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화
'패전한 국가에 대한 처우.'
말라 가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 내 심장 박동 소리가 천천히 커져 갔다.
'어렵고도••... 복잡한 안건이 군.'
이건 전생의 세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던 까다로운 문제다. 전생
의 나는 이 안건을 그저 재밌는 문제쯤으로 여겼으나, 전쟁이 코 앞까지 왔음을 느끼고 있는 지금 으로선 무겁게 들릴 수밖에 없는 안건이었다.
'전생의 기억을 대부분 잊었지만 전쟁학에 대한 지식만은 남아 있 어서 다행이야.'
어렵지 않게 합리적인 의견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안건은 해당 패전국이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의
견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만."
내가 잠시 전생의 지식들을 되 짚어보고 있을 때, 제 턱을 쓸어 내리던 디에고가 헬리오스에게 물 었다. 짙고 깊은 푸른 눈이 내겐 자주 보여 주지 않던 냉철한 빛으 로 빛나고 있었다.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실실 웃던 헬리오스가 능청스레 눈을 굴렸다.
"그래. 모든 전략은 상대가 누구 냐에 따라 달라져야지. 어디로 패
전국의 예를 들어 볼까...... 아, 그래. 예를 들어 그 패전국이
지배자의 위압감을 담은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북부인들이라면. 그들의 처우를 어떻게 해야 할까."
헬리오스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 에 어느 정도 여유롭던 화원 내 공기가 급속도로 무거워졌다.
나는 입술을 매만지며 표정을
굳혔다. 디에고의 표정도 심각해 졌다.
'이건...... 가벼운 시험 정도가 아니군. 곧 일어날 전쟁 앞에서 나와 디에고가 어떤 태도로 임할 지 보려는 거야.'
제국의 고위층들은 이미 전쟁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북부 의 비밀 무기를 몰라 방심하고 있 을 뿐.
황제인 헬리오스라면 전쟁이 다 가오고 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실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두고 나와 디에고를 시험하 고 있었다.
'북부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 게 되면...... 그들을 어떻게 처우 해야 할까.'
그러고 보면, 북부인과의 전쟁에 서 승리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 로잡혀 그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승리하고 나면? 그 이후엔?
제국 입장에서야 북부가 천하에 다시없을 적이지만, 북부인들 입 장에선 제국이 자기들을 억압하는 적이다.
북부인들 사이엔 정말 살기 위 해 일어난 불쌍한 이들도 있을 터 인데, 제국이 승리한 뒤에 그들을 함부로 대해도 되는가?
'......이래서 나는 정치를 할 위 인이 아닌 거겠지. 이런 건 냉정 한 아리아가 잘하는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게 문제다. 제일로 내세 우는 가치가 이성에 따른 손익 계 산이 아닌 신념이었으니.
'이 세상 그 누구도 죽어 마땅하 지 않다.'
내게 있어, 혼들리지 않는 헌법 같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내 신념과는 별개로 이 건 전쟁학에서도 인정받는 방법이 니까.'
나는 머릿속으로 차근히 할 말 을 정리했다. 지금이 나 자신을 헬리오스에게 증명할 수 있는 절 호의 기회였다.
그리고 내가 입을 떼려 할 때.
"......폐하. 제가 먼저 대답해도 괜찮겠습니까?"
더 빠른 것은 디에고였다.
"오, 물론이다. 너 먼저 대답해 봐라."
턱을 괸 채 자신의 옆에 피어난 꽃들을 여유롭게 구경하던 헬리오 스가 씨익 웃으며 디에고에게 손 짓했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 디에 고를 바라보았다.
잔잔한 푸름을 담은 두 눈과 마 주했다. 무엇도 가리지 않고 집어 삼키는 바다를 담은 듯 공정하고 냉정한 빛.
내가 이전에 본 적 없는 눈빛이
었으나, 그 눈빛은 그의 눈에 딱 맞는 퍼즐 조각처럼 어울렸다.
내가 잠시 할 말을 잃었을 때.
"처음으론 살아남은 군인들을 몰살시킵니다. 다시 들고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그는 내가 친애하던 아름다운 입술을 열어 망설임 없이 잔혹을 말했다.
"이후 반란을 구상했던 지도자 층의 목을 모두 베어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걸어 둡니다. 반란 의 대가가 무엇인지 학습하게 해 야 합니다. 이후에도 전투가 가능 한 어른들은 모두 죽입니다."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말하는 디에고의 낯은 지나치게 태연했 다. 마치 오늘의 날씨나 안부를 말하는 것처럼.
"남은 부족의 아이들은 모두 철 저한 사상 교육을 거친 뒤 제국민 이하의 계급으로 제국에 속하게 합니다. 그곳의 역사를 지우고, 노래를 멈추게 해 문화의 맥을 끊
습니다. 그곳의 이름을 빼앗아 완 벽한 제국의 땅으로 복속시킵니 다. 이것이 전쟁에서 완벽하게 승 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에고 솔라티네는 제국을 지키 고 부흥시키는 것이 정의이고 신 념인 냉철한 지배자였다.
"너다운 대답이구나, 디에고."
내게는 어색하다 못해 낯선 디 에고의 모습을 헬리오스는 익숙하 다는 듯 받아들였다. 마치 디에고 가 원래 그런 사람인 양.
디에고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 다.
'디에고는 원래 이런 사람이구 나.'
충격까지는 아니었다. 디에고가 얼마나 냉철한 사람인지는 나 또 한 이미 알고 있었으니.
잔잔하지만, 확실한 파동이었다. 마치 내가 눈을 깜빡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것처럼 말이다.
인간이 눈을 깜빡이는 것은 당 연한 이치다. 허나 그것을 자각하 는 순간, 그 행위 자체가 무척 어 색해진다.
디에고의 냉철함이 내겐 이와 같았다.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나는 디에고의 냉철함을 존중했 고 그의 냉철함이야말로 이 제국 을 최선의 방향으로 이끌 도구라 고 생각했으나, 그것과 별개로 그 의 의견에 동의하진 않았다.
내가 정면으로 반박하고 들어가 자 헬리오스의 눈이 흥미로 번뜩 였다.
나는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표 정을 짓는 디에고와 똑바로 마주 했다.
"민족을 말살시키는 것은 빠른 상황 진압에 도움이 될지 모릅니 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땐 손해임이 분명합니다."
"호오. 어째서?"
헬리오스의 물음에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 차분히 말을 시작 했다.
"첫째. 함부로 민족을 말살하면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로 대륙의 지 탄을 받게 될 겁니다. 둘째. 사람 들을 모두 죽인다면 이후 더 큰 발전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 셋 째. 잔혹한 행보만을 보여준다면 이에 반발한 다른 소수민족들이 연합해 제국을 공격하려 할 수 있 습니다. 넷째......
사실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은
세 번째까지다. 근거는 이것만으 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기어코 네 번째 근거를 입 밖으로 꺼냈다.
"......그것은, 옳지 않기 때문입 니다."
그래. 사실 이것이 가장 큰 이유 다.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이유만으 로 무고한 사람들까지 모두 몰살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이 내
신념이었다.
"......공녀의 말 또한 일리가 있 다고 생각하네만, 대륙의 지탄을 받는 것이 두렵다면 애초에 전쟁 도 벌여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지탄을 두려워해서야 아무것도 할 수 없네. 애초에 솔라티네 제국은 이미 대륙에서 상대할 자가 없는 제국일세 지탄한다고 한들, 누가 벌하겠나."
"허나 지탄을 모조리 무시해서 야 진정한 최강이 될 수 없습니 다. 무법자에 무뢰배가 될 뿐이겠 죠. 지금은 힘이 없어 들고 일어
서진 못하겠지만, 힘으로 짓누르 는 통치는 얼마 가지 못한다고 생 각합니다. 전쟁으로 대륙을 어지 럽게 했다면 자비 또한 보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대륙이 제국을 여차하면 아무 민족이나 몰살하는 독재자로 인식해서는 안 되지 않 습니까."
"그래. 힘으로만 짓누르는 통치 는 얼마 가지 못하겠지. 다만 대 륙에 자비를 보여 줄 필요가 있다 면 다른 방식으로 보여 주면 되는 일이야. 굳이 북부인이라는 위험 요소를 남겨 둘 필요는 없어. 북 부인들이 그저 '아무 민족'인가?
그들은 이전부터 수없이 제국을 노려 온 우리의 적이네."
나와 디에고 모두 높지 않은 언 성에 차분한 표정임에도 대화는 치열하게만 느껴졌다.
디에고는 차가운 이성만이 가득 한 두 눈으로 나를 직시했다.
"나는 여태껏 우리가 북부인들 을 많이 봐 주었다 생각하네. 한 번 더 기어오른다면...... 그땐 아 예 짓밟아 버려야지."
나는 디에고와 가까워지며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자애 롭고 공평한 군주지만, 그건 어디 까지나 솔라티네 제국에만 해당된 다는 걸.
어디까지고 착하기만 한 사람이 나, 어떤 상황에서도 구부릴 수 없는 신념을 가진 나 같은 사람은 군주가 되지 못한다. 군주는 부덕 과 온갖 권모술수에 익숙해져야 하니까.
디에고의 통치 방식은 확연한 국가 이기주의를 품고 있었다.
"......저는 제국이 북부인 하나 통제하지 못할 만큼 약한 국가가 아니라고 봅니다."
나는 천천히 말을 뱉으며 흔들 림 없이 디에고와 마주했다.
그와 나 사이에 치열하게 오가 는 시선. 그 잠시 동안, 이 세상 에 그와 나만 남은 것 같았다.
이 순간에 디에고와 나는 황태 자와 공녀도, 주군과 신하도, 남 자와 여자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의견을 타인에게 관철시키고 합당함을 증명하려 하 는 두 명의 인간일 뿐이었다.
"몰살로 일시적인 안정은 찾을 수 있을지 모르나, 북부인들을 살 려 두는 것으로써 이룩할 수 있었 을 후일의 발전은 모두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그래? 그럼 북부인들이 제국에 어떤 이득을 줄 수 있는지 말해 보지 그러나."
헛웃음을 친 디에고가 날카롭게
말했다.
처음 마주하는 그의 냉소적인 태도였으나,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 태도는 디에고와 너무 잘 어울 렸기에. 이것이 디에고가 진지하 게 대화에 임할 때 취하는 태도임 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 다.
"여태까지 이득을 취하지 않았 습니까. 그들에게 받아 온 공물들 이 제국 번성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을 겁니다. 게 다가 그들이 북부를 지키고 있는
덕분에 제국 쪽으로 넘어오는 마 수의 수가 일정하게 유지되죠. 그 들은 분명 제국에 이바지하고 있 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여태껏 북부가 감히 제국에게 반기를 들었던 횟 수 또한 기억해야 할 거야. 그로 인한 피해들도 말이야. 북부가 바 친 공물로 인한 소득과 그들의 침 입으로 인한 손실은 거의 비등한 정도일세. 그렇다면 결국 소득은 0인 거야. 0인 소득을 얻고자 잔 당들을 남겨 놓고 그들을 경계하 느라 신경을 소모한다면 그것보다 미련한 일이 더 있겠나?"
디에고와 나 사이에 치열한 설 전이 오고 갔다. 그는 의견을 굽 힐 생각이 없어 보였고, 나 또한 굽힐 생각이 없었다.
디에고의 푸른 눈동자가 한없이 서늘하게 나를 훑을 때면 나는 이 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직시했다.
"그 미련한 짓으로 수천수만 명 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무거운 바위를 내려놓듯
속내를 말했다.
입꼬리를 굳힌 디에고가 서늘하 게 나를 응시했다.
"그들은 제국민이 아닐세, 카슈 미르 크리시스. 그들의 목숨은 우 리에게 가치가 없어."
나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레오 때에 이어 또다시 신념을 두고 다 투고 있는 현 상황 자체가 조금 지쳤지만, 물러설 순 없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며 표정을 정돈했다. 나는 차오르는 감정을 꾹 누르고 쥐어짜듯 말했 다.
"이 세상에, 가치 없는 생은 없 습니다."
영원불변할 내 신념이었다.
내 신념에 자신의 신념으로 답 하듯, 디에고는 단단한 눈빛을 한 채 대꾸했다.
"이 세상에 희생 없는 평화 또
한 없네. 평화를 위해선 결단이 필요해."
디에고와는 죽이 꽤 잘 맞는다 고 생각했다. 성향이 정반대인 이 들이 오히려 더 잘 어울린다고 하 지 않던가.
그와 나는 서로에게서 공통점을 찾기가 더 어려운 것과는 달리, 여태껏 별 마찰 없이 관계를 이어 왔다.
허나 바로 이런 곳에선, 그와 나 의 가장 큰 차이점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디에고는 군주로서 생각하고, 나 는 신념을 가진 한 사람의 인간으 로서 생각한다.
그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삶의 양식을 낳았다. 이것이 그와 나를 정반대 의 부류로 가르는 가장 큰 요소였 다.
'......디에고와 이렇게 대립하고 싶진 않았는데.'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언젠가 한 번쯤 대립할 거라 예 상하긴 했지만, 그게 지금이 될 줄은 몰랐다.
열정적인 설전에 푹 잠겨 있다 가 이제야 좀 정신을 차린 건지, 눈빛에서 냉기를 걷어 낸 디에고 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 고 있었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 내가 디에고의 말에 대답하려 입술을 열 때.
"저러다 둘이 키스하면 좋겠다."
혼잣말인지 들으라는 건지 모를 헬리오스의 한마디에, 나와 디에 고는 동시에 헬리오스를 돌아보며 미친놈 보는 듯한 표정을 짓고 말 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