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화
"그러니까 그대는 이번에 발안 된 토지세에 관한 법이 조금 변형 되었으면 한다는 거지."
"네. 지금 법안 자체는 소작농들 을 위한 법이긴 하나, 영주들이 악용할 틈이 여럿 보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헬리오스와 의 대화는 상당히 즐거웠다. 살얼 음판을 걷는 어색한 대화가 되리 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헬리오
스는 대화를 이끄는 데에 익숙했 고, 또 나와 생각이 아주 잘 맞았 다.
'일이 될 줄 알았는데, 나도 즐 기게 생겼네.'
헬리오스와 대화하며 나도 모르 게 자연스럽게 올라간 입꼬리를 매만지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또 한 나와의 대화가 즐거운지 꽤 진 심으로 웃고 있었다.
"그래. 내 공녀와의 대화가 무척 즐거웠네."
"폐하를 즐겁게 해 드렸다니 영 광입니다."
4시에 가까워진 시간은 슬슬 헬 리오스와 일별해야 함을 뜻했다. 짧은 인사를 나누며 나설 준비를 하다, 문득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하나만 여 쭈어도 되겠습니까."
"음? 무엇인가."
'말벗으로 삼은 것까지는 이해가 가. 나를 탐색해야 되겠다고 느낀 모양이니. 그런데......
"어째서 저를 2황자 저하의 검 술 스승으로 삼으신 겁니까?"
이게 문제였다.
황자의 스승은 엄격한 엄선 끝 에 이루어졌다. 황자를 해하지 않 으리라는 확실한 신뢰와 상당한 덕, 지식과 품위를 쌓은 이만이 황자의 스승이 될 수 있었다.
'나를 스승으로 삼는 것엔 다른 이들의 반대가 컸을 텐데...... 왜 무리하면서까지 나를 세레논의 스
승으로 삼은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살짝 미간 을 좁힌 채 입술을 꾹 무니, '아.' 하고 탄성을 뱉은 헬리오스가 씨 익 웃었다.
"그거 내가 한 거 아닌데?"
" 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던 그가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 눈꼬 리를 휘었다.
"그건 세레논이 직접 청했던 거 야. 내부에서 반대가 있었는데도 강경하게 주장하더군."
'세레논이? 직접?'
헬리오스의 농간일 거라 생각했 건만, 세레논이 직접 청했다는 얘 기에 머리가 하얘졌다. 세레논이 나를 스승으로 삼고자 하는 이유 가 뭐가 있나 싶어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이유가 궁금하다면 세레논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러나. 물어봤는
데 도통 대답을 안 해서 나도 자 세한 이유는 모르거든. 그대가 직 접 물어보면 대답할지도 모르지."
'흐음••...
내 예상과는 다른 상황이 의아 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세레논이 무언가 눈치챈 건가 싶어 조금 염 려되긴 했지만, 역시 재밌다는 생 각이 강했다.
"알겠습니다. 대답해 주셔서 감 사합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 보도 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하게."
헬리오스의 허락을 들은 뒤 의 자를 끌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 리를 굽혀 인사한 뒤 뒤돌아 가려 던 찰나, 헬리오스의 목소리가 내 걸음을 붙잡았다.
"아, 그리고 카슈미르. 나는 말 일세, 청춘이라면 화끈해야 한다 고 생각하네."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어 멀뚱 히 그를 바라보자, 그가 악동처럼 웃었다.
"내 아들 두 놈과 한 번에 사귀 어도 묵인해 주겠다는 소릴세."
헬리오스는 역시 미친놈이었다.
시종의 안내를 따라 향한 곳은 궁 밖 넓은 공터였다. 그곳 한가 운데에 선 누군가에게 저절로 시 선이 갔다.
차라리 백발에 가까울 만큼 옅 은 채도의, 희뿌연 연보라색 머리
카락이 바람에 날려 나부낀다. 이 미 수련을 한바탕 한 건지 머리카 락을 탁고 땀방울들이 떨어졌다. 아득히 하늘을 바라보던 뿌연 하 늘빛 눈동자가 천천히 굴러 내게 로 향했다.
'세레논.'
2황자, 세레논 솔라티네였다.
"2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카슈 미르 크리시스입니다."
"그래. 왔는가, 공녀."
허리를 굽히며 정중히 인사했다. 무감각하던 그의 표정 위로 부드 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갑작스러운 요청이었을 텐데 응해 줘서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 네."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만...... 저하께서 괜찮으실까 싶습니다."
"무엇이?"
세레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난 잠시 옅게 숨을 뱉었다.
'나야 결혼이고 사교계 평판이고
구설수고 조금도 관심 없다지 만...... 세레논은 황자이니 과년한 이성과 주기적으로 만난다는 소문 이 돌아서야 좋을 게 없을 텐데.'
이성이라고 무조건 눈이 맞는 것이 아니고, 주기적으로 만난다 고 연인이 아닌데, 세상엔 이 이 치를 모르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따지면 난 지금 연인이 열 명쯤 되는 건가.'
속으로 쯧, 혀를 차곤 세레논을 바라보았다.
"우선 저는 저하보다 어립니다. 그리고 저하는 제 정확한 검술 실 력을 모르시죠. 그리고 무엇보 다••...
잠시 머뭇거리다 짧게 내뱉었다.
"여태껏 여자는 남자 황족의 스 승이 된 적 없습니다. 아시잖습니 까."
제국 역사상 여자가 남자 황족 의 스승을 맡은 전적은 없었다. 내가 최초란 소리였다.
모든 최초엔 수많은 난행이 있 다. 나는 세레논이 대체 어떻게 나를 스승으로 삼겠다는 의견을 관철시킨 것인지 예상도 가지 않 았다.
조금 생각이 많아진 나를 지그 시 바라보던 세레논이 피식 웃었 다.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그것들이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군. 나이가 검의 척도를 말하진 않고, 난 그대의 정확한 검술 실력은 모르지만 마나 운용
실력은 알지."
"......마나 운용 실력?"
"바실리스크와 마주했을 때 바 실리스크가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 도록 방어막을 쳤던 게 그대 아니 었나."
'젠장. 눈치챘었나.'
라이너나 알렉산드로가 만든 것 으로 오해해 주기를 바랐는데, 세 레논은 내 생각보다 마나의 흐름 을 잘 읽는 모양이었다.
"웬만한 마나 운용 실력이 아니
고서야 거대 마수에게서 인기척을 숨길 만큼의 방어막을 만들 수 없 어. 게다가 나를 보내고 남은 뒤 에 큰 상처 없이 살아남았다는 건 실력이 이미 증명된 거 아닌가."
세레논이 멍청이가 아닌 이상 눈치챌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 만, 이리 직접적으로 들으니 기분 이 꽤 이상했다. 잠시 눈을 굴리 다 그를 보았다.
"그럼 제가 여자라는 것엔 문제 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구설수 에도 휘말리실 텐데요."
아무리 나아졌다고 한들, 제국에 선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법적으로 금지 가 되진 않았으나, 사람들의 생각 이 그러했다. 지긋한 시선으로 세 레논을 바라보고 있으니, 눈을 깜 빡인 그가 씨익 웃었다.
"검이 성별을 가리던가? 그대가 여자든 남자든 내겐 하등 상관없 어. 구설수는...... 나도 원하는 바 니까."
'......구설수를?'
마지막 말은 조금 이상했다. 분 명 시끄러운 소문들은 그가 황좌 에 다다르는데 악영향을 줄 텐데, 그는 이에 대해 조금도 유감이 없 고, 오히려 원하는 것 같은 태도 를 보이고 있었다.
'이상한 사람이란 말이지.'
느리게 턱을 쓸었다. 아무래도, 그의 스승이 된 것은 잘한 선택 같았다. 그를 알아볼 필요가 있었 으니까.
냉철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땅을 바라보며 생각하다, 천천히 시선 을 들었다.
"그래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하. 제가 검술에 실력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만, 가 르치는 것엔 그리 능하지 않습니 다. 게다가 아무리 제 실력을 예 측하셨다 해도 저하께선 제가 검 을 휘두르는 것조차 보신 적 없지 않습니까. 수많은 스승 후보가 있 으셨을 텐데...... 왜 하필 저입니 까?"
날 검술 스승으로 만들면 감수 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도 굳이 나를 선택 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은 없 군 그래?"
"그럴 만한 안건이 아니라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내 굳건한 태도에 세레논이 한 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유야무야 넘어갈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나 는 그렇게 넘겨 줄 생각이 없었 다.
날카롭게 눈을 뜬 채 그를 바라 보고 있으니 그가 항복하듯 두 손 을 들었다.
"알았네. 내 솔직하게 말하겠 네."
안개 낀 하늘처럼 뿌연 하늘빛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어머니께서 그대가 나와 어떻 게든 엮이기를 바라셨어. 그 방도 를 궁리해 보라고 하시기에 이런 식으로 틈을 만든 거고."
세레논의 어미는 현 황후 티나 키프로스였다.
'티나 키프로스가, 나를?'
눈을 깜빡였다. 티나는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황후다. 그녀가 관여했다면 이번 일이 어떻게 이 렇게 빠르고 쉽게 이루어졌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황궁 내에서 황제 다음 가는 영향 력을 끼치는 이였으니.
'하지만...... 여태껏 티나 키프로
스는 나와 접점이 없었는데......
원작 속 그녀는 세레논을 황제 로 만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 는 인물이었다. 오직 그것에 사활 을 거는 잔인하고 매정한 인물. 그래서 원작에선 악녀로 불리었 다.
'그런 사람이 왜 내게 관심을 가 진 거지.'
대충 짐작은 가지만 확신하기가 애매해 고민하고 있을 때, 머리를 긁적인 세레논이 내 주위를 흐트
러트렸다.
"이런 일에 영애를 연관시키게 되어 미안하게 생각해. 형님께 도...... 상당히 죄송하고. 어머니 의 명으로 그대를 이리 연루되게 하긴 했지만, 사실 나도 그대에게 개인적인 관심이 있긴 하네."
그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감돌았다.
"대체 어떻게, 바실리스크에게서 살아남은 걸까."
사교계는 지금까지도 온통 나에 대한 소문으로 시끄러웠다. 내가 어떻게 생존했느냐에 대한 문제로 말이다. 세레논에 경우 눈앞에 바 실리스크를 마주했다가 내 지시에 따라 도망간 뒤 내가 멀쩡한 것을 확인한 경우이니 더 궁금할 게 뻔 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라도 그대 와 접점을 만들고자 했네. 거절하 지 않은 걸 보니 그대도 이 기회 에 날 알고자 하는 것 같은데. 아 닌가?"
' 예리하군,'
역시 세레논은 감이 좋았다.
'디에고가 완벽한 군주의 상일 뿐이지, 사실 세레논도 상당히 현 명한 사람인데......
태양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하 는 달. 사람들은 세레논을 그리 칭했다.
"......맞습니다."
"그럼 우리는 서로에게 이로움 을 줄 수 있는 거 아니겠나. 어렵
게 생각하지 말게."
세레논이 유하게 웃었다.
'역시, 내게 악의는 없어.'
수상한가 싶으면서도 악의는 읽 히지 않는다.
'우선...... 검술 수업은 해야겠 지.'
여기까지 온 이상 안 할 수는 없다, 명색이 검술 스승이었으니 까.
"......좋습니다. 우선, 한 번 해 보죠."
허리춤에 달린 검집에서 검을 꺼내었다.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날 선 검이 모습을 드러냈 다.
"우선 황자 저하의 실력을 봐야 겠지요. 실력을 보고, 어떤 식으 로 수업을 할지 다음 주까지 스케 줄을 편성해 오겠습니다. 가벼운 대련 괜찮으십니까?"
"물론이네. 그런데...... 영애는
보호구를 착용하지 않아도 괜찮겠 나?"
실제 검으로 하는 대련에선 보 호구를 다닥다닥 착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내가 오기 전 이미 수련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 세레 논은 보호 마석이 삽입된 보호구 를 착용하고 있는 반면, 나는 가 벼운 와이셔츠 한 장에 재킷이 전 부였다.
"걱정에 감사드립니다만, 괜찮을 것 같습니다."
툭 •
재킷을 벗어 가까이에 있던 바 위 위에 올려두었다. 나는 마수를 토벌할 때도 몸이 무거운 게 싫어 보호구 하나 착용하지 않는 사람 이었다.
"안 다칠 거라서 말입니다."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지었다. 눈을 깜빡이던 세레논이 하하! 하 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자신 있는 모양이군. 그
리 말한다면 더 권하진 않겠네. 그럼 진심으로 해 주길 바라네."
人、己르
■ o •
그가 자신의 검을 뽑아 내새웠 다.
"나도 내 스승님의 실력을 알아 야 할 것 같으니."
세레논이 씨익 웃었다.
'내가 진심으로 하면 넌 죽 어......
하지 못할 말은 삼키고 그를 똑 바로 바라보았다.
'오러를 사용하지 않는 선에서만 상대해 주면 되겠지.'
내가 숨기는 건 내가 미르라는 사실이지, 내가 강자라는 것이 아 니었다. 미르의 상징과도 같은 검 은 오러를 보이지 않는 선에선 마 음껏 싸워도 괜찮을 것이다.
'재밌겠군.'
카이사르가 요 근래 계속 바빴 기에 나 역시도 혼자서 수련을 해 야 했다. 실제 인물과 하는 대련 은 꽤 오랜만이었다. 나도 모르게 작게 미소 짓고는 검을 앞으로 내 세웠다.
2m쯤 벌어진 거리에서 오가는 시선. 늘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 던 희뿌연 하늘빛 눈동자가 진지 하게 돌변했다. 세레논의 진지한 태도에 나도 예를 갖춰 웃음을 지 워냈다.
"그럼, 가겠네."
햇빛 아래 반짝이는 두 검날. 그 와 나를 에워싸는 부드러운 봄바 람.
챙!
그 아래에서, 우리의 검이 부딪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