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화
"......설명할 수 있어. 내 말을 들어 봐."
할 말이 아주 많아 보이는 칼과 아리아를 앞에 둔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황급히 말했다. 저 둘이 먼저 말을 하게 내버려 뒀다간 폭탄이 터질 때까지 잔소 리만 듣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 한번 들어나 보자. 행차
까지 땡땡이쳐야 할 정도로 아픈 우리 언니가...... 그 차림을 하고 여기에 있는 이유가 뭔지."
팔짱을 낀 아리아가 엄한 눈으 로 날 바라보았다. 제대로 된 설 명 없이는 지나갈 생각 하지 말라 는 눈빛이었다.
나는 내가 운이 없다는 사실과 꼬여 가는 이 상황이 통탄스러울 따름이었다.
"그, 러니까......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말도
안 되는 변명은 넣어 두는 게 좋 을 거다. 넘어가 줄 생각 없으니. 네가 꾀병을 부릴 때부터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만...... 미르 복장까지 하고 있는 걸 보니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게 분명하군."
더듬더듬 거짓 변명을 해 보려 하는 나를 가로막은 건 칼이었다.
모든 걸 파헤칠 듯 날카롭게 빛 나는 붉은 두 눈이 나를 향하는 것이 이렇게까지 무서운 건 처음 이었다.
'젠장! 뭐라고 하지?'
나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미 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거짓말까지 하며 행차에 빠진 내 가 미르 복장으로 광장에 나와 있 는 이 상황을 덮을 수 있는 변명 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 언니."
내가 고뇌에 빠져 있음을 안 걸 까, 내가 사랑한 그 푸르른 눈으 로 나를 지그시 응시하던 아리아
가 날 불렀다. 나는 곤란함을 완 전히 숨기지 못한, 애매한 얼굴로 아리아를 돌아보았다.
"언니도 알잖아. 나는 늘 촉이 좋았지."
아리아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저 걸음을 옮기 는 것뿐인데 피식자를 마주하러 오는 포식자 같은 자태가 느껴졌 다.
"나한텐 보여. 언니 동공이 혼들 리는 게. 곤란할 때 으레 그런다
는 거, 나는 알아. 내가 언니에 대해 모르는 게 있을 리가 없잖 아."
작고 하얀 손이 내 뺨을 붙잡았 다. 아리아의 손은 분명 온기를 품고 있었으나, 어쩐지 내겐 냉기 만 느껴졌다.
그 말대로, 예전부터 아리아는 감이 지나치도록 날카로웠다. 아 리아 앞에선 거짓말을 할 생각을 고이 접어둬야 할 정도였다.
인간보단 짐승에 가깝다고까지
할 수 있는 그 예민한 감에, 먹잇 감을 포착할 때면 시리게 번뜩이 는 연하늘색 눈동자.
자매라고 하여도 닮은 곳이라곤 손가락 한 마디만큼도 없는 아리 아와 나 사이에서 닮은 점은 타고 난 감 하나뿐이래도 무방했다.
"나는 언니가 내게 거짓말하는 게 정말 싫어. 그러니 솔직히 말 해 줘."
내 뺨을 느리게 쓸어내린 아리 아가 싱긋 읏으며 눈을 휘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도 분위기는 차 가운 것이 모순적이었다.
나는 잠시 아리아를 내려다보았 다.
무력의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 늘 위태롭고 지켜줘야 할 것 만 같이 느껴지던 작은 몸은 마법 을 배우더니 어느새 마력으로 가 득 차 쉽지 않은 상대가 되었다.
순진하기만 한 것 같던 두 눈에 지혜와 야망이 들어차고, 예쁘다 고만 느껴지던 요정 같은 얼굴엔
차가운 이성이 깃들었다.
아리아는 많이 자라 있었다. 더 는 내가 지켜야 하는 대상으로 보 이지 않을 만큼.
'그래도, 그래도 네가 안전하기 를 바라는데.'
날아오를 때가 된 아기 새를 계 속 품고 있으려 하는 어미 새가 된 듯한 기분이다.
분명 아리아가 그리 약한 아이 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이 사건을 아리아에게 말해도 될 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리아가 이 일에 관여되면 어 떡하지? 그래서 다치면? 그렇게 되면,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있 나?'
아리아가 태어나 내 동생이 된 뒤로 아리아의 안위만을 위해 달 려왔다. 지금은 더 이상 아리아가 위태롭지 않으니 그 질주를 멈췄 다 해도, 아리아의 안위를 덜 걱 정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내 삶에 아무리 많은 의미들이 생겨났다 하여도 여전히 아리아는 내게 가장 큰 의미였다. 난 그런 아리아가 다치는 꼴을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냥 넘어가 줄 수 없을 까?"
나는 겁쟁이였다. 내 주변이 다 치는 게 두려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거북이처럼 등껍질에 제 머리를 푹 숨기고 마는 겁쟁 이.
나는 차마 아리아를 마주하지도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알겠네. 또 위험한 일이구 나. 그 차림을 하고 있는 걸 보아 뻔하긴 하지."
나를 빤히 응시하던 아리아가 헛웃음을 쳤다.
나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아리 아 앞에선 나도 모르게 반응이 지 나치게 솔직해졌다.
고개를 들어 마주하지 않았는데
도 아리아가 화났다는 것이 마나 를 통해 느껴졌다.
폭탄을 포기할 수도 없고, 그렇 다고 아리아를 밀쳐 버릴 수도 없 었다. 나는 부모님에게 혼나기 직 전에 놓인 5살 꼬마의 기분을 느 끼며 흘러가는 시간과 눈앞의 아 리아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언니는 또 혼자 하려고 하는구 나. 늘 그랬듯 말이야. 내가 위험 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기를 바라 니까...... 또 그렇게 입을 닫은 채
모든 걸 혼자 처리하려는 거겠 지."
늘 다정하던 목소리에 시린 냉 기가 스몄다. 이미 모두 파악했다 는 듯 확신 섞인 목소리는 모두 정곡을 찔렀다. 나는 반박조차 하 지 못한 채 주먹만 꽉 쥐었다.
"나를 봐."
이를 으득 갈며 짓씹듯 말한 아 리아가 내 턱을 쥐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손을 감히 내칠 수 없 어 순순히 고개를 들자, 맹렬히
타오르는 하늘빛 눈동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무엇으로도 끌 수 없을 것 같은 화염. 분노와 울분과 의지와 집념 같은, 단단하고 무거운 것들 이 장작이 되어 나를 집어삼킬 만 큼 크게 불타올랐다.
나는 그 눈을 감히 피할 수 없 었다.
"언니는 내 안전이 그렇게 중요 해?"
아프도록 물렸다가 풀려난 산홋 빛 입술이 움직여 당연한 것을 묻 는다. 너무나 당연해, 대답하지 않아도 우리 둘 다 아는 것.
"••••••그래."
그 질문에는 내 생애로 답해 왔 다.
내 생애가 바로 네 안위를 위한 제물이었던 것을.
내 겸허한 대답에 아리아가 눈 을 번뜩였다.
"내 행복보다도? 내 행복보다, 그놈의 안전이 중요해?"
분명 차갑기 짝이 없는데, 어쩐 지 물기가 묻어나는 아리아의 목 소리를 파열음으로 무언가에 금이 갔다.
" 나는••••••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무어라 변명하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달싹인 것은 언성이 높아 진 아리아의 목소리에 가볍게 묻
혔다. 내 양 어깨를 꽉 잡은 아리 아가 나를 똑바로 마주했다.
"나를 언니 등 뒤에 숨기려고만 하지 말고 언니와 함께 서게 해 줘. 나는 이제 약하지 않아!"
간절한 부르짖음처럼 느껴지는 말에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몸이 완전히 나은 아리아는 필 사적으로 마법을 배우고, 몸을 단 련했다. 사업과 사교로 정신이 없 는 와중에도 잘 시간을 쪼개 가며 강해지려고 하는 아리아를 만류할
때마다 돌아온 대답은 늘 같았다.
'나는 더 이상 무력하게 언니에 게 지켜지기만 하지 않을 거야.'
각오라기보다는 독기에 가까운 기운을 얼굴에 가득 채운 아리아 는 그렇게 말했다.
너무 귀해 깃털 하나 빠지지 않 기를 바라 둥지에 고이고이 모시 고 정성을 다해 품고 있던 아기 새는, 그렇게 스스로 날아가고자 하고 있었다.
"말해. 말해 줘.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언니가 뭘 하려는 건지 말 하고 공유해 줘. 나도...... 언니와 함께하게 해 줘."
연하늘색 눈동자에 보석처럼 물 기가 반짝였으나 흐르진 않았다. 절대 흘릴 수는 없다는 듯.
아리아는 내 둥지를 벗어났다.
나는 더 이상 아리아에게 숨길 수가 없었다.
'더는, 숨기고 싶지 않아.'
나는 더 이상 내 가족들에게 내 일을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시간이 없어서 길게는 설 명 못 해 줘. 칼. 칼도 이리 오십 시오."
시끄럽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기 에 최대한 목소리를 줄인 채 칼에 게 손짓했다. 나와 아리아의 대치 를 묵묵히 지켜보던 칼이 만족스 러운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래.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인
거지."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두 사 람을 번갈아 보며 무겁게 말했다.
"이번 축제 때, 폭탄이 터질 겁 니다."
두 사람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 었다.
나는 키프로스의 관여 사실과 내부 고발자가 티나라는 것만 빼 놓고 두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설 명했다. 지그문트에 대한 얘기도
조금 돌려서 얘기해야 했다.
내가 말을 끝마쳤을 때, 두 사람 은 할 말이 많다 못해 넘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가타부타할 시간은 없습 니다. 시간이 촉박해요."
내버려 뒀다간 한마디 들을 것 같아 황급히 덧붙였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태도로 내게 눈길을 거두며 심각한 표정을 지 었다.
"나침반도 망가졌다면...... 이제 어떻게 찾으려는 거지."
"감으로 찾을 겁니다. 주의를 기 울이면 찾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 다."
칼의 물음에 빠르게 대답했다. 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곤 표 정을 굳혔다.
"나와 아리아도 같이 간다."
그의 입에선 기어이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나왔다.
'이 사건에 대해서 알려 주는 것 까지만이야. 연루되는 건 너무 위 험해. 혼자 움직이는 게 훨씬 효 율이 좋기도 하고.'
나는 거세게 도리질을 쳤다.
"안 됩니다! 가는 건 저 혼자 갑 니다. 차라리 두 사람은 제가 폭 탄을 막은 후 뒷수습을 도와주거 나, 만약 제가 폭탄을 막는 걸 실 패하면...... 사람들이 대피하는 걸 도와주세요."
내 말에 두 사람이 눈을 부라렸
지만 나는 단호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두 사람은 같 이 가도 제게 방해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은 폭탄 해체를 최우 선 순위로 둬야 합니다. 후방을 맡아 주세요."
더는 반박을 받지 않겠다는 뜻 을 담아 말하자, 두 사람은 불만 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무 어라 더 말하진 못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어.'
나는 그런 두 사람을 등지고 검 손잡이를 쥐었다.
"통신구 가지고 있죠. 일이 끝나 면 연락......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가 내 감 을 건드렸다.
나는 오로지 감으로 수많은 죽 음의 순간을 넘긴 사람. 절대 스 스로의 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직감대로 발도하여 허공으 로 오러를 날렸고,
"윽!"
내 오러보다 한 박자 늦게 허공 에서 나타난 이들은 오러에 빗맞 았다. 한 박자 빨랐던 탓에 정통 으로 맞추지 못해 치명상은 아니 었지만, 확실히 타격을 입혔다.
"누구냐."
나는 검을 세운 채 고저 없는 목소리로 뇌까렸다.
느껴지는 기운으론 소드 익스퍼 트 두 명에 중급 마법사 한 명. 총 세 명으로 이루어진 가면을 쓴 무리가 나를 에워쌌다.
칼과 아리아가 내게 다가오려 했지만, 나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저지하고 내 바로 앞에 서 있는, 괴한들의 리더로 보이는 이를 노 려보았다.
"미안하지만 넌 이 이상 가지 못한다."
감히 내 앞에서 확정을 내린 정 체불명의 괴한은 그 말과 함께 섬 뜩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