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화
라이너와 나 사이에 시선이 오 갔다.
언제부터였을까. 라이너와 나는 눈빛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서로 를 읽을 수 있었다. 새삼스레 내 가 라이너와 심리적으로 무척 가 깝구나 싶었다.
"저는 늘 당신의 명령을 따릅니 다. 말씀하십시오."
내 손을 강하게 맞잡은 라이너 가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했 다. 황금빛 두 눈에 온전히 내가 담겼다.
그러고 보면 나는 위기의 순간 에 라이너의 눈빛에서 안정을 얻 곤 했다.
라이너는 사시사철 꺾이지 않는 대나무처럼 곧은 심지를 품고 있 어서, 그와 함께하는 것이라면 무 엇이든 옳은 일인 것 같았다.
'좌로든 우로든 치우치지 않을 가장 정확한 나침반.'
라이너의 눈은 오직 정의와 정 도만을 담는다. 그는 내게 있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동료이자 지 침서 였다.
나는 라이너의 시선에 소란한 마음이 천천히 진정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폭탄. 폭탄이 터지는 시간 이...... 20분 앞당겨졌습니다."
"......그렇군요."
얼핏 굳으려던 라이너는 날 한 번 보더니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 였다. 그 또한 놀랐을 게 분명하 나, 내가 흔들리고 있음을 알고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은 것 같았 다.
"그리고, 두 번째 폭탄이 설치된 장소를 확인했습니다. 황제 폐하 와 황태자 저하가 타고 있는 마차 안. 20분 뒤입니다."
라이너가 눈을 크게 떴다. 얼핏 믿을 수 없는 기색이 스치는 것
이, 그 또한 테러리스트들이 이런 짓까지 벌일 줄은 상상치 못했다 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런 라이너와 똑바로 마 주했다.
"저희 둘이 함께 다녀서는 폭탄 두 개를 전부 처리할 수 없습니 다. 제가 광장의 폭탄을 맡을 테 니, 아인하르트 경께서 마차의 폭 탄을 맡아 주십시오."
마차는 범위가 좁고 위치도 확 실히 정해져 있으니 가서 제거하
기 쉬울 거다. 나는 라이너에게 비교적 쉬운 마차 쪽의 폭탄을 맡 기고, 내가 광장의 폭탄을 맡을 예정이었다.
'소드 마스터인 내가 감이 더 좋 을뿐더러...... 만에 하나라도, 라 이너에게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 는 죄악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 아.'
사실 고작 30분 동안 나 혼자 광장의 폭탄을 찾을 수 있을지 확 신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광장 을 포기할 수도, 마차는 포기하고
라이너와 함께 광장의 폭탄을 찾 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각개 격파 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최선의 선택이 맞을까.'
선택을 하고도 쉬이 확신을 할 수가 없다. 이런 스스로가 답답했 지만,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달린 사안이니 만큼 신중할 수밖에 없 었다.
라이너의 손을 꽉 잡은 채 가라 고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 을까.
툭.
내 손에 단단히 깍지를 낀 라이 너가 상체를 굽혀 나와 이마를 맞 대었다.
이마를 통해 흩뿌려지듯 퍼져 오는 온기에 옅은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천천히 정박을 찾다가, 조금 다른 의미로 속도를 더하기 시작했다. 왠지 모 르게 울컥한 채 라이너를 올려다
보니 그가 산홋빛 입술을 느지막 이 열었다.
"당신이 안전한 선택만을 하길 바랐는데...... 결국 이렇게 또 최 선의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와 서 비참합니다. 내가 당신이 관여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하면 좋을 텐데."
목소리는 낮고 감미로웠으나, 어 쩐지 속이 들끓고 있는 것 같았 다. 내가 질끈 눈을 감으니 라이 너가 말을 이었다.
"이게 최선이 맞습니다. 당신의 선택은 언제나 옳아요. 그러니 주 저하지 말고 가십시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온 건 지, 라이너는 내가 필요했던 말들 을 확실하게 속삭여 주었다.
연인들의 밀어 같은 달콤함도 없고 아부 같은 부드러움도 없는, 그저 한없이 곧고 단호한 말투.
그것이 진정으로 내게 일어날 힘을 주었다.
"......감사합니다, 라이너. 저는 반드시, 성공할 테니......
난 맞닿은 이마를 살짝 떼어 내 고 발뒤꿈치를 들었다. 이미 라이 너가 상체를 숙이고 있는 덕에 단 번에 시야가 그의 은회색 앞머리 가 살랑거리는 곳에 닿았다.
나는 앞머리에 가려진 라이너의 이마 위로 짧게 입술을 내렸다. 그 순간 라이너의 기운이 크게 흔 들렸다.
"라이너도 반드시 성공해서 멀 쩡한 모습으로 돌아오세요. 함께 호수를 보러 가기로 하지 않았습 니까."
뒤꿈치를 내려 다시 라이너를 올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가장 나 답게,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낯으 로.
나를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라이 너의 꿀 같은 두 눈동자가 그 위 에 물이 풀린 듯 몽롱해졌다.
화사하게 개화하는 장미 꽃봉오
리의 색채를 흡수한 듯 삽시간에 달아오르는 그의 양 뺨. 늘 무심 하게 가라앉아 있던 라이너의 두 눈이 장작을 만난 불꽃처럼 거세 게 타올랐다.
어쩐지 그의 시선이 닿는 피부 위로 불똥이 튀는 듯 뜨거워지는 느낌이라, 나는 조금 움찔했다.
라이너의 악력이 강해졌다. 아프 진 않았으나, 내 손과 자신의 손 을 하나로 밀착시키려는 듯 꾹 덮 쳐 오는 열기는 기체로 퍼져 나와 그와 나 사이의 뜨거운 기류가 되
는 것 같았다.
나를 뜨겁게 바라보던 라이너가 입술을 움직였다.
"••••••미르. 카슈••••••
뎅 _
행차의 기대감을 더하기 위해 시작하기 한 시간 전부터 시작할 때까지 10분 간격으로 울리는 종 소리였다.
"......하."
허탈하게 웃으며 종을 노려본 라이너는 짙은 한숨을 쉬며 물러 났다.
"일이 다 끝난 뒤 얘기를 나누 도록 합시다. 빨리 움직여야겠군 요."
나는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 덕였다. 다만 내 머릿속은 조금 복잡해진 상태였다.
'분명, 내 이름을 부르려고 했 지.'
라이너는 여태껏 용병 미르가 카슈미르라는 사실을 마주하지 않 으려 했다.
그가 원치 않으니 나도 암묵적 인 규칙이라도 되는 양 직접 언급 하지 않고 기다릴 뿐이었다. 라이 너가 마주하고 싶어 할 때까지.
그리고 조금 전, 라이너는 분명 내 이름 '카슈미르'를 부르려고 한 것 같았다.
'일이 다 끝나면 정식으로 마주
해 주려나.'
짧은 한숨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라이너와 눈으로 인사했다. 오가 는 눈빛만으로도 그가 내게 여러 말을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 다.
"그럼,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다 시 봅시다."
나는 깍지 낀 손에 힘을 풀었고, 라이너 또한 힘을 풀었다.
손가락 틈새 사이를 간지럽히며
사르르 빠져나가는 크고 거친 손. 그 손이 손끝에서 희미하게 걸렸 다가 훅 떨어질 때.
나와 라이너는 서로에게 등을 돌린 채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추격한다.'
머릿속에서 몽실 떠 있던 구름 들을 모두 걷어 내고 또다시 감각 에만 집중한다. 다행히 한 차례 실마리를 잡았던 상황이라, 다시 방향을 잡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
았다.
온 집중을 허공에 표류하는 그 불쾌한 기운에 쏟으며 마나를 불 어넣지 않고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렸다.
'마나를 불어넣고 달리면 빠르겠 지만...... 그렇게 빨리 달리다간 쉽게 눈에 띌 테니까. 상대 쪽이 어디까지 눈치챈 건지는 모르니 조심할 필요도 있고.'
그냥 달리는 것도 눈에 띌 가능 성이 있긴 하지만 마나까지 넣는
것보다는 덜할 것이다. 이전까진 혹여 조금이라도 의심을 받을까 봐 뛰지도 못하고 빠른 걸음으로 만 움직였으나, 상황이 극에 다다 른 지금은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 해야 했다.
내가 기운이 이어지는 곳으로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아아- 안녕하십니까, 수도의 제 국민 여러분들! 다들 축제를 즐기 고 계신가요?]
광장의 중심에서 터져 나온, 마
법으로 증폭된 목소리에 나는 한 순간에 집중을 잃었다.
'빌어먹을!'
난 이를 악물었다. 감에 극도로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서 안 그래 도 증폭되어 큰 목소리는 내게 우 레처럼 느껴지는 데다, 마법으로 증폭한 탓에 마법의 기운이 주위 로 짙게 깔려 흑마법의 기운을 흐 트러 트렸다.
'이 이벤트를 잊고 있었다니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다.
건국기념일 행차 직전 중앙 광 장에서는, 마법사들을 대동한 이 벤트가 벌어졌다. 행차를 기다리 는 사람들이 지루하지 않게 하려 는 좋은 이벤트였으나, 지금의 내 게는 그것이 단두대 파티처럼만 느껴졌다.
나는 온 우주가 나를 방해하는 것만 같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며, 해변에서 손가락 새로 빠져 나가는 모래알을 쥐려고 노력하듯 다시 집중을 끌어 모았다.
[아아, 다들 행차를 기다리고 계 시다고요? 저도 그렇습니다! 행차 야말로 건국기념일 축제의 하이라 이트라고 할 수 있죠! 모두가! 아! 기다리고! 기다.......]
'젠장! 제발 닥쳐!'
애써 이어 가려는 집중을 방정 맞은 목소리로 산산조각 내 버리 는 무대 위 사회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순간 조절하지 못하 고 살짝 흘려 버린 내 살기를 느 낀 건지 흠칫 말을 멈춘 사회자는 금방 헤실거리며 사회를 이어 갔 다.
사회자는 생쥐 같은 수염을 기 른 야비한 인상의 남자였는데, 나 는 진심으로 그가 든 소리 증폭기 를 64조각 내 제국 뒷산에 닿을 만큼 힘껏 던져 버리고 그의 수염 을 쥐어뜯어 생쥐 밥으로 주고 싶 었다.
'후...... 진정하자. 저 사람은 그
냥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나는 방해가 있어도 할 수 있어.'
온몸을 지배하는 살심을 억눌러 잠재우고 마인드컨트롤을 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말을 몇 번이 고 되새기며 다시 집중해 보려 할 때였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실까 봐 작은 볼거리를 준비했습니다! 마 법사들, 나와 주세요!]
아무래도, 세상은 날 버린 것 같 았다.
사회자가 눈을 찡긋거리며 손짓 하자, 중앙 광장 동서남북 꼭짓점 부근에 위치한 네 개의 무대에 화 려한 로브를 입은 이들이 속속히 올라왔다.
[지루하신 분들을 위해! 신기한 마법들을 준비했습니다!]
'아, 제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안 그래 도 기운을 읽기 힘든데 여기에 새 로운 마법의 기운까지 더해지는
건 일을 몇 배로 힘들게 만드는 짓이었다.
'저 새끼들 역적 무리 아니야?'
나는 저들이 나를 방해하기 위 해 고용된 것이라고 해도 진심으 로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그럼! 이제부터 쇼 타임!]
사회자의 유쾌한 목소리와 함께, 사방의 무대에서 화려한 마법이 펼쳐졌다.
꽤 열심히 준비한 건지, 다채로 운 불꽃들이 하늘로 쏘아졌다. 마 법사들은 율동 같은 춤을 추며 열 심히 마법을 발동해 아이들이 웃 게 했다.
얼핏 보아도 마력 소모가 큰 마 법들인지라 그들의 이마에는 땀방 울이 맺혔지만 그들은 그런 와중 에도 뿌듯하게 웃고 있었다.
터져 나오는 환호성과 여기저기 서 들리는 따사로운 웃음소리. 행 복이란 달콤한 쇼콜라를 섞은 듯 황홀한 분위기.
그 덕분에, 이곳에서 흑마법의 기운을 찾는 것은 사막에서 좁쌀 을 찾는 난이도가 되어 버렸다.
'오...... 저 불꽃에 대가리 박고 다 같이 뒤지고 싶은 건가?'
이 상황에서 이성을 잡는 것은 나로서도 불가능했다. 나는 거의 이성을 잃은 채, 검 손잡이 위로 손을 올렸다.
"야, 이, 개......!"
턱
검을 반쯤 뽑았던 내 손이 멈춘 것은 내 어깨에 닿은 손 때문이었 다. 잠시 이 상황에 완전히 정신 이 쏠려 다가오는 인기척조차 느 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퍼뜩 이성을 찾고 내 어깨 에 닿은 손길의 주인에게 집중했 다.
그리고, 코끝을 찌르는 겨울의 향기.
분명 봄인데, 이 주위로만 겨울 이 만연하다. 봄이 아니라 여름이 거나 가을일 때에도 그와 가까워 지기만 하면 겨울이 성큼 다가와 폐부를 찌르곤 했다.
나는 표정을 완전히 굳힌 채, 뽑 다 만 검을 범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속도로 완전히 뽑으며 몸을 돌렸다.
스르릉"
이곳이 조금 외진 골목 쪽이라 다행이다. 사람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보여 봐야 좋은 꼴이 나진 않을 테니.
나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린 그를 걷어차 벽으로 밀어붙이고, 한없 이 시리게 웃었다.
녹지 않는 심장 위에 북부 설원 의 눈송이를 피부로 덧붙인 뒤 칠 흑 한 줌에서 뽑아 낸 실로 머리 칼을 더하고, 반짝이는 자수정 두 개를 박아 놓은 생기 없는 조각.
"넌 또 뭐야, 개새끼야.
지그문트. 지그문트 하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