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화
"이곳은 내가 어려서부터 즐겨 찾던 곳이네."
느긋하게 걸어 도착한 곳은 황 궁 뒤쪽을 둘러싸고 있는, 언덕 같은 산이었다.
아무렇게나 풀밭 위에 앉은 디 에고를 바라보다 나도 그의 옆에 앉았다. 따라오던 인영도 뒤쪽에
잘 자리 잡은 것 같았다.
"황궁에서도 별은 보이지 않습 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황궁은 밤 에도 환해서 별빛이 묻히지 않나. 궁들이 빽빽해 답답하기도 하고."
나지막이 말한 디에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조금 지쳐 보이는 그를 곁눈질하다, 나도 가 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 휘황하게 떠오른 밝은 달. 밤의 고요함에
순응하듯 잔잔해진 바람.
'......나오길 잘했네.'
용병으로 살 적엔 보기 싫어도 자연 풍경과 밤하늘을 보아야 했 다. 마수를 잡으려면 숲으로 가야 했고, 숲에서 야영할 땐 하늘을 지붕 삼아 잠들 때가 많았으니까.
허나 공작 영애가 된 후엔 하늘 을 구경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 다. 밤하늘의 아름다움에 속으로 탄복하며 오랜만에 하늘을 하염없 이 응시했다.
감히 그 수를 예상할 수 없는 까마득한 별들이 고고하게 빛을 반사하며 언덕 위를 비추었다. 나 는 수백억 개의 눈동자가 나를 주 시하고 있는 것만 같은 아득함을 느꼈다.
한참 동안 서늘한 밤공기에 스 며들어 별들을 헤아렸다. 코끝을 스치는 밤의 향취가 온몸을 노곤 하게 만들었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들 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이, 그저 주어진 아름다움을 만 끽할 뿐이었다.
'아.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옆에 디에고가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재빨리 그에 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짙은 푸른빛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날...... 보고 있었나?'
별을 보러 오자고 했으면서 왜 나를 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 다. 내가 눈을 도르르 굴리든 말 든, 그는 나를 보고 눈꼬리를 휘 었다.
나는 별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게 조금 머쓱해져서 헛기침을 뱉 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오신 것 같은데, 말씀하시죠."
"......그게 티가 났나?"
디에고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 었다. 그가 말하기도 전에 눈치챈 것이 놀라운 듯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디에고가 아무 이유도 없이 이 렇게 찾아올 이는 아니니까.'
내 앞에선 꽤 풀어지는 모습을 보여 주긴 해도, 기본적으로 그는 철저한 계획과 계산 아래 움직이 는 사람이었다.
그런 디에고가 약속도 잡지 않
고 이리 갑자기 왔다는 건 급하게 할 말이 있음이 분명했다.
"제가 디디의 기색 하나 읽지 못할 것 같습니까. 한번 말해 보 시지요."
내 확언에 디디가 헛웃음을 뱉 었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작게 중얼거린 그가 운을 떼었
"그대가 폐하의 말벗이자 세레 논의 검술 스승이 되었다는 소식 을 들었네."
"벌써 들으셨군요."
"그것 때문에 궁이 뒤집어졌으 니까. 심지어 폐하께선 공작가와 의 상의도 없이 결정한다 하셨으 니 궁 안 사람들은 크리시스 공작 의 칼부림을 각오하기도 했네. 오 히려 그대가 별말 없이 수긍한 것 에 다들 놀라워했지."
"그랬군요."
"나도 그대가 이리 궁으로 들어 오는 것을 반대하는 처지였으 니...... 많이 놀랐네."
"••••••네?"
'디에고가 반대를 했다고?'
디에고라면 내가 황궁에 들어오 는 것을 찬성하리라 생각했기에, 이건 예상치 못한 속사정이었다.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 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쓰게 웃 었다.
"귀족파 측에서 그대를 궁으로 들이고자 하는 이유를 눈치챘으니 까. 그대가 궁에 들어오는 순간부
터 황가의 더러운 진흙탕 싸움에 발을 들이게 될 것이 뻔하여 걱정 했네. 분명 그대도 위험해질 테니 까."
"••••••아."
옅게 탄식했다.
디에고는 평생을 황위 다툼 아 래서 고생한 사람이다. 씁쓰름함 이 그득히 담긴 푸른 눈동자를 잠 시 하늘로 돌린 디에고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대는 강한 사람이니 이
더러운 황궁에서도 잘 살아남겠 지. 알아. 그대가 잘할 거라고 믿 네. 허나 정보통을 통해 소식을 들어서 말이지."
그가 내게로 천천히 시선을 돌 렸다. 늘 보석 같다는 감상을 주 는 푸른 눈동자가 짙게 일렁였다.
"귀족파가 그대를 황자비로 만 들려고 한다고."
디에고의 새하얀 치열 아래 붉 은 입술이 꽉 눌렸다. 그는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다리를 끌어안더니 무릎에 뺨을 대며 고개를 돌렸다. 푸른 눈동자가 집요하게 나를 응 시했다.
"오늘 제안을 받았나?"
"......네."
" 수락했나?"
애써 태연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 같았지만, 이미 낮아질 대로 낮아진 목소리는 그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나를 볼 때마다 따사로워 보이던 두 눈은 이번만큼은 온도
가 없어 보였다.
어쩐지 섬뜩한 느낌에 목 뒤를 쓸어내리곤 천천히 고개를 저었 다.
"저는 결혼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 누구와도요. 전 누군가의 아내 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카슈미르 '크리시스'로서 죽을 것이다. 새롭게 갖게 된 이 이름을 너무 사랑하게 되어 버렸 으니까.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너무 그대다운 대답이라 놀랍 지도 않군."
눈을 깜빡이던 디에고가 작게 웃음 지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비록 디디는 저를 동등한 선상 에 있는 사람으로 봐 주고 있지 만, 그래도 제게 있어 주군은 디 디입니다. 제가 황자비가 되면 다 른 주군을 섬기는 것과 진배없 죠."
달빛이 깃든 푸른 눈동자를 마 주했다. 파문이 이는 호수 같은 두 눈을.
"하늘 아래 태양은 하나이고, 제 태양은 디에고입니다. 전 두 주군 을 섬기지 않습니다."
디에고는 달빛 아래에서도 아름 다웠지만, 역시 태양 아래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L "
아, 아
내 굳건한 표정을 멍하니 바라
보던 디에고가 허탈하게 웃음을 뱉었다. 그의 눈동자가 슬프게 반 짝였다. 디에고는 무언가 말하려 는 듯 입술을 열다, 다시금 꾹 닫 았다.
금세 평소의 웃음을 띤 디에고 가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오늘 세레논을 만났겠지."
"네."
" 어땠나?"
나는 눈을 굴렸다.
"생각보다...... 좋은 분이셨습니 다."
"그렇지?"
반짝이는 디에고의 두 눈엔 세 레논을 향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착한 아이일세. 너무 착한 아이 라 저를 줄에 매달고 조종하려는 인형사들조차 내치지 못해. 권력 엔 그다지 관심이 없고 늘 애정을 갈구하지."
그의 입에서 의미심장한 말들이 비집고 나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디에고의 말은 상당히 애매 했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 해 보였다.
'세레논 솔라티네가 디에고와 황 위를 두고 다투는 건 그의 의지가 아니다.'
이 사실은 내 마음을 무척 복잡 하게 만들었다.
'이 황궁에선 어쩌면 모두가 피 해자겠구나.'
완벽한 가해자는 없다. 시작과
끝이 없는 구 모양의 세상에선 모 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일 뿐이었 다.
'그리고 어쩌면, 디에고는 이 진 흙탕 싸움의 최대 피해자고.'
그 순간 찌릿하고 건드려지는 감각에 나는 짙은 한숨을 쉬었다.
시위에 걸리는 화살, 당기는 손 길.
"디디. 앞으론 절대 혼자 나오지 마십시오."
人、르_"르
' O '
콰드득!
서늘한 소리와 함께 뽑은 검-
일반인의 눈엔 보이지도 않았을 속도로 움직여 디에고를 등 뒤에 둔 나는, 그를 향해 날아온 화살 을 거침없이 베어 냈다. 반으로 잘린 화살이 맥없이 땅으로 추락 했다.
"혼자 나오시니 이런 잔챙이들
이 디디를 노리지 않습니까."
난 눈을 차갑게 뜨고 언덕 뒤쪽 의, 검은 옷을 입은 인영들에게로 검을 세웠다.
"젠장! 저년 뭐야! 귀족 영애라 며!"
"빌어먹을...... 검은 장식인 줄 알았더니...... 골치 아프게 됐군."
나를 평범한 귀족 영애라고 생 각했던 건지, 공격이 가로막힌 살 수들 사이에서 당황스러운 웅성거 림이 터져 나왔다.
'총 네 명. 다들 소드 익스퍼트 도 안 되는군.'
내겐 식후 운동 수준도 안 될 일이라 걱정도 안 됐다.
한심함에 옅게 혀를 차고 있자 니, 내 뒤에 선 디에고가 앓는 소 리를 냈다.
"젠장. 어제 보냈으니 오늘은 안 올 줄 알았는데...... 이틀 연속으 로 보내다니......
"어제도 암살자를 만났는데 오
늘 칠렐레팔렐레 혼자 나오신 겁 니까?"
디에고가 슬쩍 눈을 피했다. 걱 정 섞인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으 나, 평소엔 그렇게 철저한 사람이 호위에 한해선 이렇게 구는 이유 를 알아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래도, 그대가 지켜 줄 거 아 닌가."
머쓱한 듯 눈을 굴리던 그가 나 를 바라보며 흐드러지게 웃었다.
내가 지리라고는 조금도 예상하 지 않는 듯 확신 어린 목소리. 날 향한 신뢰로 가득 찬 두 눈.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 굳건한 믿음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결국 작게 웃음을 흘리며 검을 세웠다.
"2분 안에 끝내겠습니다. 여기 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아. 아니네."
콱-
"으아악!"
여태껏 뒤쪽에서 잠복하고 있던 인영이 움직이며 살수들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익숙한 기운을 가 진 인영을 보며 피식 웃었다.
"1분 안에 끝날 것 같습니다."
휙.
마나를 불어넣어 가볍게 도약해 한달음에 싸움 현장으로 도착했
네 명의 살수를 상대하던 인영 이 나를 발견하고 살짝 미간을 찌 푸렸다.
" 당신은......
촤악.
"끄아아악!"
남자의 말은 살수의 비명 아래 흩어졌다. 살수의 어깨를 거침없 이 베어 낸 나는, 비틀거리는 살 수의 오금을 걷어차 중심을 무너
뜨렸다.
"우선 이 상황을 정리하고 얘기 하시죠."
퍽
검 손잡이로 살수의 목덜미를 후렸다. 살수가 신음조차 뱉지 못 하고 풀썩 쓰러졌다. 힘이 조금 많이 들어가긴 했지만 목뼈는 부 러지지 않았음에 위안하며 검을 놀렸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눈으로 나
를 바라보던 남자는, 역시 지금 상황을 마무리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는지 체념한 표정으로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악!"
이 난리통 사이에서도 디에고에 게 화살 날리기를 시도하던 살수 의 팔이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툭 떨어지며 붉은 피가 터졌다.
얼굴로 튄 피를 대강 닦아 내고 살수를 엎어트린 뒤 꿈틀거리는 놈의 목 뒤를 걷어차 기절시켰다.
'저쪽도 끝났군.'
실력을 지나치게 내보이지는 않 기 위해 설렁설렁 처리하는 사이, 반대편에서 싸우던 남자도 대충 상황을 정리한 것 같았다.
기절한 살수들을 걷어차 한곳에 모아 두고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 으로 몸에 튄 피를 닦아 냈다. 디 에고에게 피 묻은 모습을 보여 주 긴 아무래도 좀 그랬다.
'......이젠 사람을 베는 게 아무
렇지 않은 건가.'
무덤덤하게 몸에 묻은 붉은 피 를 닦는 스스로에게서 이질감을 느꼈다.
잠시 숨을 가쁘게 들이쉬었다, 한탄하듯 뱉어냈다.
'칼. 혹시 수련 인형을 사람과 최대한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 줄 수 있습니까?'
'......사람과 비슷하게?'
'네. 피부도 사람이랑 비슷하고 찌르면 피가 나오는 형식으로 만
들어 줬으면 합니다. 가능하겠습 니까?'
'어렵진 않아. 그런데 너...... 괜 찮나?'
'......익숙해져야 해서요. 괜찮습 니다.'
여태껏 셀 수 없는 수의 마수들 을 잡아왔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 을 베는 것엔 익숙하지 않았다. 허나 나는 곧 전장에 나가야 하는 처지.
그래서 선택한 길이 사람과 비 슷한 수련 인형에게 칼을 휘두르
며 살육에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한동안은 수련을 마치고 속을 게워 냈지.'
칼은 정말 대단한 마법사였다.
검날에 베이는 피부의 질감부터 터져 나오는 피까지. 사람이 죽어 갈 때 만들어 내는 형태와 너무도 닮아 있어서, 나는 수련을 마친 뒤엔 한동안 화장실에서 나오지 못했다.
'네가 이렇게 괴로워하는데 나보
고 널 괴롭게 하는 걸 계속 만들 라고? 대체 왜! 슈슈, 넌 크리시 스 공작가의 사람이다! 내 동생이 란 말이다! 너는 사람을 벨 이유 가 하등 없어. 다른 이들에게 시 키면 되니까! 네 명령 한마디에 기사단 하나가 통째로 움직일 수 도 있는데 대체 왜......!'
'칼, 제발......•'
'그냥, 그냥 이유는 묻지 말고, 만들어 주세요. 저는 익숙해져야 합니다.'
내가 한동안 밥을 먹지 못했던
이유가 자신이 만든 인형 때문임 을 안 칼이 미친 듯이 화를 낸 적 도 있었다. 그런 칼의 손을 잡고 칼에게도 못할 짓을 강요한 것은, 오직 인간의 피부를 가르는 감각 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전장에 나가서도 사람 하나 못 죽여 벌벌거릴 수는 없어.'
괴물이 되기 위해서였다.
'......수련의 효과가 있어서 다행 이군.'
울렁거리는 속과 혼들리는 시야 를 무시한 채 그리 생각했다. 곧 바로 게워 내지 않았으니, 그것으 로 충분한 발전이었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애써 억누르며 주위를 둘러보았
' 아.'
마수의 피와는 다른 양상을 보 이는 붉은 피비린내. 검에 묻은 살점. 피로 뒤범벅되어 쓰러진 인 영.
모두 익숙하지 않다. 사실은 끔 찍했다.
나는 평생 용병으로 살긴 했으 나, 실질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겨우 한 번이었으니까'.
13살 겨울, 그 악몽 같던 날 단 한 번.
내 스승과 단 하나뿐이던 친구 를 모두 잃어야 했던 사건에서.
'이제는 익숙해져야 해.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부러 피 가 자욱한 현장을 꿋꿋이 눈에 담 았다.
나는 괜찮았다. 아마 괜찮을 것 이다.
'슬슬 상황을 정리해야지.'
짧게 심호흡하자 잠시 불안정했 던 호흡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표정을 한 차례 가다듬은 뒤, 여 태껏 나와 디에고의 뒤를 쫓고 살
수를 제압하는 것을 도와준 남자 에게로 몸을 돌렸다.
"오랜만이군, 페퍼 엘러바인 경."
짧은 진녹색 머리칼에 연갈색 눈을 가진 남자.
엘러바인 백작가의 차남이자 디 에고의 호위 기사, 페퍼 엘러바인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