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94화 (94/254)

94 화

"저...... 아리아."

"조용히 해."

으 一! "

"손 똑바로 안 들어!?"

이미 완벽한 11자로 들고 있는 데 더 어떻게 똑바로 들란 말인 가.

허나 아리아가 분노로 괜한 심 술을 부리고 있음을 알았기에, 심 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자세를

바로 하는 척 몸을 움직였다. 이 미 자세는 완벽했지만.

"......아리아. 이제 슬슬 그만하 는 게 어떤가."

"댁은 가만히 있어요. 댁이 너무 너그러우니까 언니가 계속 이런 짓을 벌이는 거 아니야! 그렇게 오냐오냐 해 주니까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자기 혼자 사지로 튀어 나가잖아!"

나를 일렁이는 눈으로 바라보던 카이사르가 옹호해 주려는 듯 말 문을 떼었으나, 격노한 야차 같은

아리아에게 가로막혀 바로 입을 닫았다.

엄한 어머니와 너그러운 아버지 아래에서 자란 사고뭉치 아이 같 은 기분을 느끼며 눈을 도르륵 굴 렸다.

"아리아 말이 맞습니다. 슈슈는 이렇게 해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합니다."

카이사르, 아리아와 함께 티 테 이블 앞에 앉아 있던 칼이 차가운 표정을 하고서 홍차가 담긴 잔을

매끄럽게 기울였다. 웬만해선 내 가 무얼 하든 지지해 주는 칼까지 냉혹해진 것을 보며 조금 우울해 져 눈을 내리깔았다.

"또, 또! 또 귀여운 척하지! 그 러면 용서해 줄 줄 알지? 절대 안 해 줘! 열 시간 채우기 전까진 어림도 없어!"

눈썹을 크게 꿈틀거린 아리아가 쾅 소리 나도록 티 테이블에 내려 쳤다. 나는 체념 어린 한숨을 쉬 었다.

'이번으로 스물두 번째인가

바로 직전엔 손가락을 꾸물거렸 다고, 더 전엔 눈을 빠르게 깜빡 거렸다고 귀여운 척으로 이 상황 을 벗어나려 한다는 소리를 들은 나는 해탈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이번엔...... 내가 잘못하긴 했으 니까.'

사냥 대회를 간다고 나가 놓고, 그 다음 날 바실리스크와 싸우고 맹독에 중독되어 졸도된 채 실려

왔다. 그걸 본 가족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어렴풋이 상상되었다.

'다들 많이 놀라고 걱정했겠지.'

나 같은 건 관심도 없는 사람처 럼 무심하게 차를 휘적거리고 있 지만 사실 분주하게 내 몸 상태를 살피고 있는 칼. 격노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눈가가 한참 운 사람 처럼 붉은 아리아, 시선을 숨길 생각도 없이 나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카이사르.

사냥 대회가 끝난 직후엔 세 사

람이 쏟아내는 잔소리와 화를 들 으며 하루 종일 명의에게 몸을 검 사받아 내가 지나치게 건강함을 증명해야 했다. 그 이튿날엔 식사 를 하려 포크를 드는 행위조차 금 지당하며 14시간을 취침하고, 10 시간 동안 침대에서 꼼짝 안 하고 쉬어야 했다.

그리고 사냥 대회가 끝난 지 사 흘이 지난 지금. 나는 이 볕 좋은 날 공작가 정원 테라스에서 세 시 간째 무릎 꿇고 손을 들고 있어야 했다.

'다들 내가 이 정도론 전혀 힘들 지 않다는 걸 알면서.'

나는 소드 마스터다. 내게 진정 벌을 주고 싶었다면 거대 마수 세 마리를 1시간 안에 죽이라고 하 든지, 불속에서 팔굽혀펴기 5,000 번을 하라고 해야 맞았다. 무릎 꿇고 손드는 건 열 시간이 아니라 열흘도 하고 있을 수 있었으니까.

'뻔히 알면서.'

내게 이건 장난에 지나지 않는 다는 걸 알면서도, 이걸 벌이라며

시키고 이것조차 수행하는 게 힘 들까 내 기색을 살핀다. 나는 이 런 내 가족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가 없었다.

벌을 받고 있다는 것도 잊고 푸 스스 웃고 말았다.

"웃어? 지금 이 상황이 웃겨!?"

눈앞에 놓인 디저트에 무척 관 심이 많은 척 굴면서 계속 날 힐 끔거리던 아리아는 내가 웃음소리

를 내자 테이블을 다시 내려쳤다. 나는 빠르게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냈다.

정색한 나를 곁눈질한 칼이 냉 정한 표정을 유지한 채 포크로 제 앞의 스콘을 부스러트렸다.

"......슬슬 반성한 것 같으니 묻 지. 뭘 잘못했는지 네 입으로 말 해 봐."

칼의 물음에 눈을 도르르 굴렸 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곤 느리게 입을 열었다.

"우선...... 하라바나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나는 하라바나와 싸웠다 는 것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그 럼 더 걱정할 테니까. 시체는 이 미 산화되어 사라져 버렸으니 혼 적도 없다. 라이너만 입단속시키 면 그만. 그렇게 하라바나를 처치 한 일은 라이너와 나만의 추억으 로 묻으려 했었다.

'슈슈의 신체 검사 결과가 나왔 다. 바실리스크의 독은 신성력으

로 완벽하게 해독됐다더군. 문제 는...... 아직 여운이 남은 독이 하 나 검출되었다는 거다. 무려, 하 라바나의 독이라는군.'

나는 그날 나를 보던 세 사람의 표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무섭 도록 얼굴을 굳힌 채 눈을 부릅뜬 세 사람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내 사지를 결박해 탑에 가둬 버리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강제로 내 기억을 파헤칠 기세였으니 까•...

세 사람의 닦달을 못 이겨 자초 지종을 설명한 나는, 그 직후 하 라바나에게 물렸던 어깨를 아리아 의 치유력으로 몇 번이고 치유받 아야 했다. 작은 흉터가 남은 것 빼곤 멀쩡했음에도 말이다. 아리 아가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으 로 찻잔을 기울였다.

" 그리고?"

"허락도 안 받고 외간 남자와 외박을 했습니다."

세 사람의 미간이 단번에 구겨

진다. 나는 잠시 그들의 눈치를 봤다.

사실 나는 이걸 잘못이라고 생 각하지 않았다. 용병으로 살면서 이성과 외박쯤은 일상이었으니까.

내가 라이너와 밤을 보냈다는 것을 들은 카이사르가 검을 뽑고, 아리아가 암살자 연락처를 찾으 며, 칼이 순간 이동 마법을 전개 하는 것을 보고 오해하기 좋은 일 이라는 걸 자각했을 뿐이었다. 팔 짱을 낀 카이사르가 손가락을 까 닥였다.

"......그리고."

"어, 음...... 지원을 기다리지 않 고 무모하게 바실리스크를 해치워 버렸습니다."

사실 이것도 잘못했다고는 생각 하지 않는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 인 카이사르와 노아가 지원을 왔 어도, 그들은 나보다 더 능숙하게 바실리스크를 해치우지 못했을 테 니까.

나보다 나이가 두 배 이상 많은 카이사르와 노아가 나보다 약하다

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확실히 나보다 강했다.

'하지만 마수를 죽이는 데 있어 서는 달라.'

마수를 토벌하는 것은 강하기만 해서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 다. 강한 것은 기본이고, 마수들 의 특징과 약점을 잘 알아야 했 다.

'이 분야에서 나보다 뛰어난 사 람은 이 대륙 내에 존재하지 않 아. 다른 사람들이 상대하다 다치

는 것보다 내가 처리하는 게 나았 어.'

이건 오만이 아니라 당연한 자 부심이 었다.

허나 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 었다간 혼나도 크게 혼날 것이 뻔 했으니, 나는 잘못을 아는 사람처 럼 눈을 내리깔기만 했다. 충족되 지 않은 얼굴을 한 칼이 턱을 괴 고 발을 까닥거렸다.

"그리고?"

'......그리고? 더 있나? 있는 거 같긴 한데......

무려 세 가지나 말했는데 아직 도 표정이 딱딱한 세 사람을 살피 며 눈을 굴렸다. 이것 말고도 뭐 가 더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 다. 눈을 이리저리로 도르륵 굴리 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진짜 모르겠는데......

허나 그럼에도 도통 알 수가 없 어, 결국 눈치를 보다 솔직히 고 백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세 사람에게서 동시다발적으로 한숨이 튀어나온다. 짜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참혹한 세 사람의 표 정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동공이 혼들렸다.

'그렇게 한심한가......?'

뭔가 지어내서라도 말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자리에서 일어 난 카이사르가 천천히 걸어 내 앞 에 섰다.

"넌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그가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 었다. 커다란 손이 내 주머니를 뒤적였다. 나는 뭔가 싶으면서도 얌전히 카이사르가 하는 양을 지 켜보았다.

"네게는 통신 마도구가 있었지. 분명 내가 줬다. 이 마도구엔 나, 아리아, 칼, 공작가 저택, 황실, 신전, 심지어는 황궁 기사단 직통 번호도 있어."

카이사르가 꺼낸 건 동그란 수 정구슬 형태의 통신 마도구였다. 가라앉은 핏빛 눈동자가 나를 똑 바로 바라보았다.

"이걸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왜 우리에게 연락하지 않았나."

' 아.'

잠시 입술을 벌렸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키는 느낌이었다.

연락하기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럴 리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나는 그저......•'

여태껏 내 인생에서 도움을 청 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단신으 로 재앙과 마주하는 것만이 유일 한 선택지였으니까.

그래서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 는 것을 잊었다. 습관처럼 유일한 선택지를 선택해 버린 것이다.

"저는, 그러니까......

입술이 바짝 마른다. 눈을 도르 르 굴리다 혀로 입술을 축였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쩐지 세 사람을 마주하기 힘들었다.

"저는,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 습니다."

생각해 보면, 여태껏 내겐 최선 조차 없었다. 애초에 선택지는 딱 하나뿐인데 차악과 최악 같은 것 이 어디 있겠는가.

단 하나뿐인 좁은 길을 최선이 라고 생각하며 걸어왔을 뿐이었

다.

카이사르가 뱉은 옅은 한숨이 내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고개 를 숙인 탓에 그의 표정을 볼 수 는 없었다.

'내게 실망한 걸까.'

그의 표정을 보기가 두려웠다.

나는 테라스 바닥만을 눈이 빠 져라 들여다보았다. 그래야만 눈 동자의 흔들림이 잦아들 것 같았 으니까. 그래야만, 눈물이 흐르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스륵.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나 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내 머 리를 한 번에 덮는 큰 손은 귀중 한 도자기 인형을 다루듯 내 머리 카락을 쓸어내렸다.

"잘 들어라, 슈슈.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것이 바로 최선이다."

엄중한 선언과도 같은 카이사르 의 한마디가 내 마음 위로 무겁게

떨어졌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 은 느낌. 나도 모르게 살짝 고개 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부르기만 하면 모든 걸 내팽개치고 달려갈 이들이 셋이나 있는데 대체 왜 부르질 않는 게 냐. 종처럼 부려 먹어도 다들 기 뻐할 터인데."

붉은 눈동자에 내가 똑바로 담 겼다. 처음 마주했을 땐 금방이라 도 피가 흐를 것 같은 오싹한 눈 동자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생 각이 좀 달라졌다.

카이사르의 붉은 눈동자는, 겨울 날 마주한 모닥불처럼 따뜻했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 곁엔 늘 우리가 있다. 너는 더 이상 혼 자 위험에 맞설 필요가 없다. 나 는 늘 너와 함께 싸워 줄 것이 다."

혼자가 아니다. 신박하지도, 새 롭지도 않은 진부한 위로. 누구나 할 수 있을 단순한 한마디.

허나 나는 카이사르의 말의 무

게를 알았다. 농담조차 허투루 하 지 않는 그가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숙고했을지, 위로엔 재능 이 없는 그가 이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준비했을지 또한 알았다.

"그러니 이제 더는 혼자서 위험 에 맞서는 것을 최선이라 생각하 지 마라."

이제 내게는 이런 말을 해 줄 가족이 있었다.

왈칵 치솟는 감정에 입술을 꾹 문다. 무언가 흘러내릴 것만 같았

다.

시리도록 추운 겨울만을 보내다 이제야 따뜻한 모닥불과 마주한 것 같은 기분.

마음이, 얼었던 것들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와락.

아무 말 없이 카이사르의 허리 에 두 팔을 둘러 꽉 껴안았다. 놀 란 듯 잠시 움찔하던 그는, 이내 작은 웃음을 흘리며 나를 마주 안

아 주었다.

좁고 험한 외길뿐이던 카슈미르 의 인생에 집으로 가는 길이 트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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