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96화 (96/254)

96 화

"도착했습니다."

"그래."

마차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 을 느리게 들어 올렸다. 시종의 손길 아래 부드럽게 열린 마차 문 을 지나 땅을 밟았다.

'오랜만이네.'

새삼스레 생각하며 눈앞의 거대

한 건물을 바라보았다. 카이사르, 아리아와 함께 왔던 이후로 디에 고를 만나기 위해 여러 번 방문했 었다. 그러나 요 근래는 구설수가 많아져 발걸음을 줄였던 차였다. 늘 그렇듯 휘황찬란한 궁전을 지 긋이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2시에 정원 테라스에서 황제를 만나고, 4시에 세레논과 만나야 지.'

계획들을 머릿속에서 정돈하며, 황궁 시종을 따라 정원으로 이동 했다.

봄을 맞이한 황궁의 정원은 황 홀경이라고 칭해도 될 만큼 아름 답게 관리되고 있었다. 원체 자연 풍경을 좋아하는 나는 잠시 상황 도 잊은 채 정원을 둘러보았다.

'비싼 약초들이 그냥 들의 풀이 네......

아리아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약 초학을 수준급으로 공부했던 내 눈엔 황궁 정원이 약초밭처럼 보 였다. 마비를 완화시키는 데 탁월 한 프루드페라가 꽃나무 아래에

들풀처럼 피어 있는 것을 발견하 고 조금 질려 버렸다.

'디에고와도 황궁 정원에서 티타 임을 여러 번 가져 봤지만 이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물론 그때도 아름답긴 했다. 허 나 그땐 겨울이었고 지금은 봄이 었으니 분위기부터가 새로웠다.

자꾸 두리번거리며 시종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시종이 멈춘 곳 은, 다름 아닌 정원 한가운데에 외벽을 수정으로 지은 온실 정원

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안에서 기다리 고 계십니다."

기사 넷이 지키고 있는 정원의 문 앞에서 시종이 물러섰다. 수정 으로 된 외벽이 햇빛을 받아 아름 답게 빛나는 모습에 잠시 시선을 두다, 온실 안으로 들어섰다.

'진짜 멋있다......

수정 온실의 내부는 외부 못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공중에

둥둥 뜬 마석들이 온도를 조절하 는 덕분에 현 계절에선 볼 수 없 는 꽃들도 이곳저곳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색색의 장미들이 모인 곳 을 바라보며 붉은 장미는 카이사 르와 칼에게, 파란 장미는 아리아 에게 주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들 정도였다.

넓은 온실을 꾸준히 가로지르다 보면 다다르는 고풍스러운 티 테 이블.

수정으로 만들어진 외벽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햇빛에 황금빛 머

리칼이 환하게 반짝인다. 푸른 유 리구슬처럼 동그랗고 예쁜 눈동 자. 중년의 나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얼굴.

"여어, 카슈미르 왔는가!"

그 앞에 앉은 것은 날 보며 환 하게 웃는 황제 헬리오스였다.

'여어...... 카슈미르, 왔는가 2'

황제가 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저렴한 추임새부터 허락 받지 않

은 퍼스트네임 호칭까지. 대체 어 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알 수 없 는 놀라운 말본새였다.

'게다가 저건 하네스잖아......

황제의 옷차림은 가벼운 하얀 와이셔츠 한 장. 그 위를 덮은 것 은 꽤 촘촘한 하네스였다.

'중년 남성이 저렇게 외설스러워 도 되나.'

잠시 말을 잃은 채 헬리오스를 바라보기만 하다, 겨우 정신을 차

리곤 허리를 숙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카슈미 르 '크리시스'입니다."

"하하! 그래! 어서 앉게, '카슈미 르'!"

부러 '크리시스'를 강하게 발음 하기까지 했으나, 헬리오스는 되 려 '카슈미르'를 강하게 발음하며 꿋꿋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나야 원작을 아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헬리오스는 원래 이런 놈이다. 자신의 흥미와 주관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류의 인간이었다. 나야 그걸 아니 덤덤하지만, 다른 사람이 이런 상황을 맞닥뜨렸다면 시비를 거는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차는 뭐가 좋은가?"

"무엇이든 좋습니다."

"정말 무엇이든 좋은 게 맞나?"

'•..."뭐지?'

보통 티타임에선 주최자가 준비 한 차를 마시는 게 예의였다. 그 래서 평범하게 대답했건만, 되묻 는 헬리오스의 표정은 꽤 의미심 장해 보였다.

잠시 헬리오스를 지그시 바라보 았다. 그의 두 눈은 나이답지 않 은 장난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누 가 봐도 장난을 작정한 사람의 얼 굴.

'차에 뭔가 꿍꿍이가 있나 보 군.'

소드 마스터의 감이 아니더라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기색이었다. 나는 살짝 미소 지었다.

겉으로 보기에 헬리오스는 황제 인 것이 믿지 않을 정도로 가볍고 장난스러운 사람이다. 대체 진지 한 순간이 있기는 할까 싶은 이.

허나 저것은 헬리오스의 연막이 었다.

'헬리오스 솔라티네는 독니를 숨 긴 독사지.'

태양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는 가벼움이라는 연막 으로 그 치밀한 성정과 끝없는 계 산을 가리고 있는, 완벽한 군주였 다.

'물론 헬리오스가 흥미주의자이 긴 하지.'

그는 재밌는 것이라면 눈이 돌 아가는 사람이었다. 허나 흥미가 그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틀린 말이었다.

헬리오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제국.

그는 냉정한 통치자. 그의 최우 선 순위는 제국의 안녕이었다.

'그런 사람이, 내게 황궁에 합법 적으로 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줬단 말이지. 그것도 황자의 스승 이자 황제의 말벗이라는 가볍지 않은 직무로.'

헬리오스는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을 더하는 멍청이가 아니다. 때문에 그가 나를 황실의 일원으

로 만든 이번 일을 절대 헬리오스 의 충동에 의한 가벼운 사건이라 고 보아선 안 됐다.

'헬리오스는, 나를 시험하려 하 고 있다.'

이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갑작스럽게 공작가의 입적된 정체 불명의 공녀. 바실리스크와 정면 으로 마주해 살아남은 것도 모자 라 바실리스크의 시체까지 보게 한사람.

헬리오스는 그런 나를 탐색하기

위해 이런 자리를 만든 것이 분명 했다.

'그 탐색에 응해 주지 못할 건 없지.'

헬리오스가 내게 관심을 가지는 건 바라던 바였다. 나는 그가 어 떤 장난과 시험들을 준비했든 기 꺼이 응해 줄 생각이었다.

"물론입니다, 폐하. 폐하께서 내 리시는 것인데 무엇일랑 괜찮지 않겠습니까."

나는 헬리오스를 똑바로 마주하 며 그보다 더 환하게 웃었다. 응 수해 주겠다는 뜻을 담아.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이 살짝 가늘어 지고, 잠잠한 바다 같던 푸른 눈 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가 웃 었다.

"......재밌군. 시종장. 차 가져오 게."

헬리오스의 손짓에 나이 지긋한 노인이 트롤리를 밀고 들어왔다. 능숙한 손길로 찻잔을 배치한 시 종은, 내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리고 김과 함께 올라오는 역 겨운 향.

'......검은색?'

걸쭉한 검은빛의 액체, 아니, 액 체라고 부르기도 힘든 애매한 점 액질의 무언가가 루비로 장식된 고풍스러운 잔을 채웠다.

'허......

장난질을 할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할 줄은 몰랐다. 눈을 느리게 깜 빡이다, 찻잔에 든 것을 보곤 헛 웃음을 뱉었다. 그건 내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마수의 피.'

황제는 정말 미친놈이었다.

제국의 귀족들은 마수와는 거리 가 먼 삶을 살기에 마수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마수에게 닿기만 해도 죽는다고 생각하는 귀족들이 태반이지.'

겁 많은 머저리 같지만 정말 대 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그런 와중에 황제라는 작자가 공녀와의 티타임에서 차랍시고 마 수의 피를 내왔으니,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통 귀족들은 황제가 자신을 크게 모욕하고 있다고 생각하겠 지. 티타임에서 마수의 피라니.'

귀족들이야 마수에 대해선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아마 분명 그

랬을 것이다. 자기 혼자 부글부글 끓고 있는 얼핏 보기에도 수상한 액체를 지그시 들여다보던 나는 턱을 괸 손으로 볼을 톡톡 쳤다.

'어떻게 반응해 볼까.'

장난에 응해 주듯 기겁해 볼까, 아니면 태연하게 응수할까. 느리 게 고개를 기울였다.

황제가 내게 어떤 반응을 원하 는 건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허 나 내가 황제에게 보여 주고 싶은 이미지는 확실했기에, 내가 보일

반응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황제의 노리개가 아니라 황제의 동업자가 되어야 하니까.'

기겁하며 장난스러운 반응을 보 이면 그가 나를 반응이 재밌는 영 애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허나 나 는 거기서 끝나는 존재가 되어선 안 됐다.

나는 헬리오스에게 충직하고 현 명하며, 쓸 만한 사람으로 보여야 했다.

유려한 손길로 찻잔을 들었다. 폴폴 오르는 김 새로 풍기는 악취 는 내게 너무도 익숙했다.

'뭐, 이런 좋은 걸 준다면 나야 고맙지.'

태연하게 향을 음미하듯 숨을 들이쉬고 환하게 웃는 낯으로 헬 리오스와 마주했다.

"마도루스의 피같이 귀한 것을 대접해 주시니 감사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내 반응을 집요하게 살피던 헬 리오스의 눈이 커진다. 놀라움이 담긴 그의 눈빛을 당당히 마주하 며 눈꼬리를 휘었다.

'보통 마수의 피는 약이 아니라 독이지. 하지만 마수 마도루스의 피만은 달라. 가공하면 최고의 약 재로 사용되니까.'

가공한 마도루스의 피는 마나를 강화시키고 긴장을 완화시키며, 에너지를 단숨에 회복케 하는 보 약이었다. 상당히 비싼 값으로 유 통되기에 용병으로 지낼 적엔 마

도루스는 보이는 대로 잡아다 피 를 뽑아 팔았다.

"......그걸 어떻게 안 거지?"

얼마나 놀란 건지 시도 때도 없 이 짓고 있던 웃음마저 지운 헬리 오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 다. 나는 태연히 웃었다.

"마수의 피라면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마도루스 의 피'라는 걸 어떻게 알았냐는 뜻일세."

헬리오스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나는 눈을 나긋하게 내리 깔았다.

하기야, 마수의 피가 검은색에 점액질이라는 건 누구나 알았다.

'허나 마수의 피와 마도루스의 피를 구분하는 건 아무나 하지 못 하지.'

그래서 시장판엔 가짜 마도루스 의 피가 판을 쳤다. 그냥 마수의 피를 마도루스의 피인 줄 알고 구

매하고 섭취해 병에 걸린 이들도 한둘이 아니니, 꽤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기도 했다.

'내가 여태껏 죽인 마도루스가 몇 마린데...... 나야 냄새만 맡아 도 알지.'

질리도록 마주했던 게 마도루스 의 피다. 그냥 스쳐 지나치기만 해도 알아낼 수 있었다. 허나 그 걸 헬리오스에게 그대로 말할 수 는 없었다. 나는 잠시 눈을 굴리 다, 찻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투 명한 수정 외벽을 넘어 옅게 들어

오는 이른 오후의 태양빛이 찻잔 위로 스며들었다.

"마도루스의 피는 빛에 비추면 옅은 파동이 일어납니다. 다른 마 수들의 피와는 다르게요."

이것이 전문가들이 구분하는 방 식이었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 던 헬리오스가 허,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그 파동을 느꼈다고."

마도루스의 피가 빛을 받으면

내는 파동은 지나치게 미미하다. 일반인은 감지조차 하지 못할 만 큼. 마도루스의 피가 내는 파동을 잡아내기 위해선 여러 전문 도구 들과 전문가가 필요했다.

"네. 어렵지 않더군요."

그걸 알면서도, 나는 미친 듯이 번뜩이는 헬리오스의 푸른 눈동자 앞에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하, 하하하!"

헬리오스가 웃는다. 유쾌해 죽겠

다는 듯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던 그가 상체를 숙이고 나를 바라보았다.

"공녀는 정말 재밌는 사람이네. 아나?"

"여태껏 무뚝뚝한 사람이라는 소리만 들어왔습니다만,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내 태평스러운 대답에 헬리오스 가 다시금 웃음을 터트렸다. 유쾌 하기 짝이 없다는 듯 눈꼬리를 휜 그는 마찬가지로 마도루스의 피가 든 자신의 잔을 들어 올리더니,

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 내 재밌는 말벗을 얻게 되어 무척 기쁘니, 우리 건배나 한번 하세."

찻잔으로 건배라니. 미친 소리였 다. 허나 어쩐지 나도 유쾌해져, 나는 별말 없이 잔을 들어 그의 잔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챙.

고급스러운 찻잔이 위태로운 소 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찻잔 너머 로 오가는 시선이 치열했다.

'당신이 뭘 기대하는지는 몰라 도, 그 이상을 보여 주지.'

진분홍빛과 푸른빛, 사뭇 다른 두 눈동자가 동시에 휘어들고, 우 리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마도루 스의 피는 생김새나 냄새와는 다 르게 꽤 청량한 맛을 가지고 있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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