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화
챙! 챙!
날붙이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 께 세레논과 내 검이 몇 번 부딪 쳤다. 탐색전처럼 짧게 이어지는 접전. 사실 내겐 장난 같은 대련 이었으나, 몸을 가볍게 푸는 정도 론 나쁘지 않을 듯했다. 세레논의 공격들을 가볍게 받아내며 한편으 로 생각했다.
'힘은 나쁘지 않아. 공격도 꽤 날카로워. 하지만......
슈욱.
"윽!"
세레논의 검을 피해 살짝 몸을 틀고, 그의 왼쪽 어깨에 검을 찔 러 넣었다. 정말 공격하려는 작정 으로 움직인 검은 아니었기에 허 공을 가른 검 끝은 어깨에 살짝 닿듯 하다 방어막에 튕겨져 나갔 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부여잡는 그를 보며 덤덤히 말했
다.
"검을 오른손으로 다루시면서 모든 움직임이 오른쪽에만 치중되 셨습니다. 왼쪽에 빈틈이 많이 보 입니다."
소드 마스터인 내 눈엔 지적해 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세레 논이 전력으로 휘두르는 검을 가 볍게 내치며 눈을 날카롭게 떴다.
'마나를 운용하긴 해. 꽤 나쁘지 않게 운용하는데......
세레논은 정말 소드 익스퍼트를 앞둔 검사가 맞는 것 같았다. 그 는 꽤 유려하게 마나로 검을 강화 시켰고, 움직일 때도 마나를 이용 해 빠르게 움직였다. 세레논은 마 나를 잘 다뤘다.
'그 마나를 어떻게 오러로 치환 시키는 건지 감을 못 잡았군.'
마나를 보조 도구처럼 사용하며 검을 휘두르는 것과 마나를 오러 로 치환시켜 오러로 싸우는 건 차 원이 달랐다.
'자신만의 답이 뭔지 감을 잡아 야 뽑아낼 수 있는 것이니 직접적 으론 못 도와주겠지.'
오러는 그 본인이 한계 앞에서 찾아낸 답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그걸 찾아내는 건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었다. 스스로가 해야만 했다.
'내가 오러를 사용할 수 있었던 건...... 그때부터였지.'
내가 오러를 쓰게 된 계기. 새삼 떠오른다. 그 기억은 떠올리기만
해도 목구멍으로 피가 솟아나듯 울컥하는 감정에 잠시 입술을 깨 물었다.
인간이 시련 없이도 성장할 수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시간 이 지남으로써, 삶을 경험함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좋았을 거다.
'세레논은 나처럼 시련을 계기로 오러를 발현하지 않았으면 좋겠 네.'
6년 전, 내가 오러를 발현하게 된 계기는 스승의 죽음이었다.
'이 생각은 그만하자.'
아직도 떠올리면 괴로운 기억이 었다. 심호흡으로 빠르게 생각을 지우고, 검 손잡이 끝으로 내겐 엉성하게만 보이는 세레논의 손을 퍽 쳤다.
"윽!"
"속도가 너무 느리십니다. 손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세레논의 검술은 민첩함과 예리 함 부분에서 떨어졌다. 이를 악문
세레논이 휘두른 검을 빙 돌아 피 하곤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크윽."
"반응도 늦으시고요. 감이 너무 무디십니다. 공격을 예측하지 못 해서야 아무리 강해도 이미 목이 잘린 후일 겁니다."
또다시 지적하며 크게 그어져 온 검을 무심하게 막아냈다.
나는 세레논을 봐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를 놀게 두진 않았다. 나는 그가 크게 다치지 않는 선에
서 잘근잘근 밟고 있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실 겁니 까? 이게 저하의 최선이냔 말입 니다. 저는 저하께 검을 가르쳐 드리러 온 거지 저하의 소꿉놀이 파트너를 하러 온 게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하시려면 검술은 그 만두시고 책이나 읽으시는 게 어 떠십니까. 이리 해서야 더 하시는 건 시간 낭비인 것 같은데."
이번엔 꽤 거칠게 독설을 뱉었 다. 도발은 유치한 방식이긴 했지 만, 도발만큼 사람의 한계를 확인
하기 좋은 촉진제도 없었다.
계속해서 지적당하고 얻어맞으 면서도 침착하던 세레논의 푸른 눈동자가 검을 그만두라는 말에 기이한 빛으로 번뜩였다.
'눈빛 하나는 나쁘지 않군.'
눈동자 위로 치밀어 오르는 감 정은 분노, 오기, 그리고 처절함 이 응어리처럼 뭉쳐 있었다. 그 눈빛을 묵묵히 마주하다 하나 결
론을 내렸다.
'가벼운 마음으로 검을 잡고 있 는 건 아니군.'
취미나 교양 정도로 검을 다루 는 건 아닌가 생각했던 마음을 지 워 냈다. 검을 부딪쳐 본 결과, 세레논의 검은 '잘한다', '재능 있 다'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검엔 간절한 무언가가 있 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가르치는 게
재밌지.'
나는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읏음을 오해한 건지, 눈을 번뜩이 던 세레논이 으득 이를 갈더니 내 가 피하기 쉽게 준 공격을 허리 숙여 피하곤 검을 앞으로 세웠다.
'••••••호오.'
그의 검 위로 여태껏과는 다른 기운의 마나가 모였다. 나는 눈을 날카롭게 떴다. 그의 머리칼 아래 로 허공을 난 땀방울들이 햇빛을 받아 은구슬처럼 반짝인다. 세레
논은 이미 상당히 지친 상황. 이 번이 그의 마지막 공격이라는 것 은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위잉.
세레논의 검으로 밀집된 마나가 단단해진다. 검을 머리 위로 높이 든 그가 나를 향해 내리치듯 검을 휘둘렀다.
챙!
날붙이가 맞부딪치는 거친 소리. 검 한 자루가 허공을 날아 빈 땅
에 꽂혔다.
털썩.
온몸이 멍과 땀범벅인 세레논이 쓰러지듯 몸을 기울이더니 땅에 한쪽 무릎을 꿇고 거친 숨을 들이 쉬었다.
' 대단하군.'
애초에 이건 세레논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지렁이와 용의 정면대결 같은 것이었으니. 오러 도 쓰지 못하면서 나를 상대로 이
정도로 버텨 낸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게다가...... 방금 그건 오러의 기운이었어.'
조금 전 세레논의 검을 덮었던 기운. 미미할 정도로 형체가 불분 명했지만, 나는 읽을 수 있었다.
세레논의 오러는 달빛을 닮은 은색이 었다.
'소드 익스퍼트가 코앞이군.
지금은 무의식적으로 끌어낸 듯 하지만, 조금만 더 수련하면 자의 로 오러를 출력하는 방법을 알아 낼 것 같았다. 꽤 만족스러운 실 력에 작게 웃다 세레논을 바라보 았다.
"......저하."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멍 하다. 세레논은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수심과 고뇌로 깊어지던 눈이 천천히 내게로 향한다.
"내가...... 검에 진심이 아닌 것
으로 보이나?"
낮은 목소리가 무겁게 내뱉었다.
'......이런. 역린인가.'
세레논에 한계를 본 것은 확실 하나, 너무 예민한 걸 건드린 모 양이었다. 나는 깊이 허리를 숙였
"죄송합니다. 제가 뚫린 입으로 실언했습니다."
"아니, 아니네. 불쾌했던 것은 아니야. 그냥 새삼...... 내가 왜
검을 배우고 있는지 싶어서."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깜빡이 니, 땅에 털썩 앉은 세레논이 눈 을 굴렸다.
"참 열심히, 처절하게 검을 배워 왔는데...... 생각해 보면 그 계기 가 참 우스워서."
"그 계기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됩니까?"
상당히 생각이 많아 보이는 세 레논을 바라보다 나지막이 물었 다. 그는 저물어 가기 시작한 하
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검은...... 형님께서 발을 들이 지 않으신 유일한 종목이었거든."
'세레논의 형님이라면, 디에고.'
뛰어난 카리스마와 통솔력. 지략 에 대한 천재적인 두뇌와 젊은 나 이임이 믿기지 않는 현명함. 디에 고 솔라티네는 완벽하다시피 한 인간이었다. 세레논은 아마도, 그 런 디에고가 할 수 없는 것을 해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꽤 간절했고...... 가장 열심이 었던 것이었네.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생각 해 보면 시작한 이유도 별게 아니 고, 이로 인해 얻고 싶은 것도 확 실치 않거든. 새삼 내가 한심하다 는 생각이 들었네."
세레논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 렸다. 빛을 잃은 그의 눈동자를 가만 들여다보다 한숨을 쉬며, 아 무렇게나 바닥에 앉아 있는 그에 게로 손을 내밀었다.
"겨우 한 번 진 것으로 깊게 생
각하지 마시죠. 저라고 세계를 재 패하겠다는 마음으로 검을 들었던 건 아닙니다."
세레논이 천천히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민 내 손을 빤히 바라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공녀는 어쩌다 검을 잡았 나?"
"살기 위해서요."
계기는 간단명료했다. 그저 살고 자 했고, 살길이 용병이 되는 것 밖에 보이지 않았기에 검을 들었
다. 내 대답에 눈을 깜빡이던 세 레논이 '아.' 하고 탄식을 뱉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 보니 영애는 평민 출신 이라고 했지. 예법이 완벽해서 잊 곤 하는군."
"저는 저하께서 왜 검을 잡으신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해 할 수도 없을 겁니다."
냉정하게 말했다. 개개인마다 사 정이 다를 텐데 그걸 이해하려 드 는 건 오만일 뿐이다.
"다만. 이렇게 스승과 제자로 만 나게 된 이상,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저하의 성장을 돕겠 습니다."
맞잡은 손을 힘주어 당겨 그를 일으켰다. 나는 그를 모른다. 아 마 그는 내게 해가 될 사람일지도 몰랐다.
'카라쇼가 날 가르쳐 주겠다고 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허나, 나는 한 사람의 검사로서, 또 한때 스승의 덕을 크게 받은
사람으로서, 간절해 보이는 세레 논을 돕고 싶었다.
"저는 반드시, 저하께서 다다를 수 있는 최대의 경지로 저하를 이 끌어 드릴 겁니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세레논이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잠시 파란이 이는 두 눈동자.
"영애는 분명 소드 익스퍼트겠 지. 나를 이리 쉽게 이겼으니."
세레논이 확신 어린 추측을 내
뱉었다. 아무래도 소드 마스터라 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모양 이었다. 나는 잠시 눈을 굴리다 그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분명 그럴 텐데, 왜 나와 대련 할 때는 오러를 사용하지 않았 지?"
'그야...... 내 오러 색을 보여 주 면 안 되니까.'
실제 이유는 이것이었으나, 솔직 히 말하면 무척 수상해 보일 게 뻔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느릿
하게 입을 열었다.
"오러를 사용했다면 저하께서 다치셨을 겁니다. 제 실력을 자랑 하는 시간도 아니고 가벼운 대련 이었을 뿐인데 오러를 사용할 필 요는 없었죠."
入 e 르
■ O •
가뿐한 손길로 검을 검집에 넣 었다. 피식 읏은 세레논이 마찬가 지로 자기 검을 검집에 넣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내게 자기 실
력을 자랑하려 했을 거네. 영애는 정말 재밌는 사람이야."
다시금 반짝이기 시작한 세레논 의 눈동자를 올곧이 마주했다. 늘 생각하지만, 이 때 묻은 황궁에서 평생을 살았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좋은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 다.
"칭찬 감사합니다. 허나 이제 제 가 저하의 스승인데 좀 더 예의를 갖춰 말씀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 영애입니까?"
냉정하게 눈을 번뜩이며 단호히 말했다. 그를 가르치기로 한 이상 대충 할 생각은 없다. 세레논의 스승으로서, 그를 철저히 가르치 고 얻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얻 어 낼 생각이었다.
세레논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 다. 입을 살짝 벌리던 그는 이내 상황을 읽었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제자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스승님. 앞으로 실수는 없을 겁니
솔라티네 제국은 스승과 제자에 대한 위계질서가 확실하다. 아무 리 황자라 해도 제 스승에겐 확실 한 예를 갖춰야 했다. 나는 그제 야 웃었다.
"좋습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의 앞으로 내 손을 내민다. 누 구도 손만 보고선 공녀라고 예측 하지 못할 흉터투성이 험한 손을. 세레논이 내 손을 지긋이 바라보 는 것이 느껴졌으나, 부끄러워하
거나 숨기진 않았다. 나는 이 흔 적들을 토대로 강해져, 세레논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 니.
"당신 같은 사람을 스승으로 만 나게 되어 행운이군요."
그가 내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담백하지만, 전과는 다르게 생기 가 든 목소리. 대련으로 지친 그 의 다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으나 세레논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있었다.
" 그럼••••••
무어라 말을 하려다 느껴지는 인기척에 미간을 좁히며 황궁 쪽 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 오고 있었다.
"말씀 나누시는 중에 실례합니 다만, 크리시스 공녀님."
공손한 걸음으로 나와 세레논 앞에 다다른 시종이 허리를 숙였 다.
"황후 폐하께서 공녀님을 호출 하셨습니다."
세레논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