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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06화 (106/254)

106 화

방 전체에 기이한 침묵이 감돌 았다.

난 여전히 어깨동무인지 어깨 공격인지 모를 기이한 자세를 한 채 내 눈치를 보는 엘과 알렉산드 로를 보다 한숨을 쉬었다.

"둘이 그러고 있는 거 정말 부 자연스러우니까 편하게 하시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사 람이 서로를 밀쳤다. 서로가 벌레 라도 되는 듯 멀찍이 떨어진 둘을 보고 있자니 웃기면서도 대체 뭐 하는 건가 싶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 겠습니다!"

문밖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율리안이 경쾌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엔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 력했다.

"율리안? 벌써......

"안녕히 계십시오!"

내 말까지 끊은 율리안은 쌩 소 리를 내며 쏜살같이 사라졌다. 불 구경은 재밌지만 화재에 휘말리기 는 싫은 사람 같았다.

율리안이 사라진 자리를 잠시 바라보다 얌전해진 두 사람을 돌 아보았다. 알렉산드로슨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엘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몇 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아, 물론이죠."

"당연하지."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동 시에 대답한 것조차 싫다는 듯 서 로에게서 한 뼘 정도 더 떨어지는 둘은 마치 사이가 좋지 않은 5살 아이들 같았다.

"레오. 넌 대체 왜 여기 있는 거 야?"

우선 레오가 신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이해할 수 없다 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니, 레오 가 눈을 굴렸다.

"그때 사냥대회에서 바실리스크 랑 맞닥뜨리고 몸에 잔상처들이 조금 났었잖아. 심각하지 않아서 치료할 생각이 없었는데...... 하나 같이 치료받으라고 난리길래. 미 루다가 이제야 왔어."

'사냥 대회 끝난 지가 언젠 데......

한 나라의 국왕이 이때까지 상 처 치료도 안 받고 있었던 것도 웃기지만, 이쯤이면 소드 익스퍼 트의 재생력으로 상처가 다 회복

되고도 남았을 시기였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알렉산드 로를 응시하자 그가 눈을 피했다.

'분위기를 보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상처 치료를 받으러 왔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 듯했지만, 그것만 을 위해 온 건 아닌 것 같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엘을 보았다.

"그럼 엘은......

"전 이 사람 치료해 주려고 여

기 온 거죠. 그래도 명색이 국왕 이니......

엘의 눈빛에 잠시 인생에 대한 환멸이 깃들다 사라졌다. 이내 나 와 눈이 마주친 엘은 무마하려는 듯 활짝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전에 찾 아 달라는 이야기는 뭐였습니까?"

그냥 넘어갈까도 했지만, 역시 조금은 궁금했다. 내가 직접적으 로 얘기를 꺼내니 알렉산드로가 움찔했다.

"......어디까지 들었어?"

"뭘 찾아 달라고 할 때부터 둘 이 전쟁 운운할 때까지."

두 사람이 내 눈치를 봤다. 시답 잖은 말싸움에서 전쟁까지 언급했 던 게 민망하긴 한 모양이었다. 난 팔짱을 낀 채 둘을 번갈아 보 다 어깨를 으쓱였다.

"내게 말하기 곤란한 얘기라면 더는 묻지 않을게. 그냥 궁금했던 것뿐이니까."

혹여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얘기 일까 싶어 나지막이 알렉산드로를 달래자, 그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 다.

"그건 아니야. 내가 네게 못 해 줄 얘기가 뭐가 있겠어. 그냥...... 정말 별거 아닌 거라서 말하기가 뭐했던 것뿐이야. 지금 말할게."

알렉산드로의 표정이 진지해졌 다.

"나는, 내 유모의 유품을 찾고 있어."

"••••••유모?"

미간을 좁힌 엘이 되물었다. 그 도 자세한 이야기는 못 들은 모양 이었다.

'레이샤의 유품을 찾는 건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알렉산드로의 유모는 레이샤뿐 이다. 그는 레이샤가 죽고 나서 유모를 들이지 않았을뿐더러, 들 일 나이도 아니었으니까.

'레이샤의...... 유품 같은 게 있 었나.'

원작에선 등장하지 않는 내용 같았다. 원작에 대한 기억이 점점 옅어지는 만큼 확신은 못 했지만, 확실히 내 기억 속엔 없었다.

'애초에 레이샤는 엑스트라였으 니까.'

'요정의 밤'은 남주인공들 중 한 명에게 트라우마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일회용 캐릭터에게 많은 내용을 할애할 만큼 다정한 소설

이 아니었다.

'분명, 한 명의 인간이었을 텐 데.'

창조주의 세계에서 기록할 만한 가치가 없는 피조물이란 어떤 것 일까.

원작의 카슈미르 크리시스 또한 그런 존재였다. 잠시 갈등만 만들 어 주고 사라지는 소모품.

'그런 식으로 소비되는 캐릭터들 도 기록되지 못한 저마다의 이야

기를 가지고 있었겠지.'

어쩐지 잠시 우울해졌으나, 이어 지는 알렉산드로의 말에 금방 마 음을 다잡았다.

"'레이샤'라는 사람이야. 성은 몰라. 한때 마탑 소속 마법사였 고, 제국 아카데미 마법학과에서 차석을 했었다고 들었어."

"......그런 대단한 사람이 네 유 모를 했다고?"

엘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 을 좁혔다. 확실히, 레이샤는 고

작 '왕자를 지키다 죽은 유모'로 서 스러질 인물은 아니었다.

표정이 무거워진 알렉산드로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6년 전에 죽었지만."

알렉산드로의 연둣빛 눈이 슬픔 에 잠겨서일까, 방 안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까닥이 던 엘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유품은 어디 있는데?"

"나도 몰라."

엘이 얼굴을 구겼다. 나조차도 어이없어하는 눈으로 알렉산드로 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당당했다.

"확실한 장소는 몰라. 제국에 있 다는 것만 들었어."

"지금 제국이 시골의 어느 저택 이름인 줄 아나 본데, 그대가 사 막에서 바늘을 찾아오면 나도 찾 아보겠네."

부드럽게 웃은 엘이 신랄하게 비꼬았다. 나는 착한 얼굴에 그렇 지 못한 말투를 들으며 잠시 웃음 을 찾을 수 있었다.

얼굴을 구긴 알렉산드로가 자기 머리를 헤집었다. 부드러운 연갈 색 머리가 나풀거렸다.

"정확한 장소는 모르지만 찾아 낼 수 있는 방법은 알아. 레이샤 는 13년 전에 제국에 한 번 왔던 적이 있거든. 그때 이곳에 유품을 남겨 뒀다고 했어. 그러니까 13년 전 레이샤가 갔던 곳만 추적해 내

면 찾아낼 수 있겠지."

확실히, 일리가 있는 방법이다.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 다. 나를 슬쩍 본 알렉산드로가 과장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에 온 김에 반드시 찾아가 고 싶은데...... 신의 사자라는 양 반은 자기 일 아니라고 도와주지 도 않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 겠네."

엘의 어깨가 움찔했다. 둘을 번 갈아 본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

다.

"어...... 그럼 내가 찾아 줄까?"

"정말? 그래 줄 수 있어?"

알렉산드로의 연둣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에 반해 엘의 표정은 구겨지고 있었다. 화사해진 알렉 산드로의 낯을 향해 고개를 끄덕 였다.

"응. 실력 있는 정보상들과는 두 루두루 알고 있으니까. 정 도움받 을 구석이 없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용병들과 정보상들은 직업상 밀 접한 거리를 유지하곤 했다. 미르 로 활동하며 알게 된 정보상들이 있으니, 한 사람의 과거 행적 정 도는 가볍게 알아내 줄 수 있었 다.

"네 부탁이라면 못 할 건 없지."

친구의 부탁인 이상 더 어려운 것도 기꺼이 해 줬을 것이다.

그를 향해 빙긋 웃자, 알렉산드 로가 흠칫 굳었다. 헤집어진 연갈

색 머리카락 아래 귓바퀴에 붉은 물감이 번지듯 붉어지기 시작했

"잠깐."

잠시 이어진 시선 교환을 끊어 낸 것은 어쩐지 냉랭한 빛을 띠나 여전히 나긋한 엘의 목소리였다. 그를 돌아보니, 엘이 환한 미소를 가득 피워 냈다.

"생각이 바뀌었어. 아무래도 도 움이 필요한 이를 돕는 것이 신의 사도로서의 도리지."

"그 도리는 왜 슈슈가 온 뒤에 나 발동하는지 모르겠군. 네 도리 는 그렇게 오락가락하나?"

알렉산드로의 말투는 조금 전의 설욕을 갚듯 신랄했다. 엘의 미간 에 미세한 주름이 생겼으나, 금방 사라졌다. 엘의 은빛 눈동자가 유 리알처럼 반짝였다.

"이 사람은 내가 도와줄게요, 슈 슈. 이런 일에 슈슈의 귀한 손을 쓸 필요는 없죠."

"잠깐. 난 슈슈에게 도움을

"슈슈에게 도움이나 받아야 하 는 무능한 인간인 걸 티 내고 싶 으면 계속 하든가."

웃는 얼굴로 싸늘하게 읊조리는 엘의 말에 알렉산드로가 입을 턱 닫았다. 자존심 상한 얼굴로 까드 득 이를 간 알렉산드로가 썩은 미 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도와주고 싶다면 거절하진 않지. 한번 해 보라고."

엘과 알렉산드로 사이에 서늘한 눈빛이 오갔다. 표정으로는 이미

서로를 죽이고도 남은 것 같지만, 내 눈엔 그저 어린아이들이 투닥 거리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유품을 찾는 일을 엘이 대신 해 주면, 내가 따로 도울 일 은 없어?"

"응. 아, 아니면......

수긍하다 잠시 고민하는 듯싶던 알렉산드로가 날 향해 씨익 웃었 다. 이가 드러나는 환한 웃음이

무척 상쾌해 보였다.

"오늘 많이 바쁘지 않으면, 내게 제국 수도를 소개시켜 주지 않을 래?"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제 안했다.

'하기야, 알렉산드로는 이번이 제국 두 번째 방문일 테니 안내가 필요하려나.'

오늘 하려던 일이라곤 신전 방 문하는 것밖에 없었고, 엘의 얼굴

을 보니 율리안이 말한 것만큼 기 분이 안 좋아 보이지도 않으니 함 께 가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사뿐한 손길이 내 소매를 살짝 잡 아당겼다.

"아니. 슈슈는 나랑 가 줬으면 좋겠어요."

기다란 연하늘색 머리카락이 내 옷자락을 스친다. 가만히만 있어 도 신의 축복 같은 얼굴의 눈꼬리 가 안쓰럽게 처지니 내 속에 있던

보호본능이 울컥 올라오는 느낌이 었다.

"나는 저 사람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오늘 정보 길드를 찾아갈 거 예요. 그런데 혼자 가기는 무서워 서...... 슈슈가 하루만 내 호위 기 사를 해 줬으면 좋겠어요."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이 청량하 고 부드러운 엘의 목소리가 달콤 하게 속삭였다.

제국의 지배자가 되려면 사람을 사로잡는 기술은 필수인 모양이

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제비 꽃 설탕 절임을 입 안 가득 문 것 같은 느낌이라 나는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교황 직분은 장식인가? 왜 네가 직접 가는 거지? 신전에 가득한 성기 사들은 다 약골들인가 봐? 대체 왜 슈슈를 호위 기사로 삼는 거 지?"

"시끄럽군. 치유하다 확인했는 데, 넌 지금 뇌가 오락가락하는

위급한 상태니까 나갈 생각은 하 지 말고 신전에나 붙어 있어."

"하! 슈슈가 네 부하냐? 이거 안 될 놈이네! 제국의 망조가 훤 하군. 교황이 이런 개수작이나 부 리고 있으니까!"

"난 슈슈에게 물었으니 넌 닥치 고 있지 그래. 아타라 왕국은 천 년만년 유탈하기만을 바라고 있 어. 슈슈, 대답해 주세요. 나랑 같 이 가 줄 거죠?"

알렉산드로와 엘은 개와 고양이 같았다. 난 서로가 철천지원수라 도 되는 듯이 으르렁거리는 둘을

보다 피식 웃었다.

"둘이 꽤 친하네요."

동시에 날 돌아본 둘의 얼굴 위 로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 피어올 랐다. 허나 나는 진심이었다.

'저렇게 티격태격하는 것도 어느 정도 안면이 있으니까 저러는 거 겠지.'

알렉산드로가 엘에게 도움을 요 청한 것부터가 둘이 친분이 있다 는 것을 뜻했다. 엘이 절대 해 주

지 않으리라 생각했다면 도움을 청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서로가 다리 백 개 달린 지네라도 되는 양 멀찍한 거리감 을 유지하는 둘을 뒤로한 채 자리 에서 일어났다.

"우선 오늘은 엘이랑 가는 게 맞는 것 같네."

"왜!"

두 사람의 얼굴 위로 희비가 교 차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알렉산드로를 향해 달래듯 웃어

주었다.

"정보 길드들이 들어선 지역은 위험해. 성기사들이 정체를 숨기 고 가는 것보단 내가 미르로서 엘 의 호위가 되는 게 좋겠지. 누구 도 감히 시비를 걸지 않을 테니 까."

엘에겐 미르로서 받아 온 게 많 았고, 아직도 그 도움을 전부 갚 지 못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라도 엘을 돕고 싶었다.

손을 들어 침대에 기대어 있는

알렉산드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연갈색 머리가 손가락 사이로 얽혔다.

"시내는 다음에 구경시켜 줄게. 착하게 기다려. 할 수 있지?"

알렉산드로의 얼굴 위론 불퉁한 표정이, 엘의 얼굴 위론 승리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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