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화
숲속 벌판. 사냥 대회의 시상식 이 시작될 그곳은 웅성임으로 가 득했다.
"독에 중독된 2황자 저하를 아 인하르트 경이 업고 왔을 땐 얼마 나 놀랐는지...... 저하께선 무사하 신 걸까요?"
"교황 성하께서 직접 치료하셨 다고 하니 괜찮으실 겁니다. 그런 데...... 크리시스 공녀는 대체 어
떻게 된 건지......
"그러게요. 혼자서 거대 마수 앞 에서 살아남았다죠? 그것도 거대 마수를 죽인 채로! 크리시스 공녀 가 검을 쓴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지만 거대 마수를 죽일 수준이 라니...... 믿기지가 않아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이곳에서 갑자기 고위 귀족 회 의가 열린 것을 보아 무슨 일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시끄러운 웅성임. 멈추지 않는 추론과 예측들. 그 사이에서 가장 대두된 주제는 분명했다.
카슈미르 크리시스는 대체 뭐 하는 인간인가?
제국의 사냥 대회가 벌어지는 숲속에 거대 마수가 침범했다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더 말도 안 되게 만들어 버린 장본인. 바 실리스크에게서 살아남은 자.
그 믿을 수 없는 미스터리로 사 방이 시끄러웠다.
"크흠. 지금부터 사냥 대회 시상 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웅성거리는 주위에 눈치를 살피 던 시종이 황제의 신호를 받고 크 게 외쳤다. 주위가 잠시 가라앉았 다.
"5위는 여우 두 마리, 늑대 한 마리, 오소리 한 마리를 사냥하신 폰테논 채플턴 백작님이십니다!"
이어지는 의례적인 박수. 당당히 단상으로 올라선 채플턴 백작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전 제 사냥감을 데카르도 후작
영애께 드리고 싶습니다."
채플턴 백작이 르웰린 데카르도 를 마음에 두었다는 건 사교계 전 체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누 구도 놀라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있던 르웰 린이 희미하게 올린 입꼬리를 살 짝 보이며 짧게 고개를 숙였다.
얼핏 보기엔 흠 잡을 데 없을 만큼 우아한 모습.
허나 가까이에서 보면, 부채를 잡은 르웰린의 손은 떨리고 있었
다.
' 슈슈••••••
녹빛 눈동자에 수많은 염려가 뒤섞인다. 소중한 친구를 염려하 는 르웰린을 뒤로, 시상식은 계속 되었다.
"4위는 늑대 세 마리, 토끼 한 마리,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신 아우디 프라마 영식이십니다!"
아우디 프라마, 라는 이름이 들 리자마자 많은 이들의 미간이 찌
푸려진다. 특히나 팔꿈치를 의자 팔걸이에 얹은 채 깍지 낀 두 손 위로 턱을 얹고 산만하리만큼 다 리를 떨고 있던 칼의 표정은 금방 이라도 사람 하나를 찢어 죽일 듯 난폭해졌다.
"아, 감사합니다."
거드름 피우는 발걸음으로 단상 에 올라선 아우디가 비죽 웃음 지 었다. 이를 지켜보던 라이너의 표 정이 조각상처럼 굳었다. 잠시 자 신의 검집으로 손을 올리던 그는, 이내 입술을 살짝 깨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새끼를 진즉에 죽였어야 했 어. 그랬다면 언니가 사냥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을 텐데......
양옆에 칼과 카이사르를 두고 앉은 아리아가 소름 끼치도록 차 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 의 두 눈엔 흉흉한 살기가 도사리 고 있었다. 두 눈 아래 눈가는 울 고 난 사람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 었다.
"그래. 차라리 그러는 게 더 나
았겠군."
심해에 닿을 듯 낮은 목소리가 무감각하게 중얼거렸다. 너무 차 가우면 오히려 뜨겁게 느껴지는 것처럼, 지나치게 무감각해 오히 려 격분한 것 같은 목소리.
카이사르의 핏빛 눈동자가 시리 게 번뜩였다.
"슈슈 모르게...... 저 치의 사지 를 찢었어야 했다."
그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
오다 갈무리되고, 또다시 뿜어져 나오기를 반복했다. 소드 마스터 인 카이사르가 살기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건 그의 분노가 극에 다 다랐음을 뜻했다.
크리시스 공작가의 혈육들이 자 리 잡은 곳은 다른 귀족들과 떨어 진 상석이었기에 망정이지, 누군 가 지금 그의 얼굴을 봤다면 공포 로 정신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사실 사냥감을 바치고 싶었던 영애가 있습니다만•• ... 그 영애께 선 아쉽게도 이 자리에 없으시군
요.
아우디의 눈꼬리가 가증스럽게 축 처졌다. 의자 팔걸이를 쥐고 있던 카이사르의 손에서 콰득, 하 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자신에 게 향하는 수많은 이들의 따가운 눈총을 읽지 못한 아우디가 환하 게 웃었다.
"하지만 앞으로 많이 보게 될 분이니 염려치 않습니다. 이제 많 이 가까워질 분이시죠. 다음 사냥 대회에선 그 분에게 사냥감을 바 치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다음이란 없을 거다, 이 개자식, 윽......!"
의미를 내포한 게 확실한 아우 디의 한마디에 금방이라도 마법을 발동시킬 듯 거칠게 마나의 흐름 을 휘어잡은 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는 듯싶다, 무언가 걷어차지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무너지듯 앉았다.
"감정 통제도 못하는 애새끼처 럼 굴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아리아의 서늘한 목소리는 지배
자의 카리스마를 닮은, 사람을 휘 어잡는 힘이 있었다. 아리아의 차 가운 일갈에 칼이 이를 악물었다.
"너는 지금 저 소리를 듣고도 진정이 되나!"
"내가, 지금 진정이 된 것 같 아?"
하늘빛 눈동자가 천천히 칼에게 로 고정된다. 많은 이들이 순하고 아름답다 칭송하던 두 눈에 가득 들어찬 것은 깊은 분노와 광기에 가까운 살의였다.
"우리가 지금 나서면 언니는 승 패를 인정하지 못하고 강한 가족 들을 이용해 상대를 다치게 한 비 겁한 사람밖에 안 되는 거야."
"그렇다고 저 치를 내버려 둘 순 없지 않나!"
"그래. 내버려 둘 수 없지...... 그러니 언니에게 피해가 가지 않 도록 계획을 세워야지. 암살 계획
Q "
가느다란 목소리가 섬뜩하게 속 삭였다.
어떤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암
살 계획을 세우고 있는 한편, 시 상식이 이어졌다.
"1위는 사슴 네 마리, 늑대 두 마리, 곰 한 마리를 사냥하신 노 아 아인하르트 후작님이십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백발의 사내가 곧은 발걸음으로 단상을 올랐다. 그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 해 보였다.
"좀 이상하네요. 아인하르트 후 작님께서 1위를 한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잡아오신 사냥감이
지나치게 적어요. 무려 소드 마스 터신데......
"제가 후작님과 크리시스 공작 님, 두 분과 함께 사냥을 다녀왔 습니다만, 두 분 모두 사냥엔 관 심이 없으시더군요. 공작님께선 검조차 한 번 꺼내지 않으셨고, 후작님은 보이는 것들의 숨통만 끊으셨습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단상에 오르는 그의 발걸음이 느 렸다. 노아 아인하르트가 단상에 완전히 오르려는 찰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귀족들을 가로지르며 한 인영이 단상 앞에 나타났다.
"지금 사냥감을 제출하면 너무 늦습니까?"
달려오며 살짝 흐트러진 칠흑빛 머리칼. 빛을 받아 선명하게 반짝 이는 진분홍빛 눈동자. 올곧은 시 선.
이 모든 논란의 주인공, 카슈미 르 크리시스였다.
"네, 네? 하지만...... 지금 이미 시상식이 끝난......
"잠깐."
낮은 목소리가 당황스러운 표정 의 시종을 저지시켰다.
"크리시스 공녀는 사정이 있었 네. 늦을 만한 사정 말이야. 조금 의 양해가 필요할 것 같군."
햇빛 아래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금발을 빙빙 꼰 남자가 푸른 눈을 재밌다는 듯 번뜩이며 씨익 웃었
다.
황제 헬리오스 솔라티네였다.
"하, 하지만 이미 사냥감 집계가 끝난 시점 아닙니까!"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 켜보던 아우디가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확실한 자신의 승리를 흐트러트리는 상황에 당황해 상대 가 누구인지도 자각하지 못한 행 동이었다. 정면으로 자신의 의견 을 반박당한 헬리오스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지금 누구 앞에서 언성을 높이 는 건가, 프라마 영식."
지켜보던 노아가 짧게 내뱉었다. 내뱉는 말은 가벼운 경고에 불과 했지만, 짙은 소드 마스터의 기백 은 그것만으로도 사람의 등골을 쭈뼛하게 만들었다.
"그, 그렇지만......!"
"아무래도 지금 프라마 영식의 의견을 들을 시간은 아닌 것 같 군. 아인하르트 후작. 어떤가. 그 대가 현재 우승자 아닌가. 우승자
인 그대의 의견대로 하는 것이 맞 는 것 같네만."
헬리오스의 느긋한 물음에 노아 가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늙은이가 이 자리에 껴 서 우승을 거머쥔 것도 웃긴데 젊 은이의 참가를 말려서야 되겠습니 까. 전 아무래도 좋습니다."
카슈미르가 포식한 맹수처럼 읏 는다. 불안함으로 새하얗게 질린 아우디가 다시금 소리 쳤다.
"하, 하지만! 지금 영애의 사냥 감은 어디에도 없지 않습니까! 언 제 사냥감을 다 가지고 오시려 하 십니까!"
"아, 그건 문제될 거 없네."
담담히 대답한 카슈미르가 주머 니를 뒤적이더니 매끈한 형태의 돌을 꺼냈다.
"바로 보여 줄 수 있으니까."
툭.
그리고 그녀의 손짓 아래 땅에
떨어지는 돌.
화악
밝은 빛과 함께, 땅 위로 마법진 이 펼쳐졌다.
"저, 저게 대체......!"
많은 이들의 경악 서린 웅성거 림이 사방을 채운다. 아우디의 눈 이 정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노아가 '호오.' 하고 탄식을 뱉고, 헬리오스가 재밌어 죽겠다는 듯 웃음 지을 때.
제 앞머리를 쓸어 넘긴 카슈미 르가 씨익 웃었다.
"굳이 셈이 필요하겠습니까?"
땅 위로 소환된, 산이라고 보아 도 될 법한 짐승의 사체들.
그것은 카슈미르 크리시스가 어 제 낮 세 시간 만에 사냥한 짐승 들이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한다. 경악과 놀람, 불신 등이
담긴 눈동자들. 그 시선들을 덤덤 히 받아내고 있는 인영은 무척 작 고, 가녀리고, 약해 보였다.
"거기, 괜찮다면 우승자를 발표 해 주지 그러나."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이번 사냥 대회의 우승자는 카 슈미르 크리시스라고."
그녀가 웃는다.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한없이 밝고, 또 당당 하게 웃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아우디가 크게 소리쳤다. 무심한 표정으로 들어 넘긴 카슈미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대체 무엇이 말인가?"
"이런, 이런 양의 사냥감을 영애 가 혼자 사냥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필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거나, 수를 쓰신 게 분명합니 다!"
카슈미르의 번뜩이는 눈동자가
싸늘하게 그를 담았다. 아우디는 몸을 움찔 떨었다.
"사냥은 라이너 아인하르트 경 과 함께했네. 필요하다면 경께 증 언을 부탁해 보지."
"아, 아인하르트 경과 말을 맞춘 것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프라마 영식."
그녀의 고저 없는 목소리엔 가 장 원초적인 감정인 두려움을 잡 아 끌어내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퍼뜩 몸을 떠는 아우디를 바라보 며, 카슈미르는 느리게 고개를 기
울였다.
"계속 웃기는 소리를 하는데. 내 가 왜 내 무죄를 증명해야 하지? 증명을 해야 하는 건 나를 의심하 고 있는 자네야. 내가 무언가 조 작했다는 증거쯤은 가져와서 그런 소리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 런 기본적인 상식조차 배운 기억 이 없나?"
무죄는 증명할 수 없다. 증명될 수 있는 건 유죄뿐. 당연한 상식 이었다.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 진 아우디를 뒤로 한 채, 카슈미
르는 시종에게 눈짓했다.
"진행 안 하나?"
"아, 그, 네......
땀을 뻘뻘 흘린 시종이 침을 꿀 꺽 삼키곤, 무겁게 선포했다.
"1위는...... 사슴 아홉, 아니, 열 마리에...... 음...... 가장 많은 짐 승을 사냥하신, 카슈미르 크리시 스 영애십니다......
전체에 흐르는 무거운 침묵. 믿 기지 않는다는 듯 오가는 시선들
과 경악 어린 표정들. 그 모든 것 을 당당히 받아낸 카슈미르는, 가 벼운 걸음으로 단상에 올라섰다.
"감사합니다."
좌중을 훑어보는 눈동자는 잔잔 했으나, 번뜩이는 진분홍빛은 향 하는 것만으로도 대상을 얼어붙게 했다. 그러다 문득 한 곳에서 멈 추는 시선.
그녀가 웃었다.
"저는 제 사냥감을 모두 아리아
크리시스 영애께 바치겠습니다."
다시금 좌중에 퍼지는 소란. 카 슈미르가 나타난 순간부터 부릅뜬 눈으로 그녀만을 지켜보던 아리아 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 그렇다면......
혼란스러운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시종이 입을 열었다.
"이번 사냥 대회의 퀸은...... 아 리아 크리시스 영애십니다......
카슈미르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시선들을 덤덤히 받아내며 느지막 한 걸음으로 단상에서 내려온 그 녀는 경악으로 입을 떡 벌린 채 굳어 버린 아우디 앞에 섰다.
"내가 이 내기에서 이기면 그대 가 내 구두에 입 맞추기로 했지 만...... 생각해 보니 취소하고 싶 네. 그럴 필요 없어."
주먹을 꽉 쥔 채 부들거리던 아 우디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 의 안위를 봐줬다고 생각한 모양 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카슈미
르는 유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대 같은 자에게 내 구두에 입 맞추는 영광을 줄 순 없지 않 나."
툭.
어깨가 맞부딪치며 카슈미르가 아우디를 지나쳐 갔다. 사실 둘의 키 차이 때문에 어깨로 팔을 쳤다 는 표현이 더 어울렸지만.
아우디가 분을 못 이겨 땅을 걷 어차든 말든 그를 스쳐 지나친 카
슈미르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탁
그리고 멈춘 곳은, 크리시스 공 작가의 일원들이 자리한 곳이었 다.
" 다녀왔습니다."
카슈미르 크리시스는 그녀의 가 족들을 향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