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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00화 (100/254)

100 화

'하지만 그 권력을 받은 세레논 이 기뻐할까.'

비록 잠시 동안이라고 해도 내 가 봐 온 세레논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무어라 덧붙이고 싶어 입을 뻐끔거리다 그저 닫아 버렸 다.

'대단한 사람이군. 여러모로.'

두 눈동자에 들어찬 단단함은 산전수전을 겪으며 하나의 신념으 로 굳어진 그녀의 정의였다. 내가 감히 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 다. 비록 나와 방향은 다를지라도 정말 대단한 사람임을 인정하며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신념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 다 티나는 내가 하는 말을 들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원작에서 티나 키프로스는 어떤 결말을 맞았더라.'

잠시 눈을 굴리며 생각을 더듬 어 보았다. 어제 '요정의 밤'의 내 용을 적어 놓은 노트를 정독해서 그런지, 조금 가물가물하긴 해도 생각이 났다.

원작에서 디에고는 황제의 갑작 스러운 죽음으로 황급히 황위에 오른다. 그 후 세레논은 처형하라 는 황제파 귀족들의 원성 속에서 도 디에고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 해 대공이 되고, 티나는 옥에 갇 히는 것으로 일단락이 된다.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희대의 악녀 황후의 최후는 그러 했다.'

원작에 적혀 있었던 문장을 가 만 떠올려 보았다. 왜인지 기억에 아주 깊게 남아 아직도 생생히 떠 오르는 문장. 기분이 가라앉은 나 는 턱을 느리게 쓸었다.

'티나 키프로스는 그저 '희대의 악녀 황후'라는 호칭만으로 정의 될 수 있는 단면적인 악역이었을 까.'

티나의 악역을 옹호하는 마음은 아니었다. 그녀가 디에고에게 해 온 짓들은 디에고의 친구로서 절 대 용서할 수 없는 짓들이었으니 까.

다만 그녀를 소설을 현실로 맞 이한 입장에서 문득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단순한 생물이 아닌데, 티나 키프로스는 정말 뼛 속까지 악역일 뿐이었을까?

눈앞의 그녀를 지긋이 응시했다.

사실 이런 의문을 느끼는 건 이 유가 있었다.

마수들 사이에서 실력을 기르던 내 감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나보 다 강한 소드 마스터인 카이사르 조차 내 예민한 감은 따라오지 못 할 정도였다.

'그런데 티나 앞에선 감이 울리 지 않아.'

아무리 인상이 좋고 행동이 선

량해도 조금이라도 위험 요소가 있다면 내 감은 어김없이 울렸다. 그런데 티나 키프로스 같이 겉보 기에도 위험한 사람에게 울리지 않는다니, 이건 정말 기묘한 일이 었다.

'감이 많이 죽었거나, ......티나 가 위험한 사람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였다. 허나 둘 다 가 능성이 없어 보여, 나는 잠시 고 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 상황부터 정리하고.'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고개를 휘저어 생각을 일 단락시키고 티나를 똑바로 바라보 았다.

"제안에 대한 대답부터 해 드려 야 할 것 같군요.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저는 황자비가 될 생각 이 없습니다."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끊 어 냈다. 차분하던 티나의 얼굴에 잠시 파문이 일었다. 서늘하게 눈 매를 세운 그녀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대는 언니이니 아리아

현명하리라 생각했거

거절한 것은 유감입니

저는 훗날 황후로 기억

공녀보다

늘"

"제안을

다. 허나

되고 싶지 않습니다."

"••••••무슨?"

티나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황후는 여인으로서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야. 그대는 그 영광이 탐나지도 않나?"

"황후가 대단한 자리라는 것은 압니다. 허나 저는 훗날에 누군가 의 아내로 회자되고 싶지 않습니 다."

흔들림 없이 티나와 마주했다.

'나는 카슈미르 크리시스. 그와 동시에 미르이며, 검사.'

이것은 나의 불변할 정체성이다. 나는 이대로 기억되고 싶지, 황후 로서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1 제국에서 여인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는 황후겠지.'

여태껏 제국엔 여자 황제가 없 었다. 법으로 금지된 것이 아님에 도 없었다. 여자에겐 암묵적으로 금지된 자리. 그리하여 제국의 여 자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 은 황후의 자리가 맞았다.

'하지만 내가 오르고 싶은 최선 의 자리는 황후가 아니야.'

하지만 나는, 카슈미르 크리시스 는, 황후가 되고 싶지 않았다. 카 슈미르 솔라티네로서 황후가 되어

티나같이 살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황후가 될 자신이 없기 도 했다. 나는 통치자의 그릇이 아니었고, 그런 무거운 자리를 버 티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나는 검사로 기억될 거야. 소중 한 것들을 지킨 검사로.'

그것이 내 결론이다. 옅은 파장 이 감돈 티나의 눈동자를 잠시 바 라보다 옅게 숨을 뱉었다.

"저는 결혼을 하지 않을 겁니다.

제 성이 무척 좋거든요. 줄곧, 카 슈미르 크리시스로 남아 있을 겁 니다."

나지막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입술을 꾹 물고 있던 티나가 차갑 게 식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잘난 남편이야 말로 귀족 여성 의 명예다. 알 만큼 아는 그대가 어찌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 나."

잠시 티나를 응시했다. 냉기만을 품은 듯 보이는 뿌연 푸른빛 눈동

자는 아주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 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녀의 눈동자에서 읽을 수 있 었다. 그녀는 실제 생각과 다르게 말하고 있음을.

"송구합니다만 제 명예 정도는 제가 만들겠습니다."

어떤 답을 듣고 싶어 하는 것만 같은 그녀에게 확실하게 말했다.

새하얀 치열 아래에 짓눌리는 티나의 붉은 입술. 그녀가 제 앞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완벽 해 보이던 그녀의 연보랏빛 머리 카락이 흐트러졌다.

"......그대의 마음은 알았네. 이 미 그대를 황자의 스승으로 삼은 이상 바로 철회할 수는 없으니 한 동안은 세레논을 잘 부탁하겠네. 이만 가 보게."

단호한 축객령이었다. 티나의 눈 동자에서 옅은 동요를 읽은 나는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 니다. 즐거웠습니다."

순순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곤 몸을 돌렸다. 등에 닿는 시선을 느끼며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내가 방에서 나와 사라질 때까 지, 등 뒤에 붙은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 힘들다.'

하루 동안 만만치 않은 세 사람 을 만나는 바람에 기가 쭉 빨린 느낌이었다. 팔팔한 몸에 비해 지 쳐 버린 정신을 애써 다잡으며 발 걸음을 옮겼다.

티나와 얘기를 마치고 나왔을 땐 이미 하늘이 어두워져 있을 때 였다. 마석을 이용한 가로등이 비 추는 길을 걷다, 마차가 있는 곳 으로 날 안내하는 시종에게 말했 다.

"이제 슬슬 돌아가 보지 그러나.

도착지도 얼마 남지 않았고, 여기 서부턴 나도 갈 수 있으니까."

"네? 혼자 가셔도 되겠습니까?"

"괜찮대도. 얼른 가게."

조금 머뭇거리던 시종은 내 종 용에 얌전히 돌아갔다. 시종의 기 척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느끼고,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 박 힌 밤하늘은 고고했다.

"거기 있는 거 다 아니까 나오 시죠."

그리고 나무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웃음소리. 움직이는 구두 아 래 잡초가 사르륵 소리를 내며 짓 눌렸다.

"눈치 못 챌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만, 이렇게 대화할 자리까 지 만들어 줄 줄은 몰랐네."

"이리 친히 와 주셨는데 자리를 만들지 않을 수 없죠."

하루 종일 긴장하고 있었던 나 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꽤 반 가웠던 모양이다. 어둠 속에 나타 난 인영을 보며 살포시 웃었다.

"그간 평안했습니까, 디디."

달빛 아래 고고히 웃고 있는 이 는 황태자 디에고였다.

"살얼음판 같은 황궁에서 평안 하고 말고 할 것이 있겠는가. 살 아남는데 급급했지."

"......또 암살 시도가 있었습니 까?"

미간을 찌푸렸다. 디에고와 친밀 해지며 알게 된 바로는, 그가 매 일같이 암살의 위험에 시달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주범을 조금

전에 만났던 것을 자각해 조금 불 쾌해졌다. 디에고가 아무렇지 않 게 웃었다.

"알지 않나. 내겐 일상이라는 거. 이젠 익숙하네."

자신을 죽이려는 끊임없는 시도 들에 익숙해진다는 건 어떤 느낌 일까. 나는 조금 아득해졌다. 그 런 말을 하면서도 태연해 보이는 디에고를 보자니 가슴이 아릿한 느낌이었다. 나는 슬픈 눈으로 속 삭였다.

"익숙한 게 괜찮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익숙하다'와 '괜찮다'는 동의어 가 아니다. 나는 이 두 단어가 동 의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살아왔지만, 역시 익숙해진다고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던 디에고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기다란 속눈썹 에 가려져 그의 눈빛이 보이지 않 았다.

'친구인데. 도와줄 수 있는 게 없구나.'

나는 디에고의 친구이며, 소드 마스터였음에도, 그를 위협하는 것들에게서 그를 도와줄 수 없었 다. 황위 다툼에서 일어나는 일들 은 황제조차 관여할 수 없었으니 까. 그것이 못내 속상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가 이래서 그대를 좋아해."

나지막이 속삭인 디에고가 사뿐 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높아진 시 야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대와 함께 있으면 간신히 살 아남고 있는 게 아니라 진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

디에고가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 나긋하고 아름 다운 웃음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어쩜 저렇게 태연하지.'

매일 밤 암살자를 맞이하는 사 람이라곤 믿기지 않는 밝은 낯. 분명 밤이 찾아왔는데 디에고에게 만 태양이 머물고 있는 느낌이었

다. 밤바람에 휘날려 반짝이는 금 빛 머리카락이 빛무리 같았다. 사 랑스럽게 웃고 있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 푹 한숨을 쉬었다.

"호위는 어쩌고 또 혼자 나오셨 습니까."

디에고가 움찔했다. 그가 내 눈 치를 살피다 자기 머리를 매만졌

"어차피 궁 앞에 짧게 나온 거 아닌가. 이 사이에 무슨 일이 일 어날 가능성은 낮으니......

"그러다 죽는 겁니다. 아시잖습 니까."

대강 얼버무리려는 디에고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디에고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호위 없이 나왔던 그가 어떤 위험에 처했었 는지도.

'하지만 디에고가 왜 호위를 두 는 걸 싫어하는지 아니...... 참••...

어색하게 웃고 있는 디에고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무려 황태자

라는 직위에 다른 면에 있어선 무 섭도록 철저한 그가 툭하면 호위 를 놓고 다니는 건 이유가 있었 다.

'어려서 친구가 하나 있었지. 평 민 출신에 호위 기사였지만 분명 친구라고 생각했어. 몇 년 간 그 아이와 함께 형제처럼 지냈는데, 어느 날 내 잔에 독을 탔던 자가 그 아이라더군. 돈이든 뭐든 내가 더 많이 줄 자신이 있는데 왜 그 런 짓을 했느냐고 물었지. 그랬더 니 그냥 내가 처음부터 싫었다더 군. 내 모든 것이...... 그냥 질투

나고 싫었다고. 내게 보여 준 모 습은 다 거짓이었다고 했네. 그 이후론 호위를 데리고 다니는 것 이 꺼려지더군. 나를 지켜 주는 이들은 하나같이 내 뒤를 노리고 있을 것 같아서.'

담담히 과거를 말하던 디에고의 두 눈에 진 응어리는 너무 크고 깊어 무어라 첨언할 수 없었다. 늘 생각하지만 디에고는 여태껏 미치지 않은 것이 용한 것 같았 다.

"......호위와 함께 다니십시오.

전 디디가 다치는 걸 원치 않습니 다."

조금 속상한 마음으로 중얼거렸 다. 그가 빙긋 웃었다.

"사실 그대와 만나러 오는 길이 니 두지 않았던 걸세. 무슨 일이 생기면 그대가 지켜줄 거 아닌 가."

참으로 무책임한 말을 당당하게 하는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내 웃음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그가 내게로 손을 뻗었

"이런 말들은 그만 하고. 나와 별 보러 가지 않겠나? 그대가 궁 에 올 때마다 보여 주고 싶었는데 그대는 밤이 지나기 전에 늘 가 버렸으니. 내 비밀 장소를 공유해 주겠네."

그야, 어둑해질 때쯤 들어가면 아리아와 칼이 나를 붙잡고 놔 주 질 않으니 그랬다. 내게 뻗은 그 의 손을 빤히 바라보다, 눈을 들 어 그를 보았다.

' 아.'

별을 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디에고의 눈동자에 이미 별이 담 겨 있으니. 푸름 그 자체를 마구 풀어놓은 것 같은 짙은 푸른빛 눈 동자는 별이 박힌 것처럼 반짝이 고 있었다.

"......특별히, 한 번 같이 봐 드 리긴 하겠습니다."

이미 별을 보고도 그의 손을 잡 았던 건, 내 거절로 그의 눈동자 속 별빛이 꺼지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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