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하하! 지금 자네들 표정이 얼마나 불경한지 아나?"
나와 디에고를 번갈아 본 헬리오스 가 박장대소했다.
"아, 네...... 송구합니다."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헬리오스를 흘겨보다 떨떠름하게 고개를 꾸벅였 다
디에고는 헬리오스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그를 띠꺼운 눈으로 보고 있 었다.
"두 사람의 치열한 논쟁 잘 들었네. 아주 재밌었어."
디에고가 그러거나 말거나, 금방 웃 음을 정리한 헬리오스가 느긋한 투로 말했다. 그러나 푸른 두 눈은 나른해 보이는 표정과 상반되게 날카로웠다.
"다만 나는 공녀의 이야기를 더 들 어 보고 싶군."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의 눈과 닮 은 푸른 눈동자가 내게로 고정되었
나는 목울대를 울렁여 침을 삼켰다.
"그대는 지금까지 디에고의 의견에 강하게 반론을 했네. 그럼 디에고의 의견을 대체할 다른 주장도 내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타인의 의견에 반론하려면 나 또한 의견을 내는 것이 도리이다.
이를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헬리오 스 앞에서 나는 침착하게 표정을 정 리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지식들이 펼쳐 진다. 내가 필사적으로 공부해 온, 이전 세계 역사 속 수많은 조직들의 흥망성쇠에 관한 기억들을 더듬었다-
모방이야말로 성공의 받침대. 나는 그 역사 속 가장 성공한 제국의 정책 을 빌릴 생각이었다.
"저는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엔 패 전국을 더욱 좋게 대우해 줘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내 단호한 말에, 헬리오스와 디에고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기야, 현재 대륙엔 우호적인 식 민 정책에 대한 전례가 없으니까. 하 지만 이전을 세습하기만 흐fl서야 발전 할 수 없어.'
흐르지 않는 것은 고인 것이고, 고 인 것은 결국엔 썩는다.
나는 내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제국 을 사랑했다. 제국이 더 발전하기를
바랐다.
'이전 세계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최강의 제국.'
내가 모방하려는 것은 고대 로마 제국의 정책이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여태껏 제국이 북부를 다루는 방식은 너무 거칠었다 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폐하의 선정 으로 그들의 처지가 나아졌다고는 하 나, 북부인들이 제국에게 품은 앙금 은 깊습니다. 반발심에 억압으로 대 응하는 건 효과가 없다는 게 이미 증
명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온건책을 사용해 봐야 핸다고 생각합니다."
"호오...... 어떻게 말인가?"
상당히 급진적인 방법이었을 텐데 도 헬리오스의 반응은 상당히 우호적 이었다. 짙게 번뜩이는 그의 눈을 당 당히 마주했다.
'로마의 식민 정책은 그들을 최강의 제국으로 만드는 데에 크게 기여했 지.'
"우선 북부 지배계층의 목을 치는 것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반란을 계
획한 주동자들을 살려둘 순 없습니 다. 다만 저는 기존 북부인들의 존재 와 방식을 인정해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억압으로 인한 군림은 오래가지 못 한다. 내가 배워 온 모든 지식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로마는 식민 국가를 동맹국으로 받 아들이며, 그들의 자치에 간섭하지 않고, 그들의 문화를 인정해 주었지.'
그렇게 함으로서 식민 국가는 로마 에 복속되는 것이 더 안전함을 깨닫
고 로마의 패권에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이것이 로마가 급속도로 그 들의 영역을 확장한 방법이었다.
"공물은 폐하께서 즉위 후에 조절 하신 현재의 수준도 적당하다고 생각 합니다만, 다른 식민 국가들에 비해 북부의 취급이 박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헬리오스의 전대 황제는 북부인들 을 말 그대로 개처럼 취급했다. 막대 한 공물의 압박을 이기다 못한 북부 인들이 산 채로 굶어 죽어가는 일도 빈번했다고 한다.
'헬리오스는 성격이 되먹지 못한 것 과는 별개로 현명한 정치를 펼치니 까.'
헬리오스는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북부에 대한 처우를 개선했다.
지나치게 많았던 공물의 양을 대폭 줄이고, 북부인들을 마수에게서 지켜 주기 위해 군사도 몇 차례 파견했다.
헬리오스는 지금도 무척 잘하고 있 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오랜 앙금이 풀 리진 않겠지. 그리고 아무리 잘해 주 곤 있어도 그들의 존재를 제대로 인 정하진 않으니까.'
북부인들은 민족이 형성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저 '북부 인'이라고 불린다.
그들에겐 나라도 없고 정체성도 없 었다. 제국의 식민지에 사는 소수민 족으로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제국민들은 북부인들을 분
별 능력 없는 아만인쯤으로 배우고 생각하니까. 북부인들을 거의 짐승처 럼 취급하지.'
선입견이라는 것이 이리도 무서운 것이다.
갈 때까지 간 제국민들의 북부 취 급을 생각하던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어 또렷한 눈으로 헬리오스를 보았다.
"북부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북부인 에 대한 제국민들의 인식을 개선해 그들이 제국의 지배를 자발적으로 받
아들이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재밌군. 공녀는 북부인들이 제 국의 지배를 인정할 날이 올 거라 생 각하나?"
"그들을 인간으로 대우해 주다 보 면 반드시 그런 날이 올 겁니다."
냉소적으로 날아온 디에고의 반문 을 단호하게 답했다. 그와 나 사이에 치열하게 시선이 오갔다.
"그들은 몇 번이고 우리 제국에 반
기를 든 전적이 있는 자들이야. 그들 에게 자치권을 주고 권리를 인정해 준다면 더욱 힘을 키워 또다시 반란 을 일으킬지도 모르네."
"그들이 반기를 든 것엔 제국에도 책임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으실 겁 니다. 늘 채찍만 주며 그들이 신뢰를 보일 기회도 주지 않았으면서 그들을 신뢰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너 무 잔인한 처사입니다."
사실 설전을 이어가면서 느끼고 있 었다. 디에고의 주장 또한 틀리지 않 았음을.
북부가 제국에게 앙금을 가지고 있 다면, 제국은 북부에 대한 깊은 불신 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방법은 잔인 할지언정 근거가 없진 않았다.
어느 한쪽이 옳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어느 한쪽이 틀리지도 않은 정반대의 방식이 맞부딪친다.
뚫지 못할 것이 없는 창과 막지 못 할 것이 없는 방패의 대결 같았다.
"자치권을 갖게 된 그들이 반란을 꾀했을 때 일어날 사태를 생각해 보 게! 제국이 크게 흔들릴 수도 있네!
그대의 주장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 기는 격이야!"
"애초에 그들이 반란을 꾀했던 이 유부터 생각해 보십시오! 이건 제국 이 북부인들을 신뢰해 줘야만 끝낼 수 있는 악순환입니다"
침착하게 이어지던 대화가 어느새 언성이 높아지며 격렬해졌다. 디에고 의 짙푸른 눈은 무섭도록 엄격했다.
나는 숨을 거칠게 쉬면서도 지지 않고 그와 눈을 맞추었다.
"대체 그들을 어떻게 믿겠나! 어떻
게 보장되지 않은 것을 함부로 믿느 냔 말이야! 의심하고 또 의심해 방심 하지 않아아만 살아남을 수 있단 말 일세!"
허나 이어진 디에고의 외침엔 반박 할 생각도 못한 채 헛숨을 들이쉬고 말았다.
그의 목소리는 오랜 경험으로 인한 그의 신념이 절절히 담겨 있었다.
나는 여태껏 디에고가 환경에 비해 무척 곧게 자랐다고 생각했다. 언제 암살자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태로
운 하루하루를 살았으면서도 잘 자라 준 것이 고맙기도 했다.
허나 역시 그 환경에서 모든 것이 정상일 순 없었을 것이다.
그의 위태로운 유년 시절은 그에게 지독한 인간 불신을 안겨 주었다.
'나도 디에고가' 신뢰하는 사람이 되 기까지 오래 걸렸지.'
디에고아 처음 만났던 날, 그를 살 려주었음에도 그는 나를 불신했다.
내가 몇 번이고 믿음을 주고 나서 야 디에고는 내게 경계를 풀었지만, 그에게서 확실한 신뢰를 얻어내기까 진 이후로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실 지금도 그가 나를 완벽히 신 뢰하고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렇게 살아왔으니 함부로 무언가 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겠 지.'
평생을 위험 속에 살아온 내가 어 디를 가 무엇을 하든 몸에서 검을 떼 어 놓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
각했다.
살아온 방식은 습관과 신념을 낳는 다. 그 공식에서 디에고도 예외가 되 진 못했다.
울컥 속상함이 치밀어, 나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숨을 크게 들이쉰 나는 천천 히 입을 움직였다.
"그래도, 믿을 수 없다고 해서 그들 을 모두 죽이는 건 잘못된 거 아닙니 까."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디에고가' 이러한 사람이 된 이유를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여전 히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내 눈을 본 디에고가 움찔했다. 슬 퍼하는 눈빛이 티가 난 모양이었다.
당황한 기색의 그가 반쯤 몸을 일 으켰다.
" 그게......
"이제 그만."
무어라 말하려던 디에고를 헬리오 스가 가로막앴다.
"이 이상 하다가는 내가 이 안건을 꺼낸 의미가 퇴색되겠군. 두 사람이 싸우는 걸 보R 싶었던 건 아니니 그 만두게."
여태껏 우리를 묵묵히 지켜보던 헬 리오스는 여전히 여유롭게 웃고 있었 으나, 두 눈은 단호함을 담고 있었다. 이 이상 설전을 이어 가는 건 용납하' 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 다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 하네. 허나 디에고의 의견은 극단적 인 면이 있己 공녀의 의견은 이상주 의적인 면이 있어."
헬리오스가 천천히 상황을 정리했 다.
그의 말이 맞았기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젠 완벽히 진정한 디 에고는 암울해 보이는 낯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의견을 조합해 중 간에서 합의를 보면 최고의 답이 나 오리라 생각하네."
헬리오스가 나와 디에고를 번갈아 보았다. 그의 표정엔 만족스러운 빛 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완벽하게 호완해 줄 수 있는 존재 같 군."
확실히 디에고와' 나는 정반대였으 나, 서로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슬쩍 시선을 돌려 디에고를 바라보 자, 이미 나를 보고 있던 푸른 눈동
자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차가워 보이는 색채의 눈동자임에 三 나를 볼 때면 당연스럽다는 듯 온기를 품는 눈. 차갑게 얼었던 마음 이 온기로 천천히 녹았다.
만약 어떤 일을 하는데 파트너가 필요하다면, 내겐 디에고가 가장 적 격일 것이 분명했다.
"나는 두 사람이 펼쳐 나갈 차세대 가 궁금해졌네."
헬리오스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그
의 두 눈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짝
"자. 벌써 세레논의 검술 수업 시간 이 다 되었군. 아쉽지만 공녀와는 이 만 작별 인사를 하는 게 좋겠어."
손뼉을 한 번 친 헬리오스가 유려 하게 마무리했다.
멍하니 디에고와 눈을 맞추고 있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 덕였다.
"아, 네. 이만 2황자 저하께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 먼저 일어나 가 보게. 나는 디에고와 더 얘기를 하다가 자 리를 정리할 테니."
헬리오스가 넉살 좋게 말하며 손짓 했다. 나는 고개를 꾸벅하며 자리에 서 일어났다.
"오늘 무척 즐거웠습니다. 저는 이 만 가 보겠습니다. 황제 폐하, 그리 고••...
나는 나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디에
고를 슬쩍 돌아보았다.
"......황태자 저하."
치열한 설전을 끝마친 뒤여서일까, 그와 나 사이에선 어쩐지 애매한 기 류가 흘렀다.
나는 조금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고 허리를 굽혀 인사하곤 빠른 걸음으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내가 화원을 나설 때까지도 디에고 의 시선은 내 뒤통수에 고정되어 있 었다.
애매하게 끝나 버린, 황가 부자와의 티타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