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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03화 (103/254)

103 화

"......어떻게 아셨습니까?"

페퍼가 잔뜩 경계하는 투로 물 었다.

소드 익스퍼트의 위엄이 담긴 낮은 목소리는 꽤 커다란 위협이 될 법도 했으나, 내 눈엔 솔직히 털 세운 고양이처럼 보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그리 강렬한 눈으로 줄 곧 나를 보고 있는데 모르기도 어 렵지 않나."

이글거리는 연갈색 눈동자가 담 은 빛은 호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경계와 의심, 미심쩍음이 뒤섞인 기묘한 눈빛. 적의에 한없이 예민 한 내가 이런 기색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늘 내게 할 말이 많다는 눈으

로 바라보더니 오늘에야말로 허심 탄회하게 털어놓으려는 건가?"

페퍼 엘러바인은 내가 디에고와 만날 때마다 저런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곤 했다. 얼마나 강렬하고 시건방진지, 눈빛을 이유로 모독 죄를 물어도 되겠다 싶을 정도였 다.

'이제야 저 눈빛에서 탈피할 수 있는 건가.'

피식 웃으며 페퍼를 응시했다.

내게 들킨 게 부끄러운 건지 입 술을 앙다문 페퍼가 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늘 생각하지만 참 불손한 눈깔 이었다.

'나야 페퍼가 어떤 사람인지 아 니 넘어가지만...... 참 미련할 만 큼 올곧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페퍼 엘러바인은, 자신 을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보통 귀족들처럼 가면 같은 미소 를 짓고 속내는 꼭꼭 숨기면 될

터인데, 그것도 못 할 만큼 지나 치게 솔직한 사람.

그는 의심을 하면 의심을 하는 대로 얼굴에 다 드러났다.

'게다가 원체 인상도 안 좋지.'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는 예민함 을 넘어 사나워 보였다. 거기다 그냥 봐도 째려본다는 오해를 낳 는 불손한 눈빛이 그의 기본 표정 이었다.

여기저기서 오해를 당할 만한

인상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아.'

그럼에도 나는 페퍼에게 점수를 후하게 주고 있었다. 그가 나를 아니꼽게 보고 있어도 말이다.

전생의 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 몰라도, 지금의 나는 검 사 대 검사로서 그가 마음에 들었 다. 솔직함과 올곧음, 강직함은 내가 검사의 덕목으로서 높게 치 는 요소들이었으니까.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 겠습니다."

'지금도 봐.'

누가 감히 크리시스 공작가의 영애에게 이렇게 말하겠는가.

목 위에 달린 게 소중한 사람이 라면 내 앞에서 언행을 조심 또 조심할 터인데, 페퍼는 조금의 두 려움도 없어 보였다.

늘 열정적으로 이글거리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다 웃음을 흘렸

다.

"그래. 내 들어줄 터이니 한번 말해 보게. 단도직입적으로."

"솔직히 저는 공녀님을 믿지 않 습니다."

공도 아닌 폭탄을 직구로 던지 는 페퍼를 보며 헛웃음을 쳤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연갈색 눈 동자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는 듯 날선 경계를 품고 있었다.

그가 나를 믿지 못한다는 건 이 미 예측하고 있었던 바이니 놀랍

진 않았다. 이유도 짐작이 갔고.

허나 예의상 고개를 기울여 주 었다.

"그런가? 어째서?"

"공녀님께선 출신이 불분명한 분 아니십니까. 무얼 하셨는지 이 성적이고 경계심 많으신 황태자 저하와도 급속도로 가까워지셨죠. 상당히 수상합니다. 게다가 이젠 2황자 저하의 스승까지 되었다고 하니, 황후 폐하의 끄나풀이 됐을 지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얜 진짜 내가 안 무서울까?'

나는 다시금 허탈한 웃음을 내 뱉었다. 평민이었던 내 출신부터 시작해서 황후의 끄나풀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먹이는 페퍼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 같았다.

'하지만 밉지가 않네.'

용병으로 살며 욕설에 무뎌진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페퍼의 말이 비아냥거림이 아니기 때문이 었다. 그는 정말 솔직하고 담백하 게 자신의 의견만을 말하고 있었

다.

나는 표정에 불쾌함을 띠지 않 은 채 곰곰이 생각했다.

확실히, 페퍼는 내가 디에고를 살수들에게서 구해 내었던 검사임 을 모르니 디에고와 내가 가까워 진 계기 역시 모른다. 그의 눈엔 내가 상당히 수상해 보일 게 분명 했다.

"요컨대, 내가 저하께 폐가 될까 염려가 된다, 거리를 벌려라, 이 런 거 아닌가?"

결론은 이것일 것이다. 페퍼는 디에고에게 맹목적이었고, 그의 모든 주의는 디에고의 안전에 쏠 려 있었으니까. 어쩐지 아들과 헤 어지라는 시부모의 호통을 듣는 기분이었다.

"맞습니다. 공녀님께선 황태자 저하와 너무 가까우십니다. 저하 께선 공녀님께 지나치게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다 공녀님께서 잔에 독이라도 타면 저하께서 상 심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진짜 저 직설적인 입은...... 약 도 없을 거야.'

감히 공녀에게 당신이 황족을 살해할까 봐 의심된다고 직언하는 저 위험한 입을 지적할까 하다가 말았다. 지적한다고 고쳐질 말투 는 아니었으니까.

'디에고에게도 저런 식으로 말하 다 잘릴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 라고 했지.'

지적한다고 고쳐졌으면 디에고 가 늘 페퍼의 입을 박아 버리고

싶다고 하지도 않았을 거다.

페퍼가 제 명을 못 살고 죽게 된다면 이유는 저 자유분방한 입 이 아닐까 생각하며 고개를 기울 였다.

"그대는 어쩌다 황태자 저하를 주군으로 삼게 되었나?"

내가 던진 것은 뜬금없다 싶은 질문이었다. 페퍼가 미간을 좁혔 다.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궁금해서지. 군소리 말고 어서 말해 보게."

디에고를 향한 페퍼의 지극한 충성심은 원작에서 몇 번이고 서 술되었다. 허나 그가 어째서 그렇 게까지 디에고에게 맹목적이게 되 었는지는 서술된 바가 없어 늘 궁 금했던 참이었다.

페퍼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 서도 말문을 열었다.

"......아마 아실 겁니다. 제가 엘 러바인 백작가의 사생아라는 것

을."

페퍼가 사생아라는 것은 사교계 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 었기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전 필사적으로 검을 연마해 소 드 익스퍼트가 됐지만, 사생아라 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얼마 없 었습니다. 황궁 기사단은 꿈도 꾸 지 못했습니다. 헤매고 있는 저를 거두어 주셨던 게 그 당시엔 황태 자 책봉을 받지 못해 1황자였던 디에고 저하셨습니다."

페퍼의 연갈색 눈동자가 추억에 젖어 반짝였다.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선 지극한 충성심이 엿보였다.

"지금에서야 황태자가 되시면서 경비가 강화됐지만...... 1황자이셨 던 당시엔 상당히 취약했습니다. 매일 들어오는 암살자를 감당해 내기도 벅찼습니다. 아마 매일 오 는 그 쪽지가 없었다면 황태자 저 하고 저고 다 죽었을 겁니다."

"쪽지?"

페퍼의 사연을 경청하다 갑작스 럽게 튀어나온 단어에 미간을 좁 혔다.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턱 닫은 페퍼는 잠시 내 눈 치를 살피며 눈을 굴렸다.

'말하면 안 되는 사항인 모양이 군.'

디에고를 살렸다는 쪽지의 정체 가 궁금했지만, 공연히 페퍼를 곤 란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나는 고개를 까닥여 계속 말하라는 뜻 을 표했다.

"아, 아무튼. 사실 그때 당시엔 저하의 호위 기사 자리가 그리 마 음에 들진 않았습니다. 무척 고단 한 자리였으니. 그러다 마음을 바 꾸게 된 계기는 저하가 황제 폐하 가 낸 시험을 풀어 내셨던 날이었 습니다."

"황제 폐하의 시험?"

"네. 황제 폐하께선 저하의 기질 을 판단하신다면서 자주 난해한 문제를 내곤 하십니다."

'하기야. 그 사람 성정으론......

공녀와의 티타임에서 대뜸 마수

의 피를 내온 헬리오스를 떠올리 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날은 황제 폐하께서 지나친 문제를 내셨습니다. 황제 폐하로 부터 도착한 시험 문제는...... '네 가 진정으로 내게 충성한다면, 네 가장 가까운 그림자를 죽여 내게 바쳐라.'"

" 허."

헛웃음을 뱉었다. 확실히 너무한 문제였다.

'그림자는 예로부터 귀족의 호위

기사를 뜻했지.'

디에고에게 그림자, 그것도 가장 가까운 그림자를 죽이라고 한 의 미는 분명하다.

황제는 디에고더러 페퍼를 죽이 라고 명했던 것이다.

"저는 그날 죽음을 각오했습니 다. 황족의 호위 기사는 위험한 자리이니 명이 길진 못할 거라고 처음부터 각오하기도 했죠."

"......그런데?"

페퍼는 자신이 죽을 뻔했던 날 을 얘기하는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덤덤했다. 도리어 내가 마음이 무거워진 채로 이야기를 이을 것을 종용했다.

"그거 아십니까?"

" 음?"

"저하의 왼손 새끼손가락엔 잘 렸다 붙은 흉터가 있습니다."

"그건...... 갑자기 왜?"

떨떠름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건 알고 있었다. 디에고의 손

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왼쪽 새끼손가락 끝마디 홈에 새겨진 희미한 흉터. 아주 희미하 긴 해도 내 눈엔 확실히 보여서 어쩌다 그런 흉터가 생긴 건지 물 어본 적도 있었다.

'이건...... 음, 작은 사고였지.'

그때 대답이 조금 애매해 이상 하다 싶긴 했건만.

"설마••••••

"저는 황태자 저하께 제 검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목을 내드렸 죠. 저하는 검을 받으시더니, 망 설임 없이......

"자기 새끼손가락을 자르신 건 가?"

경악 서린 내 물음에 페퍼가 묵 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를 위해서 그림자는 몇 번 이고 죽일 수 있지만, 폐하께서 자신의 충성을 의심하시는 건 참 을 수 없다고...... 편지를 쓰고 자 기 손가락과 함께 황제 폐하의 궁 으로 보내셨습니다."

'부자가 쌍으로 미쳤군......

나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마 헬리오스가 진심으로 낸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는 지나치 게 짓궂긴 해도 공연히 사람의 목 숨을 빼앗는 이는 아니었으니까.

디에고는 그걸 알 텐데도, 자신 의 손가락을 스스로 자르는 미친 짓을 한 것이다.

"황궁이 난리가 났겠군."

"네. 놀란 황제 폐하께선 대신관 을 거느리고 직접 저하를 찾아오 셨습니다. 전 황제 폐하께서 욕을 잘하신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 니다."

헬리오스 같은 미친놈도 기절초 풍을 했을 거다. 반쯤 장난으로 낸 문제에 아들놈이 손가락을 잘 라 보냈으니.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지는 기분이라 끙, 앓는 소리를 내었 다.

"손가락은 대신관의 치료로 완 벽하게 붙고, 사건이 일단락된 뒤 에 저는 저하께 물었습니다. 그냥 절 죽이면 간단했을 일에 왜 그렇 게까지 하셨냐고."

하늘을 바라보는 페퍼의 눈동자 가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도구로 이용될 각오로 디에고의 호위 기사가 된 페퍼 엘러바인.

"저하께선 그리 답하시더군요. 계기가 어찌 되었건, 그대가 내

사람이 된 이상 그대를 절대 허황 되게 죽게 하지 않겠다고. 더 좋 은 세상을 만들어 보여 주는 것으 로 그대의 충성에 보답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먹먹했다. 참으로 디에고다운 말이었다.

"전 그날 결심했습니다. 반드시 저하를 황제로 만들겠다고 말입니 다. 제게 태양은 저하뿐이라고 맹 세했습니다."

결연한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얼핏 생기가 없어 보이는 눈은 디 에고에 대해 말할 때만 빛났다.

나는 페퍼가 디에고에게 지독하 도록 맹목적인 이유를 수긍할 수 있었다.

" 그랬군."

"전 저하의 그림자로서 저하께 위해가 되는 모든 것을 내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렇기에, 수상한 공녀님을 그

냥 내버려 둘 생각이 없습니다."

페퍼가 위협적으로 목소리를 깔 았다.

' 으음••••••

나는 아기 너구리에게 위협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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