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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05화 (105/254)

105 화

그러니까, 이 복잡한 상황을 설 명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 하다.

"누구를...... 호위 기사로 써? 슈슈가 네 부하냐? 제국의 망조 가 훤하군. 교황이 이런 개수작이 나 부리고 있으니까!"

"난 슈슈에게 물었으니 넌 닥치 고 있지 그래. 아타라 왕국은 천

년만년 사고유탈하기만을 바라고 있어. 슈슈, 대답해 주세요. 나랑 같이 가 줄 거죠?"

아타라의 국왕과 제국의 교황이 나를 사이에 두고 짖어대고 있는 이 상황 말이다.

***

사건의 발단은 편지 한 통이었 다.

"카슈미르님. 신전에서 보내온 편지입니다."

"신전 말인가?"

나는 내 어깨에 기댄 아리아의 머리와 무릎 위에 누워 있는 칼의 머리를 사뿐히 치우고 편지를 받 아들었다.

간만에 사교계 약속이 없는 아 리아와 마탑에 가지 않은 칼. 둘 과 함께 나른한 아침을 보내는 중 이었다. 반쯤 졸고 있다가 머리가 들린 칼과 아리아의 얼굴이 구겨 졌다.

"신전? 그 고자들 집단에서 언

니한테 왜?"

" 아리아."

"......그 '고고한' 집단이라고 했 어."

낮잠을 방해받은 아리아의 입은 그리 정중하지 못했다. 급히 정정 하는 아리아의 말에 피식 웃으며 편지를 앞뒤로 돌려 보았다.

편지 봉투 앞쪽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름 여섯 자가 적혀 있었 다. 익숙한 악필에 또 웃음이 터 져 나왔다.

"누구의 편지인가?"

"율리안 대신관의 편지군요."

칼과 아리아의 얼굴이 더 구겨 졌다.

"그 자식이 왜 네게 편지를 보 내는 거지?"

"음...... 글쎄요. 아직 열어 보질 않아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친 구니까 편지 좀 보낼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율리안이 언니 친구라고?"

아리아의 표정이 조금 떨떠름해

졌다. 율리안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투라, 나는 고개를 기울였 다.

"......아리아 크리시스. 율리안 대신관과 친분이 있나?"

내가 묻기도 전에 칼이 물었다. 이를 묻는 칼의 목소리가 어쩐지 들끓는 것 같아 기묘하단 느낌이 들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넘 겼다.

"뭐...... 대신관이면서 사교계에 자주 나오거든, 율리안. 만나면

만나는 대로 말을 걸어서...... 친 분이 있는지 없는지 양자택일로 물으면, '있다' 쪽일걸."

아리아가 귀찮다는 듯 눈을 굴 렸다. 어쩐지 칼의 표정이 전보다 나빠진 것 같았으나, 곧바로 이어 진 아리아의 말에 신경이 그쪽으 로 쏠렸다.

"그 인간, 나랑 만날 때마다 언 니 좀 신전으로 오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하더라고."

"••••••나를?"

나는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아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신전은 카슈미르 공녀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나 뭐라나...... 유 쾌한 사람이긴 한데...... 언니 얘 기를 자주 하는 게 마음에 안 들 어."

아리아는 짜증스러운 표정이었 다. 불만 많은 고양이 같은 아리 아의 머리칼을 슬슬 쓰다듬어 주 다 사뿐한 손길로 편지를 뜯었다.

'••••••뭐야?'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네모난 카드 위에 섬뜩한 핏빛 잉 크로 마구 번진 채 적혀 있는 것 은 단 세 글자였다.

"그놈 우리 저택에 찾아왔을 때 보고 느끼긴 했다만...... 미친놈인 가?"

옆에서 카드를 같이 보던 칼이 신랄하게 말했다.

제국의 대신관에게 거침없이 욕 설을 뱉는 그의 태도는 이제 담담

하게 넘기게 되었다. 크리시스 가 문 사람들의 험한 입은 유전인 것 같았다.

'이건 대체......

앞뒤 설명도 없는 살려 달라는 말에 무슨 숨겨진 의도라도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다 그만두었

율리안이 숨겨진 의도 같은 것 을 담을 리는 없었다. 그라면 황 제를 욕하는 내용을 보낼 때도 당 당하게 제국어로 쓸 테니까.

율리안은 칼의 말처럼 미친놈■이 었다. 의도를 숨길 위인은 아니었 다.

'어.'

무심코 카드를 뒤로 돌리니 다 른 글씨들이 보였다.

[미친개가 매일같이 날뛰고 있습 니다. 우리 신전은 공녀님의 도움 을 필요로 합니다. 공녀님을 이런 시답잖은 일로 부르는 점 무척 죄 송하게 생각하지만 저는 살고 싶

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신전 한 번만 방문해 주시면 제가 단 거 싫어하는 미친개 몰래 모아 둔 초 콜릿 다 공녀님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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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 급함이 드러나는 악필에 담겨 있 는 말투는 참으로 율리안다웠다.

'엘의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 네.'

율리안과 꽤 알고 지낸 지금은

율리안이 엘을 '미친개'라는 애칭 으로 부른다는 걸 알았다. 엘은 절친한 친구인 내게 관대했으니, 아마 내가 엘과 시간을 가지면서 그의 기분이 조금 풀어지길 바라 는 모양이었다.

'사냥 대회 이후로 한 번도 못 봤으니 오늘 한번 보러 가는 것도 좋겠지.'

마음을 정한 나는 편지를 대강 밀어 두며 테일러에게 정리하라 명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어 져 있던 칼과 아리아가 내 움직임

에 소파에 제대로 앉았다.

"언니, 갈 거야?"

아리아의 물음에 나는 웃었다.

"응. 미친개를 보러 가야 할 것 같아서."

신전에 가 볼 생각•이었다.

**♦

불가피한 일을 제외하면 집에 틀어박혀 검술 수련에 매진하느라

오랜만에 하는 외출이었다.

오늘은 바깥 공기를 만끽해 보 고 싶었기에 망토를 뒤집어쓰고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 신전으로 향했다.

신분을 밝히고 들어선 신전 내 부는 언제나처럼 웅장하고 엄숙했 다. 새삼 엘이 이 거대한 신전의 주인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 았다.

숨소리조차 허투루 내선 안 될 것 같은 신전을 둘러보다, 다가오

는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 다.

"공녀님! 와 주셨군요!"

안도가 가득한 율리안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튀어나왔다. 나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율리안. 잘 지내 셨습니까?"

"아뇨••...

고개를 젓는 율리안의 얼굴이 무척 수척했다. 가냘프고 연약해

보이는 얼굴에 박힌 연보라색 눈 동자가 처연하게 반짝였다. 반쯤 죽어 가는 것처럼 보이는 율리안 이 안쓰러웠다.

"이런 일로 호출해 죄송합니다. 그런데...... 하...... 이 새끼가...... 아니 왜 그렇게 살지?"

힘이 쭉 빠져 보이던 율리안이 말하다 말고 갑작스럽게 분노했 다. 아무래도 쌓인 게 많아 보였 다. 나는 율리안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다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 었다.

"제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 르겠지만, 두 사람의 친구 된 도 리로서 최대한 도와 드리겠습니 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마 그놈은 공녀님 머리카락 한 가닥만 봐도 좋아서 승천할 겁니다."

과장스러운 율리안의 말에 웃었 으나, 의외로 그의 표정은 진지했

"부디 함께 가 주시죠. 하...... 이제 저는 한동안 그놈의 히스테

리에서 구원받을 겁니다."

'죽는 줄 알았다', '정말 감사하 다', 이런 저런 소리를 주절거리 는 율리안을 따라 신전을 가로질 렀다.

그는 나를 교황의 집무실로 이 끌었는데, 신성한 성지라 불리는 그곳이 가까워질수록 보초를 서는 성기사들이 많이 보였다. 신성력 이 점점 더 농밀해지는 것을 느끼 며 발걸음을 옮겼다.

" 여깁니다.

점점 더 가벼워지던 율리안의 발걸음은 교황 집무실 직전에 왔 을 땐 거의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봄바람을 타는 나비처럼 살 랑거리는 그의 걸음을 따라 조깅 하듯 가볍게 뛰다 율리안을 따라 멈췄다.

"음...... 이곳이 교황 집무실입 니까?"

"네. 문제가 있나요?"

확실히 교황의 집무실답게 화려 하고 웅장한 문 앞에 선 나는 느

껴지는 이질감에 미간을 찌푸렸 다.

"문 앞에 경비가 없는 것이 조 금 이상해서요."

오는 복도엔 널린 것이 성기사 였는데 정작 문 근처엔 사람이 코 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기울이니 율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놈 사람 혐오증 때문에 경비 를 다 물리거든요. 그 지랄을 감

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요."

"그래도 위험할 텐데요. 괜찮은 겁니까?"

엘의 신성력은 막강하다. 소드 마스터인 나는 그의 곁에만 있어 도 넘쳐흐르는 신성력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허나 그에게서 무력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교황이 라는 위험한 자리에 오른 그가 경 비 없이도 안전한 건지 염려되었

"그놈이요? 위험이요?"

허나 율리안은 그럴 리 없다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그놈이 위험할 일은 없을 겁니 다. 오히려 덤비는 쪽이 위험하겠 죠."

율리안의 단언에 난 눈을 굴리 면서도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저 렇게까지 단언하는 걸 보니 보호 장치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우선 들어가죠."

율리안이 문 앞에 서더니, 노크 한번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야! 나 왔...... 어엉?"

크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던 율리안이 멈칫했다. 난 뭔가 싶어 율리안 너머로 방 안쪽을 보았다.

'대체...... 방에서 뭘 한 거지.'

엘의 집무실은 난장판이라 불러 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구겨 진 채 잉크에 절어 있는 종이들이

사방에 난자했고, 폭탄이라도 맞 은 것처럼 기물들이 손상되어 있 었다.

그 가운데 엘은 없었다.

"신전엔...... 청소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잠시 뜸을 들이다 중얼거렸다. 율리안이 이마를 짚었다.

"그럴 리가요. 이놈이 다른 사람 을 자기 방으로 들이질 않아서 이 꼴이 난 것뿐입니다."

아무래도 엘은 사춘기를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잠시 할 말을 잃고 있으니, 율리안이 발길을 돌렸다.

"아마 신전 안에 있을 겁니다. 다른 곳을 찾아보죠."

이를 가는 율리안을 따라 나도 발길을 돌렸다.

[친애하는 카슈미르에게. 잘 지 내나요? 나는 잘 못 지내아아악.]

[카슈미르에게. 보고 싶어허어 엉.......]

[카슈미르, 카슈미르, 카슈미르, 카슈미르.]

간혹 구겨지다 만 종이들에서 보이는 내용은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많이 외로웠던 모양이네......

신전 생활은 엘에게 많이 힘겨 운 모양이었다. 난 일이 없을 때 도 자주 찾아오기로 마음먹었다.

***

중간에 만난 성기사의 도움으로 엘이 있는 장소를 알게 된 나와 율리안은 손님들이 머문다는 신전 의 손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꽤 오래 걸은 끝에 도착한 손님 실 안쪽에선 익숙한 기운이 풍겼

'엘. 그리고...... 얜 여기 왜 있 는 거지?'

엘 옆에 익숙한 기운에 나는 미

간을 좁혔다.

"......그러니까, 뭘 좀 찾아 줬으 면 좋겠어."

문 가까이로 다가가자 들려오는 목소리는 역시 그 사람의 것이었 다.

무척이나 진지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마나를 운용해서 나와 율 리안의 기척을 죽여 버렸다. 어리 둥절한 표정을 짓는 율리안에게 검지를 올려 입술에 대어 보이고 조용히 문으로 다가가며 오가는

대화를 엿들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 으나 어쩐지 들어야 할 것만 같았 다. 본능이 그리 말했다.

"내가 정보상도 아니고 그걸 왜 나한테 맡기는지 모르겠군. 그 잡 초 같은 눈엔 교황도 정보상으로 보이나 보지? 그러다 신벌이라도 받아야 대가리에 빛이 번쩍 들 지......

"너한텐 어렵지 않잖아. 아타라 와 솔라티네의 완만한 사이를 위 해서 잠시 봉사 좀 해 주시지 그

래. 대외로는 선한 척 사람 좋은 척 다 하더니 입에 쓰레기를 물고 있군."

"어렵진 않지만 해 줘야 할 이 유도 없지. 국왕이면 정보상 정도 는 여럿 알고 있을 텐데 왜 나한 테 맡기는 거지? 완만한 사이 따 위...... 알 바인가. 아니꼬우면 전 쟁이라도 하든지. 때와 상황도 안 가리고 짖어 대는 그 아가리보단 훨씬 낫겠지."

"돈이든 뭐든 준다니까. 제국 정 보상을 알긴 하지만...... 이건 지 나치게 개인적인 일이라서. 아니 근데 이 새끼가......

"내가 지금 돈이 궁해 보이나? 이 새끼 저 새끼 하지 말지 그래. 무척 저렴해 보이니까."

"둘이...... 뭐 하십니까?"

금방이라도 전쟁을 벌일 것 같 은 두 나라의 지배자들 대화를 듣 다 못해 문을 열어 버렸다. 정말 둘이 붙어 앉아 뭐 하는 건가 싶 었다.

" •시7"

TTTT-

" Z、Z이 "

TTTT!

날 발견하고 얼어 버린 둘은 한

참 멍하니 굳어 있다, 맞춘 것처 럼 동시에 어색한 웃음을 만면에 띠었다.

"와, 왔나요, 슈슈! 아타라와 솔 라티네의 경제 협력과 사회적 문 화 교류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 어요!"

"슈, 슈슈! 이 사람 말이 맞아! 국가의 미래와 앞으로 대륙의 전 망에 대한 토의를 나누고 있었 지!"

두 사람이 버벅거리며 어깨동무 를 했다. 어깨동무한 손들이 서로

의 어깨를 으스러져라 쥐고 있는 것이 훤히 보였다.

웃기지도 않는 변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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