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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27화 (127/254)

127 화

'젠장! 이 자식은 또 어디서 온 거지? 왜 온 거야? 날 방해하려 는 건가? 폭탄과 연관이 있나?'

머릿속이 혼란과 의심으로 뒤섞 였다. 시간은 촉박한데, 눈앞의 지그문트는 그냥 픽 밀어서 떨치 고 갈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지그문트는 제 목에 들이밀어진 검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나를 바

라보기만 했다. 나는 여전히 그의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은 싸울 생각 없어."

칼을 품은 듯한 눈빛으로 서로 를 노려보는 대치가 잠시간 이어 지는가 싶다, 지그문트가 두 손을 들었다. 완벽한 항복의 표현에 나 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슨 생각이지?'

갑작스레 나타나 뜬금없이 항복 이라니.

지그문트와 나 사이엔 싸움 말 고 할 것이 없었기에, 순순히 항 복하는 그의 목적이 뭔지 도통 추 측할 수가 없었다.

"그럼 나는 왜 잡은 건지 모르 겠군. 굳이 이 축제일에 몹쓸 얼 굴 들이밀어 내 기분을 망치고 싶 었던 건가."

'뭐, 무슨 이유든 상관없겠지.'

쯧, 혀를 찬 나는 지그문트에게 서 검을 거두고 휙 몸을 돌렸다.

지그문트가 설령 천기누설을 하려 고 나를 잡았다고 해도 듣고 싶지 않았다.

다시 폭탄을 찾으려 발걸음을 옮길 때, 내 손목을 사뿐히 잡아 챈 지그문트가 날 다시 제 쪽으로 돌렸다. 재빠른 손놀림이라 피할 새가 없었다.

'이 새끼 뭐지?'

눈을 부릅뜬 나는 이놈이고 저 놈이고 다 나를 고혈압으로 몸져 눕게 만들기 위해 파견된 비밀 요

원이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은 걸 참고 놓으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너, 폭탄을 찾고 있지."

숨결처럼 속삭여 오는 낮은 목 소리에 나는 숨을 멈추었다.

축제 한가운데의 광장은 분명 봄인데, 그와 내가 서 있는 이 골 목길만 겨울의 문턱에 선 것 같았 다. 그 한기로 뒷덜미가 오싹해지 며 몸이 얼어붙었다.

나는 뒤늦게 숨을 들이쉬었다.

'폭탄에 대해 어떻게 안 거지? 테러리스트 일당과 한패인가? 나 를 방해하러 온 건가? 그럼 오늘 은 싸우지 않는다는 소리는 왜 한 거지? 내가 폭탄을 찾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고?'

두뇌 회로가 금방이라도 과부하 가 걸릴 듯 아찔한 속도로 돌았 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서로를 잡아먹었다.

'설마 떠 보는 건가?'

문득 든 생각에 난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성의 끈을 으스러져라 잡은 나는 아주 잠시간 이어진 동요를 깨끗이 지워 내고 아무것도 모르 겠다는 태도로 얼굴을 찡그렸다.

"폭탄?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 데."

"모르는 척할 필요 없어. 이미 다 알고 왔다."

'••••••젠장.'

지그문트의 두 눈엔 확신이 가 득했다. 나는 일이 상당히 잘못됐 음을 느끼며 공격 태세를 갖추려 했다.

내 손목을 잡고 있던 큰 손이 나를 부드럽게 끌었다. 하는 짓은 망나니인 데다 입은 시궁창인 주 제에 손길은 또 조심스러웠다.

몸이 지그문트에게로 기울어지 며 가까워진 그의 목덜미에서 겨 울의 향취가 진하게 났다. 밀회를 나누기 전 연인 같은 상황이 되어

버려 반자동적으로 그를 걷어차려 할 때.

"난 네 편이야, 슈슈."

누가 들으면 안 된다는 듯, 은밀 하게 내 귓전에서 속삭이는 목소 리에 행동을 멈췄다.

낮고 끈적거리는 목소리가 덩굴 처럼 내 귀를 옭아매고 내 속까지 파고들어 심장을 꽉 조이는 것 같 았다.

잠시 혼란스러운 마음이 뭉게구

름처럼 피어올라 내 머릿속을 메 웠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나는 지그문트를 쉽게 믿을 생 각이 없었다. 세상 사람 모두를 믿어도 저 새낀 못 믿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폭탄 찾는 거, 도와줄 수 있 다."

'뭐?'

눈을 휘둥그레 뜬 나는 귀를 의 심하며 지그문트를 돌아보았다.

지그문트는 언제나 그렇듯 가면 을 몇 겹이고 덧씌워 속내가 드러 나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진중했다. 얼핏 고민 하는 기색도 보였다.

"그게 무슨,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지? 빨리 말해!"

마음 한편에선 무언가 꿍꿍이속 이 있는 게 분명하다는 의심이 치 솟았지만, 지금은 지나가는 벌레

한 마리의 도움이라도 절실했다.

"......넌 참 여전하군."

다급하게 묻는 나를 잠시 응시 하던 지그문트가 한숨처럼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곤 제 주머니 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침반?'

그가 꺼내 든 것은 지독하도록 불길한 기운이 풍기는 검은색의 나침반이었다.

"이게 뭐지?"

"흑마법의 기운이 있는 곳을 가 리키는 나침반이다. 따라가면 쉽 게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런 물건이 존재한다고?'

대륙 각지에선 흑마법은 물론, 흑마법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물건 은 제작 및 거래를 엄격히 금하고 있다. 그런데 흑마법을 추적하는 나침반이라니.

나는 불신 반 놀라움 반으로 나 침반을 받아 앞뒤로 돌려 보았다.

"원리는 나침반과 똑같다. 그 나 침반 안엔 강력한 흑마석이 들어 있어. 그 흑마석이 주위에 있는 흑마법의 기운을 감지하고 그곳으 로 향하려 하는 거다."

내가 확실히 믿지 못하고 있음 을 안 건지, 지그문트는 빠르게 설명했다.

'확실히, 나침반에선 지독한 흑 마법의 기운이 느껴진다. 게다가 가리키는 방향도...... 내가 가려던 곳과 똑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

어.'

지그문트를 믿는다는 것이 무척 이나 꺼려지고 직감도 경종을 울 렸지만, 이 나침반으로 폭탄을 찾 을 수 있다는 게 거짓은 아닌 듯 했다.

'진짜, 싫지만......

난 복잡한 눈으로 지그문트를 올려다보았다.

지그문트는 믿을 수 없고 싫은 사람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목

숨이 달린 지금은 사적인 감정을 모두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야 했다.

"......우선, 알겠다. 나침반이 흑 마법을 감지하는 건 맞는 것 같으 니. 대신 몇 가지 물어보지. 너는 폭탄에 대해 어떻게 알았지?"

대충 짐작이 가는 바는 있었으 나 확실히 하기 위해 물었다. 소 름 끼치도록 잔잔한 보랏빛 눈동 자로 나를 응시하던 지그문트는 한숨처럼 숨을 뱉었다.

"저번에 봤겠지. 나는 키프로스 백작가에서 일하고 있다. 가문의 일원들과...... 꽤 긴밀한 사이지. 이번 테러를 일으킨 것은 키프로 스 백작가다. 나는 그걸 백작으로 부터 전해 들었다."

차근하게 이어진 지그문트의 말 은 일리가 있었다. 자세하진 않아 도 분명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답답하 지.'

퍼즐이 억지로 끼워 맞춰진 느

낌. 분명 그림은 그려졌는데 무언 가 어긋난 것 같았다.

경계경보를 울려 대는 직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며 숨 을 골랐다. 우선 이 상황에 집중 해야 했다.

"우선...... 그렇다 치자. 하지만 네 말에 따르면 넌 테러리스트들 과 한패일 텐데."

나는 눈매를 날카롭게 세운 채 스산한 눈으로 지그문트를 바라보 았다.

"대체 왜 날 도와주는 거지?"

그렇다. 이게 제일 큰 문제였다.

지그문트는 날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시간이 없었기에 답을 종용하는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자, 지그문 트의 붉은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여전히 흔들림 없이 나를 마주한 채로.

"나는 이곳에서 스승님과 함께

한 나날들을 잊지 않았다."

쿵, 하고 무거운 바위가 마음 위 에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우습게도 나는 그 한마디에 동 요했다. 축제가 벌어지는 광장을 바라보고 있는 지그문트는 다행히 내 동요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늘 이곳을 지나가곤 했지. 스승 님과 너, 나, 셋이서. 너와 나는 조금만 붙어도 서로에게 검을 겨 누었으니 무조건 스승님이 가운데 에 서셔야 했어. 네가 스승님 오

른쪽에 서고, 내가 왼쪽에 섰지."

테러가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인데도 지그문트 는 여상스러운 투로 말했다. 광장 을 응시하는 그의 두 눈에 얼핏 그리움 같은 것이 민들레 홀씨처 럼 날아들다 다시 날아가 버렸다.

걸음걸이와 보폭이 천차만별인 셋이서 익숙하게 걸음을 맞추며 걸어가던 길. 발걸음을 옮기며 나 누었던 수많은 대화. 눈에 담은 계절의 변화.

이곳엔 수많은 추억들이 아로새 겨져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이곳은 스승님 께서 사랑한 곳이다."

'너희는 어떨지 몰라도...... 난 이곳이 참 좋아. 북적거리고 사람 사는 느낌 나잖아. 너희와 이곳을 걸을 수 있어 행운이라고 늘 생각 한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그문 트의 말과 언젠가 그녀가 고백하 듯 속삭이던 말이 겹쳐 들렸다.

나는 그 말과 함께 그녀가 지은 환한 웃음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 다.

"나는 스승님이 사랑한 이곳이 파괴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 그뿐이야."

만약 지그문트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했다 면 나는 주저 없이 나침반을 던지 고 떠났을 것이다. 이기적이고 이 해타산적이고 냉혈한에 쓰레기인 지그문트가 그럴 리 없으니.

하지만 그가 스승님을 언급한 순간부터 내 이성의 저울에 금이 갔다. 그 금 사이로는 감정이라는 움켜쥘 수조차 없는 고운 모래가 새어 들어가며 저울을 고장 나게 했다.

카라쇼는 내게 그런 의미였다. 내 이성을 부수고 근본을 흔드는, 미련의 결정체였다.

"그런 놈이 대체 왜......!"

검은 살기의 파동으로 일대가

혼들렸다.

나는 지그문트를 불태울 듯 노 려보며 검 손잡이를 꽉 잡았다. 순간 감정 조절 실수로 터져 나온 살기는 빠르게 갈무리했으나 감정 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였다.

나는 아무 감정도 비치지 않는 보랏빛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묻고 싶은 것도 많고, 담판도 제 대로 짓지 못했다. 모든 것을 여 기서 끝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 뚝같았지만.

"......그래. 알겠다."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나는 말을 잇는 대신 한숨으로 모든 잔감정을 날려 보내고, 나침 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지그문트는 내게 있어 일생일대 의 난제 같은 인물이었다.

그가 싫다.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그의 나침반을 따

라가려는 것은 상황이 급해서도 있었지만, 지그문트가 허투루 스 승님을 입에 담지 않았으리라는 마지막 믿음 때문이었다.

"......이곳은 반드시 지킬 거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스승님을 위해 서."

매정한 어투로 던지듯 말한 나 는 미련 없이 지그문트에게서 고 개를 돌리고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끝까지 내 등 뒤로 따라붙는 시 선이 느껴졌으나, 나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남은 시간이라곤 이십여 분. 나 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필 사적으로 달릴 때였다.

4뭐야••••••?'

나는 달리다 말고 어느 골목길 앞에서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 다.

지그문트가 준 나침반의 침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미친 듯이 돌 고 있었다.

펑!

심상치 않게 돌아가던 나침반이 이윽고 작은 폭발음을 내며 완전 히 작동을 멈췄다. 얼굴을 되는 대로 일그러트린 나는 혹시 수리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뒷면을 분리해 내부를 살폈 으나, 내부는 모두 녹아서 어떤 부품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왜 갑자기 고장이 난 거지?'

외부의 충격을 받은 것도 아니 다. 분명 나침반 내부에서 일어난 자폭이 었다.

광장에서 일어나는 이벤트의 기 운이 옅어진 외진 골목에 있는 터 라 이제부턴 감으로도 추격할 수 있을 것 같긴 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 잠시 멈춰 있을 때 였다.

"••••••슈슈?"

"슈슈 언니? 맞지?"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뻣뻣 하게 굳었다.

이곳에서 가장 들려서는 안 될 익숙한 목소리들.

"......칼, 아리아."

내 가족, 칼과 아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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