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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20화 (120/254)

120 화

쉬익!

"다시."

캉!

"다시!"

내 차가운 고함에 이를 악문 세 레논이 다시금 검을 놀렸다.

바른 자세, 유연하게 움직이는 검. 일반인의 눈에는 완벽해 보이 는 검술이겠지만 내 눈엔 허점투 성이 였다.

"허리를 조금 더 숙이고 검은 더 눕혀야 합니다. 더 날카롭게 파고드십시오!"

다시금 호통을 치자 머리를 한 번 혼들어 땀방울을 대충 털어낸 세레논이 다시 몸을 움직였다. 지 친 티가 나긴 했지만, 확실히 전 보다 나아진 게 보였다.

'말하면 바로바로 알아듣는단 말 이지.'

나는 세레논 몰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세레논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는 천재가 아니었다. 분명 재능 은 있으나, 가르침과 노력 없이는 자라지 않을 수재였다.

'하지만...... 천재보단 수재가 더 가르치는 맛이 있겠지.'

그는 몰랐기에 내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집중했다. 내가 지시한 동 작을 곧바로 완벽하게 해내진 못 했으나, 몇 번의 노력 끝에 매끄 럽게 해냈다.

세레논은 천재가 아니었기에 간 절했고, 노력했다. 나는 그의 그 런 면에서 가르치는 보람을 느꼈 다.

'세레논이 워낙 빨리 습득해서 조금 골치 아프긴 하지만...... 이 만족감을 위해서 약간의 고생쯤은 할 만하지.'

나는 제대로 교육을 받은 검사 가 아니었다. 정식 검술에 무지했 고,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레논을 가르치 기 위해선 나도 공부를 해야 했 다.

'라이너에게 부탁해 황실 기사단 훈련 방법을 훑어보고, 각종 서적 을 뒤져서 정식 검술을 익히 고...... 지도법에 스승의 덕목까지 배워 훈련 계획을 짜고...... 힘들 었지.'

황자의 스승이 되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세레논 쪽에서 바라서 된 것이 니 야매여도 어느 정도 봐줄 줄 알았건만, 황궁의 인사 기관에선 내게 교육 이념부터 시작해 스케 줄과 시간에 따른 성취 정도까지 별것을 다 물었다.

다행히도 나는 몸으로 하는 모 든 것엔 천재적이었기에 정식 검 술을 빠르게 익히고 이에 따른 훈 련 계획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래도 세레논 덕분에 나도 공 부했으니까. 원래는 경지를 높이 는 수련에만 집중하다가, 세레논 때문에 기사들의 정통 검술도 익 히게 됐지.'

용병으로서의 자유분방한 검술 만을 사용하던 몸으로 딱딱한 정 통 검술을 익히는 것은 어려웠지 만, 확실히 무의미한 배움은 아니 었다.

기사들의 검에는 분명 용병의 검에 없는 장점이 있었으니.

'세레논의 스승이 되길 잘했어.'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급속도 로 성장한 세레논의 검술은 지켜 볼수록 뿌듯해졌다.

처음 그의 스승이 되기로 결정 한 데에는 외부적 요인이 많았으 나, 어느새 나는 스승이라는 역할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이끄면 이끄는 대로 곧잘 따라 오는 충실한 제자를 가르치는 건 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나

는 세레논과, 공녀와 황자를 넘어 스승과 제자로 교감하고 있었다.

"그만. 오늘은 더 해도 성과가 없을 것 같군요. 오늘은 여기까지 만 합시다."

땀에 흠뻑 젖은 세레논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수업 종료를 선언 했다. 그는 이미 스스로를 한계까 지 몰아붙인 뒤였고, 더 해 봐야 탈만 날 게 분명했다.

내 저지에 곧바로 우뚝 멈춘 세 레논은 손에 힘이 풀린 듯 툭 검

을 놓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흙 바닥에 그냥 누워 버렸다.

'어련히 힘들었던 모양이군.'

웬만해선 내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세레논이 이런 모습 을 보인다는 건 그가 완전히 나가 떨어졌음을 뜻했다.

'곧 오러를 내뿜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요 근래 거칠게 굴리긴 했 지......•'

지금의 세레논은 소드 익스퍼트

거의 직전에 있었다. 그 모습에 욕심이 나 요 근래 훈련의 강도를 확 높였더니 감당하기 힘든 모양 이었다.

다음부턴 훈련의 강도를 조금 낮춰야겠다고 생각하며 세레논에 게 수건을 건넸다.

"늘 말하지만, 저하의 검술은 예 리함이 떨어집니다. 검 하나하나 에 너무 힘을 싣지 마십시오. 아 직 저하께선 묵직함과 예리함을 모두 살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셨습니다. 묵직함은 충분히

단련된 부분이니, 예리함에 더 초 점을 맞추셔야 합니다."

"하아...... 네."

"검을 아래쪽에서 휘두를 때 허 리를 숙이다 마는 습관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으셨습니다. 더 주의 하십시오."

바닥에 대자로 누운 채 숨을 헐 떡이고 있는 세레논에게 차가운 물을 건네주면서도 끊임없이 가르 침을 늘어놓았다.

말라 죽어 가던 식물이 빗물을 흡수하듯 다급하게 물을 들이켠

세레논은 숨이 조금 진정된 뒤에 야 작게 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 켜 앉았다.

옅은 채도의 연보라색 머리카락 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햇 빛을 받아 반짝였다. 피곤으로 눈 꺼풀이 반쯤 감겨 있음에도, 세레 논의 뿌연 하늘빛 눈동자는 여전 히 생기가 가득했다.

그의 입가엔 진심 어린 미소가 서려 있었다.

늘 봐도 새로운 세레논의 그 모

습을 응시하던 나는, 엄격하게 힘 을 주었던 눈을 풀었다.

공식적인 석상에선 늘 영혼 없 는 미소에 가면을 덕지덕지 쓴 눈 빛으로 일관하는 세레논은 내게 검을 배울 때만 저런 얼굴을 했 다.

사람보단 아름답게 세공된 꼭두 각시 인형 같던 세레논을 진심으 로 웃게 만드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었다.

"참...... 스승님께선 매정하십니

다. 어쩜 제자에게 칭찬 한마디 해 주시는 법이 없으십니까. 전 스승은 제가 검만 잡아도 찬사를 늘어놓던데요. 검이 아니라 빗자 루를 휘둘러도 절 향한 찬송가를 만들 기세였는데...... 스승님은 제 가 드래곤을 잡아 와도 자세를 지 적하실 것 같습니다."

섭섭해하는 표정을 지은 그가 투덜거렸다.

표정이나 말투와는 별개로 눈빛 엔 장난기가 서려 있음을 확인한 나는 옅게 웃음 지었다. 세레논은

어느새 내게 스스럼없이 장난을 칠 정도로 나를 편하게 여기고 있 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없고 무책 임한 말이 바로 '그만하면 잘했 어'입니다. 의미 없는 칭찬 백 마 디보다 확실한 가르침 한마디와 성과를 직시하는 평가 한마디가 훨씬 낫습니다."

이건 내가 전생에서 교수가 되 기를 꿈꿀 때 마음에 새기고 살던 말이었다.

전생의 기억 대부분은 빛이 바 래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 마 음가짐은 전생의 내가 무척 중요 시했기 때문일까,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저번에 지적했던 어영부영한 왼손 처리는 확실히 전보다 나아 졌더군요. 주중에 연습을 많이 하 신 모양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잘했다'라는 칭찬은 무의미하 다.

나는 그가 노력으로 이루어 낸

성과를 확실히 짚어 얘기하며 세 레논을 북돋웠고, 그 한마디에 금 방 꿈틀거리기 시작한 세레논의 입꼬리를 보며 웃음을 삼켰다.

"크흠. 뭐, 제가 복습 예습은 잘 하지 않습니까."

"어련히 잘하시죠."

장난스러운 말에 마찬가지로 장 난스러운 투로 대답한 나는 세레 논과 함께 큰 바위 위에 앉아 슬 슬 지기 시작하는 태양을 바라보 았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자연 스럽게 이어지는 이 행동은 수업 을 끝마치기 전 이루어지는 그와 나의 습관이었다.

"스승님."

"네, 저하."

잠시 말없이 아름다운 붉은색으 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세레논이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왔다.

평화로운 내 대꾸에 그가 잠시 고민하다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수업 초반에...... 스승님 께서 집중을 못 하시는 것 같았습 니다."

날카로운 세레논의 지적에 나는 멈칫했다.

'......세레논까지 눈치챌 정도로 넋을 놓고 있었다니, 심각했군.'

속으로 한숨을 쉬며 자책했다.

하기야 지금에서 안정된 거지, 수업 초반엔 세레논이 몇 번이고

말을 걸어도 대답을 못 할 정도로 정신이 빠져 있었으니. 눈치 빠른 그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리 없 었다.

"분명 오늘 수업 전에 형님과 황제 폐하를 만나 뵈셨다고 들었 는데,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세레논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착잡해하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무슨 일이야 있었지. 디에고와 거의 대판 싸우다시피 했으니.'

디에고와 나는 다를 수밖에 없 고 언젠가는 이 때문에 부딪칠 거 라는 걸 예측하고 있었지만, 예측 했다 해서 충돌이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건 디에고와 내 가 처음으로 부딪친 사건이었으 니.

"말하기 곤란하시다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한 내 낯 을 힐끔 본 세레논이 덧붙였다.

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 내 두 손을 겹쳐 만지작거리며 말문 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어려운 문 제를 하나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에 따른 디에고와 제 대답이

"정반대였던 모양이군요. 그래서 싸우셨습니까?"

세레논의 예리한 추측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밀히 말하면 싸움이 아니라

거친 의견 교환이었지만, 사실상 싸움에 가깝긴 했으니. 세레논은 나와 디에고를 동시에 잘 파악하 고 있었다.

"황제 폐하가 형님과 스승님을 한곳에 모으신다는 말에 무슨 일 이 날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만...... 설마 두 분이서 싸우실 줄 은 몰랐습니다. 두 분은 워낙 사 이가 좋아 보였으니까요."

의외라는 세레논의 어투에 참혹 한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와 디에고는 연인 사이가 아 니냐는 추문이 돌 만큼 가까웠으 니, 세레논이 놀라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 하지만 분명 형님께서 금방 사과를 하실 겁니다. 형님께선 스 승님을 정말 좋아하니까요."

축 처진 나를 보고 어쩔 줄 몰 라 하던 세레논이 변명하듯 덧붙 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술을 꾹 깨물었다.

디에고와 이 일로 오랫동안 냉

전을 할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는 상냥한 사람이니 분명 내게 사과를 건넬 거고, 그가 하지 않 아도 내가 할 생각이었다.

다만 내가 착잡해진 것은, 디에 고가 추구하는 세상과 내가 추구 하는 세상이 상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와 나의 최종적 목표는 같다. 제국의 안녕과 제국민들의 안위. 나는 내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솔 라티네 제국이 안전하고 평화롭길 바랐다.

'하지만 그 목표를 주위 민족들 을 모두 쳐내면서까지 이루고 싶 진 않아.'

약한 민족의 일방적 희생으로 이루어진 안녕이라니, 용납할 수 없었다. 현재로서는 내 사람들의 안위와 신념의 경계가 무척 불분 명한 상황이었지만 적어도 그것만 은 아니었다.

'디에고는 다가올 전쟁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까.'

그것이 참 궁금했다.

분명 디에고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음에도 아직 그에 대해 모 르는 게 많다는 생각에 머리가 살 짝 울려 왔다.

"저하."

" 네?"

생각에 빠진 날 방해하지 않으 려는 건지 그저 조용히 하늘만 바 라보던 세레논이 내 부름에 나를 돌아본다.

디에고와 같은 푸름이나, 그 색 채가 훨씬 뿌옇고 몽환적인 벽안 에 내 잔상이 담겼다.

'세레논은 뭐랄까, 나와 디에고 의 중간쯤인 느낌이지.'

지나치게 차가운 디에고와 지나 치게 뜨거운 나를 반반 섞어 놓은 듯,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사 람.

세레논은 묘하게 애매한 사람이 었다. 평소엔 물 흘러가는 듯 유 야무야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중

요한 순간엔 날카롭고, 인간에 대 한 정이 있는 듯 따스하게 굴다가 도 냉정할 땐 냉정했다.

어떤 이들은 이를 미지근함이라 표현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것 을 '적당함을 안다'고 표현하고 싶었다.

그것이 그를 군주의 상에서 벗 어나게 만들었을지는 모르나, 분 명 그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런 그의 이상향은 뭘까.'

"저하께선, 어떤 세상을 추구하 십니까?"

나는 말간 눈으로 날 응시하는 세레논에게 문득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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