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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08화 (108/254)

108 화

"그 더러운 성격은 여전하군."

인기척이 느껴진 곳은 검은 오 러로 인해 길고 깊게 갈려 버린 길에서 살짝 비껴간 곳이었다. 순 간이동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태평하고 심지어 웃음기까지 서려 있었기 에, 나는 더욱 분노했다.

"네 그 겁먹은 쥐새끼 같은 태 도도 여전하군."

쾅!

검은 오러가 폭발하듯 검 위를 뒤덮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분노한 탓 에 마나를 가다듬을 수는 없었지 만, 오러는 내가 살기를 띠는 만 큼 난폭함이 증가해 그 기세만으 로도 흉흉할 정도였다.

나는 분노로 부릅뜬 눈으로 지

그문트를 노려보았다.

"죽기 싫으면 검 뽑아, 개새끼 야."

여전히 검집에 굳게 꽂힌 그의 검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검사들은 말로 이야기하지 않는 다. 검을 맞대는 것이야말로 최고 의 의사소통이었기에.

사실 지그문트와는 대화를 나누 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과거의 울분을 풀어내고 싶을 뿐이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서 있던 지 그문트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 다.

고귀한 보랏빛 눈동자.

저런 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나는 아득 이를 갈았다.

우주의 보랏빛 하늘을 담아낸 주제에 별은 없고 새까맣게 죽어

버린 눈동자가 휘어진다. 그에 따 라 그의 오른쪽 눈가에 눈물처럼 새겨진 점이 살짝 움직였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 더러운 입도 여전하고."

쾅!

지그문트가 서 있는 곳으로 망 설임 없이 오러를 날렸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땅 위로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냈다.

피어오른 흙먼지 때문에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땐, 그곳에 사 람은 없었다.

지그문트가 또다시 순간이동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모를 줄 알고.'

검 손잡이를 으스러져라 쥔 채 허공에서 사라진 그의 마나를 읽 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나가 응집되는 것이 느껴졌다.

마나를 끌어 올려 도약한 나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뛰어들었 다.

예상한 대로 허공에서 나타나는 인영. 훅 다가온 나를 보고 놀랐 는지 살짝 커지는 보랏빛 눈동자.

한 뼘 이내로 가까워진 거리라 그의 속눈썹 하나까지 모두 자세 히 보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확연 히 자란 키와 몸. 더는 소년이라 부를 수 없는, 성숙하고 날카로운 성인의 인상. 원래도 놀랍도록 잘

생긴 얼굴이었으나 이젠 잘생겼다 는 단순한 표현 정도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차가운 조각상처럼 섬세 한 외모.

그러나 눈은, 이전엔 아주 희미 하게라도 띠고 있던 생기조차 완 전히 사라지고 차가움만 남아 있 었다.

속이 뒤틀린다.

떠난 건 자기인 주제에, 왜 사연 있는 눈을 하고 있는 건지. 원망 스럽고 증오스러웠다.

'빌어 처먹을 놈.'

비린 맛이 올라올 만큼 입술을 짓씹은 난, 지그문트와 부딪치기 직전의 거리에서 검을 휘둘렀다.

챙!

날붙이가 맞부딪치는 살벌한 소 리가 울려 퍼졌다. 한 발자국 물 러선 지그문트는 이제야 검을 뽑 아들고 내 검을 막아 냈다.

맞붙은 검 사이로 고고히 나를

응시하는 그와 치열하게 시선을 나누었다.

여전히 읽을 수 없는 짙은 포커 페이스가 내 분노를 더 끌어올렸 다.

캉.

내게 밀리던 지그문트가 내 검 을 힘껏 밀어내며 대치를 끝냈다. 쉽게 밀려나 준 나는 무자비하게 검을 움직였다.

챙! 챙!

검이 몇 번이고 오간다. 내 머리 카락을 태울 듯 날아온 불덩이를 가볍게 피하며 그의 어깨에 검을 찔러 넣었으나 지그문트는 순식간 에 피하며 반격했다.

'......실력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늘었군.'

그간 6년 동안 자란 것은 나뿐 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지 그문트의 실력은 급속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 시절 소년과는 비교하 는 것이 실례일 정도로 대단한 강

자의 기운이 내 피부를 자극했다.

'예측을, 못 하겠어.'

놀랍게도, 지그문트는 내가 그와 의 승부에서 승리를 점칠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파지 직!

지그문트의 손짓 아래 허공에서 그려지는 마법진. 마법진을 뚫고 튀어나온 푸른 전격을 피해 몸을 돌렸다.

내가 피하는 틈을 타 내 복부 쪽으로 빠르게 검을 비집어 넣는 지그문트의 허벅지를 걷어차고 몸 을 뒤로 젖혀 허공을 뛰어오르며 검을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렸다.

초승달 형태로 흉폭하게 날아가 는 검은 오러는, 인간의 속도로 절대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휙.

그리고 또다시 허공에서 사라지 는 인영. 검은 오러는 순식간에 투명해진 지그문트를 통과해 땅을

갈랐다. 골목길에 거대한 싱크홀 같은 구멍이 생겼다.

싸움을 시작하며 이곳으로 들어 오는 길목에 소음 및 충격, 입장 을 막는 방어막을 쳤기에 망정이 지, 그러지 않았다면 건물들이 무 너지고 큰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와 다쳤을 게 뻔했다.

'소드 익스퍼트, 거기에 상급 마 법사.'

지그문트의 경지는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의 몸속에서 요동치는 오러의 기운부터, 손짓 몇 번으로 마법진 을 전개하는 경악스러운 마법 실 력까지.

'검의 경지도, 마법의 경지도 절 대 뒤처지지 않아.'

보통의 마검사는 검술에 공격을 치중하고 마법은 들러리처럼 사용 하거나 그 반대인 반면, 그는 둘 모두 뛰어났다.

이전에도 마법과 검술을 곧잘 병행해 사용하던 지그문트는, 현 재 대륙 내 마검사 중에선 최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 을 선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순간이동 실력은...... 저 게 가능하다고?'

현재 지그문트는 제대로 된 실 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까다로운 상대라고 생 각하게 하는 요인이 바로 저 순간 이동이었다.

순간이동은 수많은 마법 중에서 도 고난이도에 속한다.

아주 복잡한 마법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마법사는 이를 허공에서 바로 전개하지 못 하고 땅에 그려 사용했다.

게다가 한 번 시전하는 데에 많 은 양의 마나를 필요로 했기 때문 에, 연속으로 사용하는 것은 고사 하고 한 번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 는 마법사가 태반이었다.

'그런데 지그문트는......

공격이 휘둘러지는 그 찰나에, 시동어조차 없이 곧바로 순간이동 을 사용한다. 그것도 물 쓰듯이. 잠깐 사이에 5번을 사용했음에도 그의 마나는 고갈될 기미조차 보 이지 않았다.

아무리 단거리를 이동하고 있다 고 해도, 이런 순간이동 실력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6년 동안 순간이동만 연습한 건가?'

얼굴을 한가득 구긴 채 날아오 는 검을 받아쳐 냈다.

이상하게 불쾌했다. 물론 지그문 트의 얼굴을 봐서 그런 것도 있었 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근본적 인, 내 본능을 건드리는 기이한 불쾌함이 있었다.

지그문트의 몸에서 피어나는 기 운이었다.

"6년이나 지났건만 겨우 이 정 도 수준인가. 영웅이라느니, 대륙 최강자라느니 하더니 들려오던 미

르의 명성은 다 헛것이었던 모양 이군."

내가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있 을 때를 틈타 날카롭게 검을 휘두 른 그가 비꼬았다. 잠깐의 방심으 로 로브 자락을 내준 나는 서늘하 게 눈을 떴다.

"전보다 퇴화한 새끼는 닥쳐. 네 이름은 내 귀에 들리지도 않더군. 6년간 어디 시골에서 요양이라도 하고 왔나 보지?"

내 비꼼에 그가 태연하게 어깨

를 으쓱였다.

"뭐, 그럴지도. 그래서 내가 보 고 싶었나?"

능청스러운 말투. 조금의 진심도 없는 웃음. 여전히, 읽을 수 없는 눈빛.

쾅!

그의 모든 것이 나를 미치도록 분노케 했다.

"검 잡는 새끼가, 뭐 이리 혀가

길어. 마법도 겸하는 잡종 새끼라 그런가."

폭발하듯 터져 나온 오러에 밀 려 휘청거리는 지그문트를 내려다 보았다.

진심으로 마검사를 잡종이라 생 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의 노력 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허나 저 자식의 속을 뒤집기 위 해서라면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 을 것 같았다.

나 스스로도 낼 수 있으리라 생 각하지 않았던 낮고 차가운 목소 리가 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 다. 공녀로 살며 억눌렀으나, 원 래는 용병으로 살며 한없이 거칠 었던 말투가 부활한 느낌이었다.

"과묵한 검사님이신 너는 참 잘 났군."

다시 중심을 찾은 지그문트는 핏물 섞인 침을 내뱉으며 나를 비 꼬았다. 달라진 듯 달라지지 않은 그를 보고 있자니 무언가가 울컥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지그문트는 그때와 똑같았다.

한 마디도 곱게 나오지 않는 저 주둥이부터, 비뚤어진 미소만 주 야장천 지어 대는 저 붉은 입술, 남은 욱하게 만들면서 자신의 감 정은 조금도 드러내지 않는 저 포 커 페이스까지.

그를 친구라고 생각하던 그때로 부터 달라진 건 그를 향한 내 감 정뿐일지도 몰랐다.

'너는 어째서.'

원수처럼 생각하면서도 미묘한 친애를 품고 있던 마음엔 들끓는 분노만 남아 있었다.

너는 어째서, 그날 오지 않았나.

"그날,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 아도 스승님을 생각해서 왔어야 지. 그날은 불가피하게 못 왔더라 도 한 번은 스승님을 찾았어야 지!"

언성을 높이지 않으려 했는데. 화를 내면 지는 것 같아서, 그저

고저 없이 말하려 했는데. 결국 뱉은 것은 울분 섞인 원망이었다.

여전히 무덤덤하게 나를 바라보 는 지그문트의 눈에 흙을 뿌려 버 리고 싶었다.

그가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래. 나 혼자만 친구라고 생각 했다는 게 조금 가슴 아플지도 모 르겠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체념하는 것에 익숙했으니까.

"은혜를 몰라도 유분수지, 어떻 게, 다른 사람도 아닌 네 은인 카 라쇼에게 그럴 수가 있나."

하지만 카라쇼에게 함께 배웠던 주제에, 나와 같은 카라쇼의 제자 였던 주제에!

심지어 나보다 더 카라쇼에게 신세를 진 주제에 그녀가 죽은 뒤 로 그녀를 찾지 않았던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네가 인간 새끼야?"

불같은 분노가 내 온몸을 지배 했다.

지그문트의 보랏빛 눈동자에 파 동이 일었다. 찰나였지만 분명했 다.

기다란 속눈썹이 빛 없는 자수 정을 잠시 감춘다.

바람에 휘날리는 짧은 칠흑빛 머리칼. 저 머리색 때문에 나와 그는 함께 다닐 때면 남매라고 오 해받곤 했다. 무척 사이가 좋지 않은 견원지간 남매로.

굳게 닫힌 그의 눈가 아래, 내 눈물점과 좌우만 바뀐 것 같은 눈 물점도 사람들이 그와 내가 혈연 관계라고 오해하게 만든 큰 요소 였다.

'지그문트와 형제냐고요? 이 자 식과 형제였다면 같은 피가 흐른 다는 것이 수치스러워 자결했을 겁니다.'

'전 미르를 처단했을 겁니다. 이 녀석을 없애면 끝나는 것을, 굳이 제 소중한 생명을 끊을 필요는 없 겠죠.'

'이 새끼가......

'뭐.'

지그문트와 내 사이가 보통 친 구처럼 좋았다고 말하기는 무리였 으나 분명 우리는 가까웠었다. 만 나기만 하면 질색을 했어도, 같은 스승을 공유하고 같은 세상을 배 우며 함께 싸웠다.

지그문트와 나는 가까운 친구였 다. 어쩌면 친구 이상일, 생사를 함께한 전우.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 하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맑고 호 쾌한 웃음소리가 내 귓가를 가득 채웠다. 친구였을 적에도 보기 힘 들었던 큰 웃음을 틀어진 지금에 서야 보게 된 것이 기이했다.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지그문 트를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의 얼굴에 남은 웃음기는 여 전히 진심이 조금도 없었다. 그의

눈은 조금도 웃지 않고 있었기에.

그의 웃음은 얼어붙은 호수 같 았다. 너무 꽝꽝 얼어 그 속에 무 엇이 있는지, 얼마나 깊은지 조금 도 보여 주지 않는 호수 말이다.

허나 거짓으로 점철되었음에도 지그문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멍청하구나, 카슈미르."

변성기가 끝나지 않아 미성이던 과거와는 달리, 완벽한 성인 남성 의 태가 나는 낮고 굵은 목소리.

여전한 것은 사람을 휘어잡는 예 의 분위기뿐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도 지배자의 기 세를 풍겼다.

"아직도 그 사사로운 감정과 미 련한 정을 버리지 못했어."

나지막이 읊조리는 짙은 목소리.

검을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 어갔다.

지그문트는 날카롭게 올라간 눈

꼬리를 휘며 사르르 웃음 지었다.

"너는 말이야, 그 뭣도 없는 용 병이 뒤진 일이 내게 무슨 의미라 도 될 줄 알았나?"

그는 기어코, 최후의 선이던 내 이성 줄을 무참히 끊어 버렸다.

쉬익!

세찬 바람 소리. 아니, 어쩌면 폭풍의 소음을 더 닮았을 거친 공 기의 소리가 일대를 휘감았다.

"나는 말이야, 한때 너를 괜찮은 놈이라고 생각했었어. 친구라고, 생각했었지."

내 입술 틈새를 가르는 고백은 스스로 놀라울 만큼 침착한 목소 리로 읊어졌다. 차갑지도, 뜨겁지 도 않은, 딱 0도에 맞춰진 느낌.

그 온도 없는 눈으로, 나는 지그 문트를 요요히 응시했다.

그리고 읏었다. 쉴 새 없이 메마 른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에 젖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때까지

웃다, 숨을 멈췄다.

"그런데 이제 보니 금수 새끼였 구나."

쾅!

그리고.

세상이 칠흑빛으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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