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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14화 (114/254)

114 화

내가 내뱉고도 순간 흠칫했다. 지금 상황이 이전에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지그문트 또한 그때가 떠오른 건 지 표정이 묘했다.

순간 들썩인 마음을 억누른 나 는 빠르게 주머니로 시선을 돌렸 다.

순식간에 만들어 낸 오러의 족

쇄는 지그문트 같은 실력자를 오 래 붙잡아 놓을 만큼 단단하지 못 했다. 그가 움직일 수 있게 되기 전에 내용물을 확인해야 했다.

사실 이 틈을 타 주머니를 들고 바로 자리를 뜨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으나, 허벅지를 다친 레 오는 도망칠 수 있는 상태가 아니 었다.

우선 지그문트가 여기까지 온 목적이자 레오가 이성을 놓은 원 인인 이 주머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부터 할 작정이었다.

'......이건, 은빛 늑대의 문양.'

주머니에 수놓인 문양을 보며 확신했다.

이것이 어째서 우리 집, 그것도 내 어머니 방에 있었는지는 모르 겠지만, 이건 확실히 은빛 늑대 수인족의 문양이었다.

'게다가 내용물의 기운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차단하는 효과까지 있군.'

주머니 자체에서 은은히 감도는 마력을 느끼며 확신했다.

상당히 고위급 보호 마법이 새 겨진 주머니는 내용물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했다.

'레오는 왜 이걸 보고 흥분한 거 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뒤로한 채 재빨리 주머니를 열었다.

더욱 격렬히 발버둥을 치기 시 작한 지그문트를 무시하며 내용물

을 확인한 나는, 예상치도 못한 물건을 발견하고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이게 왜 우리 집에 있었던 거지?'

사실 나는 어머니의 방에 들어 간 적이 손에 꼽힐 정도였다. 어 머니에 대한 기억은 무척 희미했 기에 들어갈 이유도 없었고, 왠지 모를 거부감 때문에 들어가기도 꺼려졌다.

가끔씩 들어갔던 이유도 별거

없었다.

분명 평소엔 거부감을 느끼다가 도 아주 간혹 이유 모를 끌림이 느껴져서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 있거나, 방을 청소하기 위해서 들 어간 정도였다.

방 안을 뒤져본 적이 없으니 이 물건의 존재를 몰랐던 것도 당연 하나, 문제는 어째서 이게 이곳에 있느냐는 것이었다.

'......요정 숲 출입패.'

나는 멍하니 그 물건을 내려다 보았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기이한 질감의 투명하고 동그란 광물 위에 정밀하게 새겨진 숲과 날개.

인간에겐 허락되지 않은 대륙 동쪽 끝 요정 숲의 자유로운 출입 을 허락하는 패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알아볼 수 없 었겠지만, 나는 용병 미르로서 마 수를 토벌하기 위해 대륙 곳곳을

돌아다녔다. 요정 숲에 관련된 의 뢰를 받아 본 적도 있었기에 패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건, 이렇게 귀한 물건이 있었 다고?'

요정 숲의 지배자에 의해서만 하사되는 요정 숲 출입패는 돈으 로도 살 수 없는 물건이다.

'어째서 이게 우리 집에 있었고, 지그문트는 어떻게 이것이 우리 집에 있다는 걸 알았으며, 왜 이 걸 원했고, 레오는 왜 이걸 보고

이성을 잃었던 거지?'

수많은 의문 속에 머리가 멍해 졌다.

그것이 내가 방심한 순간이었다.

순간 직감이 따갑게 울렸고, 위 험을 느낀 내 몸은 무슨 일이 일 어나기도 전에 움직였다.

쾅!

이어서 뒤늦게 들려온 폭음.

지그문트의 몸을 옥죄던 내 오 러가 산산조각 나는 것이 느껴졌 다. 나는 패에 고정하고 있던 시 선을 지그문트에게로 돌렸다.

'분명 2분 정도는 버틸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을 벗어난 상황에 당혹스러 움이 밀려왔다.

분명 현재의 지그문트는 내 오 러를 이렇게 빠르게 벗어날 수 없 었다. 여태껏 내게 보여주지 않은 수를 쓰지 않는 이상.

내가 직감을 따라 오른쪽으로 피하고, 오러에서 벗어난 지그문 트가 내게 검을 휘두르는 일은 동 시에 이루어졌다.

나는 확실히 느꼈다.

내 오러 속박을 끊고 내게 날아 오는 것은 분명히 지그문트의 오 러 였다.

쾅!

내가 아슬아슬하게 피한 지그문

트의 오러가 벽에 부딪쳐 폭발한 다. 나는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아연하게 입을 벌렸다.

'저게• ... 오러라고? 저게 가능 하다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오러는 검사의 정체성. 오러의 색은 검사가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으며 찾은 답을 기반으로 한다.

오늘 처음으로 본 지그문트의 오러는, 내가 여태껏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형태를 하고 있 었다.

"••••••젠장."

보이기 싫었던 치부를 내보인 사람처럼 일그러진 지그문트의 얼 굴이 보였다.

잠시 넋이 나가 있던 나는 가까 스로 정신을 차리고 태세를 가다 듬으려 했으나, 그 잠깐의 틈은 지그문트와의 싸움에 있어서 거대 한 구멍과 다름이 없었다.

화악!

순간 패를 잡고 있던 내 손 위 로 빛이 솟구쳐 올랐다.

손을 옭아매는 불쾌한 마법의 기운. 황급히 막으려 했으나, 이 번엔 지그문트가 빨랐다.

"오늘 만남은 여기까지로 하지."

내 손 위에 있던 패가 그의 손 위로 옮겨 갔다. 그 직후 지그문 트는 다급하게 뒤돌아 전투로 인 해 박살이 난 창문 너머로 뛰쳐나

갔다.

'젠장!'

순간의 방심이 승부를 좌우했다. 나는 이를 아득 갈며 지그문트가 나간 창문을 향해 오러를 날렸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고통 어린 신음 소리.

나는 지그문트가 내 오러에 베 여 멈칫한 틈을 타 빠르게 창문을

넘어 추격했다. 레오도 다급하게 뒤따랐다.

우리 집은 시내에서 약간 외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주위에 나무가 많았다. 나무가 무성한 곳 으로 지그문트가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순간이동을 쓰지 않는다는 건 이미 지쳤다는 거야. 추격하면 따 라잡을 수 있어!'

강력한 마법사이기도 한 지그문 트라면 보통 이 상황에서 순간이

동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두 다리 로 뛰어 도망치고 있다는 건 마력 이 동났다는 것을 뜻했다.

나와 레오는 나무 사이사이를 재빠르게 지나며 멀어지고 있는 지그문트를 빠르게 뒤따랐다.

"잡아야, 해."

허벅지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내 옆에서 끈질기게 속도를 맞추고 있는 레오가 중얼거렸다. 힐끔 돌 아본 그의 두 눈은 광기에 가까운 집착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어딘가 망가진 사람처럼 뒤틀린 얼굴을 한 레오가 지그문트를 향 해 검을 세웠다. 그의 검날 위로 독극물을 닮은 연둣빛 오러가 덧 씌워졌다. 레오가 오러를 날릴 듯 검을 움직이던 순간.

"안 돼!"

퍼뜩 앞을 확인한 나는, 레오를 막아섰다.

거의 이성을 잃은 것 같던 레오 의 눈동자로 내가 들어서고,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달리던 그의 발 이 살짝 휘청거리며 멈추고 검을 휘두르려던 손이 굳었다.

'젠장. 지그문트를 잡기는 글렀 군.'

레오와 내가 멈춘 잠깐 사이에 지그문트의 인기척이 빠르게 멀어 지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짓씹었 다.

아마 지그문트는 내 판단을 예 측하고 이쪽으로 도망쳤을 것이 다. 그 예측에 따라 움직이는 것

이 미치도록 분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은, 내 신념이니까'.

"......뭐 하는 거야, 슈슈? 나와. 쫓아가야지!"

"......안 돼. 검 넣어, 레오."

간절하게 소리치는 레오에게 피 를 토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저었 다.

"더는 가면 안 돼. ......돌아가 자."

처참하게 갈라지고 메마른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힘이 없 었다.

레오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겠 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지 그문트가 사라진 곳을 가리켰다.

"대체 왜? 조금 전에 부상을 입 혔으니 그때 공격하면 분명 따라 잡을 수 있었어! 지금, 지금이라 도 다시 쫓으면 따라잡을 수 있을 지도 몰라! 왜 안 되는 건데!"

"저쪽은 인가니까!"

레오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닌데, 나 또한 멈출 수밖에 없는 이 상 황에 울분이 차올랐기에 고함을 치듯 언성을 높였다.

지그문트가 도망친 방향은, 바로 사람들이 밀집된 인가였다.

"바로 저기만 나가면 바로 사람 들이 사는 곳이야! 네가 오러를 날리면 쑥대밭이 됐을 거라고! 우 리 일에 무고한 사람들이 휘말려 죽게 하면 안 되잖아!"

"왜 안 되는데!"

"••••••뭐?"

레오의 외침에 순간 멍해진 나 는 뒤늦게 반문했다.

'왜 안 되냐니, 그야, 무고한 사 람이 휘말리면 안 되는 거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이유가 필요치 않다. 때문에 사람을 살리 는 데도 이유가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이유 를 불문하고 해선 안 되는 짓이었 다.

그것은 하늘은 파랗고, 불은 타 오르며, 얼음은 차갑다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 데 있어 이유가 필요하던가?

아니. 그것은 섭리이며 순리. 흐 르기에 흐르는 것이다. 그곳에 이 해관계는 필요치 않았다.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는 것도 그와 같은 선상에 있는 문제였다.

아마 레오가 너무 흥분해 물불

가리지 못하는 상태라 실언을 한 것일 터였다. 그야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는 기본 이치를 모를 사람 은 없으니까.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그와 눈 을 맞췄을 때.

나는 그대로 굳고 말았다.

'......무지.'

내가 늘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압생트 빛 두 눈에 들어찬 것은 확연한 무지이고. 몰이해였다.

어떤 죄책감도 없이 나비를 산 채로 박제하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눈. 너무 맑고 깨끗해 오히려 섬뜩한 눈빛.

레오는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 는 사실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모르는 사람이 죽는 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몇 명이 죽든 저 주머니만 가져오면 되는 거잖아!"

"••••••레오."

"지금이라도 나와! 나라도 쫓아 갈 테니까'! 수백 명이 죽게 돼도 상관없어! 저 주머니만 돌려받을 수 있다면......!"

"알렉산드로 아타라!"

어지럽도록 쏟아지는 말들을 듣 다 못한 나는 평소엔 입에 담지 않던 그의 풀네임까지 입에 담았 다. 그제야 그가 말을 멈췄다.

레오와 허울 없는 친구로 지내 고 싶어 평소엔 잊고 있던 그의 이름. 무려 한 왕국의 이름을 본 딴, 그의 성.

"너는 왕이야, 알렉산드로 아타 라! 대체,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 고서 어떻게 통치를 하는 거지?"

내 사람이라 생각하던 레오에게 신념을 정면으로 반박당한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숨을 몰아쉬며 레오를 올려다보 았다.

마주한 레오는, 내가 여태껏 마 주한 적 없는 지독히 차갑고 섬뜩 한 낯을 하고 있었다.

"카슈미르. 무슨, 말을 하는 거 야. 통치는 공포와 위엄으로서 임 하는 거야! 그 누구도 내 왕좌를 감히 우러러볼 수조차 없도록! 막 아서는 것은 모조리 베어 내고, 남은 것들은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복종하게 해야 지! 그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선 수천, 수만도 죽일 수 있는 게 바 로 왕이야!"

부르짖듯 터져 나오는 그의 목 소리에서 나는 느꼈다.

여태껏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마음으론 이해하지 못한 것을 뼈 가 저리도록 느끼고 말았다.

레오는, 더 이상 내가 알던 어린 소년이 아니다.

그는 알렉산드로 아타라.

자신의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반대하는 귀족까지 모조리 숙청하 며 아타라 왕국을 공포로 밀어 넣 었던 피의 군주였다.

그것을 실감하자마자 본능적으

로 치밀어 오르는 거부감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물러서는 나를 발견한 레오의 동공이 확장되고 그가 나를 잡으 려는 듯 손을 뻗었다.

크고 단단한, 내가 익히 알던

'저 손엔 대체 얼마만큼의 피가 묻었을까.'

그의 손 위로 내가 지독히 싫어 하는 인간의 붉은 피가 물든다.

나는 알렉산드로가 얼마나 간절 히 내게로 손을 뻗었는지 알았음 에도, 그 손을 내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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