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화
'일이 또 골치 아프게 됐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 나가 풀리려 하면 다른 장애물이 나와 앞길을 가로막았다.
앞으로 폭발까지 10분 남짓 남 은 시간을 확인하고 망설임 없이 검을 꺼내 세웠다.
"순순히 비키면 굳이 베지는 않
겠다. 허나 막아서겠다면
쾅
나도 모르게 기분이 반영된 것 인지, 검날 위로 터지듯 솟구친 오러는 광포하게 일렁였다.
나는 사방으로 살기를 내뿜으며 온기 한 점 없는 눈빛으로 그들을 하나하나 직시했다.
"무사하진 못할 거다."
경고를 한 번에 알아듣고 얌전
히 가면 좋으련만, 그들은 살기에 몸을 떨면서도 물러날 생각이 없 어 보였다.
'3분 안에 처리하고 간다.'
한숨을 푹 내쉰 내가 전투태세 를 갖추려 할 때였다.
쾅
" 아악!"
적들 앞으로 살벌한 기세의 불 덩이가 떨어지고, 그중 한 놈이
무언가 정신적 타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머리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옆을 돌아 보았다.
"빌어먹을! 분명 적은 미르 하나 뿐이라고 했는데!"
양손에 불의 마법진을 전개한 아리아와 두 손을 세밀하게 움직 이며 정신 붕괴 마법을 사용하는 칼.
이미 싸울 각오가 만만해 보이 는 칼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소 리쳤다.
"빨리 가, 미르! 여기는 우리가 처리하겠다!"
두 사람은 내 길을 터 주기 위 해 괴한들의 발을 잡아 놓을 생각 인 것이 분명했다.
'정말 두고 가고 싶지 않은 데......•'
두 사람이 저들을 잡고 나는 폭
탄을 찾으러 가는 것이 최선의 방 법임을 안다. 그렇지만 쉬이 발이 떨어지진 않았다.
칼과 아리아는 둘이고 괴한들은 셋. 게다가 괴한들은 그저 그런 상대가 아니라 실력자들이었다.
'아무리 내가 타격을 입혀 놓았 다지만, 만약, 칼과 아리아가 다 친다면?'
내가 가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 자, 마법진을 여러 개 전개하기 시작한 아리아가 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가! 우리를 믿어!"
분명 처음으로 실전 전투와 마 주했으니 두려울 법도 한데, 연하 늘색 눈동자는 흔들림 하나 없이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내게 굳은 신뢰를 전해 왔다.
"......그래. 맡긴다."
나는 아리아를 믿기로 했다. 그 아이의 가능성을 믿고, 날아오를
수 있도록 품에서 내보내야 했다.
칼, 아리아와 잠시 눈빛을 교환 한 나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고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달렸 다.
휘익
이미 위치가 파악된 이상 숨길 것도 없었다. 망설임 없이 마나를 개방해 발 위에 덧씨우고 허공으 로 도약했다.
"이 자식이!"
나는 내 머리를 향해 빠르게 날 아오는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고개 를 기울여 피했다. 날아온 것은 투척용 단검이었다.
'둘은 잡았는데...... 셋 다 잡진 못한 모양이군.'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살피면, 괴한 둘을 잡고 고전하고 있는 칼 과 아리아가 보였다.
아리아는 중급 마법사를, 칼은 소드 익스퍼트를 상대하는 것만
해도 힘에 부치는 듯하니, 내게 단검을 던진 소드 익스퍼트는 내 가 처리해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잔챙이지만.'
쯧, 혀를 찬 나는 달려오는 괴한 을 향해 가로로 길게 검을 휘둘렀 다. 검날을 에워싸고 있던 검은 오러가 먹잇감을 찾은 개처럼 날 뛰며 괴한의 발목을 베었다.
" 아악!"
괴한의 비명 소리가 골목을 채
우고, 그의 발목이 반쯤 잘려 나 갔다. 그리 약하지만은 않다는 걸 증명하듯 그가 그 사이에 마나로 몸을 강화한 탓에, 발목이 완전히 썰리지는 않았다.
"큭, 널 보내 줄 순 없다!"
통증을 참듯 이를 악물고 소리 친 괴한이 내게 훅 다가와 검을 내질렀다. 원거리라면 내가 오러 로 자신을 한 번에 날려 버릴까 봐 거리를 좁힌 모양새였다.
'확실흐]. 오러를 날리기엔 원거
리가 편하긴 하지만.'
검을 직접 부딪치는 싸움에서 승기를 잡으려면 상당한 근력이 필요하다. 괴한은 몸집이 작아 보 이는 나와는 근접전을 하는 것이 비교적 승률이 높다고 생각한 모 양이었다.
서걱.
"으악!"
물론, 그건 한심한 오판이었다.
"소드 마스터 앞에 직접 몸뚱이 를 들이대다니...... 멍청하구나."
나는 내게 검을 휘두르려다 말 고 베인 어깨를 부여잡는 괴한을 보며 중얼거렸다.
날고 기고 헤엄치는 별의별 마 수들과 마주하며 수많은 방식의 전투에 임해 온 나는 거리에 따라 싸움 능률이 변하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역시...... 죽이고 싶진 않으니 까.'
죽이고자 마음먹고 검을 휘둘렀 다면 바로 죽일 수 있었겠지만, 상대가 죽지 않는 선에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 내 발을 잡았다.
나는 어깨가 날아가고도 내게 달려드는 괴한의 검을 가볍게 피 하고 괴한의 옆구리에 검을 찔러 넣었다.
"컥! 커흑......
이번엔 꽤 깊게 찔렀던 탓에 괴 한이 옆구리를 붙잡고 쓰러졌다.
확실한 전투 불능 상태였다.
검날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조금 꺼림칙하게 바라보다 몸을 돌려 다시 가려고 할 때였다.
"악! 이거 놔!"
"멈춰라, 미르!"
등 뒤에서 단말마처럼 터져 나 오는 비명에 우뚝 발걸음을 멈췄 다. 내 귓가에 감겨드는 익숙한 목소리.
' 아리아!'
나는 심장이 뚝 떨어지는 감각 을 느끼며 새파랗게 질린 채로 뒤 를 돌아보았다.
"하, 하하! 거기서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이 자식 목숨은 없 다!"
이내 내 시야를 사로잡은 것은 아리아를 붙잡고 있는 소드 익스 퍼트였다.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폭신한 긴 연분홍색 머리칼이 크고 거친 손
에 우악스럽게 잡혀 있었고, 새하 얀 목덜미엔 단검이 겨누어져 있 었다.
아리아는 얼굴을 있는 대로 구 긴 채 괴한의 손길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긴 머리카락이 보기만 해 도 아프게 뽑혀 나가는 것 외에 성과는 없었다.
'어, 어떡, 어떡하지.'
가장 원치 않았던 상황이었다. 나는 감히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 하고 빙하처럼 굳었다. 아리아가
잡혔다는 사실을 인식한 후로 뇌 가 완벽하게 굳어 생각이 되질 않 았다.
내가 완전히 질려 버린 것을 안 건지, 괴한은 누런 이를 한껏 드 러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 자식을 살리고 싶나? 그럼 무기를 놓고 투항해라!"
"빌어먹을, 놓으라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억지 로라도 아리아를 보냈어야 했나?'
수많은 생각괴 후회들이 머릿속 을 스친다. 곧이곧대로 투항하는 것은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서도, 일단 아리아를 구해야 한다 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남자의 말대로 아무 저항 없이 검을 놓으려 할 때였다.
'슈슈! 정신 차려라!'
마나를 이용한 전언이 날카롭게 내 귀에 꽂혔다. 칼의 목소리였 다.
나는 검을 놓으려다 말고 흠칫 고개를 들어 칼을 바라보았다.
'아직 검을 놓지 마라. 내게 생 각이 있다!'
괴한이 아리아를 잡고 있는 상 태이니 칼 또한 항복을 표하듯 두 손을 들고 있었으나, 그 와중에 내게 전언을 보내고 있었다.
'하, 하지만 아리아가......•'
'네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다고 해서 저 새끼들이 순순히 아리아
를 놔 줄 것 같나? 그리고 어차 피 지금 폭탄이 터지면 나랑 아리 아는 죽을 가능성이 높다!'
칼이 차가운 목소리로 내 이성 을 일깨웠다.
나는 반쯤 죽어 가던 정신을 애 써 재정립하며 크게 심호흡을 하 고 덜덜 떨리는 손을 꽉 주먹 쥐 었다. 내가 지나치게 동요하고 있 음을 티내선 안 됐다.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내가 저 자식에게 정신 조종 마
법을 걸겠다. 꽤 강자라 완전히 정신을 붕괴하는 건 어려울지 몰 라도 잠시 눈 돌아가게 하는 정도 는 충분해. 그때 네가 저 자식을 공격해라.'
칼의 계획은 지나치게 단순했지 만, 지금 상황에선 최선으로 보였 다. 나는 힘겹게 고개를 까닥여 동의를 표했다.
'셋 센 뒤 한다. 셋.'
"이, 이익! 이 자식이 죽는 꼴 보고 싶어? 당장 무기 버려!"
"놔! 놔, 이 개자식아!"
내가 무기를 놓지 않자 당황한 괴한이 아리아의 목으로 검을 더 깊게 찔러 넣었다. 아리아는 필사 적으로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 다.
나는 아찔해지는 정신을 가까스 로 부여잡았다.
'둘 '
"으, 놓으란 말이야!"
사람들이 천사의 것 같다고 찬 사를 늘어놓던 길고 풍성한 아리 아의 머리칼이 사정없이 뜯겼다. 나는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워지는 그 모습에, 차라리 아리아가 더는 발버둥을 치지 않기를 바라며 검 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
그리고 카운트가 끝에 다다르기 직전, 이변이 일어났다.
"내가••••••!"
파지 직-
"으악]"
작은 손끝에서 터져 나온 전류 가 검을 겨누던 괴한의 눈을 공격 했다. 괴한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맥없이 노출되어 제 눈을 부여잡 았다.
"빌어먹을, 아리아!"
나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건 너 무 위험한 짓이었다. 내 부르짖음
에도 아리아는 멈추지 않고 몸을 돌려 괴한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 다.
엉킨 분홍색 머리칼이 한 뭉텅 이로 뽑히고, 나오는 와중에 새하 얀 목줄기가 깊게 긁혔다. 한눈에 보아도 아파 보이는 상처였으나, 아리아는 신음 한번 내지 않았다.
화르륵.
아리아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불 꽃이 엉망이 된 머리칼에 닿았다.
화아악!
연분홍빛보다 훨씬 진한 붉은색 화염 아래, 허리까지 닿던 긴 머 리카락이 거세게 불타기 시작했 다.
아리아의 얼굴 위로 격노가 물 든다.
괴한에게 잡혔던 일부가 제 몸 에 남아 있는 것을 버틸 수 없다 는 듯 망설임 없이 스스로의 머리 카락을 불태우는 손길.
그 순간 아리아는 먹이사슬 최 상위에 선 오만한 맹수 같았다.
"내가, 놓으라고 했지, 개새끼 야. 감히 어디에 손을 대."
머리카락을 집어삼킨 화염의 불 똥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그 불꽃은 아리아의 눈동자로 번졌 다.
괴한을 노려보는 아리아의 눈빛 이 독기와 살기로 뒤섞여 섬뜩하 게 빛났다.
화르륵!
눈 깜짝할 새에 거리를 벌리더 니 시동어조차 없이 괴한의 머리 위로 마법진을 전개한 아리아가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거대한 화 염이 괴한에게로 쏟아졌다.
"으아아악!"
방심한 탓에 방어할 틈도 없이 화염을 뒤집어쓴 괴한이 귀 따가 운 비명을 질렀다. 갑작스러운 상 황에 뻣뻣하게 굳어 있던 칼도 빠 르게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했
다.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아리 아를 바라보았다.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곤 늘 긴 길이를 유지하던 연분홍색 머 리칼이 어깨뼈에도 닿지 않을 길 이로 짧아진 모습은 무척 어색했 으나, 동시에 기이한 감상을 불러 일으켰다.
집에서만 지내던 병약한 아리아 와의 완벽한 차이점이 만들어져 버린 것 같았다.
"가. 빨리 가!"
나를 돌아본 아리아가 크게 소 리쳤다.
'죽여, 버리고 싶은데.'
나는 잠시 아리아를 바라보다, 아리아를 붙잡았던 괴한에게로 시 선을 돌렸다.
감히 내 동생에게 손을 댄 치에 게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일었 다. 내 감정을 따라 검은 살기가
안개처럼 퍼져 나왔다.
"이 새끼는 내가 처리해. 언니는 가. 가서 이 일을 끝내!"
내가 괴한을 찢어 죽이고 싶어 하는 것을 느낀 건지, 아리아가 내게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을 붙 잡은 괴한에 대한 보복은 스스로 하겠다는 의지였다.
시선이 마주하고, 내가 사랑한 연하늘색 눈동자가 거세게 타오른 다.
한곳에 뿌리를 내리고 머무는 꽃이 아닌, 모든 걸 집어삼키고 불태우며 덩치를 불리는 불꽃이었 다.
아리아는 더 이상 내 도움을 받 아 위기에서 벗어나는 아이가 아 니었다. 보복까지도 스스로 할 수 있는 독립적인 한 명의 사람이었 다.
" 으 "
흐 •
더는 아리아를 방해해선 안 된 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나는 아
리아의 눈빛을 마음속에 깊이 새 기고, 내 일을 하기 위해 몸을 돌 려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실 아직도 아리아가 걱정되었 다.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걸 놓고 아리아를 품에 안은 채 위로해 주 고 싶었다. 저런 위험한 상황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고, 그저 내 가 모든 걸 지고 가며 아리아에겐 조금의 타격도 없도록 해 주고 싶 었다.
하지만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 었다. 아리아는 더 이상 어리기만 한 애가 아니라는 걸.
이제 아리아는 내 뒤를 맡길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었다.
끌어 모을 수 있는 마나는 모조 리 끌어 모아 방출하며 범인의 눈 엔 보이지 않을 속도로 달렸다. 다행히 기운의 출처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끼익!
나는 광장에서 가장 구석진 골 목에 멈춰 섰다. 발의 마나를 거 두지 않은 탓에 바닥이 갈리는 소 리가 울려 퍼졌다.
"뭐, 뭐야!"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이전 괴 한들과 같은 가면을 쓴 네 명의 인물이 불길한 기운의 폭탄을 막 다른 벽에 설치하고 있는 모습이 었다.
'드디어.'
나는 찾았다는 짧은 안도에 느 리게 숨을 내쉬고, 곧바로 검을 세웠다.
쉬익
허공을 찢는 바람 소리와 함께 일대를 뒤덮는 검은 연기. 모두가 숨을 멈추었다.
진득한 살기가 금방이라도 모든 생명체를 죽일 듯 범람하는 가운 데, 나는 난폭한 기세로 테러리스 트들을 마주했다.
"죽고 싶지 않다면 모두 비켜 라."
이젠 이 소동을 끝낼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