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화
쾅!
굉음이 땅을 울린다. 사방으로 흙먼지가 퍼졌다.
검은 오러에 물들어 흡사 악령 에 물든 듯한 기운을 풍기는 내 검.
검 끝은, 지그문트의 목 바로 옆 에 박혀 들어가 있었다.
"하
내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튀어 나갔다. 그리 힘든 것도 아닌데,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심해 속에 빠진 것 같았다.
숨이, 막혔다.
툭.
지그문트의 하얀 피부 위로 투 명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를 본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파도처럼 너울거렸다.
나는 그 물방울이 나를 에워싼 심해가 흘러넘친 것뿐이라고, 절 대 눈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런 개자식 때문에 눈물을 흘 리기엔 내 눈물이 너무 아까우니 까.
툭. 툭.
내 숨통을 쥔 심해가 계속해서
흘러넘친다. 어느새 물기가 가득 해진 지그문트의 새하얀 피부는 빗물을 머금은 백합 같았다.
시야가 번져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럼 에도 나는 눈을 닦지 않았다.
닦아 내면 내가 울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내가 아직까지도 지그문트를 친 구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인정해 버리는 꼴이었다.
'나는, 왜 못 죽일까.'
목숨 끊는 것 하나에 벌벌 떠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울컥 치 솟았다.
지그문트 말이 맞았다. 나는 아 직도 나약했다.
이런 금수 새끼 따위 죽여 버리 는 게 나을 것이다. 살아 있어야 산소 낭비밖에 안 할 천하의 개자 식. 은혜도 모르고 염치도 없는, 마수만도 못한 놈.
마수의 숨통을 끊듯, 그렇게 끊 어 버리기만 하면 되었다. 저 새 하얀 목덜미 위에 내 검 끝을 처 박기만 하면 됐다.
허나, 알면서도, 그리 간단한 것 을 못 하는 것은.
'슈슈. 지그문트와 친하게 지내 라'
'싫습니다. 저는 스승님이 그 빌 어먹을 놈을 거두신 이유를 모르 겠습니다. 속을 알 수도 없고, 늘 제게 시비만 걸고! 왜 그 음흉하 고 재수 없는 새끼를......!'
' 카슈미르!'
'......죄송합니다.'
'그래...... 지그문트는 상당히 날 선 아이지. 가까워지기 힘든 성격 이고. 네가 지그문트를 좋게 생각 하지 않는다는 거 안다. 하지 만...... 그래도 나는 네가 지그문 트와 친하게 지내 주었으면 한 다.'
'네겐 삶의 이유가 있지? 검을 휘두르는 이유가 있잖아. 하지만 지그문트에겐 그것조차 없어. 그 저 살아 있기에 살고, 죽지 않았 기에 검을 휘두르는 거야. 슈슈.
나는, 네가 비록 용병으로 살아갈 지라도 사람의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부디 지그문트를 안쓰럽 게 여기렴.'
'......그건 동정이지 않습니까. 그 자식이라면 분명 제가 자기를 동정한다고 싫어할 겁니다.'
'슈슈. 동정이라는 건 그렇게 나 쁜 것만이 아니다. 타인을 아랫사 람으로 여기는 동정은 잘못된 거 지만, 동정 자체는 타인의 마음에 공감하는 것에서 시작되니까. 나 는 네가 지그문트의 처지를 이해 해 줬으면 한다.'
'네게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훗날 내가 죽어도 너희 둘이 서로를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 는 서로의 기둥이 되길 바란다.'
내 스승이, 지그문트를 사랑했기 때문에.
새하얀 설원을 떠올린다. 지그문 트의 피부만큼이나 새하얗던 설원
O
그 하얗던 눈밭 위가 붉은 피로 물들던 순간을 떠올린다.
뚝
끊임없이 흐르는 물방울은 분명 투명했음에도, 왜일까', 나는 그것 이 설원을 적시던 피 같아 보였 다.
'사람의, 숨통을, 끊을 땐...... 절대 그의 눈을 피해선 안 된다. 네가 앗아가는 생명의 무게를 반 드시 짊어져야 해...... 그게 상처 받을지언정 괴물이 되지 않는 방 법이다.'
나는 여전히 생명의 무게를 짊
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
"너는, 이제부터 내게 죽은 사람 인 거야."
갈라진 내 목소리는 현악기 줄 이 끊어지는 소리와 사뭇 닮아 있 었다. 물기 어린 시야 때문에 지 그문트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계 속해서 그의 눈으로 추정되는 부 근을 응시했다.
비록 지그문트가 피 흘리게 죽 도록 할 순 없어도, 내 속에서 죽 이기 위해.
"내게 있어 너는 이곳에서 죽은 거야. 방금 휘두른 검 끝에 찔려 죽은 거야. 나는, 너를 죽인 거 야."
죽일 자신도 없고, 계속 기억하 고 있을 자신도 없다.
그래. 나는, 여전히 나약했기에.
그래서 나는 지그문트를 죽은 셈 치기로 했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피차 보기 좋은 얼굴도 아니잖아. 오늘은 너도 이곳에서 일이 있어 서 우연히 만난 거라고 믿을게. 다음엔 우연히 만나도 아는 척하 지 말자. 나를 죽이고 싶으면 암 살자를 보내. 네 더러운 얼굴 들 이밀지 말고."
갈라진 목소리를 신경 쓰지 않 고 단호히 말했다.
나는 눈가를 거칠게 닦아 냈다. 간지러워서인 것처럼 벅벅 닦았 다. 부어오른 눈가가 따가웠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손등에 묻어난
물기는 모르는 척했다.
"그러니"h 너는......
멈칫.
물기가 걷히고 깨끗해진 시야. 그 너머로 보이는 모습은 내 속을 뒤틀었다.
내 눈이 저절로 커졌다. 애써 진 정시켰던 내 안의 심해가 끓어 넘 치는 느낌이었다.
내가 올라탄 탓에 꼼짝도 못하
는 커다란 몸. 내게 얻어맞아 엉 망이 된 얼굴. 흙먼지로 더러워진 검은 머리카락.
나를 올려다보는, 상처 입은 보 랏빛 눈동자.
나는 또다시 이성을 잃고 지그 문트의 '뺨으로 힘껏 주먹을 날렸 다.
퍽!
그의 얼굴이 휙 돌아갔다. 작게 신음을 뱉은 그가 눈을 감았다.
더는 지그문트의 눈이 보이지 않 았다.
다행이었다. 그 상처받은 눈을 계속 보았다면, 진짜 죽여 버렸을 것 같으니까'.
'감히.'
나는 입술을 짓씹어 화를 참았 다.
지그문트는 상처받을 자격이 없 었다. 버리고 간 건 그인 주제에, 모든 과거의 연을 금수만도 못한
한마디로 끊어낸 주제에 그런 눈 을 해선 안 됐다.
"너는, 이제부터 내게 없는 사람 인 거야."
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까 스로 억누르고 말을 끝마쳤다. 목 소리가 흔들렸던 건 그저 지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크게 심호흡을 한 나는, 올라탔 던 지그문트의 몸 위에서 일어나 땅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왜, 이런 태도인 거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그문트가 얌전히 얻어맞은 것도, 조금 전 눈빛도.
그런 금수 같은 소리를 했으면 끝까지 뻔뻔하게 나올 것이지, 약 한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겠 지.'
더는 볼 일 없는 사람이다. 지그 문트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든 내
겐 하등 상관없었다.
나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한계까지 마나를 끌어올린 탓에 욱신거리는 마나 회로를 무시하며 주위를 덮었던 방어막을 해체했 다. 마나 과용으로 크게 뛰던 심 장이 그나마 가라앉은 느낌이었 다.
검엔 온갖 더러운 것들이 묻어 있었다. 깨끗이 닦아야겠지만, 그 건 집에 가서 할 일이었다. 우선 대충 휘둘러 턴 뒤 납검했다.
이곳에서 그와 함께 숨 쉬고 있 는 것 자체가 견디기 버거워서, 나는 차라리 엘이 있는 건물로 들 어가려고 했다.
"네 할 말만 하고 가 버리는 나 쁜 습관도 여전하군. 내 대답도 들어줘야지."
그리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낮 고 매혹적인 목소리.
잠시 발걸음이 멈칫했으나, 나는 못 들은 척 가려 했다.
" 싫어."
"••••••뭐?"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등을 돌렸다.
엉망이 된 상태로 휘청거리며 서 있는 지그문트가 눈꼬리를 예 쁘게 휘었다. 짙은 보랏빛 눈동자 에는 기이한 승부욕 같은 것이 들 끓고 있었다.
"나는, 너에게 있어 죽은 사람으 로 남지 않을 거야."
그의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순간 검으로 가려는 손을 꾹 쥐 었다. 그의 웃는 얼굴에 다시금 주먹을 날리고 싶은 마음도 참았 다.
'대꾸할 가치도 없어.'
지그문트의 의견을 듣고자 했던 얘기가 아니다. 조금 전 했던 말 은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나는 그 멍청한 미련으로 내 사
람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두었던 너를, 완벽히 내칠 거라는 선포. 이제 더는 너를 내 사람으 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결심.
그것에 지그문트의 의견은 필요 치 않다.
나는 대답 없이 그를 등지고 다 시 걸었다.
" 미르."
나는 부름을 무시하고 꿋꿋이 걸었다.
"카슈미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미 여러 번 깨물어 피가 배어난 입술 이 다시금 혹사당했다. 심장을 울 컥 뱉어 내고 싶었다.
"••••••슈슈."
멈칫.
수많은 감정들이 뒤섞인 낮은 목소리에 결국 멈추고 만다. 그 목소리를 타고 흐르는 내 애칭에,
내 귀로 마수의 피가 들어간 것 같았다.
나는 결국 뒤돌아보고 말았다.
"다시는, 날 그렇게 부르지 마, 역겨운 자식아."
거칠게 으르렁거리며 얼음장 같 은 눈빛으로 지그문트를 노려보았 다.
지그문트는 웃었다.
"우리, 여전히 친구야?"
지그문트와 나는 같은 스승을 둔 제자들로서 꽤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사이였다.
함께한 시간이 꼭 대상을 아는 지식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지 만, 함께한 시간이 길수록 대상을 더 많이 알아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지그문트는, 나를 분노케 하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쉬익!
마나의 돌풍과 함께 단숨에 지 그문트 앞에 선 나는, 그의 멱살 을 뜯어 버릴 듯 쥐고 잡아당겼 다. 지그문트의 상체가 구부러지 며 내게로 속절없이 끌려왔다.
"6년 사이 그 반질한 대가리에 칼이라도 맞은 적 있나 봐. 생각 없는 말만 나불대는 걸 보면. 그 김에 뒤져 버리지, 왜 내 앞에 다 시 나타났어? 네가 얼마나 망가 졌는지 보여 주고 싶었나? 네 뇌 가 얼마나 작고 멍청한지 내가 알 길 바랐어? 그 금수만도 못한 아
가리가 얼마나 잘 짖어 대는지 자 랑하고 싶었던 건가? 내 친애하 는 지그문트."
나는 스산한 목소리로 사납게 뇌까렸다. 그를 끌어당긴 반동으 로 잠시 맞닿고 떨어진 이마의 감 촉조차 역겨웠다.
'......짜증 나.'
투명한 보랏빛 눈동자는 쏟아지 는 욕설에도 예상했다는 듯 태연 했다. 그것이 내 속을 더 뒤집어 놓아서, 멱살을 쥔 손에 힘이 들
어갔다. 지그문트의 고급스러운 하얀 셔츠가 살짝 찢어질 정도였 다.
나는 섬뜩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너는, 내게 친구였던 적이 없 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대가리 를 잘라 성문 밖에 걸어 놓을 개 새끼야."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내 명료 하고 유쾌한 목소리의 반이 거짓 말. 허나 반은 진실.
그는 여태까지 내게 친구였다. 줄곧.
허나 앞으로는 아닐 것이다.
지그문트의 멱살을 놓고 그의 어깨를 거칠게 밀어냈다. 멱살을 놓으며 투둑 소리와 함께 그의 와 이셔츠 단추가 떨어졌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지그문트는 반항 없이 밀려났다.
"......그래. 그렇군."
구겨진 자신의 와이셔츠를 멍하 니 매만지던 지그문트가 중얼거렸 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깊 이 가라앉아 있던 보랏빛 눈동자 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다시금 마주하는 두 눈.
그 순간, 지그문트의 손이 내 멱 살을 잡아끌었다.
피할 수 있었으나, 순간 당황한 나는 그대로 그에게 이끌렸다.
키 차이 탓에 내 발꿈치가 들렸
다. 그는 멱살을 잡았다기보단 춤 의 한 동작을 수행하는 것처럼 느 껴질 만큼 사뿐히 나를 이끌었다.
오가는 시선. 젖혀진 내 고개. 지그문트의 상체가 살짝 휘어들며 나와 이마를 맞대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저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나는 그 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다.
"이럴 생각까진 없었는데 마음 이 바뀌었어. 나는 네게 살아 있 는 사람으로조차 남을 수 없다는
거지."
지그문트의 눈이 예쁘게 휘어들 었다.
"그렇다면 나는 네 인생 최대의 개자식이 되어 보일래. 네 인생에 끼어들어서, 지울 수 없는 내 혼 적을 네게 남길 거야. 추억을 남 길 수 없다면 흉터라도 남겨야지. 넌 그 흉터를 보면서 날 떠올릴 테니."
나긋하게 속삭인 지그문트의 엄 지가 상황에 맞지 않는 부드러운
손길로 내 뺨을 쓸어내렸다.
엄지가 닿은 곳은 지그문트가 던진 단검에 베인 상처가 남은 곳 이었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움찔 눈가를 떨었다.
따가웠다.
곧게 뻗은 새하얀 손끝 위로 핏 줄기가 묻어나자, 그는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처럼 웃었다.
"상처가 치료돼도 흉터는 남는 거 알잖아. 슈슈. 넌 나를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의 모든 정과 기억들을 미 련한 것으로 치부해 버린 주제에, 그는 내게 기억되고자 하고 있었 다.
왜 이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이는 지 나는 결단코 이해할 수 없었 다.
'그래...... 이해할 필요 없겠지.'
헛숨을 들이쉬었다. 어쩌면 미친 놈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 못된 것일지도 몰랐다.
퉤 •
지그문트의 콧대를 타고 내 타 액이 흘렀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 은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얼굴에 침을 뱉은 나는, 그 를 똑바로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 다.
"소원 성취한 거 축하한다, 개자
식아."
지그문트는 이미 내 인생 최대 의 개자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