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화
"......제가 추구하는 세상이요?"
내 물음에 크게 멈칫한 세레논이 얼빠진 표정으로 반문했다. 옅게 혼 들리는 그의 동공은 그가 이런 질문 을 들은 게 처음이라고 말해 주는 듯 했다.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2황자가 이런 질문을 처음 들어봤다고?'
도리어 의아해진 나는 뭐가 문제인 가 싶어 세레논을 바라보았다. 잠시 고장 난 듯 눈을 깜빡이던 세레논은 멍한 낯으로 입술을 열었다.
"여태껏...... 제 생각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어서 말입니다. 저는 키프 로스 측의 명령만 따르면 됐으니까 요."
"아."
나는 옅은 탄식을 내뱉었다.
키프로스가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꼭두각시 황제였다.
세레논 그 자체가 아니었다.
헬리오스는 세레논을 사랑하긴 했 으나, 황제인 그가 세레논에게 관심 을 주는 것은 단순하게 아들을 사랑 하는 것이 아니라 디에고의 입지를 위태롭게 하는 정치적인 행보로 읽힐 게 분명했다. 그러니 함부로 세레논 에게 관심을 줄 수 없었다.
티나는 그나마 세레논 그 자체를 사랑해 주는 인물이었으나, 그에게 권력을 쥐여 주기 위해 움직이느라 바빠 세레논에게 관심을 줄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 안쓰럽지 않은 사람이 없 지.'
의견 한번 펼치지 못했을 세레논을 생각하니 심장이 가는 낚싯줄로 꽁꽁 묶인 것처럼 따가웠다.
황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다투고 있는 디에고와 세레논을 볼 때면, 가 해자는 없고 피해자들만 있는 참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황제 자리는 형님 것인 데...... 제 의견을 들어 봤자 아무 소
용도 없지 않겠습니까."
어느새 태도에서 동요를 지운 세레 논이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자신은 의견을 내선 안 되는 것처럼 말하는 그의 얼굴엔 기계적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잊고 눈을 깜빡 이다, 진중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래도 궁금합니다. 저는 세레 논 솔라티네가 꿈꾸는 세상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나는 디에고를 황제로 밀었고,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세레논을 지지할 수 없었다. 허나 그것이 세레논이 이상 향조차 꿈꾸지 못하는 꼭두각시로 스 러지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꿈꾸는 것은 모든 살아 있는 인간 의 권리다. 세레논도 예외는 아니었 다
세레논이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칙 칙한 하늘빛에 내 진분홍색 눈동자가 비치며 기이한 보랏빛을 만들어 냈
"......어렸을 적 황궁 도서관에서 책을 한 권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죽어 있던 눈동자가 빛나기 시 작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언제라도 즐거운 일이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이전 에 제국 아카데미의 재학 중인 학생 들이 쓴 상소문과 건의들을 책으로 엮은 것이었습니다. 무척 낡은 책이 었죠. 사실 이젠 내용도 가물가물한 데...... 똑똑히 기억하고 잊지 못하는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세레논은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 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엔 아 직 별이 뜨지 않았는데, 세레논의 눈 에선 벌써 별이 빛나고 있었다.
"'앤테이아 헬라'라는 마법부 학생 의 글이었습니다. 수인족들의 인식을 개선해 달라는 상소문이었죠"
'......안테이아 헬라?'
어쩐지 익숙한 이름에 미간을 좁혔 다. 기이한 감각이 몸을 타고 올라왔 으나, 애써 무시하고 고개를 끄덕였 다
'수인족 인식은...... 상소할 만하지.'
수인족. 수많은 민족과 종족이 터를 잡고 있는 이 대륙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평균적인 무력만 따지면 최강 으로 손꼽히는 종족.
그 강력함을 기반으로 대륙 전역에 종족별로 무리 지어 살며 대단한 존 재감을 드러낸 적도 있었으나, 그건 모두 과거 이야기였다.
'수인 대학살 사건.'
인간의 편협함은 참혹한 재앙을 만 들어 낸다. 오래전부터 수인들의 강 함을 두려워하던 인간들이 힘을 모아 수인들을 모조리 학살한 백여 년 전 의 참극 이후, 대륙엔 수인족의 씨가 말라 버렸다.
'그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수인족은 단 하나, 은빛 늑대 수인족.'
은빛 늑대들은 그 참극 때 우두머 리의 지혜로 인간들을 피해 대륙 북 서쪽에 자리를 잡은 뒤 여태껏 존속 을 이어 가고 있었다.
'남은 수인족이라곤 은빛 늑대들뿐 이건만, 수인족에 대한 사람들의 인 식은 여전히 좋지 않지.'
제국의 서적들은 여전히 수인족에 대해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서술 했고, 제국민들은 수인족을 꺼려 했 다. 이는 잘못된 교육으로 인한 잘못 된 인식의 답습이라고 볼 수밖에 없 었다.
"수인족에 대해 지나치게 편파적으 로 발언하는 서적들을 금지시키고 새 롭게 교육하라는 학생의 의견은 타당 했습니다. 강렬한 그 상소문에서 읽
었던 문단이 여태껏 제 기억에 또렷 이 남아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던 세레논의 두 눈이 나를 향했다. 그 두 눈은 결연한 빛 을 담고 있었다.
"'모든 것엔 금이 가 있습니다. 태 양의 제국 또한 예외는 아닙니다. 이 금은 흠집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저 는 그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고 생 각합니다. 시행착오 없이 완벽한 것 은 없습니다. 실수로 생긴 틈에서 바 깥으로부터 들어오는 빛을 보셨다면, 틈을 막으려고만 하지 말고 벽을 허
물어 주십시오. 바깥의 빛과 마주해 주십시오 외면하지 말아 주시길 바 랍니다.'"
수인 학살 참사는 옛 인간들이 저 지른 최악의 사건 중 하나였다. 허나 여태껏 그 사건은 수습되지 않은 채, 남은 은빛 늑대들은 사과조차 받지 못하고 차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크게 난 금은 막을 수 없다. 지울 수도 없었다. 빛은 여전히 그 틈새로 애매하게 들어와 고문하는 것처럼 죄 책감을 자극할 것이다.
굴레를 깨뜨리려면 벽을 부수고 빛 과 마주해야 했다.
"저는 누구도 외면당하지 않는 세 상을 바랍니다. 제 형님께서, 반드시 그 세상을 이뤄 주시리라 믿고 있습 니다."
그의 목소리 중앙엔 단단한 원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빛나는 보석이 될 수 있는 원석이.
"저도 그런 세상이 보고 싶군요."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느덧 해는 하늘 끝자락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슬슬 불 어오는 바람에 조금 났던 땀이 모두 말랐음을 느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 다
"저는 슬슬 일어나 봐야 할 것 같 군요•"
"아, 가십니까."
덩달아 일어난 세레논이 아쉬움 가 득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을 떠나보 내는 강아지같이 축 처진 세레논을 보며 웃음을 삼킨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스승님께서 더요"
세레논은 익숙하게 내 손을 마주 잡고 혼들었다. 잠시 그와 시선을 마 주한 사이로 깊은 유대감이 퍼져 왔 다
'분명 여기 어디쯤일 텐데.'
세레논과 작별한 뒤 나를 배웅해
주는 시종에게 산책을 하고 간다는 핑계를 대고 정원으로 빠진 나는, 티 나에게서 받은 편지를 쥔 채 이곳저 곳을 두리번거렸다.
황족은 쉽게 알현할 수 없다. 황족 을 알현하기 위해선 현장에서 황족에 게 호출을 받거나, 확실한 초대장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티나는•••... 초대장이 아니 라 은밀한 서신을 보내왔지. 황가의 문양조차 찍지 않은 서신을.'
황가의 문양이 찍힌 초대장이 없으
면 황족을 알현할 수 없다. 그걸 모 를 리 없는 티나가 이런 방식으로 날 호출했다는 건 대외적으로 만나길 원 치 않는다는 뜻이 분명했다.
허나 편지엔 따로 만날 장소도, 방 식도 언급되지 않았다. 나는 티나의 의도가 무엇인지 하루 종일 고민한 끝에, 그럴 듯한 뜻을 유추해 냈다.
'티나는 편지를 엽서로 보냈어.'
귀족이, 그것도 황족이 편지지로 엽 서를 사용하는 일은 없다. 엽서는 너 무 가벼운 느낌이니.
그럼에도 티나가 엽서를 사용한 것 은, 엽서의 그림에 의미가 있는 게 분명했다.
'황후궁 옆 정원의 분수.'
엽서가 담고 있는 장소였다.
황후궁 옆의 정원은 가 본 적이 없 어 처음에 분수만 봤을 땐 어딘가 싶 었지만, 분수 뒤쪽에 황후궁이 있다 는 것을 발견하고 위치를 지레짐작한 참이었다.
'이쯤인 것 같은데.'
사람이 없는 외진 곳에서 사진 속 분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던 나는, 이내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길을 제대로 찾았음을 확신했다.
조금 빠르게 걷자 별안간 엽서 속 분수가 나오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인영이 보였다. 나는 살짝 웃음 지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내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
자, 그 인영은 조용히 로브의 후드를 벗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둠이 집어삼킨 정원은 휘황한 달만이 비추고 있었 다. 라일락이 필 시기여서인가, 달빛 을 받은 그녀의 연보랏빛 머리칼에서 짙은 라일락 향이 퍼져 오는 듯했다.
암살자처럼 칙칙한 검은 로브를 입 어도 감춰지지 않는 품위와 위압감.
이 달밤 밀회에 날 초대한 사람, 티 나 키프로스였다.
태양보단 달이 어울리는 여인의 희 뿌연 벽안이 나를 고고하게 응시했 다. 눈빛만으로 사냥감을 제압할 것 같은 맹수의 눈동자였다.
나는 그 앞에서 매끄럽게 웃었다.
'......호위 한 명 없이 왔군.'
조용히 주위의 기척을 읽어 내다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은밀히 불렀 다고 해도 호위를 잠복시켜 둘 거라 고 예상했거늘, 주위에선 기척이 조 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믿는 건가.'
나는 입가를 느리게 쓸어내렸다.
세레논의 검술 스승 일을 무리 없 이 수행하고 있다는 것에서 내가 그 리 약하지 않다는 것을 짐작했을 텐 데도 호위 하나 없이 나와 만나러 온 티나가 의뭉스럽게 느껴졌다.
'갑자기 제국이 위험하다는 말로 황 태자의 편인 나를 호출해선...... 무슨 일일까.,
제국이 위험흐}다는 소리와 따갑게
울리는 감에 주저 없이 티나와 만나 러 오긴 했으나, 사실 그녀가 내게 무슨 말을 할지 감이 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디에고의 측근이라고 해도 될 만큼 디에고와 친밀하다. 디에고를 끊임없이 죽이려고 하던 티나가 내게 해 줄 말 중에 좋은 게 있을까 싶었 다
'여전히 불길한 느낌은 없다는 게 이상하지만.'
지금까지도 티나에게선 위험한 사
람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조금 풀리려는 긴장을 다시 다잡고 예의상 미소를 지은 채 티나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나를 부른 사람은 그 자신인 주제 에, 티나는 내가 등장한 이후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었다.
무척 착잡해 보이는 얼굴로 입술을 꾹 닫고 있는 티나를 얼마나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을까.
이젠 어떻게 돼도 모른다는 듯 체
념이 담긴 한숨을 쉰 그녀가 나를 똑 바로 마주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 는 건지 티나의 두 눈엔 결연함이 가 득했다.
"......사실 이걸 그대에게 말해도 되는 건지 아직도 확신이 없네. 하지 만 그대 말고는 이 말을 할 사람도 없지."
무거운 티나의 말투에 나도 덩달아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다. 무슨 속셈 인가 싶어 예민하게 그녀를 살펴도, 티나의 얼굴엔 진심만 어려 있었다.
"그대가 나를 굳게 믿어 주리라 생 각하진 않네. 나는 이 황궁의 최고 악역이 아닌가. 그래도 들어는 줬으 면 하네."
자조처럼 시작하던 티나의 말은 단 단한 심지가 담긴 당부로 끝이 났다. 이래도 되는 건가 혼란스러워 보이면 서도 혼들림이 없는 티나의 눈을 멍 하니 바라보교 있을 때, 그녀의 입술 이 천천히 열렸다.
"다가오는 건국 기념일. 수도의 축 제에서, 큰 테러가 일어날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