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화
"슈슈, 나는......!"
알렉산드로가 변명하려는 것처 럼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절박하게 내게 다가오는 손길. 그의 눈동자 엔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확실했다. 그런 그를 똑바로 바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배제하고 서라도 널 친애하고 있어."
알렉산드로가 움직임을 멈췄다. 바실리스크의 검은 피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 내 시야를 살짝 가 렸으나, 그럼에도 계속해서 그를 응시했다.
'불의에 대한 증오보다 더 소중 한 사람.'
내게 있어 알렉산드로는 그랬다. 멍하게 서 있는 그를 향해 부드럽 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나......
화악.
순간 주위를 덮는 밝은 빛. 강대 한 마나가 가까이에서 요동쳤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가렸 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슈슈!"
익숙한 이들의 얼굴이 보인다.
카이사르, 라이너, 세레논, 율리
안, 엘. 신관들과 성기사들.
그들을 보자마자 긴장이 풀렸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여태껏 남은 마나를 죄다 끌어 지키고 있 던 바실리스크 사체 가까이의 방 어막을 해체했다.
'다른 사람들이 오니 가는군.'
여태껏 우리를 지켜보던 오른편 나무 위에 기이한 인기척이 멀어 지는 것을 느꼈다. 굳이 추적할 필요는 없었다. 누구인지 짐작이 가니까.
그 존재에게선 늑대의 향이 났
나는 슬슬 정신이 옅어지는 것 을 느끼며 아연한 표정의 알렉산 드로를 돌아보곤 싱긋 웃었다.
"나, 널 많이 아끼고 있어."
칼을 지팡이처럼 사용해 애써 지탱하고 있었던 몸이 중심을 잃 고 무너진다.
내 몸을 잡아채는 단단한 팔과
코끝을 찌르는 백합 향을 끝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 으음••••••
정전되었던 방에 불이 켜지듯 정신이 돌아왔다. 잠들기 전보단 몸이 한결 가벼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슈슈."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가, 내 이
름을 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나는 눈을 크 게 떴다.
"엘
하나로 낮게 묶어 늘어뜨린 하 늘빛 머리. 아침 이슬처럼 반짝이 는 은빛 눈동자.
엘리오르 라였다.
나는 조금 당황한 채 주위를 휙 휙 둘러보았다.
내가 누워 있는 곳은 천막이라 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휘황찬 란했다. 하얀색과 하늘색으로만 이루어진, 어쩐지 신성해 보이는 내부. 바닥에 깔린 카펫에 새겨진 신전 상징 문양. 무엇보다 사방에 서 은은히 풍겨오는 백합 향기. 이곳은 엘의 천막이 분명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정신을 놓기 직전 텔레포트로 도착한 엘을 보긴 했지만, 엘이 나를 자기 천막으로 데려왔으리라 곤 상상하지 못했다. 함께 도착한
카이사르가 날 맡아 줄 거라고 생 각했으니까. 머쓱하게 그를 바라 보고 있자니, 엘의 눈매가 날카로 워졌다.
"당신은 스스로 몸을 지켜야 한 다는 자각은 있어요? 지원이 오 기까지 기다렸어야지, 어떻게 두 사람이서 바실리스크를 상대할 생 각을 해요? 죽고 싶은 건가요? 내 눈앞에서 당신이 픽 쓰러지는 데 얼마나......!"
"자, 잠깐만요, 엘."
와르르 쏟아지는 잔소리에 당황
하며 그를 저지했다. 엘은 무척 화난 기색이면서도 내 저지에 말 을 멈췄다. 도르르 눈을 굴려 그 의 눈치를 보던 나는 조심스레 입 을 열었다.
"음, 그러니까...... 우선, 제가 얼마나 잤습니까......?"
"......이제 겨우 세 시간쯤 잤어 요."
한숨을 쉰 엘은 손을 들어 부스 스한 내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나는 살짝 움츠러들면서도 그의 손길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꽤
익숙한 손길이었으니까.
"더 자도 괜찮아요."
"어,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 엘의 천막에서......
"내 천막에서 잘 수 있는 사람 이 당신 말고 달리 누가 있을 것 같나요?"
가라앉은 은빛 눈동자가 나를 또렷이 담았다. 나를 꿰뚫는 것 같은 짙은 시선에 민망해져 뒷목 을 긁적였다.
'바실리스크 숨통을 끊은 이후로
세 시간이면...... 슬슬 사냥 대회 시상식이 시작할 시간이군.'
아직 몸이 지쳐 있었기에 엘의 말대로 조금 더 잘 수 있다면 좋 겠지만, 이 사냥 대회의 끝을 보 기 위해선 일어나야 했다. 이불을 살짝 걷어냈다.
"배려해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슬슬 일어나는 것이 좋을 것 같습 니다."
'아우디 자식이랑 끝을 봐야지.
아우디와 나의 내기는 사교계에 서 무척 유명했다. 지금 나가지 않는다면 아우디와의 내기에선 암 묵적으로 진 것으로 소문이 퍼질 게 뻔했다.
'대재앙을 둘이나 죽인 상황에서 겨우 동물 사냥감으로 우위를 다 툰다는 게 웃기긴 하지만.'
피식 읏음 짓고는 몸을 움직여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다 새삼 내 몸 속을 맴돌던 바실리스크의 독이 깔끔하게 사라졌다는 것을 느끼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
다.
"중독되어 있던 슈슈의 몸은 제 신성력으로 치료했어요."
내 의문을 느낀 건지, 엘이 묻기 도 전에 대답했다. 가뿐한 어깨를 휘휘 돌려보다 그를 보곤 눈을 동 그랗게 떴다.
'어쩐지 독이 완벽하게 해독되었 다 했더니......
바실리스크의 독은 일반인은 5 분만 노출되어 있어도 즉사하는
맹독이었다. 소드 마스터인 나도 자연 회복으로 완전히 해독하려면 3일 이상이 걸렸다. 교황인 엘 정 도는 되어야 단번에 독을 해독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회복에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 다."
작게 웃곤 정중히 인사했다. 나 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던 엘이 짙게 한숨을 쉬었다.
"......바실리스크 독에 노출된 숲은 내가 필두로 나서서 정화시
켰어요. 완벽하게 정화시키려면 며칠 더 걸릴 것 같지만, 무슨 영 문인지 바실리스크의 시체가 산화 되어 사라져 버려서 독이 더 퍼지 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당 신과 함께 있었던 아타라 사절단 의 남자."
은빛 눈동자가 나를 지그시 응 시했다.
"......그 사람 정체, 알고 있나 요?"
'레오가 알렉산드로인 걸 아느냐
고 묻고 있는 거겠지.'
어떻게 대답해야 잠시 고민하다, 그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엘에게 숨길 이유는 없었으니까. 옅은 숨을 뱉은 엘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황제나 공작을 비롯한 주요 인 물들은 이미 그의 정체를 알고 있 지만, 대외적으로 밝혀지는 건 곤 란해요. 아무리 동맹국이라고 해 도 한 나라의 국왕이 정체를 숨기 고 제국을 방문했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퍼져도 좋은 소문은 아닐
테니까."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기에 꾸준 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내 안 색을 살핀 그가 조심스레 말을 이 었다.
"당신과 그 작자가 바실리스크 를 죽인 일을 묻지는 못해요. 이 미 사냥 대회에 참가한 온 귀족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거든요. 이 일 에 대한 전말을 묻는 이들로 온통 시끄러운데...... 사건의 전말을 솔 직히 밝히면 그 작자에게로 시선 이 몰려 버릴 거예요. 그럼 누군
가 그 작자가 국왕임을 눈치채 버 릴지도 모르죠."
* 이■하' '
요컨대, 제국의 주요 인물들은 알렉산드로에게로 귀족들의 시선 이 몰리는 것을 꺼리고 있다는 것 이다. 그들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 되는 바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황가 와 신전, 공작가와 두 후작가, 그 리고 아타라 사절단 사이에 회의 가 있었어요. 이 일을 어떻게 잠
재울 건지. 우선 나와 크리시스 공작, 황태자와 아인하르트 소후 작, 그리고 그 국왕 작자까지 나 선 덕분에 사건 현장에 있었던 당 신을 심문하는 절차는 생략하기로 했어요. 죄 지은 일을 심문하는 게 아니긴 해도, 알다시피 제국의 심문은 무척 고된 일이라서."
'와,그걸...... 생략할 수가 있는 건가......?'
이렇게 큰 사건의 당사자인 나 를 심문조차 하지 않는다는 건 내 편의를 봐 줘도 지나치게 봐 준다
는 뜻이었다. 새삼 내가 친하게 지내고 있는 이들이 정말 대단한 이들이라는 생각을 하며 입술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당신이 그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입단속하기 엔...... 내가 온 귀족들 앞에서 독 에 중독된 당신을 안고 내 막사로 데려온 참이라......
'허......
엘은 내가 쓰러지는 걸 보고 지 나치게 놀란 모양이었다. 조금 식
은 눈으로 엘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당신이 그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걸 이미 온 귀족이 알아 버렸어요."
'집중을...... 받길 바라긴 했는 데.'
슬슬 사교계에서 검사로 이미지 가 굳어야 하는 시기다. 허나 이 렇게까지 거대한 사건의 장본인이 되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나는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
지 알 수 없어 입꼬리를 뒤틀었
'현재까지 엘의 설명을 조합하 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 하다. 느리게 턱을 쓸어내리곤 엘 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건의 장본인은 저와 레오, 아 니, 국왕 폐하, 이렇게 두 사람이 지만, 국왕 폐하는 신분을 위장하 고 있는 고로 이번 사건의 연루되 었다는 사실을 밝히기 힘들다. 그
러니, 이미 사건에 연루됐다는 것 이 밝혀진 나를 이 사건의 유일한 당사자인 것으로 공식적으로 발표 하려 한다."
"엘이 말하고 싶은 게 이거 맞 습니까?"
엘이 붉은 입술을 짓씹었다. 죄 악감이 가득 들어찬 표정을 지은 그가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하자는 황제의 의 견이 너무 강경했어요."
그러니까, 윗선에선 사냥 대회가 벌어지는 숲속에서 거대 마수가 나타난 이 사건을 나를 희생양으 로 일단락시키겠다는 소리였다.
심문을 하지 않는다는 건 이 사 건을 공식적인 안건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다. 물론 마수가 들 어오게 된 경로는 추적하겠지만, 나를 의심하진 않겠다는 뜻.
허나 공식적으로 내가 사건의 당사자임을 공표하게 되면, 나는 비공식적인 소문들을 피할 수 없
었다.
'거대 마수를 혼자서 쓰러트린 기이한 공녀.'
나는 그 타이틀을 걸고 사교계 귀족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 가게 될 것이다. 잠시 숨을 들이 마시다 엄지로 입술을 매만졌다.
'......완전 좋은데?'
치솟으려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 시켰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예상치도 못한 돈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이제 슬슬 이름을 알려야 할 때 인데...... 알아서 내 명성을 날려 준다고 하면 나야 고맙지.'
갑작스럽게 출몰한 거대 마수를 해치운 의문의 공녀. 아주 좋은 타이틀이다. 같이 처치했으면서 공을 독식하는 것 같아 알렉산드 로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하여간 이번 사건으로 인한 소문들은 내 게 커다란 이득이 될 것 같았다.
"......미안해요, 정말."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 시키고 있을 때 들려오는 가라앉 은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다는 말에 어리둥절해져서 고개를 기울였다.
"엘이 뭐가 미안하십니까."
"슈슈, 미르인 걸 숨기고 있잖아 요. 그런데, 내가 실수해서, 다른 사람들이 슈슈를 의심하게 되었으 니까"
아무래도 엘은 공식적인 발표를
막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소문이 이상하게 퍼지지 않도 록 잘 단속할게요. 그러니까, 용 서해 주세요. 네?"
내 손을 살며시 잡아 올린 그가 내 손에 제 뺨을 비볐다. 창백한 피부 위 장밋빛 홍조가 든 따뜻한 뺨에 손끝이 닿았다. 은빛 눈동자 가 애처롭게 반짝였다.
'강아지 같아......
보고 또 봐도 경악스러운 미모 다.
엘은 교황 선발 기준이 얼굴 아 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이였다. 심장이 뽑혀 내던져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의 얼굴 에 딱 달라붙은 시선을 애써 떼어 냈다.
"소문, 단속하실 필요 없습니 다."
"......네?"
내 단호한 말에 엘이 한 차례
늦게 반문했다. 나는 씨익 웃었
"소문은 이상하게, 또 과장되게 퍼질수록 좋습니다. '거대 마수에 게서 단신으로 살아남은 정체불명 의 괴상한 공녀' 느낌으로 말입니 다."
" 네?"
엘이 알아듣지 못한 표정으로 계속 반문했다. 나는 계속 웃었 다.
'보통의 귀족들은 이런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아주 싫어할 테지만, 나는 이런 구설수가 절실하니까.'
이름을 알려야 했다. 최대한 많 은 이들이 날 알도록. 앞으로 일 어날 일들에 반대하지 않도록.
"괜찮습니다, 엘. 저는 앞으로 생겨날 그 모든 소문들보다 대단 한 사람일 테니까."
미르.
앞으로 사람들의 입에 스치고 지나갈 과장된 소문들보다 훨씬
대단하고 무거울 이름.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모든 건 제 생각보다 더 순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엘은 그냥 앞으 로 제가 펼쳐 낼 길을 지켜보고 따라와 주시면 됩니다."
눈꼬리를 휘며 엘의 뺨을 쓸어 내렸다. 손끝에 쓸리는 부드러운 피부. 나를 바라보던 은빛 눈동자 에 멍한 기색이 감돌았다.
'무엇을 기대하든, 내게 실망하 는 일은 없겠지.'
나는 검은 재앙 미르. 불가사의 이자 영웅으로 불리는 이름.
앞으로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하 든, 그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 줄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