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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22화 (122/254)

122 화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얼굴을 굳히고 날카로운 투로 티나에게 되물었다. 티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테러라고? 건국기념일에?'

나는 혼란스러움을 뒤로하고 빠 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런 내용이 원작에 등장했는지 알기 위해 기

억을 헤집었으나, 정말 기억이 나 지 않았다.

'젠장. 원작 내용을 툭하면 잊어 버리니......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마치 기억해선 안 된다는 듯, 내 뇌는 원작의 내용을 깨끗이 지워 버렸다. 매일 아침이면 원작 내용 과 전생의 지식들을 적어 놓은 노 트를 정독하곤 했으나 그것도 조 금 뒤면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그 노트를 들고 다니 기엔 만에 하나라도 남에게 빼앗 겼을 때 너무 위험해지니...... 젠 장. 집에 돌아가서 다시 읽어 봐 야겠군.'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올릴 수 없을 것 같아, 우선 생각을 정 리하고 티나와 마주했다. 티나의 표정은 무척 진지했다.

"이번 건국기념일에, 수도 축제 에서 커다란 테러가 일어날 걸세. 그대가 믿든 믿지 않든 확실한 정

보야."

건국기념일. 제국의 가장 큰 국 경일이었다.

건국기념일엔 축제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과 노점상들로 수도 전 체가 무척 붐볐다. 거기다 황족과 신전의 고위층들이 일 년에 단 한 번, 제국민들에게 모습을 드러내 는 날이기도 했다.

"......건국기념일에 수도는 철저 히 단속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테 러가......

"고위급 귀족 가문이 합류해 뒤 를 봐주고 있네."

말허리를 끊고 들어오는 티나의 말에 멈칫했다.

제국 수도의 테러를 성사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한 권력을 가졌으 며 현 정권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곳. 게다가 티나와 연관되어 있는 가문.

사실 하나뿐이었다.

내 눈빛을 보고 얼굴을 일그러

트린 티나가 입이 쓴 듯 침을 삼 켰다.

"그래. 키프로스 가문일세. 북부 와 손을 잡고 테러를 일으킬 셈이 야."

'북부.'

그 단어 하나에 머릿속이 차갑 게 굳었다. 북부가 움직이기 시작 했다는 건 적신호였다.

나는 티나에게 재우쳐 물었다.

"정확히 언제 일어나는 겁니까? 어떤 방식으로?"

"정확한 시간은 행차 때. 중앙 광장에서 마력 폭탄이 터질 걸세. 폭탄 반경은 5km. 광장에서 터진 다는 것 외에 정확한 장소는 나도 모르네."

티나의 침착한 대답에 나는 미 간을 좁혔다.

건국기념일 축제의 하이라이트 는 황족과 신전의 고위층, 그리고 고위 귀족들이 함께 수도 거리를 행차할 때였다.

그때는 제국의 모든 수뇌부가 함께하기에 보안이 극도로 강화되 었다. 정식으로 허가된 이가 아닌 이상 500m 이내에서 금속이 섞 인 것이나 마도구를 소지하지 못 할 정도였다.

그에 비해 노점상들이 모여 있 는 광장은 보안이 약하긴 했다. 금속이나 마도구를 단속하진 않으 니까.

그러나 보안이 비교적 약할 뿐, 축제 기간엔 수도 전체에서 공격

성을 가진 마력 도구를 운반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했다.

'하지만 사냥 대회에서 봤던 그 결계를 떠올리면...... 완전히 불가 능은 아니겠지.'

북부는 제국의 귀족들 대부분이 모인 사냥 대회에서 공간을 분리 시키고 마수를 집어넣는 대담한 짓까지 벌였다.

그때 공간을 분리시키며 펼쳤던 보라색 결계는 소드 마스터들조차 상황을 읽지 못하게 했으니, 충분

히 그들의 마법 수준을 유추할 수 있었다.

지금의 북부라면 제국의 보안을 뚫을 수 있는 마력 폭탄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사냥 대회 사건 뒷정리 도 얼마나 깨끗이 했는지...... 제 국의 수사관들은 그 사건을 기이 한 해프닝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지.'

바실리스크의 시체도 사라져 버 리고, 공간을 분리시켰던 보라색

결계조차 사람들이 상황을 알고 나와 레오를 찾으러 왔을 때쯤엔 완전히 소멸되어 있었다고 했다.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으니 제 국에선 사냥 대회의 사건을 해프 닝으로 종결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이 오리무중이 되며 몇 안 되는 장본인인 내가 많이 부상하 긴 했지만...... 그 사건과 북부를 연관시키지 못한 탓에 제국은 여 전히 북부를 가볍게 여기고 있 어.'

제국 최고의 국경일인 건국기념 일에 테러를 벌인다는 건 사실 말 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계획이 신빙성 있게 들리는 것은 키프로 스의 영향력이나 북부의 마법 수 준도 이유가 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제국의 방심이었다.

제국은 너무 오랫동안 대륙의 최강으로 영위해 왔다. 내부적인 다툼이 있었을 뿐, 북부가 몇 번 반기를 들었다 해도 작은 소란 정 도였다.

즉 수도까지 영향을 미치는 외 침은 오랜 세월 동안 전무했다고 볼 수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제국이 경각심을 가지게 되겠군.'

테러가 성공한다면 그야말로 모 든 것이 묵사발이 되겠지만, 잘 막기만 한다면 제국 전체에 확실 한 긴장감을 줄 방아쇠가 될 것 이다.

난 최대한 긍정적으로 판단하려

노력하며 생각을 이어 갔다.

'축제엔 크리시스가 전체가 참여 해. 특히 카이사르는 축제의 주력 으로 행차 맨 앞에서 등장할 거 고.'

건국기념일 축제에서 고위 귀족 가의 일원들은 모두 행차에 참여 해야 했다. 정말 특별한 일이 아 닌 한은 불참할 수가 없었다.

'젠장. 가족들이 위험해.'

나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

었다. 광장에서 5km 범위라면 행 차하는 곳에도 폭발의 여파가 닿 을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나는 특별한 작위가 없 는 공녀이기 때문에 정말 죽을 것 같이 아프다고 구르면 행차에 빠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카이사르는 축제의 주 력인 공작이었다. 집안이 풍비박 산 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은 행차에서 절대 빠질 수 없었다.

'칼과 아리아라도 빠지게 하고

싶지만...... 내가 빠지면 나를 대 신하는 차원에서라도 둘은 필참해 야 할 거야.'

비교적 약한 둘이라도 안전한 곳에 있게 하고 싶건만, 내가 테 러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불 참하면 두 사람은 크리시스 공작 가를 대표해 반드시 참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위험하지 않도록, 내가 반드시 막는다.'

걱정과 수많은 사념들로 어지럽

도록 붉던 머릿속이 단 하나의 생 각으로 귀결되었다.

나는 결단을 내리고 티나를 마 주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막 아 보겠습니다."

내 무거운 확언에 티나가 복잡 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확 신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황후지만• ... 부끄럽게도 내 손에 확실히 잡히는 권력이 없

네. 거기에 감시를 당하고 있어서 함부로 움직였다간 꼼짝없이 들키 겠지. 그래서 불가피하게 그대에 게 부탁하게 되었네만, 사실 아직 잘 모르겠네. 귀족 영애에 불과한 그대가 이 일을 막을 수 있을까."

하기야, 티나는 내가 미르인 것 을 모르니 나라는 사람 자체에게 큰 기대를 품기는 힘들 것이다. 아마 내 가문인 크리시스 공작가 의 힘을 생각해 내게 이 일을 말 해 준 게 분명했다.

착잡한 듯 한숨을 쉰 티나가 말

을 이었다.

"알다시피 크리시스 공작이 축 제에서 빠져 이 일을 처리해 줄 순 없을 걸세. 그가 축제에서 빠 지기 위해선 정말 그럴듯한 이유 가 있어야 할 터이니. 게다가 그 가 축제에서 빠지게 되면 키프로 스와 북부 측에선 상황이 이상함 을 감지하고 돌발 행동을 할지도 몰라. 이 일은 공작의 도움 없이 오로지 그대의 선에서 처리해야 해."

티나는 오목조목 상황을 분석했

다. 그녀의 푸른 두 눈은 한없는 이성과 냉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도 폭탄이 광장에서 터진다 는 것만 알지, 정확한 장소는 모 르네. 이 일을 처리할 사람은 마 도구 탐지기에도 걸리지 않는 마 력 폭탄을 탐지할 수 있을 만큼 마나에 예민한 사람이어야 하네. 아마 소드 익스퍼트나 상당한 실 력의 마법사 정도는 돼야겠지. 그 리고 이 사건에 개입해 정체가 노 출되어 키프로스의 보복을 받아도 버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 걸 세. 그런 사람을 아나?"

아무래도 내가 직접 나서서 폭 탄을 처리할 거라곤 상상도 못 하 는 모양인지, 티나는 내게 이 일 을 처리할 사람을 찾아 달라는 듯 말하고 있었다.

나는 티나의 얘기를 들으며 느 리게 턱을 쓸었다.

'저거...... 딱 나잖아.'

마나에 예민한 소드 마스터에, 키프로스가 보복하더라도 끄덕없 는 사람. 딱 나였다.

'그리고 한 명 더 있군.'

티나가 말하는 조건에 부합하는 이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혼자 찾는 것보단 둘이서 찾는 게 좋겠지.'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 였다. 아무래도 그 사람에게 도움 을 요청해야 할 것 같았다.

"저는...... 소드 마스터 미르에 게 이 일의 처리를 부탁할 예정입

니다. 미르와는...... 개인적으로 깊은 친분이 있어서요.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공녀의 신분으로 나서서 폭탄을 찾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니 당연 히 미르로서 나설 예정이었다.

최대한 태연하게 스스로를 제삼 자처럼 말하고 있자니 티나가 놀 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검은 재앙 미르 말인가? 그대 가 미르와 아는 사이라고?"

"음, 네. 아주 돈독한 사이입니

다."

"미르 정도라면 문제없이 할 수 있겠지만...... 그자는 정체를 드러 내지 않아 수상하지 않나. 정말 믿을 수 있는 위인인 건가?"

내 앞에서 나를 의심하는 티나 의 행동에 묘한 기분이 들었으나,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다. 제국 이 위험에 쳐했다고 하면 미르는 주저 없이 저희를 도울 겁니다."

내가 그럴 터이니, 확실했다.

내 확연한 눈빛과 마주한 티나 는 옅게 숨을 뱉었다. 걱정이 담 겼는지 안도가 담겼는지 모를 복 잡한 숨결이었다.

"우선...... 알겠네. 어차피 난 축 제 내내 꼼짝도 하지 못해. 그대 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 네."

힘없는 그녀의 목소리는 얼핏 무력해 보였다. 다만 나를 믿어 보겠다는 듯, 올곧게 나를 향하는 티나의 눈동자는 분명 강한 신념

을 담고 있었다.

"......폐하. 여쭙고 싶은 것이 있 습니다."

세간에서 듣고 내가 생각하던 악녀 황후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 라서, 나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께선 키프로스의 일 원이십니다. 분명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폐하께서도 무사하 지 못하실 텐데요. 어째서 이 일 을 막으려 하시는 겁니까?"

내 물음을 예상했다는 듯, 티나 가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 만월 의 달빛 아래 초승달처럼 올라간 그녀의 입술이 살짝 떨리고 있었 다.

' 아.'

난 그걸 보고 깨달았다.

티나 키프로스는, 두려워하고 있 었다.

"그래...... 아마 키프로스가 북 부와 손을 잡았다는 것이 알려지

면 나 또한 무척 곤란해지겠지. 무사히 일단락된다고 해도, 이 일 의 내부 고발자가 나라는 것이 들 통나면 키프로스가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고."

조금 흔들리는 목소리로 담담히 이어지는 티나의 말을 들으며 깨 달았다. 그녀는 어느 곳에도 완벽 히 소속되어 있지 못하다는 걸.

키프로스의 뜻과 그녀의 뜻은, 달랐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키프로스

의 만행을 두고 보고 싶진 않네. 테러가 성공하면 수많은 이들이 죽을 거야. 나는 세레논이 황제가 되길 바라지만, 그 왕좌로 가는 길을 누군가의 피로 만들고 싶진 않아."

그녀는 혼들리는 목소리로 혼들 리지 않는 신조를 말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움찔거리는 몸.

티나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으나, 공포에 굴복하진 않았다. 유일하

게 미동 없는 두 눈은 나를 똑바 로 바라보았다.

"나는 두려움과 권력욕 때문에 참극을 외면하지 않을 걸세."

티나 키프로스는, 단순히 악녀로 정의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속사정이 있구나.'

그 순간 나는 느꼈다. 디에고를 몇 번이고 암살하고자 했던 이는 티나가 아니라는 걸.

저런 눈으로, 저런 말을 하는 사 람이 그럴 리 없다. 분명 속사정 이 있을 것 같았다.

"잘 알았습니다, 황후 폐하."

그러나 그건 나중에 알아볼 일 이고, 일단은 테러부터 해결해야 한다.

나는 티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이제 자세히 말해 보게. 용병 미르를 고용할 생각인 건

가?"

"아, 음, 네. 고용...... 비슷한 것이겠지요. 용병 미르 외에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 한 명에게 사 건 처리를 부탁할 예정입니다."

"미르 외에도? 그 자는 누군 가?"

걱정 가득한 티나의 물음에, 나 는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 다. 그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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