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화
"조심하십시오."
휙.
기이하게 변조된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엘의 소매를 살짝 잡고 그 를 안쪽으로 끌었다. 엘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끌려오고 얼마 지 나지 않아 엘이 있었던 자리에 아
슬아슬하게 마차가 지나갔다.
"고마워요."
로브 후드로 가린 얼굴 아래로 희미하게 보이는 엘의 입가에 미 소가 피어올랐다. 후드 안으로 마 도구를 사용해 색을 바꾼 갈색 머 리카락이 삐죽 보였다.
'갈색 머리도 어울리는구나.'
제일 혼한 머리색인 갈색조차 아름답게 소화해 내는 엘의 미모 를 보며 새삼 감탄했다.
내게 닿는 사람들의 시선을 익 숙하게 무시하며 살짝 삐뚤어진 가면을 고쳐 썼다.
그도 나도 정보 길드에 가면서 정체를 드러내면 곤란한 사람들이 었다. 공녀와 교황이 함께 정보 길드에 가는 상황은 어떻게 보아 도 이상했으니.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그와 검 은 로브에 가면까지 쓴 나는 충분 히 수상해 보였으나, 공녀와 교황 이라는 것을 들키는 것보단 나았
다.
"엘은 평소에 자주 찾는 정보 길드가 있습니까?"
"신전에서 주로 이용하는 정보 길드는 있죠. 하지만 이번엔 사람 행방 하나 찾는 간단한 의뢰라서 원래 가던 곳 말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요. 내가 직접 정보 길드를 찾는 건 오랜만이지만요."
하기야, 교황이 직접 정보 길드 를 찾아 나설 일이 뭐가 있겠는 가. 시킬 사람이 한가득한데.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이번 일은 왜 직접 나서 셨습니까? 아무래도 국왕의 부탁 이니 확실히 하시려고?"
엘이 나를 돌아보았다. 고개가 움직이며 검은 로브 아래 은빛 눈 동자가 살짝 드러났다. 그가 눈꼬 리를 휘었다.
"내가 그 사람 부탁에 관심을 둔 것 같나요? 내게 필요한 건 슈슈랑 함께할 구실뿐이었어요."
그의 얼굴을 가득 채운 부드러 운 미소에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 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 이제 정보 길드의 골목 입니다."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엘 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함께하고 싶은 사람 이 되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 다. 귓가가 미미하게 달아오른 느 낌이 들었다.
수도 시내를 빙글 돌아 깊은 곳 으로 들어오면 정보 길드들이 모 인 골목이 나왔다. 나는 개인으로 활동하는 정보상들 중 안면이 익 숙한 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의뢰를 맡기곤 했기 때문에 정보 길드 골 목은 그리 자주 오는 편이 아니었 다.
내가 진짜 미르인지 아닌지 가 늠하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헤치 며 얼마나 걸었을까, 엘이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저기로 갈까요? 이용해 본 적 은 없지만 꽤 유명한 곳이니까. 사람 한 명의 행적 캐는 데엔 문 제가 없을 것 같네요."
나는 엘이 가리킨 건물로 시선 을 돌리고 눈을 깜빡였다.
'Hide & Ceek'. 약 5년 전에 만들어진 정보 길드로, 지금은 상 당히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정보 길드를 이용하지 않는 나조차도 그 명성은 알고 있을 정도였다.
'문제는 없는데...... 기분이 좀
이상하네.'
살짝 미간을 좁힌 채 표지판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보라색과 진분홍빛이 섞인 색에 필기체로 쓰인 'Hide & Ceek'. 'Hide & Seek'의 틀린 철자 같은 이름은 나로 하여금 기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이곳은 싫나요? 다른 곳으로 갈까요?"
한참 표지판을 바라보고 있는 내 안색을 살핀 엘이 물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잠시 눈 을 굴리다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곳으 로 가죠."
' 멍청하게.'
아직도 과거의 망령에 벗어나지 못한 스스로를 욕하며 먼저 문 쪽 으로 향했다.
"아, 잠깐."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려는 나를, 엘이 막았다.
"혹시 괜찮다면 밖에서 기다려 줄 수 있을까요? 내가 처리하고 올게요."
"하지만...... 내부에서 위험해지 시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미간을 좁혔다. 위험하다는 말에 미묘한 표정을 짓던 엘은 작 게 읏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정말 괜찮으 니까. 슈슈가 있으면...... 음, 내
가 직접적으로 말하기가 어려워서 그래요."
어쩐지 곤란해 보이는 엘을 보 다 고개를 끄덕였다.
엘이 내부에서 위협을 당한다면 그 누구보다 내가 더 빨리 느낄 수 있을 테니, 밖에서 기다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위험하다 느끼는 즉시 뛰어 들어 가도 엘이 위험해지는 것보단 빠 를 터였다.
"그럼 다녀오시죠."
" 다녀올게요."
내가 순순히 물러나자 엘이 고 맙다는 듯 웃고는 문을 열고 들어 갔다.
그가 사라진 곳을 잠시 바라보 다, 정보 길드 건물 벽에 몸을 기 대었다.
꽤 북적거리던 골목길에 인적이 줄어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두 워지는 거리에서 인적이 아예 없 어질 때까지 보다가, 잠시 사색에 젖었다.
'......그 새끼는, 잘 있을까.'
눈앞에 아른거리는 인영에 얼굴 을 구겼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데, 그러기엔 너무 깊이 새겨진 인물이었다.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개자식.'
그를 떠올리면 자동적으로 함께 떠오르는 얼굴 하나가 내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의 나를 붙잡아 주었 던 유일한 인물. 여전히 내가 가 장 동경하는 이상향.
'......카라쇼 스승님.'
한때는, 내게도 스승님이 있었 다. 한없이 강직하고 올곧은 시선 을 가지셨던 분.
용병이었던 카라쇼는, 세상을 향 한 경계심과 아리아를 살리겠다는 집념밖에 없었던 나를 거두어 스 승이 되어 주었다.
'검을 휘두를 땐 흔들림이 없어 야 한다. 네가 베어 내는 것을 정 확히 눈에 담고 대상을 확실히 베 어라. 검의 혼들림은 생사의 위태 로움과 직결된다.'
'이 세상에 죽어 마땅한 사람은 없다. 정말 어쩔 수 없이 누군가 를 죽여야만 할 때가 올지도 모르 지만 기본적으론 이 마음을 품어 야 한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 있 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모두가 죽어도 되는 인간 같거든.'
'사람의, 숨통을, 끊을 땐...... 절대 그의 눈을 피해선 안 된다.
네가 앗아가는 생명의 무게를 반 드시 짊어져야 해...... 그게 상처 받을지언정, 괴물이 되지 않는 방 법이다.'
나는 그분에게서 검을 배우고 세상을 배웠다. 어쩌면 카라쇼가 내 세상이었을지도 몰랐다. 용병 일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뭣도 몰랐던 나는, 그녀와 함께 다니며 마수를 토벌했다.
그리고 13살 겨울.
새하얀 설원이었다. 그 새하얀
눈송이를 어떤 것들이 물들였는지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모두가 범인의 것을 뛰어넘던 그 순간. 발달된 감각은 여전히 나를 그때 그 악몽으로 끌고 갔다.
내 절망이 형태를 갖췄던 그 순 간은, 여전히 내게 있어 지옥이었 다.
'차라리 망각할 수 있다면 얼마 나 좋을까.'
눈을 질끈 감고 울컥 치밀어 오 르는 감정을 힘겹게 억눌렀다.
여전히 나는 겨울을 싫어했다. 특히 눈 오는 날을. 사람의 피 냄 새를 맡으면 머리가 어지러웠고, 거대 마수 떼를 보면 속이 울렁거 렸다.
나는 여전히, 그 기억 속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 기일은 아무 것도 못 하고 넘겨 버렸네.'
이전까진 스승님의 묘를 매년 찾아갔건만, 크리시스 공작가로 입적되고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 느라 바빠 묘를 찾는 것을 잊고 있었다.
'......나약한 놈.'
사실, 묘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내가 그분을 잊을 리 없었으니까. 줄곧 기억하고 있 었다. 허나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너무, 행복해서.'
그래. 너무 행복했다. 새로운 가 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건강한 아 리아와 함께하는 일들이 벅차도록 즐거웠다. 친구들을 만나고 웃는 시간이 소중했다. 그래서 그 행복 을 흐트러트리고 싶지 않았다.
'행복을, 유지하고 싶었어.'
카라쇼의 묘를 다녀온 뒤면 나 는 죽어갔다.
잠은 잘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끝없는 악몽이 나를 기다렸으니
까.
검을 잡을 때면 떠오르는 그날 의 감각에 검을 휘두르는 것이 무 리일 정도로 손이 떨려 왔다. 음 식을 먹으면 입 안을 가득 채우는 피비린내에 뭐든 게워 냈고, 눈을 뜨면 눈물부터 차올랐다. 숨이 막 히나, 죽지 않았다.
이 악몽에서 괜찮아지기까진 아 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나는 그 시간 동안을 지옥으로 보내야 했 다.
'비겁한 새끼......
두 손 위로 얼굴을 묻고 차오르 려는 눈물을 삼켜 냈다.
결국 변명일 뿐이다. 비겁하기 짝이 없는 변명. 나는, 내가 지키 지 못한 생명의 무게를 버티지 못 할 뿐이었다.
'이런 걸 떠올리는 게 아니었는 데.'
한숨을 뱉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수면 아래 잠겨 있던 그때의 기 억들이 다시 떠올라 나를 덮치는 느낌.
떠오른 생각들을 모두 지워 버 리고 싶었다.
'진정해. 사사로운 감정에 빠져 있을 시간이 아니야.'
천천히 심호흡하며 어두운 감정 들로 인해 탁해진 몸속 마나를 순 환시 켰다.
엘의 의도가 무엇이었건 나는
엘의 호위 기사로서 온 것이다. 이런 나약한 감정에나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래. 괜찮아질 거야. 나는 9
그리고 세상의 시간이 멈춘다.
동공이 확장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말도 안 돼. 이건......
끊임없이 울리는 본능의 경고음.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이 터질 것 같았다. 허나 나를 경악시킨 건 다가오는 위험이 아니었다.
사람에겐 저마다 기운이 있다. 어쩌면 마나의 흐름이라고도, 어 쩌면 아우라라고도 할 수 있는 고 유의 무언가. 소드 익스퍼트가 된 이후부터 난 이 기운으로 사람을 읽곤 했다.
그리고 지금 다가온 기운은, 잊 으려 했으나 여전히 기억하고 있 는 어떤 이의 기운이었다.
숨을 멈춘다.
그 사람에게선 늘 이런 향이 났 다. 겨울을 그대로 담아 낸 것만 같은 한없이 차가운 향기• 땅 위 에 소복이 쌓이는 눈송이의 내음. 뼛속까지 얼어 버릴 것 같은 지독 한 냉기.
쉬익!
세찬 바람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르는 단도를 고개를 기울여 피 했다. 충격으로 뇌가 굳어 버린
탓에 반응이 조금 늦었다.
단도 날에 긁힌 뺨에서 피가 흘 러내렸지만, 나는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소드 마스터가 됐다고 들었건 만, 여전히 느리구나, 미르."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등 뒤에 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귀를 사로잡는 매혹적인 낮은 목소리가 내 뇌를 혼들었다.
나는 콰득 입술을 악문 채 양손
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쾅!
온몸에서 검은 살기가 폭발하듯 쏟아져 나온다. 밟고 선 땅이 옅 게 흔들렸다. 데베라와의 대치 이 후 처음으로 최대치까지 살기를 풀었다.
주위를 검은 연기가 감쌌다. 보 통 사람이었다면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졌을 살기에도 등 뒤로 다가 오는 발걸음 소리는 여전했다.
나는 으르렁거리며 짓씹듯 욕설 을 내뱉었다.
"감히,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 어, 개새끼가."
■스-르■릉'
물 흐르듯 발검하며 반원 방향 으로 몸을 돌려 대상의 목 앞에 검 끝을 겨누었다. 온몸에 분노가 들끓어 오르는 듯했다.
그리고 마주치는 눈동자.
여전했다, 지독할 정도로. 그는 새파란 소년 시절보다 훨씬 더 성 숙해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했다.
죽음을 상징하는 색임에도 그의 보랏빛은 치명적으로 아름다웠다. 여전히 속내를 감춘 채, 자수정처 럼 투명하게 반짝이는 눈동자. 날 카롭게 올라간 눈매. 섬세한 속눈 썹. 새하얀 얼굴.
그 얼굴 위를 덮은, 내 가면과 똑같은 형태이나 색만 하얀 가면 도 여전했다.
짧게 다듬은 칠흑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살랑거린다. 분명 봄 인데, 봄바람을 타고 온 그의 향 기는 겨울을 담고 있었다.
쓰
부드럽게 찔려 들어가는 피부의 감촉에 떨리려는 손을 애써 진정 시켰다. 눈처럼 새하얀 목 위로 붉은 피가 배어났다.
급소를 노리고 있는데도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태연한 그의 태도 가 내 속을 뒤집었다. 피어오르는
비린 피 냄새에 울컥 치밀어 오르 는 것을 억누르며 분노로 이글거 리는 눈을 그에게 똑바로 맞췄다.
" 지그문트......
지그문트. 그것이 한때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 증오스러운 이의 이 름이 었다.
한없이 낮아진 내 목소리가 맹 수의 울음소리처럼 거칠게 으르렁 거렸다.
그와 나 사이에 치열하게 오가
는 시선.
소드 마스터가 됐음에도, 6년을 더 살았음에도 여전히 읽을 수 없 는 그의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예나 지금이나, 난 저 눈빛이 싫 었다.
달칵.
제 얼굴로 천천히 손을 뻗은 그 가 사뿐히 가면을 벗었다. 완전히 드러난 그의 얼굴은 여전히 숨 막 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붉은 입술이 읏는다. 피 어오른 초승달처럼 휘황하게 웃었 다.
"오랜만이야, 슈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말 오 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인사하듯 태연한 목소리.
날 붙잡고 있던 줄이 툭 끊어졌 다.
쾅
나는 망설임 없이 그를 향해 검 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