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11화 (111/254)

Ill

지그문트가 제 얼굴에 묻은 침 을 손등으로 닦는 사이, 나는 그 의 복부를 걷어차 멱살잡이에서 벗어났다. 그와 맞닿았던 이마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라 팔 로 벅벅 닦아 냈다.

'더러운 거 밟았다고 생각하자.'

내게 개자식으로 남겠다는 지그 문트를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더

이상 그와 어울려 줄 생각 따윈 없었으니 상관없을 터였다.

이 같잖은 대치를 끝내기 위해 움직일 때였다.

끼익.

'Hide & Ceek' 정보 길드의 문 이 열렸다.

순간 엘인가 싶었으나 엘의 기 운이 아니었기에 미간을 좁혔다.

'내가 밖에서 기다릴 때는 들어

가는 걸 못 봤던 얼굴인데.'

그럼 나와 엘이 이곳에 오기 전 에 정보 길드를 들어간 사람이라 는 것.

나는 별생각 없이 나온 인물을 확인하다 미간을 찌푸렸다.

'......티나 키프로스?'

중년의 사내를 보자마자 든 생 각이었다.

희뿌연 연보랏빛 머리카락에 축

처진 검은 눈동자. 티나보다 나이 가 든 것 같지만, 확실히 그녀와 닮은 얼굴이었다.

'......불쾌해.'

남자의 기운은 내 신경을 거스 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분명 외모 자체는 나쁘지 않았음에도.

안 그래도 좋지 않던 기분이 최 악을 찍는 것을 느끼며 남자를 지 나쳐 길드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였다.

턱.

나와 지그문트의 싸움으로 난장 판이 된 거리를 놀란 눈으로 바라 보던 남자가 거칠게 내 팔을 붙잡 았다.

순간 손을 부러트리고 싶은 충 동이 울컥 올라왔으나 간신히 눌 러 참았다. 평민 용병 미르인 상 태에서 귀족에게 상해를 입히면 무조건적으로 내게 불리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 무슨 일이십니까."

"용병 미르, 아닌가?"

남자의 유려한 목소리가 내 귀 엔 불쾌하게만 들렸다. 살기를 내 뿜고 싶은 것을 참으며 고개를 돌 려 그를 마주 보았다.

전투 후 살기가 차마 다 갈무리 되지 않아서인지, 나와 눈이 마주 친 남자가 움찔 몸을 떨었다.

"맞습니다만, 무슨 용건이십니 까."

"아, 전부터 그대 얼굴을 보고

싶었거든."

남자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피었다.

"그대는 우리 가문의 스카우트 를 다섯 번이나 거절한 용자가 아 닌가."

' 다섯 번이나?'

나는 미간을 좁혔다.

소드 마스터가 된 후로 나를 집 요하게 스카우트하려는 조직들이

있긴 했지만, 그중에서도 다섯 번 이나 스카우트 요청을 해 온 조직 은 많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를 고용하려면 어마 어마한 봉급을 약속해야 하고, 그 런 봉급을 지불할 수 있는 건 귀 족들뿐이니刀 E

귀족들은 자존심이 높았다. 거절 당하고도 다시 요청하는 이들은 적었다.

'••••••설마.'

문득 남자의 정체에 대해 유력 한 추측이 떠올랐다.

내가 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 자, 남자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 소개가 늦었군. 키프로스 백 작가의 소백작, 파울로 키프로스 일세."

파울로 키프로스. 티나 키프로스 의 오라비였다.

'원작에선 어떻게 등장하는 인물 이더라.'

머리가 지끈거려 눈을 꾹 감았 다 떴다. 원작에서 키프로스 백작 가는 디에고와 대립하는 단면적인 악역이었기에, 서술이 많지 않았 다.

'내게 호의가 있는 건 아니군.'

파울로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 었다. 애초에 스카우트를 거절한 나를 비꼬는 듯 말을 꺼냈으니.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원작의 파울로 키프로스는 몰라 도...... 현재의 파울로 키프로스에 대한 소문은 알지.'

그는 사교계에서 꽤 유명한 인 물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저열한 그의 눈빛에 치밀어 오르는 구역 질을 참았다.

"참으로 아쉬워...... 우리 가문 에 들어왔다면, 내 한 번쯤 같이 놀아 주려 했건만."

파울로 키프로스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신보다 권력이 약한

이들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으로 유명한 사교계의 탕아였다.

'어떻게 운수가 이렇게 나쁘지.'

지그문트에 파울로까지. 불운도 이런 불운이 없었다.

내 팔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그 의 복부를 걷어차고 가 버리고 싶 었지만, 애써 참고 손을 살짝 내 쳤다.

"키프로스 백작가에서 주셨던 관심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만,

조직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있어 거절하는 것은 불가피했습니 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건물로 들어가려는 나를 그의 손이 다시금 저지했다. 내 팔을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평범한 사 람이었다면 멍이 들었을 것 같았 다.

나를 핥아 내리는 것 같은 더러 운 시선에 차오르는 분노를 꾹 눌 렀다.

"내 잠시 그대를 보고 싶네만."

'죽일까.'

지그문트로 가열된 머리 때문일 까, 과격한 생각부터 불쑥 머리를 들었다.

파울로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도망가는 데에 얼마나 걸릴지를 계산하던 나를 멈추게 한 것은 뒤 에서 들린 목소리였다.

"소백작님. 그쯤 하시지요."

귓가를 울리는 매혹적인 저음.

목소리를 들은 파울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얼굴을 구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지그문트. 그였다.

얼굴에서 타액과 흙먼지를 깨끗 이 닦아 낸 지그문트가 우리에게 로 다가왔다. 그 깔끔해진 얼굴이 재수 없었다.

그나마 나로 인한 멍과 상처들 은 그 반반한 낯짝에 고스란히 남 아 있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나를 힐끔 본 지그문트가 파울 로를 향해 웃었다. 한파를 닮아 털을 쭈뼛 서게 하는 섬뜩한 미소 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기이하게도, 지그문트의 기운은 분노한 것처럼 들끓고 있었다.

"이제 슬슬 가야 하지 않겠습니 까. 시간이 늦었습니다."

파울로를 대하는 지그문트의 태 도는 기묘했다.

얼핏 보기로는 지그문트가 파울 로를 섬기는 사람 같았으나, 파올 로의 긴장한 눈빛이나 윗사람을 대하는 것 같지 않은 지그문트의 싸늘한 태도가 내 감을 건드렸다.

"그, 그래. 이제 가야지."

더듬거린 파울로가 내 팔을 잡 은 손을 황급히 놓았다. 그의 눈 빛에서 두려움이 감돌았다.

눈을 가늘게 뜬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둘이...... 무슨 사이입니까?"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내가 파울 로에게 물었다. 내 질문에 잠시 지그문트의 눈치를 살핀 파울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여기는...... 내 호위 기사일세."

'호위 기사? 저 자식이?'

찡그린 눈으로 지그문트를 바라

보자,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눈 을 휘었다. 기분이 더 불쾌해진 난 고개를 돌렸다.

'저 자식은 누구 아래에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지그문트는 타고나기를 지배자 인 놈이었다. 나는 그가 누구 아 래에서 일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 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뭐라고 반박 할 순 없으니까.'

증거도 없고, 반박할 만한 상황 도 아니었다. 나는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두, 둘은 무슨 사이인가?"

나와 지그문트를 번갈아 본 파 울로가 물었다. 인상을 구긴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답하려 했 으나, 지그문트가 더 빨랐다.

"무척 긴밀한 사이죠. 아마 서로 에게 유일할 겁니다."

'이 미친 새끼가.

나는 이를 악문 채 지그문트에 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나를 도발하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여기서 화내는 건 지는 거다.'

숨을 들이쉰다. 주먹을 으스러져 라 쥔 나는, 서늘한 낯으로 그를 향해 마주 웃었다.

"맞습니다. 아주, 특별한 사이

죠."

확실히, 그는 내게 특별할 것이

다. 나를 이렇게까지 분노케 할 수 있는 사람은 전과 후를 통틀어 지그문트가 유일할 테니까.

내 대답에 지그문트가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내게로 향하는 알 수 없는 눈빛.

이후 그의 얼굴 위로 떠오른 것 은 형식적인 웃음이었다.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 반가웠지만, 이젠 들어가는 게 좋 겠습니다. 이만 가시지요."

"아, 그, 그러지."

파울로가 허둥지둥 지그문트 옆 에 선다. 아무리 봐도 주인과 호 위 기사라고 하기엔 이상한 모양 새였다.

" 미르."

나긋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마지막까지 나를 뒤흔드는 말을 남기고 멀어져 가는 발소리.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지그문트와 다시 만났을 때, 동요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 다.

"미르! 많이 늦었죠. 정말 미안 해요. 생각보다 얘기가 길어졌어 요. 차라리 들어와서 앉아 있으라 고......

엘은 지그문트와 파울로가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에서 나 왔다.

황급히 달려 나오던 엘의 표정 이 나를 보자마자 굳었다. 그의 은빛 눈동자가 달빛 아래 번뜩였 다.

"......누가 그랬나요?"

하기야, 멀쩡해 보일 리는 없다. 아무리 방어막을 쳤다고 해도 지 그문트와 내가 싸운 흙길은 거의 폭탄을 맞은 꼴인 데다, 내 매무

새도 엉망이 됐을 테니刀E

TTTT- TTTT-

심해를 긁듯 낮은 목소리.

내 앞으로 다가오는 발이 보였 다. 나는 고개를 더욱 숙였다. 대 답을 할 수는 없었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질 게 뻔했으니.

와락.

긴 두 팔이 나를 으스러져라 안 았다. 흙먼지가 잔뜩 묻어 더러운

내 옷 때문에 그의 옷도 덩달아 더러워진다는 것을 지적할 틈도 없었다.

나를 필사적으로 안은 두 팔이, 내 후각을 마비시키는 짙은 백합 향이, 넓고 따뜻한 품이, 모두 나 를 울고 싶게 만들었으니까.

지나치게 힘들었던 하루를 위로 받는 기분이었다.

"말해 줘요. 뭐가 당신을 힘들게 했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칠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최대 한 다정하게 잠재우며 묻는 엘에 게 나는 이렇게밖에 답할 수 없었 다.

그의 기운이 흉흉해지는 것을 느꼈음에도 정정할 순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이였다. 그 저 떠나간 옛 정일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어야 하는 것에 이렇게 동요하는 나약한 내가 지 독히 혐오스러웠다.

"......당신을 힘들게 하는 것들 을 모두 짓이기고 싶어요."

엘에게서 기이한 기운이 풍겨 왔다. 나조차도 놀랄 만큼 사나운 살기 였다.

늘 내겐 천사같이 굴던 엘이 처 음으로 거칠게 말하는 것을 듣자 몸이 살짝 떨렸다.

"하지만 그러면...... 당신은 더 힘들어하겠지."

한숨처럼 뱉는 말에 날 향한 걱 정이 가득 들어 있었다.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떨어졌 다. 피처럼 방울진 눈물이 엘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다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다 나았다고 생각한 상처를 건 드리니 또 울컥 피를 뱉어 낸다. 애초에 괜찮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듯.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약했다. 나약해서, 아직 도 극복하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그 악몽 속에서 괴로워했다.

나는 위로받을 품이 필요했다.

'저, 는

"......쉬이. 다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니,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아도 돼요."

더듬더듬 무어라 말하려는 나를 엘이 저지했다. 그가 나를 더욱

세게 끌어당겼다.

나는 그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소 리 죽여 울었다.

"당신을 울게 하는 것을 처리할 순 없어도, 우는 당신을 달래 줄 순 있겠죠."

부드럽게 속삭인 엘이 커다란 손을 내 후드 안으로 넣어 내 머 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울음소리를 삼키기 급급해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늘 이곳에 있어요. 당신만 을 위해. 언제나 당신의 기댈 품 이 될게요. 그러니까......

"......혼자 울지 말고 내게 와요. 내 온기는 늘 당신에게 허락되어 있으니까. 당신에게만 허락된, 당 신만의 것이니까."

다정하게 달래 오는 목소리가 깃털로 눈물샘을 건드리는 것 같 았다.

울고 싶지 않은데, 강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데, 상처에서 피가 흐

르듯 눈물이 떨어졌다.

벌어진 흉터가 고통스럽다.

"괜찮아요. 내가 당신 옆에 있잖 아요."

허나 엘은 신성력조차 쓰지 않 고 천천히 내 상처를 치유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낱말 하나하 나가 나를 부드럽게 보듬었다.

어린 날 내가 구해 주었던 소년 은, 어느새 자라 이제는 내게 위 로가 되어 주고 있었다.

"울어도 괜찮아요. 내가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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