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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95화 (95/254)

95 화

공작가 저택 안, 공작 집무실에 자리를 잡은 네 사람 사이에서 짙 은 침묵이 감돌았다. 네 사람 모 두가 책상에 놓인 편지 한 장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바닥엔 황실의 도장으로 인봉된 편지봉투가 떨어져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무거운 침묵 끝에 카슈미르가 입을 열었다.

허공에 외치는 것 같은 공허한 목소리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 다. 모두가 답을 몰랐으니까.

"황제 이 미친 새끼가 진짜

결국 아리아의 입을 비집고 튀 어나오는 욕지거리.

'오늘부로 카슈미르 크리시스 공 녀를 세레논 솔라티네 2황자의

검술 스승 및 황제의 말벗으로 삼 는다. 반드시 일주일에 두 번 이 상 황궁으로 출석하도록.'

멋들어지는 필기체로 쓰인 편지 는 이런 개소리를 담고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편지가 도착한 건 사냥 대회를 마친 지 여드레째 되는 날이었다. 온 사교계가 나에 대한 소문으로 미친 듯이 달아올 라 있을 때.

나는 그럴 때에도 지금까지와 같이 수련과 가족들과의 교제로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이럴 때 바로 나서기보단, 사람들이 나에 대해 더욱 궁금해하도록 좀 더 잠 적하는 게 좋았다.

그리고 공작가를 뒤집어 놓은 편지는 내가 내 수련을 마치고 아 리아와 칼의 마법 대련을 구경하 고 있을 때 도착했다.

"그러니까, 황실에서 공식적인 안건으로 공작가에 편지를 보냈다 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저를 이유로 말이죠."

" 그래."

카이사르의 부름으로 집무실에 도착한 내가 떨떠름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덩달아 따라온 아리아와 칼이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편지를 바라 보았다.

'황실에서 공식적으로 내게 편지 를 보낼 일이 뭐가 있지?'

턱을 느리게 쓸며 고민했다.

황실에서 보낸 편지라고 해서 디에고의 서신인 줄 알았는더卜디 에고와 나는 거의 매일 서신을 주 고받고 있었다. 추문의 위험도 있 고, 우리 둘 다 바빠 자주 만나기 는 어려웠으니까- 들어 보니 공 작가에 내려진 황제의 공식적인 명령이란다. 그것도 나를 콕 집어 서 내린.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을까 요."

포효하는 용이 새겨진 금빛 인 봉을 보다 머리를 긁적였다.

'사냥 대회 때 나를 보는 황제의 눈빛이 심상치 않기는 했지만.'

사냥 대회 1등을 거머쥔 나를 보는 그의 눈이 광기에 가까운 흥 미로 번뜩였던 것을 기억했다-

나는 원작을 본 사람으로서 현 황제 헬리오스 1세가 얼마나 흥 미에 미친놈인지 알았기에, 등골 이 섬뜩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툭.

"걱정 마라. 네가 잘못을 지었을 리도 없지만, 무슨 잘못을 저질렀 더라도 덮어 줄 수 있으니."

수심에 잠긴 나를 바라보던 카 이사르가 제 손으로 내 머리를 덮 었다. 머리를 슬슬 쓰다듬는 손길 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살짝 고 개를 끄덕였다.

투툭.

카이사르가 레터 나이프를 사용

해 유려하게 편지를 열었다.

무려 황궁에서 온 편지 봉투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는 행동은 조금 경악스러웠지만.

그의 큰 손이 접힌 편지를 펼치 고, 붉은 눈동자가 종이 위를 굴 러 글자를 읽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얼굴이 한없 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버지?"

답지 않게 뻣뻣해진 그를 조심 스럽게 불러 보았다.

내 부름에도, 아리아가 사탕을 자기 머리로 던져도 반응이 없던 카이사르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 었다.

"이 새끼가...... 미쳤나?"

" 네?"

평소 카이사르라면 하지 않는, 지나치게 가벼운 욕설.

황제의 서신에 대한 반응이라기

엔 너무도 불손했다. 누가 보았다 면 황족 모독죄로 고발했을지도 모르는 언행에 나는 눈을 크게 떴 다.

"대체 뭐길래 그러십니까?"

소파에 앉은 내 어깨에 머리를 느슨하게 기대고 있던 칼이 카이 사르의 반응을 보며 미간을 좁혔 다.

"설마 황태자비가 되라든가, 그 런 건 아니지?"

내 무릎에 머리를 베고 있던 아 리아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랬다면 황실과의 전쟁을 선 포했을 거다."

'황태자비'라는 소리에 얼굴이 구겨진 카이사르가 무섭게 부정했

"그럼 대체 뭔데 그러십니까?"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착잡한 눈으로 나와 편지를 번갈아 본 카

이사르가 손짓했다.

"우선...... 네 일이니 네가 직접 보는 게 좋겠군. 이리 와라."

어리둥절하며 책상 앞에 앉은 그에게로 다가갔다. 내게 기대고 있던 칼과 아리아도 덩달아 나를 따라왔다.

[크리시스 가의 깜찍한 사랑둥이 에게, 아빠 친구가.......]

맨 위와 맨 아래에 받는 이의 이름과 보내는 이의 이름만으로

미쳤음을 가감 없이 드러낼 수 있 는 건 헬리오스가 유일할 것이다.

나는 초장부터 어이가 사라진 채로 길지 않은 편지를 읽기 시작 했다.

편지에 대한 내 감상은 이러했 다.

'헬리오스 솔라티네, 이거 완전 히 미친놈이군.'

그는 내 생각보다 더 미쳐 있었

"미친 새낀가?"

"미친 모양이군."

아리아와 칼이 번갈아 가며 말 했다. 누가 가족 아니랄까 봐 감 상도 똑같았다.

우리는 한참 아무 말 없이 편지 를 들여다보기만 했다.

"그러니까. 지금 황제는, 언니한 테 2황자 보모 겸 지 친구 하라 고 명령을 내린 거야?"

기이한 침묵을 끊은 건 아리아 의 신랄한 한마디였다.

황제에게 그런 언행을 하면 안 된다고 지적할까 하다 입을 다물 었다. 솔직히 나도 입을 열면 비 꼼부터 튀어나갈 것 같았다.

"원래 미친놈인 줄은 알고 있었 지만...... 완전히 미친놈이었군. 슈슈를 자기 종으로 아는 건가?"

칼이 상당히 언짢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금방이라도 황궁으로 쳐들어갈 듯 흉흉한 기세를 내뿜

는 그를 달래듯 어깨를 매만져 주 고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황자의 스승을...... 이렇게 통 보 식으로 갑작스럽게 정해도 되 는 겁니까?"

"그럴 리가. 황제가 미친 짓을 한 것뿐이다."

딱 자르는 카이사르의 말에서 황제를 향한 경멸이 묻어났다.

'확실히...... 황제가 너무 미친 짓을 하긴 했지.'

이런 중요한 안건을 일언반구의 논의도 없이 통보 식으로 전달하 다니 해도 해도 너무했다.

나야 황제가 원래 이런 미친놈 이라는 걸 알기에 그나마 담담할 수 있었지만, 다른 이가 이 상황 에 있었다면 당황하다 못해 황실 이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건가 고 민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검술 스승이라니.'

검술 스승. 유독 진하게 쓰인 것 같은 그 단어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세레논은 현재로 20살. 19살인 나는 그보다 한 살 더 어렸다. 황 족들의 스승 대부분은 나이가 지 긋한 지혜로운 노인들이다. 그런 데 그보다 어린 내게 그의 스승이 되라고 하다니, 이치에 맞질 않았 다.

'게다가 세레논은 소드 익스퍼트 를 직전에 둔 꽤 실력 있는 검산 데...... 나를 그의 스승으로 붙이 겠다는 건, 내 검술 실력이 세레 논보다 높다고 판단한 게 아닌

가.'

미친 농담처럼만 보이는 이 편 지가 황제의 치밀한 덫이라는 생 각이 문득 들어 등골이 섬뜩했다.

"......황제 폐하는 어디까지 눈 치채신 걸까요."

조금 무겁게 뱉은 질문에 모두 들 생각에 빠진 듯 대답이 없었 다.

'사냥 대회 일로...... 내 무력에 대해 관심이 생긴 건가.'

황제는 사냥 대회 거대 마수 출 몰 건에 대한 자세한 전말을 몰랐 다. 아마 여러모로 추리하고 보고 를 듣는 식으로 예측은 하고 있겠 지만, 아직 내가 미르라는 진실에 도달하진 못했을 터. 그 진실에 도달하지 않는 이상 상황은 풀리 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만약 그게 궁금했다면 나를 그 의 말벗으로 삼는 정도로 충분했 을 텐데...... 2황자의 검술 스승은 대체 왜 시키는 거지?'

아무리 무소불위 권력의 공작가 라도 형식적으로는 황가를 섬기고 있다. 황제가 나를 말벗으로 삼고 자 했다면 그 정도는 군말 없이 수용할 정도였단 말이다.

허나 2황자의 검술 스승을 시키 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기묘하단 말이지......

편지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황제의 속은 알 듯 모를 듯 어려 웠다. 내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어이없음의 늪에서 빠져나온

아리아가 두 눈을 차갑게 번뜩였

"논의조차 없이 이런 사항을 결 정했다는 건 언니를 우습게 봤다 는 거잖아. 의견조차 묻지 않다 니......

"맞습니다. 이건 슈슈를 모욕한 것 같은데요."

서늘한 표정의 칼이 아리아와 합세했다. 마찬가지로 차가운 얼 굴의 카이사르가 제 입술을 쓸었 다.

"내 괜한 마찰이 싫어 웬만해선 황제의 명에 따랐건만••... 이런 식으로 내 딸까지 마음대로 하려 하는 건 도가 심하군. 슈슈. 많이 불쾌했겠구나. 걱정하지 마라. 내 가 오늘 직접 황궁으로 가서

"아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뭐?"

금방이라도 검을 들고 황궁으로 쳐들어갈 것 같은 카이사르를 단 호하게 제지했다. 단번에 가로막 힌 그가 되물었다.

'황제의 속셈이 뭔지 모르겠어. 이게 함정일지도 모르겠고.'

정말 내게 악감정을 가진 황제 가 나를 모욕하려 하는 걸지도 모 른다. 나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나는 어차피 황제의 눈 안에 들 어야 해.'

내 미래 계획을 위해선, 좋든 싫 든 황제의 눈 안에 들고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러는데 있어 2황 자의 스승 자리와 황제의 말벗 자 리는 무척 유용할 게 뻔했다.

'갑자기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 어온 기분이네.'

황제의 눈에 들 절호의 기회가 두 개나 생겼다. 내 생각과는 다 르게,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잘 흘 러가는 상황에 입꼬리가 올라갔 다.

'그리고...... 검술 스승이면 2황 자와 접촉하기도 좋은 자리잖아.'

나는 개인적으로 2황자가 궁금 했다. 디에고와의 사이라든지, 권

력을 대하는 그의 태도라든지, 묘 하기 짝이 없었기에.

'이건 2황자를 합법적으로 캐낼 기회야.'

나는 이미 디에고를 내 시대의 태양으로 결정했다. 고로 세레논 이 태양을 꿈꾸면서 아닌 척하는 가식쟁이인지, 그저 태양을 노리 는 이들에 의해 놀아나는 꼭두각 시인지 알아야 했다.

'뭐야. 너무 좋은 기회인데.'

처음엔 보고 당황스러움에 뭐지 싶었지만, 생각할수록 잘된 일이 었다. 이번만큼은 황제의 충동적 인 결정에 감사하며 씨익 웃었다.

"저, 하겠습니다. 2황자의 검술 스승과 황제의 말벗 둘 다요."

내 단언에 세 사람의 얼굴로 경 악이 깃든다. 심각한 표정을 한 카이사르가 내 어깨를 잡았다.

"슈슈. 설마, 가문에 누가 될까 봐 억지로 하는 거리면 그만둬라. 크리시스는 이런 것을 거절한다고

큰일 날 정도로 위태롭지 않으니 까. 내가 황제와 결판을 내고 오 마. 그러니......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고 싶어 서 그래요."

내 사적인 호기심도, 내 공의를 위한 계획도 다 충족시켜 줄 기 회. 나는 내 품으로 날아든 기회 를 놓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세 사람을 향해 환하게 웃어 주었 다.

"이거, 무척 즐거울 것 같거든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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