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31화 (131/254)

131 화

몸이 덜덜 떨리고 초점이 흔들 렸다. 넘치는 자기혐오로 울컥 심 장을 토해 낼 것 같았다.

'이게 내 신념의 결과인가.'

평생을 지켜 온 단단한 신념이 한순간에 부서졌다.

나는 피에 절은 검은 장갑을 멍 하니 내려다보았다. 색이 검정색

인 탓에 피는 보이지 않았음에도 피비린내가 지독했다.

나는 내가 전쟁을 앞에 두고 얼 마나 안일했는지, 생명의 무게를 얼마나 간과했는지 뼈저리게 깨달 았다.

"라, 이너. 내가...... 사람을 죽 였습니다."

"그냥, 그냥 제압만 했습니다. 죽이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카슈미르."

"그런데, 결국 나 때문입니다.

내게 패배해서 자결한 거예요. 결 국 내가...... 사람을......

"슈슈!"

크게 소리친 라이너가 내 어깨 를 꽉 잡았다.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멍하니 그를 올 려다보았다. 이렇게 나약한 모습 은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 건만, 쉬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표정이 무섭도록 굳은 라이너는 헛숨을 들이쉬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카슈미르 크리시스. 당신은 신 도, 구원자도 아니고 인간일 뿐입 니다. 모두를 살릴 순 없습니다."

라이너는 내가 이전에 들어 본 적 없는 매정한 목소리로 단호하 게 말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들의 나열이었음에도, 그의 한 마 디 한 마디에 심장이 난도질당하 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눈을 보면, 그 난도

질은 나를 상처 주기 위함이 아니 라 썩은 부분을 도려내기 위함임 을 알 수밖에 없었다.

"기사단장으로 살며 배웠습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건 누군가 죽었 다는 뜻임을. 내가 살았기에 날 노리는 암살자는 죽은 것이죠."

금빛 눈동자가 슬픔으로 물들었 다. 라이너는 이런 말을 하기 싫 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도, 따가운 바늘을 삼키듯 말했 다.

"당신도 알잖아요. 모두가 살 순 없습니다."

아. 정말 지독한 진실이다. 머리 론 알고 있었음에도 마음으론 인 정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

'신은 어째서 인간에게 생을 주 셨으면서 모두가 살진 못하게 하 셨나.'

알면서도 모두를 구하고 싶었다. 피가 싫었고, 죽음도 싫었다.

죽어 가는 카라쇼와 설원을 적

시는 핏물을 보며 다시는 누군가 의 죽음을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 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괴로워하는 아 리아의 옆을 지키며 누구도 이런 경험을 하지 않게 해 주고 싶었 다.

나는 내가 느꼈던 고통을 다른 누군가가 느끼지 않길 바랐다. 아 무도 느끼지 않길 바랐다.

'평생을 간직해 온 이 생각이 잘 못된 걸까. 나는, 그저 이상주의

자에 불과했나.'

애써 부정했던 것이 억지로 인 정되는 과정은 폭력적이었다. 나 는 나를 둘러싼 한 세계의 파괴를 생생히 느꼈다. 이미 금이 가 있 었으나 억지로 지탱하고 있던 세 계였다.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을 베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회피하고 싶었던 잔혹한 진실이었다.

진실의 파편들이 심장을 무참히 찔러 댔다. 나는 거칠게 마른세수 를 했다.

"하지만 슈슈. 모두를 살릴 수는 없지만, 최대한 많은 이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있지 않습니까."

나를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놓은 라이너가 내 양 뺨을 살며시 잡고 나와 눈을 맞추었다.

이 상황에서도 여전히 빛나는 강직한 황금빛 눈동자는, 어두운 밤하늘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방

향을 가리키는 북극성 같았다.

"지금 당장 극복하기 힘든 문제 라는 거 압니다. 나도...... 이 상 황에서 당신을 정신 차리라고 몰 아붙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의 얼굴에 죄책감이 물들었다. 옅은 숨을 내쉰 라이너가 입매를 굳혔다.

"하지만 당신이 나서지 않으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겁니다. 당신은 그걸 보면 더 힘들어하겠 죠. 나는 사람들을 살리고 싶고,

당신도 지켜 주고 싶습니다."

긴 속눈썹이 라이너의 눈을 반 쯤 가렸다. 그가 애달프게 눈매를 늘어뜨렸다.

"도와주세요, 슈슈. 당신 없이는 못 합니다. 폭탄을 해체하는 걸 도와주세요."

'폭탄.'

암전되어 있던 이성에 희미한 불이 들어왔다. 북극성의 빛 덕분 이었다.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힘들었 고, 아직 북부에 대한 생각도 정 리되지 않았다. 만에 하나 폭탄 해체를 실패한다면 느끼게 될 감 당 못 할 죄책감은 상상하고 싶지 도 않았다.

사실 다 놓고 도망가고 싶었다.

그럼에도, 내가 옅어진 이성의 끈을 꽉 잡고, 눈물을 거칠게 닦 아 내며 이를 악무는 것은.

"••••••가요."

이곳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 때문이 었다.

나는 초점도 제대로 잡히지 않 는 눈을 부릅떴다. 떨리는 손으로 검을 으스러져라 잡은 건 악에 받 친 집념이었다.

"......카슈미르."

나를 바라보던 라이너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의 황금빛 두 눈에 짙은 괴로움이 아롱거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라이너는, 크고 단단한 손으로 내 손에 깍지 를 꼈다.

"당신은 잘하고 있습니다."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또 울컥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입술을 짓씹어 참고 빠르게 발걸 음을 옮겼다. 라이너의 손을 맞잡 은 채로.

"축제 전에 급하게 폭탄 해체하 는 방법을 배웠지만 이건 처음 보

는 종류의 폭탄이라 제가 해체할 수 없습니다. 해체 방법을 물을 테러리스트들은...... 죽어 버려 서."

죽는다는 말은 내게 독약 같아 서 목구멍부터 입 안까지 온통 불 타오르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신 음을 참은 나는 결연한 눈으로 라 이너를 바라보았다.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 방법을 정말 사용해야 하는 거군요."

라이너가 무거운 표정으로 중얼 거렸다.

축제 전, 라이너와 나는 폭탄 테 러를 막을 방법을 심각하게 고안 했다. 그래봐야 단순한 방법뿐이 었지만.

'플랜 A는 직접 폭탄을 해체하 는 것. 플랜 B는 테러리스트들을 협박해 해체 방법을 알아내는 것. 플랜 C는......

나는 겨우 2분 남짓 남은, 불쾌 한 기운이 만연한 폭탄 위로 망설

임 없이 손을 올렸다.

폭탄은 벽에 접착제로 붙어 있 었는데, 접착력 자체엔 크게 신경 을 쓰지 않은 건지 떼어 내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그러 나 혹시 일정 이상의 충격을 가하 면 터지는 폭탄일지도 모르니 최 대한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라이너. 시작하죠."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라이너가 내가 쥐고 있는 폭탄 위로 손을 올렸다.

플랜 C는 가장 무식하고, 극단 적이며, 최후의 보루로 남겨 두었 던 계획이었다.

우웅-

어두운 빛을 띠는 내 마나와 금 가루를 뿌린 듯 황금빛으로 빛나 는 라이너의 마나가 겹쳐 들었다. 얇디얇은 마나의 막이 폭탄을 감 쌌다.

덮고, 덮고, 또 덮고. 얇은 마나 의 막이 수백 겹으로 겹쳐지며 눈

밭 위를 구르는 눈덩이처럼 크기 를 불렸다.

누군가 마나 회로에 빨대를 꽂 고 쭉쭉 빨아들이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마나가 갈려 나갔으나 나 도, 라이너도 멈추지 않았다.

' 힘 드네.,

마나 막 제작은 마법사의 특기 지 검사의 특기가 아니었다. 마나 를 강하게 방출해 오러로 치환하 는 것에 익숙한 검사로서 이러한 세밀한 작업이 쉬울 리 없었다.

"......하."

나도 힘든데 라이너가 힘들지 않을 리 없다. 힘에 겨운 숨소리 가 귓가로 들려 마음이 무거워졌 다.

나는 라이너의 몫을 덜어 주기 위해 좀 더 빨리 마나의 막을 만 들었다.

1분 남짓이 남았을 때 손을 떼 어냈다. 라이너 또한 손을 물렸 다. 마나로 둘둘 감싼 폭탄은 공

같았다.

'가야지.'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내가 발 위로 마나를 덧씌울 때, 큰 손 이 내 어깨를 잡았다.

"......제가, 제가 가면 안 되겠습 니까."

라이너의 두 눈이 이전에 본 적 없을 만큼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최대한 태연 하게 웃었다.

"이미 얘기를 마친 사항 아닙니 까.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라이너가 입술을 짓씹었다. 자괴 와 염려, 상념이 뒤섞인 그의 표 정은 보고 있기가 괴로울 정도였 다.

'안 됩니다! 그건 거의 공멸 계 획 아닙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이건 정말 최후의 보루니까요. 정말 다른 방법이 없을 땐...... 이 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차라리 제가 하게 해

주십시오.'

'제가 하는 게 낫습니다. 저는 위험할지도 모르는 정도지만...... 경은 반드시 위험합니다. 아시잖 습니까.'

이 계획에 관련해선 이전에 라 이너와 논쟁이 있었다. 정말 별다 른 방법이 없을 때에나 시도할 만 큼 극단적인 수였기에, 너무 위험 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아직도 그 순간 나를 바라 보던 라이너의 눈을 또렷이 기억 한다. 무력함에 물들어 스스로의

혀라도 깨물 것 같던 눈을.

'저는 미르 님께서 위험한 게 정 말 싫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건...... 이제 그만두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이 그득히 묻어나는 목소리 는 한 단어 한 단어 호소하듯 내 귓가에 울렸다. 이기적으로 굴어 도 좋다고 했던 이전처럼, 오직 나만을 위한 말이었다.

'하지만 아인하르트 경. 저도 당 신이 위험한 게 싫습니다.'

'......

'희생 없는 평화가 있다면 정말 좋겠죠.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결국 누군가는 해야 하 는 일이고...... 그 누군가는 강한 사람이여야 합니다. 그게 가진 힘 에 대한 책임이니까요.'

누군가는 희생해야 하고 그 희 생은 강자의 몫이라는, 고대부터 이어져 온 진부한 이야기. 허나 멈출 수 없는 이야기였다.

'강자가 희생하지 않으면 너무 많은 약자가 죽는다.'

같잖은 영웅심리라 비난할지라 도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내 희생 으로 많은 이들이 살 수 있다면 나는 몇 번이고 몸을 던질 것이 다.

"저는 살아 돌아올 겁니다. 함께 호수를 보러 가기로 약속하지 않 았습니까."

나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마 음과 깊은 부담, 두려움을 모두 뒤로한 채, 나를 걱정해 주는 라 이너에게 밝게 웃어 주었다.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돌 아오겠습니다."

라이너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 다. 여전히 그의 얼굴은 슬퍼 보 였으나, 그의 두 눈에는 나를 향 한 확실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부디, 조심히 다녀오십시 오."

나는 눈꼬리를 휘는 것으로 대 답하고, 몸속에 남아 있는 마나를 한껏 끌어 모아 허공으로 도약했

다.

쉬익

마나로 발판을 만들어 거침없이 위로 올라갔다. 하늘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센 바람에 검 은 망토가 휘날렸다.

'플랜 仁는, 마나의 막으로 싸서 최대한 데미지를 줄인 폭탄을 직 접 들고 허공으로 올라가 터트리 는 것.'

거의 공멸에 가까운 무모한 방

법이었다.

누가 들으면 그런 무식한 방법 이 어디 있냐고 따질지도 모르나, 나와 라이너로선 고심 끝에 찾아 낸 방법이었다.

그냥 마나의 막으로 덮은 뒤 그 자리에서 터트리는 것도 생각했으 나, 폭탄의 폭발 규모가 어느 정 도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마나 막 만 믿을 순 없었다.

직접 안고 가는 게 아니라 그냥 하늘로 던져 버리는 것도 생각했

지만, 폭탄이 어떻게 터질지 모르 는 만큼 직접 상태를 지켜보며 터 지는 것을 확인해야 했다.

'만약 폭탄이 돌발 상황을 일으 키면 거기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 어야 하고, 그건 기사인 라이너보 다 내가 더 잘해.'

내 인생은 늘 돌발 상황의 연속 이었다. 예상과 어긋나는 상황에 대한 대처는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또한 폭발이 마나 막을 뚫고 나

온다면 그로 인한 데미지는 소드 익스퍼트인 라이너보다 소드 마스 터인 내가 더 잘 감당할 수 있을 터.

결국 내가 모든 위험부담을 감 수하고 폭탄의 방파제가 되겠다는 계획이었다.

난 손에 쥔 폭탄을 내려다보았 다. 겨우 축구공 크기쯤 될까 싶 은 작은 폭탄은 이 수도를 불바다 로 만들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죽음을 손에 쥔 기분을 느끼며, 이리저리 뒤엉키고 복잡한 내 마 음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나는, 정말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가.'

용병으로 살며 죽는 게 두렵지 도 않냐는 핀잔을 들을 때마다 거 침없이 그렇다고 대답했으나, 지 금은 사실 쉬이 대답하기 어려웠 다.

'사랑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졌으 니까.'

이전엔 살아야 하는 이유가 아 리아 단 하나뿐이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너무 많아졌다. 내가 누군 가의 의미가 되어 버리고 누군가 도 내게 의미가 되어 주었다.

'......죽고 싶지 않아.'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죽어 버 린 지금, 나는 내게 살 자격이 없 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살 고 싶었다. 살아서 이제야 찾은 행복을 만끽하고 싶었다.

역시 폭탄을 손에 쥐고 자살 특 공대 같은 작전을 수행 중인 사람 이 할 만한 생각은 아니긴 하다. 그래도 나는 이곳까지 온 것을 후 회하지 않았다.

'내겐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으니까.'

내 죽음보단 내가 사랑하는 사 람들의 죽음이 더 두려웠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나는 더 높이 뛰어 올랐다.

10 초.'

속절없이 흐르는 폭탄의 타이머 를 보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 다.

이 재앙 앞에서도 하늘은 야속 하리만큼 푸르렀고, 높은 곳에서 보는 축제의 광경은 아득하게 아 름다웠다. 갑자기 하늘로 솟아오 른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 도 얼핏 보였다.

'당신들이 오늘도 살아서, 오늘 은 그저 조금 특별한 해프닝이 있

었던 즐거운 축제날이었다고 회상 할 수 있기를.'

나는 그리 생각하며, 허공에 우 뚝 멈춰 선 채, 충격을 최소화하 기 위해 폭탄을 몸에서 떼어 내 위로 던졌다.

'그리고 나도, 살아서 오늘을 기 념할 수 있기를.'

펑-!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하늘 위에서 일대를 울리는 거대

한 폭발음과 함께 폭탄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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