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화
레오와의 다툼 뒤 생각이 많아 진 나는 도저히 일찍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반쯤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정 처 없이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그 러던 와중 비까지 오기 시작했으 나, 나는 헤매는 것을 멈추지 않 았다.
차라리 비가 와서 좋았다. 한계
까지 과열된 머리가 식는 기분이 었으니.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채 집 에 들어간 것은 자정이 가까운 늦 은 밤이었다.
콰쾅!
귀를 시끄럽게 울리는 천둥소리 에 살짝 미간을 좁히며 축축한 앞 머리를 쓸어 넘겼다. 빗물로 머리 카락이 온통 젖어 있었다.
'대부분 자는 것 같은데.'
천천히 저택 내 인기척을 읽어 내렸다. 괜히 저택을 소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조용히 들어온 참이었다.
'대충 씻고 자자......
이 시간에 목욕을 하기 위해 사 용인들을 깨우고 싶지는 않았기 에, 흙먼지와 상처만 물로 씻고 바로 잘 생각이었다.
나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내 방 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에 가까워질수록 느껴 지는 익숙한 인기척.
'깨어 있었나.'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 꼴을 보 여 주면 걱정할 게 뻔했기에.
그렇다고 뒤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는 주저하면서도 내 방으로 향했다.
"......언니?"
방문 앞쯤 다다랐을 때 가느다 란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저 호 칭으로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이.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리아."
내 동생, 아리아였다.
열려 있는 내 방문 틈새로 새어 나온 빛이 어두운 복도를 비추었 다. 그 빛 위에 서 있는 아리아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맑은 아침 하 늘의 푸름을 담은 연하늘빛 눈동 자엔 모순적으로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 눈이 애 처롭게 처졌다.
"왜 이렇게 늦었어. 걱정했는 데."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리 아가 걱정한 것도 기우는 아니었 다.
'언, 니? 이게 무슨......!'
지그문트와의 첫 전투가 있었던
어제, 밤늦은 시간이 되어 집에 돌아온 내 꼴은 말 그대로 개판이 었으니까.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것 때문에 집이 한바탕 뒤집어졌 었다.
'곤란한데.'
오늘 외출은 절대 안 된다는 가 족들을 선약이라는 말로 겨우겨우 회유하여 나갔던 것인데, 오늘도 만신창이인 모습을 보여 주는 것 이 꺼려졌다.
내가 다가가지 않고 주저하는 것이 이상한지 미간을 좁힌 아리 아가 발걸음을 땠다.
"왜 거기 있어. 이리......
" 잠깐만."
다가오려는 아리아를 손을 뻗어 저지했다. 멈칫한 아리아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 처음인가.'
그러고 보니 다가오는 아리아를
저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떨리는 아리아의 동공을 보니 죄책감이 머리를 들었으나, 그럼에도 한 걸 음 물러났다.
"......왜, 안 와?"
"지금 내 꼴이 말이 아니라서 그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아리아는 내게 시선을 똑바로 고정한 채 성큼성큼 다가왔다.
기이한 빛으로 푸르게 번뜩이는 아리아의 눈동자. 그 시선이 사슬 처럼 나를 옭아매서, 나는 그 자 리에서 굳은 채 움직일 수 없었 다.
"나한테서 뒷걸음치지 마, 슈슈 언니."
감미로운 목소리는 여전했으나, 그곳에 담긴 감정은 진득했다. 그 농도에 조금 당황해 눈을 몇 번 깜빡이던 나는, 아리아의 시선이 내 몸을 샅샅이 훑는 것을 느끼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리아, 그러니까 이건......
"다쳤네. 또."
서늘한 목소리가 내 말허리를 끊었다. 순간 목덜미에 소름이 돋 아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아리아 가 더 빨랐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들 어와."
아리아는 휙 뒤돌아 내 방으로 향했다.
' 망했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리아의 태도는 얼핏 보아도 싸늘했다.
화악.
환한 빛이 내 몸을 에워싼다. 자 연 그 자체와 가장 가까운 힘 중 하나인 치유력은 피부에 닿는 것 만으로도 날 쾌적하게 만들었다.
살갗을 타고 올라온 빛이 상처를 천천히 치료하는 것을 지켜보다, 슬쩍 아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화 안 났으니까 눈치 그만 봐."
아리아가 잔상처가 난 내 상체 를 매만지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 다. 그 말을 듣고서도 나는 또 다 쳐 온 게 미안해서, 일부러 더 축 처진 표정을 지었다.
"화 안 났다는데 계속 그러 네......
결국 차갑던 표정을 풀고 피식 웃은 아리아가 치료를 받느라 아 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던 내게 새 옷을 건넸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깨끗한 옷에 팔부터 집어 넣었다.
"무슨 일 있었어?"
나직하게 들려오는 아리아의 물 음에 와이셔츠 단추를 잠그다 말 고 멈칫했다. 물으면서도 답을 기 대하지 않는 투가 내 가슴을 아리 게 했다.
아리아가, 답하지 않는 내게 익 숙해져 버린 것 같아서.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어제도 아리아는 똑같은 질문을 했다. 무 슨 일이 있었냐고.
'아리아한테 지그문트 얘기를 어 떻게 해.'
지그문트와 싸운 일을 설명하려 면 그놈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데, 거기에 연루된 것은 내 인생 최대 의 비극이다. 나는 그 얘기를 아
리아에게 할 자신이 없었다.
'이곳에 오면 더는 무언가를 숨 기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 는데• ... 나는 여전히 네게 숨겨 야 하는구나.'
참으로 돼먹지 못한 언니다. 항 상 다쳐 와 걱정만 시키는데, 다 친 이유조차 말해 주지 못하니.
자괴감이 울컥 치밀어 올라 앞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친구랑...... 싸웠어."
어제와 연달아 오늘도 침묵으로 답하는 것은 정말 아리아에게 못 할 짓 같아, 잠시간 고민 끝에 겨 우 내뱉었다.
거짓말은 아니나 지나치게 불친 절한 설명이라는 것은 나도 알았 다.
그 한마디에도, 아리아는 답이 돌아온 것만으로 만족스럽다는 듯 표정이 확연히 밝아졌다.
"그 친구가 누구, 아니, 음......
그래서 화해했어?"
직접적인 질문을 하려던 아리아 가 잠시 간극을 두더니 곤란하지 않은 질문을 던져 왔다. 잠시 입 술을 꾹 깨문 나는, 고개를 저었 다.
"••••••아니."
상처의 주된 요인은 지그문트지 만, 내 마음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든 것은 레오였다.
나는 여러 상념들로 뒤엉킨 마
음을 정리하지 못한 채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아리아. 만약에 있잖아."
문득 아리아에게 말을 건 것은, 단순하고 뻣뻣한 나와는 달리 현 명한 아리아라면 이 복잡한 문제 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너랑 정말 친한 친구가 자신의 뜻을 위해선 무고한 사람 을 함부로 해쳐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래서 다퉜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아직도 내 눈앞에서 사람 이 죽는 꼴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것이 내 사람으로 인한 것이라 면 더욱더 괴로울 것 같았다. 전 쟁을 결심하고 준비하고 있는 주 제에 아직도 그랬다.
'하지만, 전쟁은 어쩔 수 없다지 만...... 그곳의 사람들은 모두 무 고하잖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먼저 걸 려온 전쟁에 대항하는 것과 사사
로운 일을 위해 민간인을 해치는 것은 내게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레오라고 해도, 나는 내 눈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 을 묵인할 수 없었다.
'레오에게 레이샤는...... 정말 큰 의미인데.'
그러나 레오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레오에게 있어 레이샤는 부모를 넘어 구원자에 가까웠다. 그가 지 그문트를 따라가겠다고 날뛴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언니. 솔직히 말해 줄까?"
수심에 잠긴 채 멍하니 바닥만 보는 날 지그시 응시하던 아리아 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살짝 고개를 들어 보니 아리아가 진지한 표정을 짓 고 있었다.
"나는 그 친구랑 생각이 같아. 내 뜻을 위해선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해."
한없이 맑고 투명한 목소리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그렇게 말했 다. 거짓 한 점 없이 결연한 푸른 눈동자와 마주한 나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아리아는 카라쇼 스승님께 배운 적이 없지.'
내게 가장 소중한 아리아가 내 신념에 정면으로 반하는 말을 거 침없이 뱉었다는 데에서 심장이 잠시 내려앉았으나, 빠르게 진정 했다.
레오와의 대치에서는 갑작스러 운 상황에 겹쳐 너무 흥분한 나머 지 감정을 마구 쏟아냈지만 비를 맞으며 긴 생각을 마친 지금은 달 랐다.
내가 생의 소중함을 배운 것은 카라쇼로부터였다. 레오도 아리아 도, 카라쇼와 같은 스승이 없었을 테니 나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했다.
"나는 행복이 일종의 파이라고 생각해. 파이 조각의 수는 적지 만, 그걸 나눠 먹어야 하는 인원
은 많지. 파이를 한 조각이라도 먹기 위해선 싸움과 쟁탈 또한 감 안해야 해."
나와 혼들림 없이 눈을 마주한 아리아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 다. 나는 아리아의 의견에 동의하 지 않았으나, 내게 반박하는 목소 리를 들으며 새삼 느꼈다.
'많이 자랐구나.'
내 말이라면 언제든 웃으며 고 개를 끄덕이던 아이가 이젠 내 눈 을 똑바로 바라보고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이는 크리시스 공작 가 에 온 뒤로 생겨나기 시작한 변화 였다.
'내가 변한 만큼...... 아리아도 변하고 성장했구나.'
새삼스러운 감상이 마음을 울려 왔다.
아리아는, 내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못 하던 요정 같은 아이는 많은 것을 경험하며 한 사람의 어 른으로서 성장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무고한 사 람이 죽는 것에 감흥이 없어. 내 게 소중한 이도 아닌데 어떻게 되 든 상관없잖아?"
아리아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적 잖이 충격적이었지만 아리아의 말 을 끊지는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처음으로 알았다. 아리아가 이렇 게 당당히 내 의견에 반박할 수 있는 줄.
나는 자라 버린 아리아에 대해 많이 무지했기에, 아리아를 더 알 고 싶었다.
작게 숨을 들이쉰 아리아가 나 를 응시했다. 내가 사랑한 하늘빛 눈동자는 더 이상 여려 보이지 않 았다.
시린 채도를 담은 두 눈은 혼들 리지 않는 심지와 함께 나를 향한 애정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언니가 싫어하니까. 사 람의 생을 함부로 여기는 걸 언니
가 원치 않으니까'. 그래서 언니의 방식을 따르려 하는 거야. 늘 말 하듯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언니니 :까. 언니가 나로 인해 속상해하는 걸 원치 않아."
맑은 목소리가 내 귓가에 부드 럽게 스며들었다. 나는 다정이 담 긴 아리아의 눈동자를 멍하니 마 주했다.
무너졌던 마음이 다시 재구축되 고, 천천히 치유되는 느낌.
"내 사상보다 언니가 더 소중하
니까."
어쩌면 내가 아리아를 사랑하는 것보다 아리아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클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들었다.
아리아는 나와 달랐다. 자신의 생각보단 자신의 사람을 생각했 다. 신념 때문에 레오에게 검을 겨누었던 나와는 달랐다.
'뭐가 옳은 거지?'
나는 더 깊은 혼란에 빠졌다.
그때 정말 레오를 보내주는 게 맞았을까?
결론적으론 신념을 선택했으나, 난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고 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내게 다가온 아리아는 내 양 뺨을 두 손으로 잡고 들어 올려 자신과 마주하게 했다.
"뭘 고민해. 언니가 옳아. 어느 때라도 네가 옳아, 언니. 나는 언 니만큼 옳고 곧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그러니 고민될 때는 언니가
끌리는 대로 행해. 그게 옳은 거 야. 그걸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애초에 언니의 사람이 아니었던 거니까 인연을 끊어."
아리아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신 념을 가지고도 혼들리던 내게 정 답을 쥐여 주는 것만 같은 말.
레오를, 잘라내라는 말.
'내가, 어떻게 그래.'
나를 향해 간절히 빛나던 연둣
빛 눈동자를 떠올린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확신했다.
나는 레오를 내칠 수 없었다.
"......내칠 수 없는 사람인가 보 구나."
내 표정을 영민히 읽어낸 아리 아가 중얼거렸다. 쓴웃음 섞인 아 리아의 한숨이 내 머리카락을 간 지럽 혔다.
"그 사람이랑 화해하고 싶은 거 지? 계속 친구하고 싶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을 함부로 여기던 레오에 대 한 분노는 이미 모두 가라앉았다. 사실상 지금 남은 것은 레오와 화 해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준 아리아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사람의 사상이라는 건 오랫동 안 굳어 하나의 습관처럼 된 거 야. 어쩌면 그 사람도 언니를 따 르고 싶지만 따를 수 없는 처지에
있는 걸지도 몰라. 언니가 그 사 람을 계속 곁에 두고 싶다면 그 면을 이해하는 방법밖엔 없다고 생각해."
들려오는 목소리엔 틀린 말이 없었다.
내가 여태껏 구축된 레오의 사 상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다. 그것을 변화시키겠다 나서는 것도 기만에 불과했다.
계속 레오와 함께하고 싶다면, 내 신념과 부딪치는 레오의 면모
까지도 품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난폭한 제왕, 알렉산드로 아타라 를 떠올렸다.
내가 그런 인물을 과연 곁에 둘 수 있는가 의심이 생겼으나, 이내 결연하게 생각을 굳혔다.
'나는, 할 수 있어.'
레오는 내 친구다. 나는 이미 그 를 아낀다 선언했고, 내 말을 지
켜야 했다.
"나는 언제나 언니를 응원해. 알 지? 내게 가장 소중한 건 언니니 까."
나지막이 속삭인 아리아가 나를 꼭 안았다.
나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아리아를 마주 안고 아 리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내게는 세상이 무너진대도 나를 지지해 줄 내 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