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화
분명 나는 알렉산드로의 잔인한 면까지 품겠다고 당당히 말했었 다. 그렇지만 정말 그의 뒷면을 보자 의심이 드는 것이다.
'내가 과연 이런 생각을 가진 이 를 품을 수 있을까?'
나는 구원자가 아니다. 신도 아 니었다. 인간이었다. 미련한 신념 들을 가득 안고 그것들을 지키려
발버둥치는 한낱 인간.
그런 내가, 이런 뒤틀린 이를 친 구라 부르며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가?
"그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왕은 백성들의 대리인이고, 그들 을 지키기 위해 세워진 거잖아. 사람들의 목숨을 함부로 여겨선 안 되는 거잖아!"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린 상태에 서도 침착하게 말해 보려 했으나, 결국은 언성이 높아졌다.
손이 내쳐진 순간을 기점으로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진 알렉산 드로는 소름끼치도록 공허한 눈으 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사람을 죽이지 않 고 권력을 얻어? 카슈미르 크리 시스, 네가 지금 얼마나 나약한 탁상공론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 나는 뭣도 없는 9왕자로 태어나 서 검으로 왕좌를 탈환했어! 어린 시절엔 레이샤가 없었으면 죽을 뻔했고! 내게 레이샤는 구원자나 다름없어! 나는 레이샤를 위해선
뭐든 할 수 있다고!"
"여기서 레이샤 얘기가 왜 나오 는데!''
"그야 저 미친 새끼가 들고 튄 저 주머니에 레이샤의 문양이 수 놓여 있었으니까!!! 딱 봐도 저게 레이샤의 유품이잖아!!!"
알렉산드로의 처절한 부르짖음 에 나는 흠칫 굳었다.
그의 눈동자는 공허한 가운데에 서도 괴기한 집착으로 불타고 있 었다. 알렉산드로에게 레이샤가 얼마나 큰 의미인지 절절히 와닿
았다.
' 잠깐만.'
잠시 멍하다, 순간 느껴진 이질 감에 미간을 좁혔다.
주머니 외면에 새겨진 건 분명 은빛 늑대 수인족의 문양이었다. 내 눈이 맛이 간 게 아닌 이상 분 명했다.
'그런데 그게 레이샤의 문양이라 고?'
갑자기 치고 들어온 대형 정보 에 머리가 어질했으나, 애써 정신 을 차렸다. 지금 담판 지어야 하 는 건 따로 있었다.
"그건...... 다음에 말하자. 어쨌 든 지금 지그문트를 따라가는 건 안 돼. 무고한 사람이 죽는 건 용 납할 수 없어."
"하...... 진짜 미치겠군. 카슈미 르, 너는 내게 레이샤가 얼마나 큰 의미인지 몰라서 그래. 레이샤 는 나한테 그냥 유모 정도가 아니 라고...... 나는 반드시 레이샤의 유품을 찾아야 해. 제발...... 가게
해 줘......
한 점의 조각 같던 알렉산드로 의 얼굴이 슬픔으로 처절하게 무 너졌다.
그가 내게 간청하듯 매달렸다. 레아샤가 알렉산드로에게 어떤 의 미인지는 나 또한 알고 있었기에 순간 크게 혼들렸으나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안 돼."
" 어째서!"
레오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너한테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 나만이라도 쫒아 가게 해 달라고!"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을 어떻게 방관해! 네가 무고한 사람 을 해치러 가겠다는데 어떻게 길 을 열어 주냐고!"
"왜 못 열어 주는데! 나는 평생 동안 사람을 죽이면서 살았는데!"
처음이었다. 알렉산드로가 내 앞 에서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소리친 건.
귀를 따갑게 울리는 고함에 몇 번 눈을 깜빡이다 그를 멍하니 올 려다보았다.
"나는 평생을 사람을 베며 살았 어! 방해하는 모든 것을 짓밟고 올라서서 이 자리에 섰다고! 사람 의 목숨을 함부로 여겨선 안 된다 고? 나는 늘 함부로 여겨졌어! 나 는 왕위를 넘볼 수조차 없는, 바 닥보다 더 아래에 존재하는 9왕 자였다고! 내 목숨은 파리 목숨보 다 더 가벼웠고, 내 목숨을 넘보 는 살수들이 매일 내 침실에 있었
어! 그걸 지켜준 게 레이샤고! 모 두가 내 목숨을, 내 존재를 가볍 게 여겼는데 왜 나는 그들의 목숨 을 가볍게 여기면 안 돼? 왜 내 가 받아본 적도 없는 걸 베풀라고 강요하는 건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들이 할 수 있었다.
그럼 존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알렉산드로가, 다른 이를 존중할 수 있는가? 평생 싼 목숨 취급을
받아 온 그에게 목숨을 존중하라 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알렉산드로에게 불가능한 걸 강요하고 있는 건가? 보내주 는 게 맞는 건가?'
순간 든 생각에 새하얗게 질려 비린 맛이 올라오도록 입술을 짓 씹었다.
감정을 폭발하듯 터트린 레오는 눈이 충혈된 채로 거세게 심호흡 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얼굴 위로 어린 소년의 얼굴이 겹치며 퍼뜩 무언 가가 떠올랐다. 감정이 울컥 치밀 었다.
나는 눈가가 붉어진 채 레오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적어도 나는...... 네 목숨 을 소중히 여겼으니까......
그래.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는 내가 이렇게까지 충격받은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기를 쓰고 살린 레오가, 사 람의 목숨을 소중히 하지 않기 때 문이었다.
"나는 어렸던 널 살렸어."
"네가 누군지도 몰랐고, 내게 중 요한 사람도 아니었는데...... 그 냥, 지나쳤어도 됐을 텐데...... 지 나치지 않고 널 살렸어. 생명은, 그 누구의 것이라도 소중한 거니 까."
왜일까. 문득 눈물이 나올 것 같 았다. 눈가에 눈물이 핑 돌고, 가
슴이 아파왔다.
딱•딱하게 굳은 채 하염없이 나 를 내려다보는 레오를 물방울이 맺힌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더는 화도 나지 않았다.
"......그래. 이건 스쳐 지나간 과 거 얘기일 뿐이니刀h 네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이 일 을 들먹이며 네게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고 강요할 수 없다는 거 알 아."
"......! 그럴 리가 없잖아! 젠장, 그게 아니라......!"
"그래도 나는!"
"나는, 네가...... 적어도 생을 모 독하는 사람은 되지 않기를 바랐 어. 조금 더 욕심을 부리면, 내가 널 도와줬던 것처럼 훗날엔 너도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를, 바랐 어......
"너무 큰 바람이었어?"
아. 정말 울고 싶지 않다. 내 신 념을 말하는 이 순간만큼은 울고 싶지 않았다.
눈물이 흐를 것 같아서, 나는 도 리어 눈을 부릅떴다. 눈물이 떨어 질 틈도 없도록.
"......그래.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란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라고! 나는......
"그래도 못 보내줘."
쉬익!
허공을 찢는 바람 소리와 함께 검 위로 칠흑빛 오러가 덧씌워졌 다.
눈동자 위로 물기와 흔들림을 모두 걷어낸 나는, 오직 또렷한 신념만 남은 눈으로 알렉산드로를 직시했다.
"나는 방관 못 해. 가고자 한다 면 날 쓰러트려."
결연하게 선포하면서도 문득 두 려워졌다.
레오에게 소중한 것을 놓고 생 을 소중히 여기라 하는 나는, 사 랑하는 이의 죽음과 신념 사이에 서도 신념을 택하고야 말 것 같아
끔찍한 자괴감이 밀려왔다.
"......하."
자신의 앞으로 들이밀어진 검을 빤히 내려다보던 알렉산드로가 허 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올려다본 그의 아름다운 녹빛 눈동자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 다.
"너는 나를...... 왜 이렇게 비참 하게 만들어."
"온 세상이 나를 욕해도 괜찮았 어. 피에 미친놈이라고 떠들고, 왕좌가 아니라 철장이 어울리는 짐승 새끼라고 해도, 나는 아무렇 지 않았다고."
그가 이를 악물었다. 상처 입은 짐승같이 처량한 눈이 나를 응시 하다, 이내 일그러진다.
"그런데 네 한마디엔 자꾸 내 세상이 무너져 내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
진다.
압생트의 빛깔을 그대로 담은 유해한 눈동자는 독이라 불리던 압생트를 흘릴 법도 한데, 그 또 한 눈물로 흘리는 것은 결국 무엇 도 해할 수 없는 투명한 물방울이 라서 가슴이 죄였다.
툭.
알렉산드로가 내 앞에 한쪽 무 릎을 꿇고 앉았다. 피로 왕좌에 오른 그 난폭한 왕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챙.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을 잡고 있던 내 손을 잡았고, 나도 모르게 힘이 빠진 나머지 검을 놓 고 말았다. 그는 제 뺨에 내 손등 을 비볐다.
복종하는 사냥개 같은 모습이었 다.
"나를, 나를 친애한다고 했잖아. 내 추악한 모습들을 배제하고라도 아끼고 있다고, 걱정 말라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왜 내 손을 내쳤어? 분명, 그렇게 말했으면서 왜 낯선 것을 보는 눈빛을 해...... 나는 레오인데. 나, 알렉산드로 아타라 아닌데......
"나, 나 그 새끼 안 따라갈게. 네 말대로 여기 있을게. 무고한 사람도 안 해치고, 레이샤 유품도 안 찾을게. 그냥 검도 더는 들지 말까? 네가 내 손을 자를래? 네 가 하라는 거면 뭐든 할 테니"h 제발, 나를......
목소리는 원망처럼 시작하다, 체
념으로 이어지고, 결국 처절한 간 구의 빛을 띠었다.
툭.
손등 위로 뜨거운 액체가 떨어 진다. 살짝 입술을 벌린 채로 액 체가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았 다. 그의 눈물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버리지 마••••••
아직은 끝나지 않은 봄을 따라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의 연갈색 머리칼이 살짝 헤집 어졌다. 바람은 그의 눈물을 허공 으로 날려 보내고, 내 떨리는 한 숨을 사그라지게 했다.
어떻게, 이런 그를 미워할 수가 있을까.
"••••••나는."
"아니.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그가 나 를 가로막았다. 그의 입가로 이 상황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웃
음이 피어올랐다. 내 손을 꾹 잡 은 채 허리를 굽히고 마른 웃음을 터트리던 그는 작게 속삭였다.
"나...... 지금 너무 비참해서 죽 고 싶거든."
그러곤 내가 말할 틈도 주지 않 고 또다시 웃음을 터트린다. 그의 웃음에선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 켜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 가 묻어났다.
"나, 네가 너무 미워."
긴 웃음 끝에, 그는 갈라져 조각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을 보고 싶었으나, 여전히 허리를 굽 힌 그는 내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 았다.
"그런데, 미운데, 죽어도 싫어할 수는 없어서, 널 싫어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혐오스러워......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그의 눈 너머 감정도 살필 수 없었고, 그 의 목소리는 일파만파로 갈라져 감정을 짐작할 수 없었다.
한참 흐느끼듯 숨을 들이쉬던 그는 천천히 무릎을 펴고 일어났 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여 얼굴 을 보이지 않은 채로.
"나 좀 들어가서 쉬어야 할 것 같아. 미안. 먼저 갈게."
그러고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아.'
나는 그제야 그의 허벅지 상처 가 더는 움직여선 안 될 정도로
악화됐다는 걸 발견했다. 그를 잡 으려 했지만, 그는 내가 손을 뻗 기도 전에 왔던 길을 가로질러 멀 어져 갔다.
'••••••젠장.'
피가 뚝뚝 떨어진 땅을 잠시 내 려다보던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무너지듯 앉아 나무에 기대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냥 보내 줘야 했을까? 하지만 그건 내 신 념이 용납하지 않는데.
레이샤는 대체 뭐지? 은빛 늑대 수인족은? 요정 숲의 출입패와, 지그문트 그 개자식은?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섞이고, 뒤엉키다, 결국 탁올라 사라진다.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레오와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