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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02화 (102/254)

102 화

"......어떻게 제가 여기 있다는 걸 아셨습니까?"

묘한 표정을 지은 페퍼가 믿기 힘들다는 듯 물었다. 나는 의미심 장하게 웃었다.

"글쎄. 감으로?"

페퍼의 표정이 더 묘해졌다.

디에고와 친밀하게 지내며 저절 로 안면을 튼, 디에고의 호위 기 사 페퍼 엘러바인.

디에고를 처음 만났을 당시 그 를 데리러 온 이이기도 한 이 남 자는 소드 익스퍼트였다.

'소드 익스퍼트의 강자인 자신의 기척을 읽어낸 게 수상한 거겠 지.'

날카로운 페퍼의 시선 앞에서 그저 웃었다. 그렇다고 내가 소드

마스터임을 밝힐 수도 없으니, 모 르는 척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우선 상황부터 정리하도록 하 지."

태연한 걸음으로 페퍼를 지나쳐 디에고에게로 향했다.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던 디에고가 내 검에 묻은 피를 발견하고 표정을 굳힌 채 내 게 다가왔다.

"슈슈. ......괜찮나?"

검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줄기가 땅으로 툭툭 떨어진다. 옅게 떨리 는 손을 꽉 쥐고 급조해 낸 태연 한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물론입니다. 괜찮지 않을 이유 가 없지 않습니까."

살수들이다. 사람의 생명을 앗는 것으로 품삯을 받는,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 그들을 공격했다고 죄 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같이 피를 본 순간 나

도 같은 쓰레기 아닌가.'

얼핏 떠오른 생각 하나가 목구 멍에 걸린 가시같이 나를 괴롭힌 다.

속이 울렁이며 조금씩 금이 가 는 웃음. 불어나는 생각들과 함께 가시가 점점 커져 가는 것 같았

손가락을 목구멍으로 넘겨서라 도 토해 내고 싶었다.

■슈. 슈슈!

그리고 내 어깨를 잡아 오는 손 길.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나는, 귓전을 가르는 디에고의 목소리에 퍼뜩 눈을 깜빡였다.

"네,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디에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잠 시 넋을 놓고 눈을 깜빡이던 나는 머쓱해져 뒷머리를 긁적였다. 동 요를 보였다는 것이 못내 민망했

눈을 도르르 굴리고 있자니, 내 어깨에서 손을 뗀 디에고가 짙게 한숨을 쉬었다.

"괜찮지 않은 것 같군."

"아닙니다. 저는......

스르륵.

"그냥, 좀...... 힘들다고 좀 하 게. 사람 피를 보는 게 괴로웠다 고 해."

그의 한 팔이 내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내 몸에 묻어 있던 피가 디에고의 깨끗한 옷에 배어 들었다. 옅은 바닐라 향이 코끝을 스쳤다.

' 아.'

들이쉰 헛숨을 허무하게 내쉬었 다. 심장이 꽉 조이는 느낌. 그 짧은 포옹에 위로를 받는 것 같았 다.

나는 한숨처럼 웃었다.

'나는, 이 사람을 지켜야 하지.'

나는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다. 그것이 내가 살수들과 다른 점이 었다.

"......이제 정말 괜찮아졌습니다- 디디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옅게 웃으며, 나를 품에 안은 디 에고의 등을 툭툭 쳐 주었다.

어쩐지 나보다 더 동요한 것 같 은 것은 나를 그만큼 걱정하고 있 기 때문임을 알았기에 마음이 짠 해졌다.

"거짓말."

"정말입니다. 이제 괜찮아요."

작게 속삭이고 그를 마주 보았 다. 디에고는 잔뜩 속상해하는 표 정이었다.

"제가 걱정되십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나!"

"디디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인 데요."

조금 놀리듯 말하자, 한숨을 푹 쉰 디에고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

았다.

"그대는 내게 소중한 사람인데,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 나."

따스함이 심장께로 퍼진다. 나는 느리게 웃었다.

"황태자 저하. 이런 일이 일어날 까 봐 제가 함께 가자고 한 것입 니다."

그리고 디에고와 나 사이를 가 르는 차가운 목소리.

디에고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

"내가 분명 따라오지 말라고 했 을 텐데, 페퍼 엘러바인 경."

내게는 익숙하지 않은 매정한 목소리로 잘라 말하는 디에고는 냉철한 황태자 그 자체였다.

시리도록 차가운 디에고의 태도 에도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다가 온 페퍼는 나를 차가운 시선으로 힐끗 보더니 디에고를 똑바로 마

주했다.

"저하를 지키는 것이 제 사명입 니다. 혼자 나가시는 것을 볼 수 는 없었습니다."

"내 명령을 듣는 것이 바로 그 대의 사명이네."

"방금 살수들을 보지 못하셨습 니까? 제가 오지 않았다면 위험 하셨을 겁니다."

낮은 목소리로 정중하지만 치열 하게 대거리하는 페퍼와 지지 않 고 쏘아붙이는 디에고를 보다 한 숨을 쉬었다.

오랫동안 디에고의 호위를 담당 한 페퍼 엘러바인은 충직하고 유 능한 기사였다. 페퍼 덕분에 여태 껏 디에고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는 디에고를 위해서라면 당장 목숨을 던질 수 있을 만큼 충성스 럽기도 했다.

'저하! 혼자 화장실 가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그의 단 하나뿐인 문제라고 한

다면, 자신의 일에 너무 집중했다 는 것이다.

너무.

호위 기사에 대해 좋지 않은 기 억을 가진 디에고는 페퍼를 꺼렸 으나, 페퍼는 디에고를 과보호하 려 들었다.

페퍼가 오직 디에고에게 충성하 고 함께해 온 시간이 긺에도 두 사람이 엇나가는 이유였다.

'디에고는 페퍼를 깊게 신뢰하고

있지만 정은 붙이지 못하고, 페퍼 는 디에고를 군주로서 충실하게 섬기고 있지만 자기 뜻을 몰라주 는 디에고에게 섭섭해하지.'

두 사람의 입장 다 이해가 되었

여전히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안 왔어도 카슈미르 영 애가 날 지켜 줬을 걸세."

"하! 카슈미르 크리시스 영애를 어떻게 믿으십니까! 이젠 2황자

저하의 스승인 사람입니다. 그새 황후의 수족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페퍼 엘러바인!"

디에고가 드물게 극노한 표정을 지었다. 늘 이성적인 그에게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서릿발 같은 냉기를 뿜는 디에 고를 힐끔 보다 조금 경탄스러운 눈빛으로 페퍼를 보았다.

페퍼의 조금 전 발언은 상당히 무례했다. 내가 살수와 한패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도 했으니.

나는 크리시스 공작가의 일원. 내가 조금 전 발언을 걸고넘어진 다면, 페퍼는 책임을 피할 수 없 었다.

'진짜 대단한 충성심이군.'

슬쩍 웃음을 지은 채 입가를 쓸 었다.

페퍼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 발 언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내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디에고를 똑 바로 바라보고 있는 그는 무척 강 직해 보였다.

페퍼는 자신이 봉변을 당하더라 도 디에고에게 소신대로 발언하는 것이었다.

'역시. 참 강한 사람이야.'

전생에 원작을 읽었을 당시엔 페퍼가 좋게 보이지 않았던 기억 이 어렴풋이 난다. 그는 너무 뻣 뻣하고 고지식한 사람이었으니까.

허나 이리 직접 보니 그의 깊은 충성심이 절절히 느껴져 미묘하게 호감이 올라왔다.

나는 페퍼가 싫지 않았다.

"지금 그 발언이 어떤 뜻인지 아나?"

보통 사람들이 분노하면 언행의 온도가 높아지던가. 디에고는 진 정으로 분노하면 오히려 온도가 내려가는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채도가 낮은 푸른 눈동자에 시린 분노가 채워지니 설원 한복판 같

았다.

디에고의 분노를 오롯이 받아 내던 페퍼가 울컥한 표정을 지었 다.

"크리시스 영애가 뭐라고......!"

"지금 이럴 시간이 아닙니다."

페퍼의 말을 끊고 둘 사이에 끼 어들어 만류했다.

여기서 내버려 두었다간 페퍼는 빼도 박도 못할 하극상을 저지를 것이다. 그의 충성심은 참 지극했

지만, 충성심이 너무 강하다 보니 선을 넘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해지 곤 했다.

"저하. 갑작스러운 일로 피로하 실 텐데 이만 들어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건 저하와 제 사이의 일입니 다! 크리시스 영애는......!"

"페퍼 엘러바인."

내게 반박하려는 페퍼를 무감각 한 눈동자로 돌아보았다. 나와 눈 이 마주친 페퍼가 크게 움찔했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서 늘한 미소를 띠었다.

"내가 그대의 무례를 몇 번이나 눈감아줘야겠나?"

그는 나와 마주치고 내게 인사 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도 별말 없이 넘겼건만,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계속 너그러울 생 각은 없었다.

내가 페퍼를 좋게 보고 있는 것 과는 별개로 서열 정리는 확실히 해야 했으니까.

나는 공작가의 공녀, 그는 백작 가 출신의 기사. 나는 이 이상 그 의 무례를 두고 볼 생각이 없었 다.

"......제가 공녀님께 실례했습니 다. 용서해 주십시오•"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내 마 지막 선을 눈치챈 건지, 입술을 꾹 깨문 페퍼가 정중히 허리를 굽 혔다.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받고 디

에고를 돌아보았다. 순간 올라온 분노를 그사이 어느 정도 정돈한 것 같은 그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 고 있었다.

"저하. 많이 피곤하시겠습니다- 이만 들어가시지요."

"• ...그대가 돌아가는 것까지 보고 싶네만."

"저도 저하가 돌아가는 것을 봐 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위험에 처했던 건 저하이시니 저하가 한 수 접어 주시지요."

표정이 한층 풀린 디에고를 향

해 작게 웃어 주었다. 결국 같이 웃은 디에고가 힘없이 고개를 끄 덕였다.

"......제가 황태자 궁의 마법사 들을 호출하겠습니다. 순간이동으 로 이동하시지요."

나와 디에고를 빤히 지켜보던 페퍼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눈을 끔뻑였다.

'황태자 궁은 걸어서 5분 거린 데......•'

"어차피 가까운 거리인데 마법 사들까지 호출할 필요가 있나."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디에 고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우 리 둘의 반응에도 페퍼는 강경했

"다른 살수들이 돌아가는 길에 잠복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닙 니까. 금방 호출하겠습니다."

페퍼가 주머니에서 통신용 마도 구를 꺼냈다. 디에고는 체념한 표 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참...... 하극상인지, 과잉 충성 인지 애매하단 말이지.'

저게 페퍼의 문제였다. 디에고를 너무 걱정한 나머지 독단적이다 싶을 정도로 디에고를 과보호하는 것. 저 태도 때문에 둘의 사이는 좁혀질 듯 좁혀지지가 않았다.

"황태자 저하를 뵙습니다. 궁까 지 모시겠습니다."

페퍼의 호출로 한 명의 마법사 가 나타나 디에고에게 허리를 숙

였다. 내게도 인사를 하는 마법사 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네. 엘 러바인 경. 가지."

가까운 거리로 가는 마법진이라 그런지 마법사는 금방 마법진을 그렸고, 디에고가 마법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디에고를 지켜보던 페퍼는 고개를 저었다.

"송구합니다만, 저는 아무래도 살수들의 뒤처리를 하고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디에고의 눈이 가늘어졌다. 디에 고의 미심쩍다는 표정에도 페퍼는 당당했다.

"......알겠네. 정리하고 돌아오 게."

한숨과 함께 수긍한 디에고가 마법사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퍼 져 나가는 빛.

마지막으로 본 디에고는 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달이 예쁘군.'

고요해진 언덕. 피가 튄 주위를 보지 않으려 괜히 밤하늘로 시선 을 돌렸다. 반짝이는 별들이 세상 의 눈이 되어 나를 단죄하는 것만 같아 더 불편해졌지만.

멍청하게 떨리는 손을 드러내지 않으려 주머니에 박아 버렸다. 잠 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던 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말해 보지 그러나."

내 옆을 지키고 있던 인영이 살 짝 움찔했다.

"......무슨 소리십니까."

페퍼의 목소리가 불퉁했다. 피식 웃은 나는 느리게 눈을 뜨며 그에 게로 고개를 돌렸다. 베이지색을 띤 두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주시 하고 있었다.

"그대 용건은 살수가 아니라 내 게 있지 않나, 엘러바인 경."

그는 내게 할 말이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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