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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23화 (123/254)

123 화

"아인하르트 경."

수련장을 하염없이 돈 뒤 바닥 에 주저앉아 말없이 숨을 고르던 중, 나는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 에 앉아 있는 라이너를 불렀다.

은실 같은 머리칼을 타고 떨어 지는 구슬진 땀방울을 묵묵히 닦 아 내던 그가 살짝 시선을 들어 나를 보았다. 짐승의 것처럼 번뜩

이는 황금빛 두 눈이 맹목적으로 나를 담았다.

운동을 한 직후이기 때문일까, 그의 체향인 로즈우드 향이 평소 보다 짙어진 채 공간을 가득 채웠 다.

"부르셨습니까, 미르 님."

낮은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 히듯 다가왔다. 땀이 난다는 거 말곤 완전히 멀쩡해 보이는 겉모 습과 달리 사실 꽤 힘든 건지, 라 이너의 목소리가 무척 가라앉아

있었다.

분명 무뚝뚝하고 금욕적인 인상 임에도 어쩐지 색기가 만연한 느 낌이었다. 나는 잠시 그의 얼굴에 시선이 빼앗겨 있다 뒤늦게 입을 열었다.

"......진지하게 드릴 말씀이 있 습니다.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 다."

내가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으니, 덩달아 진지해진 라이너 가 자세를 바로 했다.

'건국기념일 테러를 함께 막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라이너야.'

그는 소드 익스퍼트 수준의 강 자였고, 느껴지는 바로는 소드 마 스터를 코앞에 둔 상태였다.

게다가 황실 제2 기사단의 기사 단장인 라이너와 제1 기사단의 기사단장인 그의 아버지 노아는 둘 다 축제 때 보안을 위해 일해 야 했기에 아인하르트 가문은 행 차 때 아예 참가하지 않았다.

'축제 때 보안 일로 무척 바쁘긴 하겠지만 라이너가 기사단장 직위 에 고작 경비를 서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정 빠져나와야 한다면 나올 수 있겠지.'

미세한 마나를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마나에 예민하고, 행차 때에 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사 람. 딱 라이너였다.

"건국기념일 축제에 저와 함께 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라이너를 똑바로 바라보며 묻자,

라이너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길 고 섬세한 은회색 속눈썹이 금빛 달을 감추었다 드러내기를 반복했 다.

살짝 입을 벌린 채 멈춰 있던 그가 조금 주저하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건...... 데이트 신청입니까?"

"••••••네?"

상상치도 못한 라이너의 말에 나는 눈을 끔뻑이며 되물었다. 나 를 멍하게 만든 라이너는 되레 자

기가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귓등이 붉은 물감으로 칠 한 듯 붉었다.

"축제에서...... 함께해 달라고 흐}셔서......

' 아.'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같이해 달라고 했으니 그렇게 들릴 법도 했다.

어쩐지 민망해진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을 다

제 말은, 축제에서 일어날 사건

함께 처리해 달라는 뜻입니

아...... 그렇습니까."

라이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이 전보다 가라앉았다는 느낌 이 든 것도 같았으나, 그가 그럴 이유가 없으니 내 착각일 터였다. 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번 건국기념일 축제에서 폭

탄이 터질 겁니다."

라이너의 얼굴이 단박에 굳었다.

묵묵하지만 상냥하고 수줍음 많 은 라이너에서 기사단장 아인하르 트 경이 된 그는 자세히 설명해 달라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도 내부고발자를 통해 전해 들은 내용입니다. 테러의 주동자 들이 누군지는 발설하지 말아 달 라고 했기에 말씀드리기 어려우 나...... 믿을 수 있는 정보입니다. 축제 행차 때, 중앙 광장에서 마

력 폭탄이 터질 겁니다.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기에 축제 날 찾 아야 하는데 저 혼자 찾기엔 버거 울 것 같아 경께 도움을 청하는 겁니다."

내 설명을 듣는 라이너의 표정 이 점점 심각해졌다. 미간을 좁힌 그가 제 턱을 쓸었다.

"미르 님께서 제게 이리 개인적 으로 도움을 청하실 정도라면 은 밀히 해야 하는 일인가 보군요. 아마...... 큰 권력을 쥔 단체의 개 입이 있는 모양입니다."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영민한 라이너는 알아서 주동자에 대해 추리해 나갔다. 나는 침묵으로 긍 정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위력이 대단한 폭탄이 터질 거 라고 합니다. 테러가 성공하면 축 제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 을 겁니다. 절...... 도와주십시 오."

나는 라이너를 간절히 바라보았 다. 나 혼자 막으려고 하다가 만 에 하나 실패라도 하면 나는 죄책

감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미르 님. 이건 미르 님께서 부 탁하실 부분이 아닙니다."

내 눈을 빤히 응시하던 라이너 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놓으며 고 개를 저었다.

"이건 제국의 기사로서 당연히 도와 드려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일 때문에 아인하르 트 경은 복잡한 일에 휘말리거나 보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착잡해하며 말했다.

테러를 막는다 해도, 이후가 문 제다.

라이너는 테러를 막고서도 테러 가 일어날 거란 사실을 알았음에 도 보고하지 않은 점이나 독단적 으로 행동한 점에서 징계를 받을 지도 몰랐다.

키프로스가는 테러에 연관되었 다는 것이 드러나면 파멸을 면할 수 없으니 함부로 움직이진 못하 겠지만, 일에 훼방을 놓은 라이너

에게 알게 모르게 해코지를 할지 도 몰랐다.

'나는 정체불명의 용병 미르로 나설 테니까 키프로스가 건드릴 수 없겠지만...... 라이너는 공식적 인 신분으로 나서는 거니까.'

아무리 테러를 막기 위해서래도, 라이너에게 피해를 끼치는 건 아 닐까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사념에 머리가 아팠다. 내 낯이 어두운 것을 파악한 건지, 라이너가 내 뺨을 살짝 잡은 채

내 얼굴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 다.

그의 크고 거친 손이 가면 위에 닿았다.

가까워진 거리에 눈을 조금 동 그랗게 떴다. 나를 자신과 똑바로 마주하게 한 라이너는 올곧은 눈 으로 나를 응시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십시오. 저 는 미르 님의 부탁이 아니었더라 도 이 일을 알았다면 기꺼이 막기 위해 나섰을 겁니다. 그리고 미르

님의 부탁인 이상...... 그게 무엇 이든, 저는 수행합니다."

분명 낮고 굵은 목소리에 정석 적인 기사의 딱딱한 말투였으나, 내겐 무척 부드럽게 들렸다. 흔들 림이 없는 황금빛 두 눈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느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정도 를 걷는 이가 바로 라이너 아인하 르트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럼, 함께해 주십시오."

나는 부탁하거나 주저하는 기색 을 지우고, 당당하게 그에게 말했 다. 라이너는 그제야 만족스럽다 는 듯 웃었다.

"원하시는 대로."

"그래...... 그래서 어디가 아프 다고?"

팔짱을 낀 채 한숨을 푹 내쉰 카이사르가 5살 먹은 애를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았 다.

누가 가족 아니랄까 봐, 의자를 돌려 앉은 채 나를 지그시 바라보 는 칼이나, 침대 맡에 앉아 내 앞 머리를 쓸어내리는 아리아의 눈빛 도 카이사르와 똑같았다.

"크흠. 콜록. 쿨럭• 컥• 큼. 어지 럽고, 목이 따갑고, 배도 좀 아프 고...... 허파랑 콩팥이 욱신거리는 것도 같습니다. 심장도 빨리 뜁니 다. 허리가 아픈 것을 보아 신장 도 쇠약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콜록."

그리고 세 사람의 지긋한 시선 을 받아내고 있는 나는, 침대에 최대한 힘없이 누워 이마에 물수 건까지 올린 채 생전 처음 꾀병을 부리고 있었다.

'젠장. 전혀 믿는 표정들이 아닌 데.'

'널 사랑하니까 장단 맞춰 주고 있긴 한데, 너 지금 헛소리하고 있다.'라는 뜻을 가감 없이 드러 내고 있는 세 사람을 게슴츠레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등 뒤로 식은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건국기념일이 하루 남은 지금, 나는 테러를 막기 위해 어떻게 해 서든 행차에서 빠져야 했다.

마음 같아선 가볍게 팔이라도 하나 스스로 부러트려 간단하게 빠지고 싶었지만 팔을 부러트리면 가족들이 팔이 부러진 경위를 치 밀하게 따져 물을 게 뻔했기에 그 럴 수가 없었다.

'남는 방법은 꾀병밖에 없는

데...... 하......•'

내 아버지는 자연의 흐름을 읽 는 소드 마스터. 오빠는 특출난 마법사에, 여동생은 치유력을 사 용해 대상의 상태를 예민하게 읽 을 수 있는 요정 혼혈이다.

속여 넘겨야 하는 이들이 만만 치 않을뿐더러,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빌어먹을 만큼 거짓말을 못했다.

"허어...... 그 정도면 곧 죽을

지경이 아닌가 싶은데...... 그런 것치곤 우리 따님 안색이 너무 좋 군."

"큼! 자식 된 도리로 어찌 어버 이께 병색을 보여 드리겠습니까. 제 효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아 최대한 온전한 낯을 보이려 노 력 "

큭.

팔짱 낀 손으로 자기 팔을 툭툭 건드리며 의심스럽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리는 카이사르에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하던 나는, 소리가 터

져 나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미안하다. 계속해라."

소리의 범인은 칼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무척 애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속눈썹을 파르르 떤 칼이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이 인간이 진짜......

그리고 그 손 아래 입이 웃고 있음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과

자괴감으로 정말 열이 나는 것처 럼 붉어졌을 얼굴을 문지르며 입 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서...... 내일 있을 건국기 념일 행차는 참가하지 못할 것 같 습니다."

"음. 그런가."

카이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딴엔 장단에 맞춰 준다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래 봤자 눈빛에서 웃음기가 훤히 보였다.

"행차는 둘째치고...... 따님께서 아프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 나. 당장 신전에 연락해서 신성력 으로 치유해 달라고......

"자, 잠깐!"

지금 당장 신전에 연락하려는 듯 방을 나서려는 카이사르의 손 을 턱 잡았다. 카이사르가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 다.

"왜 그러나. 새파랗게 어린 교황 이나 그 천둥벌거숭이 대신관은 네가 아프다고만 하면 날아올 것

같은데. 아무래도 확실하게 치유 하려면 교황을 부르는 게 낫겠 지?"

카이사르가 유려하게 웃었다. 나 를 놀리는 걸 즐기고 있는 게 분 명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애초에 멀쩡하기 짝이 없는데 신성력이 필요할 리가 없잖아

엘이 와서 나를 진찰하고 내가

멀쩡하다고 선언하면 교황 공인 꾀병 공녀가 되는 거다.

엘이라면 내게 사정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정말 아프다고 해 줄 지도 모르지만, 그 지경까지 가면 나는 엘을 볼 낯이 없었다.

"손가락 까닥하기 힘들 정도로 아프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틀 정 도만 쉬면 나을 것 같습니다. 괜 히 바쁜 분을 부를 필요는 없겠 죠."

나는 카이사르를 향해 이를 악

물고 웃으며 말했다. 더는 참기 힘들다는 듯 카이사르의 입꼬리가 크게 요동쳤다.

"진짜...... 어이없고 귀엽다."

아리아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 럽혔다. 내 머리맡에 앉아 소리를 죽이고 웃던 아리아가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아리아는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 A A "

I r rr-

"......네, 아버지."

제대로 꾀병을 부리는 것도 아 니고 그렇다고 꾀병 부리길 포기 하는 것도 아닌 채 눈치만 보고 있는 나를, 카이사르가 따뜻한 목 소리로 불렀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하지 못했 다.

"너는 이곳에 온 뒤로 딱 두 번 내게 무언가를 요구했지."

천천히 내게로 다가온 카이사르 가 내가 누워 있는 침대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온 화한 붉은 눈이 나를 온전히 담아 냈다.

"첫 번째는 아리아를 살려 달라 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하네스 사업에 투자해 달라는 것이었다. 기억하느냐?"

"......네."

"딱 그 두 번이었다. 네가 직접 적으로 요구한 것이. 그 두 번조 차 너를 위한 것이 아니었지."

늘 강직하고 차갑던 카이사르의 붉은 두 눈 위로 슬픔을 닮은 일

렁거림이 일어났다.

이전의 그에게선 볼 수 없었다 는 감정• 나와 아리아가 이곳에 온 뒤로 카이사르가 배운 감정이 었다.

"너는 단 한 번도 너 자신을 위 한 것을 내게 요구한 적이 없다."

'......그랬던가.'

억지로 침을 삼켜 마른 목을 축 였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린 카이사르 가 크고 예쁜 손으로 내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손길에서 애처 로움이 묻어나는 듯했다.

"이렇게까지 해야만 행차에 불 참할 수 있을 것 같더냐. 그냥 말 로 요구하면...... 내가 듣지 않고 참여하기 싫다는 널 억지로 참여 하게 할 것 같았나."

"......저는......

"쉿. 목도 따가운 애가 괜한 말 하지 마라."

내 어색한 꾀병 멘트를 다 기억 하고 있는 건지 무어라 말하려는 내 입술 앞에 검지를 댄 카이사르 가 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민망하면서도, 부드러운 카 이사르의 태도에 가슴이 뭉클해졌 다.

"이유도...... 묻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갑작스럽게 참가하지 않 겠다는데도 그는 그저 작게 웃었 다.

"어련히 이유가 있겠지. 네가 공

연히 이러는 아이는 아니라는 걸 안다."

카이사르의 목소리엔 나를 향한 믿음이 가득했다. 나는 조금 울컥 한 나머지 얼굴을 찌푸렸다.

카이사르가 상냥한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음부턴 번거롭게 이러지 말 고 말로 해라. 이유를 말하지 못 해도 괜찮으니, 당당히 요구해라. 네가 아무 이유 없이 세상을 달라 해도 군말하지 않고 세상을 네 손

에 쥐여 주마."

달콤한 목소리에 질끈 눈을 감 았다. 치사량의 다정이었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카이사 르는, 내 방문을 열고 나가 방문 앞에 있던 테일러에게 확연한 목 소리로 말했다.

"카슈미르 크리시스는 병환을 이유로 이번 건국기념일 행차 때 참가하지 않는다. 황실에 전달하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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