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화
"......어머니께서 스승님을 왜 호출하시는 거지?"
"송구하옵니다만, 저 또한 이유 는 듣지 못하였고 모셔 오라는 명 만 들었습니다."
시종과 대화를 나누는 세레논의 표정은 지나치게 굳어 있었다. 무 척 심각해 보이는 그를 잠시 바라 보다 눈을 굴렸다.
'왜 부르는지는 대강 예상이 되 니...... 못 갈 건 없지. 늦게 돌아 가서 한 소리 들을 것 같지만.'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에게 늦게 돌아왔 다고 꾸중을 들으리라 예상하면서 도 시종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갈 수는 있네만, 보다시피 내 상태가 황후 폐하를 보러 갈 상태 는 아니라서. 괜찮나?"
"상태가 어떻든 즉각적으로 와 주길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대련을 직전에 마친 탓에 나는 살짝 땀이 나고 흐트러진 상태였 다. 시중의 확답에 고개를 끄덕이 곤 바람에 날린 머리를 대강 정리 했다.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것 같습 니다, 저하."
"자, 잠깐!"
세레논이 급하게 나를 잡았다. 혼들리는 그의 동공. 그가 당황했 음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기에 미 간을 좁혔다.
"문제가 있으십니까?"
"그, 러니까, 안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눈을 피한 세레논이 우왕좌왕 말했다.
'하기야. 티나 키프로스는 잔혹 한 사람이니.'
아마 세레논은 티나가 내게 무 슨 짓을 할까 걱정이 되는 것 같 았다. 나는 공작가의 일원이었기 에 정 끌리지 않으면 호출을 거절 할 순 있었다.
'하지만, 한 번쯤 얼굴을 봐야 하는 사람인걸. 티나가 멍청한 사 람도 아니니 날 대놓고 해하려 들 리는 없고. 해하려 들어도...... 쉽 게 당해 주진 않을 테니까.'
나는 티나의 호출을 거절할 생 각이 없었다. 걱정스러워 보이는 세레논에게 작게 웃어 주었다.
"괜찮습니다. 저하의 스승이 된 이상 학부모를 한 번쯤은 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부모라는 단어에 세레논의 표 정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미묘해졌다. 조금 웃음을 참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부디 평안하시기를. 먼저 물러 나 보겠습니다."
황궁 쪽으로 몸을 돌리곤 시종 에게 길 안내를 종용했다. 잠시 세레논과 나를 번갈아 보던 시종 은 세레논에게 짧은 인사를 남긴 채 나를 안내했다.
티나의 궁은 세레논의 궁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차가운 색들 이 메인 컬러가 되는 엄숙한 궁 안을 걸으며 무섭도록 깨끗하다는 생각을 했다.
" 이곳입니다."
긴 복도를 걸어 다다른 알현실 앞은 기사 둘이 지키고 서 있었 다. 나와 시종을 확인한 기사 하 나가 알현실의 문을 열었다.
"왔군."
문이 열리면, 내 귀를 사로잡는
차갑고 단조로운 목소리.
'......역시. 지배자는 지배자라는 건가.'
분명 무력의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는 일반인이었음에도 공기를 압 도하는 아우라가 대단했다. 소드 마스터인 나조차 잠시 미간을 좁 히게 한 그녀의 위압감에 감탄하 며, 사뿐한 걸음으로 그녀의 앞에 서 허리를 숙였다.
디에고가 황제와 똑 닮은 반면, 세레논은 황후와 닮았던 모양이었
세레논의 머리카락보다 조금 더 채도가 높은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을 듯 말 듯한 길이로 짧게 다듬어져 있다. 나를 기다리 는 잠시의 시간도 기다리지 못하 겠다는 듯 알현실에서도 서류를 읽고 있던 두 눈동자는 희뿌연 파 란빛. 색깔부터 처진 눈꼬리까지 마치 복사 후 붙여넣기라도 한 듯 세레논과 똑같았다.
그녀와 세레논의 얼굴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단연 눈빛이었다.
비록 뒤에서 뭔가 생각을 하고 있 을지언정 드러내는 눈빛은 유들유 들한 세레논과는 달리, 티나의 눈 빛은 금방이라도 상대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맹수의 눈빛 같았다.
나는 그 눈빛을 피하지 않고 받 아내며 천천히, 그리고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카슈미 르 크리시스입니다."
티나 키프로스. 이 제국의 황후 였다.
'디에고를 끊임없이 죽음의 위기 에 처하게 만든 사람.'
그 생각을 하면 머릿속이 싸해 진다. 저 우아한 얼굴로 디에고 암살을 명했으리라 생각하면 소름 이 끼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티내는 것은 바보 천지만도 못한 거다. 애써 태연함 을 가장하고 묵묵한 표정을 유지 했다.
"갑작스러운 호출에 응해 줘서
고맙네. 부디 앉게."
티나가 가리킨 그녀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가 들어와 내 차와 다과들을 의자 사이 책상에 배치시키곤 조 용히 물러갔다.
'독은 없군.'
홍차가 든 잔을 들어 올리고 잠 시 향을 맡다 결론 내렸다. 티나 가 직접적으로 날 공격할 만큼 멍 청한 이는 아님을 앎에도 그녀를 잘 모르다 보니 습관처럼 경계하
게 됐다. 완벽한 예법으로 몸을 움직여 홍차를 입에 머금었다.
"갑작스러웠을 텐데 군말 없이 세레논의 스승이 되어 준 점 고맙 게 생각하고 있네. 세레논과의 첫 수업은 어땠나."
"아. 황자 저하께선 습득력이 무 척 빠르시더군요. 즐거웠습니다."
어쩐지 정말 학부모와 면담을 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 어색하게 답변하니 우아하게 잔을 들어 올린 티나가 고개를 끄 덕였다. 그녀의 작은 손짓과 몸짓
엔 고귀함과 우아함이 깃들어져 있었다.
"세레논은 영특한 아이지. 그나 저나, 그대가 황제 폐하의 말벗도 겸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네."
"아, 네."
"혹시 폐하께서 특별히 하시는 이야기 있으시던가? 예를 들 면......
티나의 푸른 눈동자가 세차게 번뜩였다.
"황태자비가 되라고 했다던가."
"쿨럭."
갑작스러운 발언에 헛기침이 흘 러나왔다. 다행히 얕은 기침이라 서 찻물을 뱉어내는 일은 없었다.
'이런 걸...... 왜 물어보는 거 지?'
깜짝 놀란 마음을 애써 정리하 곤 티나와 마주했다. 먹잇감을 눈 앞에 둔 맹수처럼 번뜩이는 눈은 한 점의 장난기도 없이 진지했다.
'마지막에 디에고와 세레논을 겸
해서 사귀어도 된다는 미친 소리 를 하긴 했지만...... 그건 농담이 었을 거고. 황태자비가 되라는 소 리는 없었는데......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말씀은 없으셨습니 다."
"그럼 다행이군. 내가 영애를 부 른 이유가 궁금하겠지. 단도직입 적으로 말하겠네."
티나의 잔이 책상 위로 올려졌 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시선이 나 를 향한다. 그녀의 시선 앞에 서 있으면 마치 저울에 매달리듯 계 산되고 계량되는 것 같았다. 지긋 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티나 가 입을 열었다.
"그대, 황자비가 될 생각 없 나?"
황자라면 2황자 세레논이 유일 하다. 저건 세레논의 아내가 되라 는 소리였다.
순간 찻잔을 떨어트릴 뻔했으나 정신력으로 버텼다. 동요를 보일 까 홍차에 고정시켰던 얼굴, 홍차 위로 혼들리는 내 동공이 비쳐 보 였다.
세레논에게서 이번 일에 티나가 연루되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 녀가 나를 2황자를 지지하는 귀 족파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고 있 음은 예측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깊이 끌어들 이고 싶어 하고 있었다니......
황자비가 되라는 소리는 '같은 배를 타 보자' 정도의 제안이 아 니라, '배의 1등 항해사가 돼라'는 제안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갑작 스러움에 할 말을 잃고 있으니, 티나가 말을 이었다.
"알아. 당황스럽겠지. 조금 조급 한 제안이었다는 거 아네. 허 나...... 그대가 황태자와 친분이 깊다는 걸 아니 나도 조급해서. 크리시스 공작가의 공녀라는 좋은 패를 황태자에게 넘겨줄 수는 없 지 않는가."
단호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정말 단도직입적으로 상황을 말했다. 그녀는 나를 패라고 부르는데 거 리낌이 없었다.
'그러니까 티나는 내게 세레논과 의 정략결혼을 제안하는 거군.'
귀족들에게 있어 결혼은 두 조 직의 결속을 단단히 할 최고의 도 구쯤으로 이용된다는 건 알고 있 었다. 허나 이렇게 직접 제안을 받으니 조금 멍한 느낌이었다. 말 없이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티나 가 말을 이었다.
"크리시스 공작이 그대와 아리 아 크리시스 공녀를 정략결혼 시 킬 마음이 없다고 공표하긴 했네 만, 아비와 당사자의 마음은 다를 수도 있지 않은가."
'카이사르가 그런 것도 공표했었 나.'
입술을 느리게 축이며 턱을 쓸 었다. 차가운 눈으로 나를 관찰하 던 티나가 입을 열었다.
"나는 세레논을 황제로 만들 걸
세. 세레논이 황제가 되면, 그대 는 저절로 황후가 되겠지. 이 제 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 되는 걸세. 모든 권력이 그대 손에 모 이는 거야."
티나가 다리를 꼬고 상체를 숙 여 내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짙 은 푸른빛 드레스가 잠시 펄럭였 다. 그녀의 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집착 같은 야망이었다.
"여자가 한번 세상에 태어났으 면 큰 꿈을 꿔야지. 황제를 남편 으로 두는 삶, 탐나지 않는가? 그
대가 황자비가 되어 공작가가 힘 을 보태 준다면 세레논이 황제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네."
"우리와 함께 해 볼 생각 없는 가."
티나는 내게 크리시스 공작가의 힘을 빌려주면, 황후로 만들어 주 겠다는 제안을 하고 있었다.
'황제를 남편으로 둬야만, 가장 고귀한 여인이 될 수 있는 건가.'
고민에 빠진 채 잠시 찻잔을 쓸
어내리던 나는 느릿하게 입을 열 었다.
"......몇 가지, 질문을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사항이라 면 대답해 주겠네."
티나가 한 점 흔들림 없는 우아 한 손짓으로 찻잔을 다시 들었다. 조금의 허점이나 흐트러짐조차 없 는 몸가짐과 옷매무새를 보며 잠 시 헛숨을 들이쉬었다.
'황후는 저래야 하는 걸까.'
무섭도록 철저해 인간이 아니라 기계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 다. 잠시 코르셋으로 힘껏 조여진 그녀의 허리에 시선을 두다, 신중 하게 입을 열었다.
"우선, 왜 제게 이 제안을 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크리시스 공작 가의 힘이 필요하심은 알겠으나, 아시다시피 공작가의 딸은 하나가 아닙니다. 저보다 훨씬 훌륭하고 사교계의 파급력이 큰 아이도 있 죠."
"요컨대, 황후로선 아리아 크리
시스 공녀가 더 적합하다는 거 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티나가 피식 웃었다.
"나도 당연히 그 생각을 했지. 그래서 아리아 공녀에겐 이미 한 번 제안했던 적이 있어."
"......이미 제안했었다고요?"
눈을 크게 떴다.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설마...... 그때인가.'
아리아가 이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었다. 허나 대강 예측이 가는 상황은 있었다.
몇 달 전쯤, 카이사르와 아리아 가 답지 않게 사이좋게 둘러 앉아 심각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가 있었다.
'황후 쪽에서 연락이 왔지만...... 역시싫어요. 내가 결혼을 왜 해? 난 평생 언니랑 살 거예요.'
'너라면그럴줄알았다. 놀랍지 도 않군. 어차피 크리시스는 여태
껏 중립이 었고, 그 제안 하나 거절 한다고 위태롭지않다. 네 마음대 로 해라.'
'두 사람이서 뭐 그리 심각합니 까?'
'아, 아무것도아니야!'
'별거 아니다.'
웬만해선붙어 있지도않는둘이 서 머리를 모으고 속닥이기에 뭘까 했던적이 있었다. 황궁, 황후 어 쩌고 하기 에 조금 이상하다 싶었는 데 티나의 제안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 그대에게 한 것과 똑같이 제안했었어. 허나 단호하게 거절 하더군. 그래서 그대에게 제안한 거야."
티나가 담담히 말했다. 손끝을 매만지던 나는, 느리게 시선을 들 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나 더 여쭙겠습니다. 황후 폐 하께서는 2황자 저하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도 괜찮으신 겁니까?"
"......웃긴 소리를 하는군."
내 물음이 떨어지자 말없이 날 바라보던 티나가 차갑게 읏었다.
"황족의 결혼은 사랑의 결실 같 은 게 아니네. 최선의 결속을 위 한 도구 같은 거지."
"압니다만, 그래도요. 저와 결혼 한 황자 저하께서 행복하실 거라 고 생각하십니까?"
잠시 멈칫한 티나가 시선을 내 린다. 잔을 느리게 매만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랑은 한 계절 동안 잠시 피
었다가 지는 꽃 한 송이 같은 거 야."
우아한 걸음으로 방을 가로지른 그녀가 창가 앞에 섰다. 창가를 장식하던 붉은 튤립 다발. 이를 지긋이 응시하던 그녀가 유려한 손길로 화분에서 한 송이를 뽑아 냈다. 티나의 하얗고 작은 손 안 에 아름다운 꽃 봉우리가 들어찼 다.
"시기가 지나면 시들어 버리고, 너무 쉽게 바스러지지."
꾸욱.
하얀 손이 주먹을 쥔다. 바스러 진 붉은 튤립이 피를 쏟아내듯 그 녀의 손 틈새를 비집고 나왔다. 죽은 튤립의 잔해가 잔뜩 묻어난 자신의 손을 서늘한 눈으로 바라 보던 티나는, 미련 없이 잔해들을 땅에 흩뿌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 왔다.
잠시 방 안을 덮은 튤립 냄새가 피 냄새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
"사랑은 한순간이지만, 권력은 영원하네."
다시 자리에 앉은 티나가 붉은 꽃잎의 잔해가 남은 손을 털어냈 다.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갑고 매 정해 무서울 정도였다.
"나는 영원할 권력을 내 아들에 게 물려주고 싶었네. 그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