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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17화 (117/254)

117 화

"빌어먹을, 칼 크리시스!"

"그래, 멍청한 아리아 크리시 스."

쾅! 콰쾅!

아리아의 날카로운 욕설, 칼의 비아냥거림과 함께 수련장 일대에 굉음이 울렸다. 멀거니 앉아 있는 내 앞에선 불덩이가 쏟아지며 번 개가 내리꽂히고 있었다.

"네 스승에게 너무 난폭하군. 그 더러운 성질을 하루라도 티 내지 않으면 두 손에 메테오라도 떨어 지는 모양이야?"

"하! 그 잘나신 스승님은 맨날 제자한테 털리지? 아주 입만 열 면 개소리가 절로 나와!"

쿠쿵! 콰직!

'아리아한테...... 차라리 검을 가 르쳐 줄걸 그랬나.'

아리아가 칼에게서 마법을 배우

면 둘이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 며 좀 친해질 거라고 생각했건만, 어쩐지 더 앙숙이 되었다.

마법 실력이 걷잡을 수 없는 속 도로 성장해 이제는 칼과 어느 정 도 합을 맞출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른 아리아가 칼의 머리 위로 물 을 소환하는 것을 체념 어린 시선 으로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똑똑.

"아가씨, 도련님. 방해해서 죄송 합니다만,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

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서로를 죽일 듯이 맞붙던 칼과 아리아의 움직 임이 멈추었다. 나는 그 둘에게 눈짓을 보낸 뒤 문을 열었다.

역시, 문밖의 인물은 테일러였 다.

"무슨 일인가."

조금 전까지 미친 듯이 싸웠다 는 티가 날 만큼 매무새가 흐트러 진 칼이 다가왔다. 폭탄을 맞은

듯한 몰골을 하고서도 테일러 앞 이라고 진지한 표정을 보이는 것 이 조금 웃겼다. 뒤따라오는 아리 아도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카슈미르 아가 씨께 황궁에서 서신이 도착해서 말입니다."

"......황궁에서?"

칼과 아리아가 표정을 더욱 굳 혔다. 아마 저번의, 황제의 미친 짓이 떠오른 것 같았다.

"이리 주게."

나 또한 그때 일이 떠올라 조금 진지해졌다.

'오늘은 마침 황궁에 가는 날인 데. 무슨 일이지.'

일주일에 한 번, 세레논의 검술 스승이자 황제의 말동무 노릇을 하려 황궁을 방문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나는 테일러가 건넨 편지를 받 아 들고 깔끔히 개봉해 내용을 확 인했다.

[잘 지냈나, 카슈미르! 오늘 나 를 만나러 올 때 유의할 사항이 있어서 서신을 좀 보냈네. 거 별 건 아니고, 오늘 만남엔 디에고가 같이 참석할 예정이네. 그럼 잠시 뒤에 보세!]

"......하."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10년 지 기 친구에게 보내는 듯 격식 하나 갖추지 않은 내용과 묘하게 발랄 해 보이는 어투는 제국의 황제라 는 지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래...... 원래 이런 인간이니 까. 나와 디에고를 한자리에 모으 려는 이유도 어느 정도 예상은 가 는군.'

여러 번 헬리오스와 만나고 보 니 이제는 이런 그의 태도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내용을 보려 기웃거리는 칼과 아리아를 슬쩍 밀어내며 편지를 접을 때였다.

"아, 황궁에서 온 편지가 한 장

더 있습니다, 아가씨."

테일러의 말에 나는 고개를 기 울였다.

내게 편지를 보낼 만한 황궁의 인물이라면 황제 말고는 디에고 정도인데, 바로 오늘 아침에 디에 고의 편지에 답신을 보냈던 탓에 이렇게 바로 편지가 올 것 같진 않았다.

"황후 폐하께서 보내오신 서신 입니다."

내 표정에서 의문을 읽어낸 건 지 테일러가 곧바로 덧붙였다. 나 는 미간을 좁혔다.

"......황후 폐하께서?"

"네. 그것도...... 꽤나 은밀하게 전해 왔습니다. 아가씨께 바로 전 달해 달라고 하더군요."

'티나 키프로스가? 내게?'

황자비와 관련된 얘기는 첫 만 남 때 생각이 없다고 못을 박았 다. 이후로 티나와 엮일 일은 없 으리라 예상했건만.

'그러고 보니...... 지그문트가 키 프로스 가의 호위 기사였던가.'

티나를 생각하니 저절로 떠오르 는 그놈의 얼굴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여러 생각이 떠올라 마음이 어 수선했지만, 우선 내용부터 확인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편지를 뜯었다.

[제국이 위험하네. 편지로는 길

게 말 못 하네. 세레논과 수업이 끝난 뒤 나를 찾아오게.]

편지의 내용은, 상당히 심각했 다.

'무슨 일이 생기겠군.'

편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 다.

내 직감이 따갑게 경종을 울리 고 있었다.

"여어, 카슈미르. 그대 왔는가!"

헬리오스와 만나는 장소인 유리 온실로 들어서자, 여느 때처럼 핼 리오스의 격식 없는 인사말이 들 려왔다.

그의 태도에 익숙해져 버린 나 는 은은히 웃으며 목례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유리로 된 외벽을 넘어 들어온 햇빛에 헬리오스의 머리칼이 황금

빛으로 반짝였다.

흥미와 날카로운 통찰이 함께 담긴 푸른 눈과 잠시 마주하다, 그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헬리오스와 지극히 닮은 얼굴의 청년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황태자 저하를 뵙습니다."

제국의 황태자, 디에고 솔라티네 였다.

"하하! 둘이 친한 거 다 아는데 무어 그리 딱딱하게 인사를 주고

받고 있나! 내 앞이라 그러는 거 라면 그만두게."

고개를 들고 디에고와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을까, 그 잠시를 참 지 못한 헬리오스가 주책바가지처 럼 굴었다.

난 속으로 한숨을 쉬며 어색하 게 웃었고, 디에고는 자기가 더 부끄럽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덮 었다.

"자, 어서 앉게. 차부터 한 잔씩 하자고."

헬리오스의 손짓에 내가 선홍빛 홍차를 두 모금쯤 마셨을 때, 그 가 말문을 열었다.

"그래. 두 사람 다 내가 이 자리 를 마련한 이유가 궁금하겠지."

디에고도 이 자리가 마련된 이 유를 제대로 듣지 못한 건지 헬리 오스의 음성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이 끌 그대들의 사상을 한자리에서 들어 보고 싶어서 말이야. 두 사

람은 황실과 공작가의 차세대 주 인들이 니."

이어진 헬리오스의 말에 나는 내 턱을 쓸어내렸다. 나는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담긴 눈으로 헬리오스를 응시했다.

"송구합니다만, 공작가를 이끌 이의 말을 듣고 싶으셨다면 칼 크 리시스 공자를 부르셨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아직 공작 후계에 대한 공식적 인 발표가 없었음에도 대부분의

이들이 칼을 차기 공작으로 확신 하고 있었다. 아리아와 내가 입적 되었음에도 그 인식은 여전했다.

'공자가 공작이 된다. 공녀는 직 위가 낮은 가문에 시집을 가 다른 성씨를 달게 되거나, 운이 좋아 봐야 황족이나 교황에게 시집을 가는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하나의 공식처럼 사람들에게 남 은 인식.

그 누구도 공녀인 나와 아리아 가 공작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

지 않았다. 전례가 없기 때문이었 다.

"재밌군, 카슈미르 공녀. 그대는 내가 차세대를 논하는 자리에 그 대를 부른 것이 실수라고 생각하 는가?"

턱을 괸 채 나를 지그시 응시하 던 헬리오스가 유려하게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로 진심을 가렸으 나, 그의 푸른 두 눈은 냉철함에 시리게 빛나고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진중한 태도로 그를 마주했

"많은 이들이 그리 생각할 겁니 다. 제게서 가능성을 보는 이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오랫동안 고착화된 관념은 아주 무서운 것이다.

아리아가 아무리 똑똑해도 나랏 일을 할 수 있는 인재로 보는 이 들은 없다는 것. 르웰린이 아무리 사업에 천재적이어도 사람들은 당 연히 무능한 메르헨이 후계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당연히 여겨지지만 당연하지 않 은 것들이 이 세상엔 많았다.

"나는 많은 이들의 생각 말고 그대의 생각을 묻고 싶다만."

내 애매하고도 중의적인 대답이 내포한 뜻을 단번에 알아차린 듯, 헬리오스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대는 스스로의 가능성에 대 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대는 스스 로가 차세대를 이끌 수 없다고 생 각하나? 그럴 인물은 그대의 오

라비뿐인가?"

헬리오스의 물음은 얼핏 들었을 때 일종의 시험 같았다. 허나 내 겐 그가 내게 기회를 주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걸 묻지 도 않았을 거야.'

애초에 내게 가능성이 있으리라 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까'.

헬리오스는 이미 내가 차세대의 주축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판단에 대한 내 의견을 묻고 있었다.

'참, 종잡을 수 없는 데다 음험 하기까지 한 인간이지만...... 미워 할 순 없단 말이지.'

옅은 미소를 띤 나는 홍차가 든 잔을 내려놓았다.

일렁이는 황금빛 불꽃이 세밀하 게 새겨진 잔은 내 투지를 닮아 있었다.

"폐하. 저는 차세대를 이끌지 않

습니다."

내 부정적인 대답에 헬리오스의 눈이 미미하게 커졌다. 옆에서 잠 자코 지켜보던 디에고도 내가 이 리 답할 줄은 몰랐는지 놀란 표정 이었다.

헬리오스의 눈빛에 실망이 스쳐 지나갈 때, 나는 씨익 웃었다.

"정확히는, 차세대만 이끌지 않 을 겁니다."

'차세대를 이끌 수 있을지 없을

지를 고민할 시기는 지났지.'

내겐 그런 고민에 빠져 있을 시 간조차 없었다.

"폐하. 저는, 차세대뿐만 아니라 현세대 또한 이끌고자 합니다."

이 제국의 지배자와 차기 지배 자 앞에서 나는 당당히 선포했다.

전쟁은 이미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 나는 내 나이가 찰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지키기 위해선, 차세대를 운운할 틈도 없이 들고 일어나야 했다.

"저를 신임하고 자리를 내어 주 는 이만 있다면, 저는 능히 현세 대와 차세대 모두를 최선의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나는 현세대의 수장과 똑바로 눈을 맞춘 채 혼들림 없이 말했 다.

헬리오스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 곧 만족스러워하며 만면에 흥미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신임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신 임하게 할 것입니다. 반드시 제 가치를 세상에 증명할 겁니다."

전쟁에 관여하기 위해선 반드시 지도자의 계열에 들어야 한다.

이것은 내게 허락되지 않은 지 배자의 홀을 거머쥐고야 말겠다는 선전포고였다.

"하하하!"

헬리오스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

트렸다. 여태껏 지켜본 결과, 그 는 정말 만족스러울 때 저런 웃음 을 지었다.

"당돌하단 말이야......

나를 지그시 응시하던 헬리오스 의 두 눈이 흐드러지게 휘어졌다.

"나는 그런 공녀가 참으로 마음 에 드네."

" 영광입니다."

나는 여유롭게 답했다. 팔짱을 낀 채 제 의자에 몸을 푹 기댄 헬

리오스가 두 손을 펼쳐 보였다.

"그래. 그럼, 공녀의 그 당돌함 이 과연 이유 있는 당돌함인지 내 확인해 보도록 하겠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모 양이군.'

헬리오스가 갑작스럽게 나와 디 에고를 한자리에 모은 이유. 사실 나는 진작부터 그 이유를 어느 정 도 짐작하고 있었다.

'헬리오스는 디에고에게 황태자

의 자질이 있는지 자주 시험한다 고 했지.'

이전에 디에고의 호위 기사', 페 퍼 엘러바인에게 들었던 말이 결 정적인 힌트가 되었다.

"나는 중요한 안건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을 듣고 싶네."

헬리오스는 나와 디에고의 기질 을 판단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 한 것이 분명했다.

"내 두 사람에게 묻지."

깍지 낀 두 손 위에 제 턱을 얹 은 헬리오스가 나와 디에고를 천 천히 번갈아 보았다. 그의 푸른 두 눈은 평소의 장난기를 벗고 진 중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대들은 전쟁에서 패배한 국 가를 어떻게 처우해야 한다고 생 각하나?"

이것은 헬리오스가 내게 내는 첫 번째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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