레이! 내, 내 방에 시체 가......!'

'소란 피우지 마시죠. 어젯밤 왕 자님 방에 침입했기에 제가 죽인

겁니다.'

'뭐? 그, 그래도 죽이는 건

......

'적당히 하세요, 왕자님.'

'아직도 깨닫지 못하셨습니까? 이곳에선 죽이지 않으면 죽습니 다. 이 정도 각오도 없다면 빨리 말하세요. 암살자 동정하다가 죽 으시든지. 나도 살기 싫다는 애 데리고 이 짓 하고 싶지 않습니 다.'

'나, 나는

'이 전쟁의 희생양으로 죽거나, 다 죽이고 왕이 되거나. 둘 중 하

나입니다.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

레이샤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레오를 거칠게 키웠다. 소설 속 그녀의 말투를 보면 저게 열 살배 기 애를 다루는 게 맞나 싶을 정 도로 직접적이고 날카로웠다.

'어쩐지 애가 발톱 세운 사자 새 끼 같더니...... 그렇게 자랐던 거 면 이해가 되지.'

레이샤가 레오를 다루는 방법을 떠올려 보면 레오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보였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냉혹한 레이샤의 가르침 과 비호 아래, 알렉산드로는 살아 남는 방법과 왕의 덕목을 배웠다.

그리고 그의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었던 사건은, 그가 12살 소년이 었을 때 일어났다.

그날은 늘 삼엄하던 레이샤의 경계가 조금 풀어진 날이었다. 그 녀가 평소보다 조금 여유로웠고, 조금 더 누그러졌을 때. 레이샤가 처음으로, 알렉산드로를 향해 웃 어 주었던 날.

그날 알렉산드로의 악몽이 시작 됐다.

누군가 선물한 독이 섞인 음식 을 먹은 레이샤가 몸이 약해진 틈 을 타 암살자들이 알렉산드로의 궁으로 침입했다. 레이샤는 독으 로 몸을 가누기 힘들었고, 알렉산 드로는 그런 레이샤를 지킬 힘이 없었다.

'빌어 처먹을! 도망치세요! 당장! 뒤돌아보지 마요! 정원에 텔레포 트 마법진이 있으니 창문으로 나

가세요!'

알렉산드로는 도망쳐야 했다. 그 에겐 힘이 없었으니까. 독화살을 어깨에 맞고, 온몸이 상처투성이 가 되어도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반드시 강해지셔야 합니다. 그 래서 복수해 주셔야 합니다! 전 한낱 왕자의 유모로 남고 싶지 않 습니다! 왕이 돼 주십시오. 왕이 돼서, 제가 왕의 기틀을 닦은 신 하로 남게 해 주십시오!'

레이샤는 강력한 마법사인 동시

에 야망가였다.

알렉산드로슨 떨어졌다. 좁은 성 의 창문을 넘어, 정원사 하나 없 어 삭막하기 짝이 없는 정원으로. 그의 몸이 땅에 닿기 직전,

'어! 여기 사람이......『

그는 레이샤의 마지막 마법으로 무려 왕국에서 제국까지 텔레포트 를 해 아리아와 마주한다. 이것이 원작 속 알렉산드로의 과거였다.

'뭐야, 이 넝마 덩어리는.

그것이 뒤틀리며 아리아가 아닌 나를 만나긴 했지만, 하여간 그의 왕자로서 과거는 변한 것이 없었 다.

알렉산드로슨 도망치는 것과 높 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 했다.

'젠장!'

내 칼에 정통으로 찔리고 잠시

멈춰 있던 바실리스크가 다시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를 악 물며 패닉 상태로 굳어 버린 절벽 위에 레오를 올려다보았다.

'칼 칼이 없어!'

바실리스크에게 칼을 찔러 넣은 채로 도망쳤기에, 내 손엔 칼이 없었다. 잠시 레오에게 네 칼이라 도 던져 달라고 할까 했으나, 여 기서 절벽 위로 오러를 날리면 레 오도 다칠 게 뻔했기에 관두었다.

'그렇다고 내가 저 위로 다시 올

라가기엔 너무 늦었어!'

절벽의 높이는 말 그대로 까마 득하다. 내가 다시 올라가는 것보 다 바실리스크가 레오를 덮치는 것이 빠를 것 같았다.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다.

레오가 이 절벽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질책으론 안 돼.'

현재의 레오는 공포에 질린 열

살배기 아이로 봐야 했다. 겁에 질린 아이를 몰아붙여 봤자 상황 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입술을 짓 씹다, 애써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 다.

"레오, 레오! 착하지. 여기 봐!"

내 부름에 떨리던 그의 몸이 움 찔한다. 가까스로 희미하게 눈을 뜬 채 절벽을 내려다보던 레오가 다시금 눈을 질끈 감았다.

"모, 못 보겠어......•"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애처로울 정도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바실 리스크의 기척에 입술을 앙 물다, 어쩔 줄 모르는 그를 향해 최대한 상냥하게 말했다.

"레오. 아가, 괜찮아. 낭떠러지 말고 나를 봐!"

그가 흠칫했다. 레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처럼 쏟아지는 게 보 였다.

상처라는 것이 그랬다. 아무리 해묵은 상처라도 건드리면 건드리

는 대로 아팠고, 자국이 남았다. 특히 상실의 상처는 잊을 만하면 울컥 붉은 피를 뱉는 낙인과도 같 아서, 끝끝내 소드 마스터 경지까 지 다다른 나조차도 가끔은 고통 스러웠다.

'레오에게 레이샤는 어떤 의미였 을까. 내게 있어...... 카라쇼와 같 은 의미였을까.'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여자의 웃는 얼굴.

내 스승의 얼굴.

레오에게 있어 레이샤가 내게 카라쇼와 같다면, 그의 공포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극복했듯이, 너도 극복했 으면 좋겠어.'

아무리 죽은 자의 흔적이 짙고 깊어도 산 자는 살아가야 한다. 나 또한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다 괜찮다는 뜻을 담아, 그를 향 해 달래듯 웃었다.

"나를 봐, 레오. 아래를 본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를 본다고 생각 해!"

어찌 보면 우습기까지 한 가벼 운 생각의 전환이었다. 허나 친구 를 마주한다는 것과 낭떠러지를 마주한다는 것은 너무도 다른 의 미였기에, 나는 그를 달래듯 속삭 였다.

"레오. 나를 봐 줘."

질끈 감겼던 그의 눈이 천천히

열린다. 희미하게 눈꺼풀이 들린 예쁜 눈 아래로 반짝이는 연둣빛 눈동자가 비쳤다. 레오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고, 나는 두려움으로 얼어붙은 동공과 마주했다.

나는 그 두려움을 향해 부드럽 게 웃어 주었다. 과거의 기억은 괜찮아질 것이고, 지금의 우리 또 한 괜찮다고.

"괜찮아. 내가 있어. 네가 발걸 음을 떼는 그 순간에도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반드시 널 잡아 줄게. 걱정하지 말고 내게로 와! 넌 떨

어지는 게 아니라 내게로 오는 거 야."

질려 있던 형광 연둣빛 눈동자 위로 멍한 기색이 깃든다. 덜덜 떨리던 그의 몸이 조금은 진정되 는 것을 확인하고, 그를 향해 방 긋 웃었다.

"이리 와, 레오. 내가 안아 줄 게."

이것은 내가 그에게 하는 위로. 추락하는 널 반드시 잡아 주겠다 는 결단이었고, 두려움을 넘어서

면 꼭 안아 주겠다는 응원이었다.

"......아."

목울대를 울렁인 레오가 옅게 숨을 뱉었다. 멍하게 잦아든 눈동 자가 나를 집요하게 머금었다. 여 전히 공포에 질린 얼굴. 여전히 식은땀이 흐르는 몸. 그는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다.

"......그거, 정말이지."

허나 그럼에도 레오는 낭떠러지 를 향해 걸음을 떼고 있었다.

신을 바라보는 성도처럼 맹목적 인 두 눈을 직시하며 받아낸다. 나는 누군가의 구원이 되기에 부 족한 사람이지만, 수렁을 벗어나 고자 하는 이를 돕는 것 정도는 여러 번 해 본 경험이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그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어."

결심이 굳은 표정을 지은 레오 가 발걸음을 뗀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발걸음이 떨려 와도 그는 계속 걸었다.

그리고 레오의 발이 허공을 딛 는 그 순간.

카아아아악!

숲을 뚫고 나온 바실리스크가 소름 끼치게 울부짖었다. 나는 마 나를 최대로 발동해 땅을 박차고 올랐다.

탐욕스럽게 벌어지는 바실리스 크의 아가리. 벌어지는 그 아가리

를 피해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는 레오. 떨어지는 레오를 잡으려 있 는 힘껏 박차 오른 나. 그 모든 것이 찰나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 다.

나는 낭떠러지 한가운데에서 떨 어지는 레오의 몸을 꽉 안아 들었 다. 그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마주 안았다.

스릉.

그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검이 내 손에 뽑혔다. 한 팔로 눈을 질

끈 감은 레오의 몸을 안고, 다른 손으로 검을 쥔 나는 씨익 웃었

"눈 떠, 레오."

허공에 결집되는 거친 마나의 기운. 금방 빛 한 점 없는 오러의 구가 완성되었다. 아득한 오러가 응축된 동그란 구 앞에 검날을 세 우며, 레오에게 속삭였다.

"네 친구가 얼마나 강한지 봐야 지."

검은 구를 향해 유려하고 부드 럽게 검을 그었다.

그리고 세상이 암흑으로 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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