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91화 (91/254)

91 화

검은 구가 터져 나가는 찰나, 세 상이 진공 상태가 된 것 같았다. 숲 안 마나의 흐름이 한곳으로 모 여드는 것 같은 감각.

검 끝에서 나간 오러가, 검은 구 를 반으로 갈랐다.

콰쾅! 콰콰쾅!

귀를 마비시킬 듯 터져 나온 굉

음이 숲을 덮었다. 절벽이 뭉텅이 로 떨어져 나가고, 주위 나무들은 잡초 뭉그러지듯 바스러졌다.

키에에엑!

내 공격을 정통으로

리스크는 온몸이 검게

무너지는 절벽과 함께

렸다.

그리고 떨어지는 건

도 마찬가지였다.

맞은 바실

지져진 채

떨어져 내

나와 레오

세찬 바람이 양 귀를 스쳤다. 어

떤 안전장치도 달지 않은 맨몸이 중력을 따라 속절없이 추락하자 등골에 오싹하고 생리적인 소름이 돋았다.

"하, 슈, 슈슈."

새하얗게 질려 영혼이 없는 것 같은 얼굴. 그가 내 어깨를 꽉 잡 은 채 혼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동공이 확장된 채 빛이 들지 않는 두 눈은, 내게 구 원을 원하는 것만 같았다.

"괜찮아. 괜찮아, 레오.

나는 그런 그를 꽉 안은 채, 발 위로 마나를 덧씨웠다.

마나가 공기를 긁으며 속도를 서서히 늦추었다. 나와 그 사이를 덮은 내 방대한 마나가 중력을 거 부했다. 나는 점점 더 속도를 늦 추며 떨리는 레오의 몸을 꼭 안아 주었다. 다 괜찮다는 뜻을 담아. 흔들리는 눈동자와 계속 마주 보 았다. 그가 떨어지는 동안 주변 광경을 보지 않도록.

속도는 점점 잦아들어, 발이 땅

에 닿을 때쯤 되었을 땐 꽃잎이 내려앉는 속도와 진배없을 정도였

발이 땅에 닿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곤, 여전히 나만을 바라 보고 있는 레오의 어깨를 턱 잡았

"레오. 수고했어."

어깨를 살짝 밀어 맞닿아 있던 몸의 거리를 벌렸다. 그가 저항

없이 떨어졌다.

나는 새까맣게 탄 채 꿈틀거리 고 있는 바실리스크를 향해 다가 갔다.

"이제 쉬어. 끝은 내가 낼 테니 까."

바실리스크는 레오와의 추격전 으로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상처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숨통만 끊으면 되는 일이 었다.

다시금 검 위로 검은 오러를 덮 었다. 조금 전 광역기는 내 속의 모든 오러를 긁어모으듯 뭉쳐 한 번에 터트려 버리는 기술이었기에 나도 지쳐 있었으나, 영혼이 탈곡 된 것 같은 레오보다야 나았다.

푸슉.

그에에에엑.......

바실리스크의 몸에 깊숙이 박혀 있던 검을 뽑아냈다. 바실리스크 가 힘없이 신음하며 꿈틀거렸다.

바실리스크는 더는 도망치지 못했

'집에 돌아가는 대로 검을 씻어 야겠군.'

검 전체가 점액질의 검은 피로 덮여 끈적거렸다. 지독한 악취에 구역질이 나려는 걸 참으며, 검 위로 오러를 불어넣었다.

지이잉.

검은 오러를 머금은 검이 진동 한다. 손잡이 중심에 박힌 붉은

마나석이 번뜩거렸다. 나는 바실 리스크의 머리를 발로 꾹 누른 채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았다.

햇빛에 번뜩이는 은빛 날.

꾸에에에엑.......

머리와 몸의 이음새 부근에 검 이 처박힌 바실리스크가 힘없이 꿈틀거린다. 마수의 피와 살이 오 러로 지져질 때 나는 냄새는 언제 맡아도 끔찍했다.

이윽고, 바실리스크가 숨을 멈추

었다.

'끝났다.'

흑마법의 기운이 바스러지듯 사 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자니 온몸 의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짙게 한숨을 뱉으며 바실리스크 머리에 올렸던 발을 내렸다.

'이틀 동안 대재앙 둘을 죽이다 니

하라바나와 바실리스크, 둘 모두 재앙 중의 재앙이라 불리는 최강

의 마수들이다. 미친 듯이 마수를 잡고 다니던 용병 시절에도 이런 업적을 세운 적이 없었다. 하루 간격으로 대재앙 두 마리를 죽인 인간은 대륙 역사상 나뿐일 것 같 았다.

'우선...... 심장을 챙겨야겠군.'

서늘하게 식은 눈으로 바실리스 크의 사체를 바라보던 나는, 바실 리스크의 몸 중반쯤에 검을 꽂아 거칠게 찢어냈다. 역겨움을 참아 내고 사체 속을 긁어내다 보면 기 이한 형태의 거대한 보랏빛 살덩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는 바실리스크의 심장이었다.

애써 숨을 참으며 심장을 뽑아 냈다. 심장에서는 흑마법의 기운 이 진동했다.

흑마법은 마수가 죽은 즉시 해 체되고, 흑마법에 조종당한 마수 의 사체는 숨통이 끊긴 뒤 한 시 간 안에 산화되어 사라진다. 그래 서 누군가가 마수를 흑마법으로 조종했다는 증거를 찾는 것은 무 척 어려운 일이었다.

'흑마법의 혼적이 남는 부위는 딱 하나, 그 마수의 심장이지.'

마수의 코어와도 같은 심장엔 흑마법이 해체된 뒤에도 주술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여전히 역한 흑마법의 기운을 풍기는 바실리스 크의 심장을 주머니에 있던 자루 에 넣고, 독이 새어 나가지 않도 록 마나로 몇 번이고 밀봉한 뒤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이것은 쓸 곳이 따로 있었다.

'......힘들어.'

힘 빠진 발걸음을 터덜터덜 옮 겼다. 바실리스크에게서 흘러나온 보랏빛 독이 내 발 아래 짓밟히며 절벅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무리 나라도 하라바나를 상대 한 바로 그 다음 날 몸이 완벽하 게 멀쩡할 리는 없다. 그 상태에 서 바실리스크까지 상대했으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 큼 지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아직 쉴 순 없지.'

바실리스크에게서 lm쯤 떨어졌 을까, 나는 이미 지쳐 버린 마나 회로에 애써 시동을 걸어 마나를 끌어올렸다.

화악.

반투명한 막이 바실리스크 사체 주위를 감쌌다. 땅을 녹이며 사방 으로 퍼지려던 보랏빛 독과 독의 기류들이 막 안에 갇혔다.

'성기사와 사제들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해.'

바실리스크가 이동한 곳은 이미 독으로 황폐화되어 있다. 이 상태 에서 체내 모든 독을 배출하기 시 작한 사체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간 성기사와 사제들이 오기도 전 에 숲이 황폐화될지도 몰랐다.

무리한 마나 회로가 금방이라도 타오를 듯 과부하되어 있었지만, 나는 막을 지탱해야만 했다.

"카슈미르!"

어느새 정신을 차린 레오가 빠 르게 내게로 달려왔다. 어깨를 잡

는 그의 손길에 잠시 몸을 기대며 작게 웃었다.

"레오. ......아니."

여태껏 알고 있던 그의 이름을 부르다 정정한다• 더 기다려 주기 엔 내 참을성이 기다려 주지 않았 다.

"이제 알렉산드로 국왕 폐하라 고 불러야 할까."

알렉산드로 레안드로 레오네 드 아타라.

그것이 그의 진짜 이름이었다.

가까스로 진정한 듯싶었던 레오 의 얼굴이 다시금 하얗게 질린다. 내 어깨를 잡았던 큰 손에 힘이 빠졌다.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 복하던 그가 기이한 신음 같은 소 리를 뱉었다.

"......왜, 왜 그렇게 생각했어?"

그야 내가 원작을 알기 때문이 다. 허나 그리 대답할 순 없었으 니, 생각해 두었던 대답을 입에

담았다.

"2황자 저하가 널 폐하라고 불 렀지. 넌 아타라 왕국에서 왔고."

"그, 그건 그냥 2황자가 장난 O "

"무엇보다 네 오러의 색, 아타라 국왕의 오러와 색이 똑같잖아."

알렉산드로 아타라는 치명적인 맹독을 닮은 형광 연둣빛 오러로 유명했다.

'원작에선 흰색이었는데 왜 그렇 게 변한 걸까. 나랑 같이 지냈던

시간이 영향을 준 건가?'

원작에선 모든 걸 불태우고 남 은 순백의 재를 오러로 담아냈던 그가 이 세계에선 어째서 형광 연 둣빛을 오러로 담아낸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정곡이 찔렸는지 입술을 뻐끔거 리던 레오가 시선을 피하며 변명 했다.

"색, 색이 비슷한 것뿐이야. 그 럴 수도 있잖아."

" 레오."

나지막이 그를 부른다. 조금 슬 픔이 깃든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내게 계속 숨길 생각이니."

그래• 나는 꽤 속상했다. 내가 그에게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 는 것에. 그가 계속해서 스스로를 숨기는 것이 섭섭했다. 그 마음을 그대로 표정에 담은 채 지그시 입 술을 깨무니, 레오, 아니, 알렉산 드로의 눈동자가 혼들렸다.

"슈슈. 그러니까 나는......

"내가 네게 있어 그리 믿지 못 할 사람이야?"

섭섭한 마음에 툭 뱉으니 알렉 산드로의 얼굴이 굳었다. 잠시 헛 숨을 들이켠 그가 앓는 소리를 내 뱉는다. 알렉산드로의 손 아래에 서 연갈색 머리카락이 마구 헤집 어졌다.

"하...... 그래. 나는......

수많은 감정이 뒤엉킨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목울대를 울렁인 그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나는, 아타라의 국왕이야."

드디어 그가 직접 자신의 정체 를 밝혔다. 비밀 많은 레오가 알 렉산드로가 된 순간이었다.

'그런데 넌...... 왜 그러는 걸 까.'

무언가 대단히 잘못한 사람처럼 푹 숙인 고개. 꽉 쥔 두 손.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나면 속이 시원 할 거라 생각했건만, 그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 잘못한 기분

이었다. 고개를 돌려 버린 알렉산 드로를 지긋이 바라보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내가 모르길 바랐어?"

" 으 "

흐 •

"영원히 숨길 생각이었던 거 야?"

"그건 아니야. 나는 그냥......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마주 한 눈동자는 조금 전과 비슷한 빛 을 띠고 있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네가

최대한 늦게 알기를 바랐어."

알렉산드로는 두려워하고 있었 다.

'......이런 사람?'

이해하지 못한 나는 미간을 좁 혔다.

"무슨 소리야?"

"너도 알잖아. 현 아타라 국왕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어떻게 왕위를 찬탈했는지."

'현 아타라 국왕은...... 제국과 손을 잡음으로써 힘을 기르고 자 기 형제를 모두 죽여서 왕위에 올 랐지.'

알렉산드로의 왕좌엔 수많은 이 들의 피가 묻어 있었다. 알렉산드 로가 참혹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 었다.

"너 어려서 착한 사람이 좋다고 했잖아. 얼마 전에도 그 말 했었 고."

'••••••아. 아!'

퍼뜩 떠오른 기억에 입을 벌렸

' 야.'

' 야!'

'누나라고 불러.'

'......누나. 너, 그...... 어떤 사 람이 좋아?'

'갑자기 왜?'

'아, 그냥 대답해!'

'허, 이 부룩송아지 같은 놈이.'

' 대답하라니까!'

'참나.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

는데......

'그, 그래도 이번 기회에 한번 생각해 봐!'

'음...... 나는 아마 착한 사람이 좋을걸.'

'자신만큼이나 타인을 소중하게 여기고, 스러지는 생명들을 아끼 는 사람. 그냥 다른 사람을 함부 로 대하지 않는 사람이 좋아.'

'넌 어떤 사람이 좋아?'

'아마, 착한 사람.'

'......착한 사람?'

'그러니까 알렉산드로슨...... 자 기가 수많은 피를 흘려 왕좌를 쟁 취한 알렉산드로 국왕이라는 걸 내가 알면, 자신을 좋지 않게 볼 거라고 생각한 건가?'

이내 도달한 하나의 결론에 어 이가 바스러져 없어진 표정을 짓 고 말았다. 내가 어이없어하든 말 든, 알렉산드로슨 심각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너는 날 어린 레오로만 기억하 고 있을 테니까."

그가 나를 바라본다. 알렉산드로 의 눈동자는 지독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렇게 자라 버린 나는, 네가 싫어할까 봐......

흐려지는 말끝이 애처로웠다. 난 잠시 할 말을 잊은 채로 그를 바 라보았다.

확실히, 나는 어려서부터 착한 사람을 좋아했고, 지금까지도 나 쁜 사람과 착한 사람 중 고르라고 한다면 후자가 좋았다.

실제로 나는 레오가 알렉산드로 임을 알면서도 형제를 몰살하고 왕위에 오른 잔인한 군주가 아니 라 어려서 보았던 새침한 소년으 로 생각할 때가 많았고.

'분명 그렇지만......

어려서의 윤곽은 가지고 있으나 꽤 달라진 알렉산드로를 지긋이 올려다본다.

'그가 내게 있어 레오로 남고 싶 었던 건, 내가 아리아에게 있어

그저 슈슈 언니로 남고자 했던 것 과 비슷한 마음일까.'

공작가로 온 뒤 담담하게 내가 미르였음을 밝히긴 했지만, 사실 나는 아리아에게 카슈미르로 남고 자 하는 마음이 컸다. 사랑하는 동생에게 평범한 언니로 남고 싶 었으니까.

'언니가 미르인 줄 알면 내가 싫 어할 것 같았다고? 어이가 없네.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그야, 알잖아. 미르에 대해선 헛소문도 많고......

'허...... 그럼 이렇게 생각해 봐. 만약에 내가 살인자라고 한다면, 언니는 나를 경멸할 거야? 언니 가 알던 순진한 아리아가 아니니 까?'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 나도 그래. 언니가 검은 재앙이든, 지옥의 마왕이든, 나는 여전히 언니를 사랑해. 내가 사랑 하는 건 언니 그 자체니까.'

'누군가를 마음 깊이 아낀다는 건 그 사람의 뒷면까지도 받아들 이겠다는 거잖아.'

허나 아리아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자라 주었다. 아리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나 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나는...... 잔인한 사람이 싫어."

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휙 고 개를 든 알렉산드로의 얼굴은 물 에 빠져 죽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여기는 것도 싫고, 잔인한 것도, 난폭한 것도 싫지."

나는 알렉산드로 국왕의 성향을 좋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무 리 평생을 용병으로 살아오고, 전 쟁을 결심했어도 여태껏 살인을 해 본 적은 단 한 번뿐이었다.

나는,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다 루는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