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화
"그럼 푹 쉬도록 하세요, 아가 씨."
탁
짧은 한마디와 함께 마리아가 방에서 나가며 문을 닫았다.
금방이라도 잠에 들 듯 눈을 꾹 감고 있던 나는, 마리아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살며시 눈을
떴다. 시계 바늘이 12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하고 빠르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가족들은 11시쯤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저택에 남은 것은 사용인들뿐이고, 마리아를 통해 내가 먼저 부르기 전까진 내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말을 전해 놓았다.
'1시쯤에 테러리스트들이 행동을 시작할 거라고 했으니...... 빨리 가야겠군.'
재빨리 몸을 일으켜 침대 아래 에 있던 상자를 꺼냈다. 입고 있 던 옷을 벗어던지고 미르의 복장 으로 갈아입는 건 순식간이었다.
'음성 변조 반지. 통신 마도구. 투명화 마도구. 연막탄. 단도 6 개.'
건국기념일을 기다리는 동안 철 저히 준비한 상자 속 물건들을 차 근차근 확인했다.
티나에게 전해 받은 귀걸이 모 양 통신 마도구를 귀에 꽂고, 목
걸이 형태를 한 투명화 마도구를 착용했다. 연막탄과 단도는 아공 간 주머니에 넣었다.
준비를 마친 나는 잠시 창밖을 응시했다.
수도의 거리는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부모의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 물건을 많이 팔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신나 보이는 노점상인들. '평화'라는 주제를 두고 그린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나는 이 순간이 비극으로 바뀌 는 꼴을 볼 수 없었다.
길게 한숨을 뱉고, 목걸이에 걸 린 펜던트를 꾹 눌렀다. 내 몸이 순식간에 투명해졌다.
나는 창문을 열어젖히고,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오늘은 대망의 건국기념일이었 다.
'이쯤이라고 했는데.'
나는 인파에 자연스럽게 섞여든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투명 인 간 상태로 기척을 죽이고 저택을 빠져나온 나는, 북적거리는 수도 의 거리에서 라이너를 찾아 헤매 고 있었다.
'젠장. 이곳에서 사람 한 명도 못 찾는데 폭탄을 찾을 수 있으려 나.'
중앙 광장엔 사람들이 넘쳐났고,
그만큼 수많은 기운들이 섞여 있 었다.
'아무리 흑마법의 기운이 독특하 다고 해도...... 그걸 읽어낼 수 있 을지.'
몰려든 상념에 살짝 입술을 깨 물었다.
티나의 말로, 폭탄은 흑마법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흑마법과 마 법은 워낙 궤도가 달라 보통 위험 마도구 탐지 기계론 탐지할 수 없 기에 테러리스트들은 흑마법 마력
폭탄을 주로 사용했다.
흑마법 탐지 기계 같은 건 존재 하지 않는다. 나는 이 광활하고 복잡한 광장에서 오직 직감만을 도구로 삼아 폭탄을 찾아야 했다.
'......할 수 있겠지.'
하겠다고 했고, 해야만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오늘이 오니 나 는 자꾸 작아졌다. 메시아 콤플렉 스 같은 걸 느끼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누군가를 구해야 하는 책 임감 막중한 상황들이 다가오니
마음은 무거워져만 갔다.
'조금 지쳤나.'
결단의 순간 앞에서 새삼스럽게 마음이 흔들렸다.
때때로 무지가 더 현명하고, 무 력이 더 안전하다.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남들이 가지지 못한 힘을 가진다는 건 삶이 고달파진 다는 것을 뜻했다.
'젠장. 나약하게.'
난 빠르게 고개를 휘저어 생각 을 지워 냈다. 그런 건 테러를 막 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 다.
'그런데...... 라이너는 진짜 어디 있지.'
생각에 빠진 채 인파에 휩쓸리 는 대로 걷던 나는 시간이 다가오 는 것을 확인하고 다급하게 라이 너를 찾았다.
수도 지리에 익숙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길을 잃었을
것 같았다.
"미르 님. 여기입니다."
그리고 헤매는 날 부드럽게 잡 아끄는 손길이 있었다.
" 아."
지나가는 사람 무리에 밀리며 저절로 손길의 주인과의 거리가 좁혀졌다. 익숙한 로즈우드 향이 물씬 풍겼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에 그
림자를 드리울 정도로 키 큰 인영 과 마주했다.
공식적인 행사이기 때문일까, 그 는 화려한 황실기사단 정식 제복 을 입고 있었다. 하얀 천에 금실 로 장식된 제복은 태양 아래서 찬 연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모든 것보다 빛나는, 곱게 휜 황금빛 눈동자.
"찾았는데 여기 계셨군요. 무사 히 만나 다행입니다."
손길의 주인은 예상대로 라이너 였다.
"아인하르트 경. 광장이 워낙 붐 벼서...... 찾는 것이 늦었습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뇨. 저도 사정을 둘러대고 빠 져나오는데 시간이 좀 걸렸기에. 염려하실 거 없습니다."
살짝 시선을 피한 채 변명하듯 말하니 라이너가 살짝 웃으며 답 했다. 어쩐지 평소보다 기분이 좋 아 보이는 그의 모습에 덩달아 마 음이 부드러워진 나 또한 가볍게
웃었다.
"이전에 드린 것으로 흑마법 기 운은 익숙해지셨습니까?"
아직 테러리스트들이 본격적으 로 움직이기 전이었기에, 나는 라 이너와 거리를 걸으며 그에게 물 었다.
'라이너는 흑마법과 마주해 본 것이 바실리스크와 상대할 때뿐이 었을 테니까.'
이 넓은 광장에서 감만으로 흑
마법을 추격하기 위해서는 흑마법 의 기운에 익숙해져야 했다. 나는 급한 대로 그에게 바실리스크의 심장을 담았던 주머니를 넘겨주며 기운에 익숙해지라고 한 참이었 다.
바실리스크의 심장에서 퍼져 나 오는 흑마법의 기운이 얼마나 강 했는지, 그걸 담았던 주머니에도 흑마법의 기운이 가득했다.
"네. 적어도 100m 앞에 흑마법 의 기운을 가진 것이 있다면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이너는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꽤 자신이 넘치는 것을 보니 흑마법 기운을 읽는 연습을 필사적으로 한 모양이었다.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경께 선 어떻게 업무 중에 빠져나오신 겁니까?"
라이너를 짧게 칭찬한 나는, 시 간이 남은 김에 그에게 궁금했던 걸 물었다. 내가 함께해 달라고 하긴 했지만 사실 기사단장인 그 가 정말 축제 보안을 도맡는 중에
빠져나올 수 있는지는 확신이 없 었던 차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빠져나오겠 다고 하는 라이너를 보며 조금 걱 정을 하기도 했는데, 그 말대로 이렇게 빠져나온 그를 보니 뭐라 고 둘러대고 나온 것인지 궁금했 다.
"아......
내 질문에 라이너가 나직하게 숨을 뱉었다. 황금빛 테두리가 품 은 검은 동공이 잠시 혼들리는가
싶다가 슬쩍 내 눈을 피했다. 라 이너의 표정은 여느 때처럼 붙박 이 같은 무표정 그대로였으나, 내 눈엔 그가 민망해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웬만한 말로는 나오기가 어려 울 것 같아...... 거짓말을 보태서 말하고 나왔습니다."
무언가 큰 것을 터트리기 전 밑 밥을 까는 것처럼 말하는 라이너 의 모습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는 무척 머뭇거리고 있었다.
'뭐...... 부모님이 아프다고 하고 나왔나? 아니면 철천지원수가 이 번 축제에 참가해서 암살하러 간 다고 했다든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머뭇거리는 라이너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니, 입술만 달싹이던 그가 손으로 제 입가를 가린 채 살짝 고개를 돌렸다. 긴 속눈썹이 그의 눈 위 에 그늘을 만들었다.
"교제하고 있는 여성과...... 잠 시 만나러 간다고......
낮은 음성이 작은 목소리로 속 삭였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나 는, 그의 말을 이해하고 낯이 조 금 화끈해졌다.
"그......렇게 말하니 보내줬습니 까?"
"......네. 다들 제 연애에 관심이 많더군요. 제 일은 자기들이 알아 서 처리하겠다면서 보내줬습니 다."
"아...... 평소 인덕을 많이 쌓으 신 모양입니다."
나는 어색하게 묻고, 그는 머쓱
하게 대답했다. 왜인지 이 사건에 대해 처음 말할 때 데이트 신청이 냐고 묻던 라이너가 떠올라서, 나 는 조금 더 민망해졌다.
내 걸음이 조금 느려지자 나와 같은 보폭으로 걷던 라이너의 걸 음이 마찬가지로 느릿해졌다.
"미르 님."
얼마나 말없이 걸었을까, 라이너 가 느지막이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했다.
"건국기념일 축제는 아름답지 않습니까."
나는 동의를 표하는 뜻으로 고 개를 끄덕였다.
태어나서부터 수도에 살았는데 건국기념일 축제가 아름답다는 것 을 모를 수는 없었다. 늘 먹고 살 기에 바빠 본격적으로 즐겨 본 적 은 없으나, 그래도 축제가 벌어지 면 아리아와 함께 짧게라도 구경 나오곤 했다.
'하지만...... 이번 축제는 즐기지
못하겠네.'
입 안이 약을 가득 머금은 듯 씁쓰름했다.
축제는 건국기념일 이후 일주일 동안 이어졌지만, 축제의 첫날인 오늘은 테러를 막느라 정신이 없 을 거고 그 이후는 테러 사건의 여파로 축제 자체가 황급히 막을 내릴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 테러 사건으로 축제가 더 이어지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수도 호수에 등불은 띄우지 않을
까 싶어서 말입니다."
건국기념일 축제 마지막 날 잠 엔 수도 중심 부근에 있는 호수에 등불을 띄운다.
그 호수는 용이 잠들어 있는데, 언젠가 다가올 건국기념일 축제 마지막 날에 깨어나 날아오를 거 라는 전설이 있어서 용의 가는 길 이 어둡지 않도록 불을 밝히는 것 이었다.
'아무리 테러 사건 때문에 뒤집 어져도 그 정도는 하겠지.'
수도 호수에 등불을 띄우는 것 은 워낙 유서 깊게 이어져 온 전 통이기에, 축제는 폐쇄되더라도 그 정도는 할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이 테러를 성공적으로 막 는다면...... 저와 함께 축제 마지 막 날 호수를 보러 가 주시지 않 겠습니까."
라이너의 얼굴에 정말 흔치 않 은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부드럽게 휜 눈꼬리와 완벽한
호선을 그으며 말려 올라간 입꼬 리. 정오의 태양보다 더 찬연한 그의 웃음은 지독하게 아름다웠 다. 나는 그의 웃음을 잠시 멍하 니 바라보았다.
'저 얼굴에 어떻게 거절을 뱉 어.'
적어도 나는 못 한다. 나는 라이 너의 웃음이 실망으로 사그라들기 를 원치 않았다.
나는 그의 웃음이 좋았다.
"경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요."
웃음은 전염된다고 하던가. 나는 잠시 테러에 대한 걱정과 상념들 을 잇고, 라이너를 향해 마주 웃 었다. 나를 보는 황금빛 두 눈이 살짝 풀렸다. 그의 지긋한 시선은 깃털같이 내 얼굴을 간지럽혔다.
"미르 님은......
지이잉-
라이너가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열 때, 귀에 착용한 통신용 마도 구가 옅게 떨렸다. 그 진동을 느 낀 나와 라이너 모두 차갑게 굳었 다.
'황후의 연락이다.'
이 마도구를 넘겨준 것이 바로 티나다.
연락이 왔다는 건, 테러가 시작 하려 하고 있음을 뜻했다.
"......잠시 연락 좀 받겠습니다."
라이너에게 양해를 구하고 귀걸 이를 한 번 건드렸다. 잠시 마법 의 기운이 귓가로 퍼짐과 함께, 기이하게 변조된 목소리가 들려왔 다.
[미르. 카슈미르 공녀에게 소개 받았는데. 맞나.]
"맞습니다, 각하. 무슨 일이십니 까."
나는 마찬가지로 변조된 목소리 로 정중히 답했다.
티나는 현재 현장에 있는 사람
이 미르라고 알고 있다. 나는 티 나에게 내부 고발자의 정체를 누 구에게도 알리지 않는다고 했으 니, 미르로서 티나가 누구인지 모 르는 척을 해야 했다.
귀걸이 너머로 티나의 깊은 한 숨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급하게 전해 들은 말이 있 네.]
티나의 목소리는 불안으로 떨리 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 일 어나고 있음을 눈치챈 나는 곧바
로 귀를 기울였다.
[오늘 설치될 마력 폭탄이 두 개 라고 하네.]
나는 단번에 얼굴을 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