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화
쉬익
거센 바람이 나를 에워싼다. 폭 발음에 정면으로 노출된 탓인지 폭풍 같은 바람 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고 웅웅거렸다. 높은 곳 에서 보호 장비 하나 없이 떨어지 는 감각은 온몸에 털이 쭈뼛 서고 소름이 돋을 만큼 아찔했다.
' 끝났다.'
고통보다 먼저 느껴진 것은 안 도였다.
폭탄은 나를 제외한 그 누구에 게도 해를 입히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안도.
나는 만신창이가 된 채로 하늘 에서 수직 추락하고 있는 사람답 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이너가 아니라 내가 왔기에 망정이지.'
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폭탄의 위력은 예상보다 강했다. 그 순간 몸을 마나로 보호했음에 도 폭탄의 여파로 온몸에 상처를 입었을 정도이니, 라이너였다면 정말 위험했을 터였다.
바람 때문에 뜨기 힘든 눈을 가 까스로 떠 시야를 확보했다.
' 아파••••••
몸을 조금 달싹거리는 것도 쉽 지 않았다.
난 온몸을 강타하는 고통을 가 까스로 참으며 손을 내려다보았 다. 끼고 있던 검은 장갑은 넝마 처럼 찢어졌고, 옷이 가리지 못한 피부는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무리 체내 마나 양이 비정상 적일 정도로 많은 나라도 오늘처 럼 마나를 줄줄 흘리고 다닌 날엔 다시 마나가 회복되기까지 시간이 걸렸기에, 몸속에 남은 마나는 거 의 없는 수준이었다.
'다행이야.'
상태는 최악이었으나 우습게도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용병으로 살며 수많은 생사의 고비를 넘겼을 땐 별 감흥이 없었 건만, 오늘은 살았다는 사실이 숨 막히도록 가슴이 벅찼다.
나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떨어지기 직전, 순간 이동 아티 팩트를 발동시킨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순간 이동
아티팩트를 여러 개 챙긴 참이었 다.
맨몸으로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당연히 멀쩡하지 못할 것이다. 그 러나 지금은 마나도 얼마 없었고 방어막을 만들 기력도 없었다.
이 높이에서 순간이동을 하면 높이까지도 함께 이동되어 이동된 장소에서 떨어지기 시작할 테니, 지면에 닿기 직전에 순간이동을 해서 아주 낮은 높이에서 떨어지 는 꼼수를 부릴 생각이었다.
나는 발버둥치는 벌레처럼 꿈틀 거리며 주머니에서 힘겹게 순간이 동 아티팩트를 꺼내 손에 쥐었다. 붉은 피가 아티팩트를 물들였다.
'5초 뒤에 시동어를 외운다.'
지면과의 거리를 눈대중으로 확 인하고 결심했다. 차가운 바람에 시린 눈을 감으며 시동어를 외우 기 위해 천천히 입술을 뗄 때.
훅
허공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내
몸을 잡아챘다.
번뜩 눈을 뜬 나는 다가오는 기 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에 당황하다, 상대방이 순간이동으로 나타났음을 알아차렸다.
단단한 두 팔이 안정적으로 나 를 안아 들었다.
무척 낯선 듯하면서도 지나치게 익숙한, 서늘하고 불쾌한 마력이 었다. 그리고 후각을 마비시키는 시린 겨울의 향취.
"......지그문트?"
나는 그냥 뜨기도 힘든 눈을 크 게 뜨며 얼빠진 채로, 내가 사람 들에게 품은 여러 종류의 감정 중 가장 복잡하고 지독한 감정이 물 든 이름을 중얼거렸다.
탁
지그문트는 나를 안아 들고도 아무것도 들지 않은 양 아무도 없 는 골목길에 착지했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자수정을 빼어 박은 듯 아름다 우나 늘 겨울 한가운데에 있는 것 처럼 차갑던 두 눈은, 내가 이전 에 본 적 없는 세기로 거세게 불 타고 있었다.
"그래. 아주 미친 모양이더군. 터지기 직전의 폭탄을 가지고 올 라갈 생각을 다 하고 말이야. 살 신성인의 정신으로 폭탄을 안고 죽을 생각이었나? 넌 예나 지금 이나 무식하기 짝이 없군. 대체 그 무모한 정신엔 발전이라는 게 없나? 그렇게도 명을 재촉하고 싶었나 보지?"
빙하처럼 꽝꽝 언 낮은 목소리 가 나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나는 순간 울컥해 그와 치고 박 고 싸우던 어린 날처럼 사나운 말 을 뱉으려 했으나,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이건, 꼭 걱정하는 것 같잖아.'
걱정이라니, 극에 다다른 지그문 트와 나의 사이에서 지독하게 어 울리지 않는 단어였지만, 얼핏 화 나 보이는 얼굴이나 비난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다급한 투는 분명 걱정 같았다.
'이 새끼가? 나를? 왜?'
분명 지그문트라면 내가 다치든 말든 아무런 관심이 없고, 내가 죽으면 오히려 기뻐하며 축제를 열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 은 채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가 명을 재촉하든 말든......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않나?"
자각 없이 날카롭게 나간 말에 지그문트가 멈칫했다. 감정을 감 추는 것엔 누구보다 뛰어난 그였 기에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싸한 무표정에 불과했겠지만, 내 눈엔 보였다.
지그문트는 지금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이 자식 왜 이러는 거지?'
예상치도 못한 행동과 말을 하 며 저 스스로 동요하는 지그문트
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동요해 버 렸다.
폭탄 해체를 도와준 것부터 떨 어지는 나를 잡아 준 것과 걱정하 는 듯한 어투까지, 모두 그답지 않아 나는 반쯤 넋을 잃고 눈을 끔뻑였다.
"......그렇지."
한참 말없이 동요하던 지그문트 가 작게 긍정했다. 묘하게 무너지 던 표정은 수습한 뒤였으나, 그의 동공은 여전히 희미하게나마 혼들
리고 있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이지."
내 인생 최대의 개자식이 되겠 다고 한 주제에 애매하게 행동하 는 것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 라보았으나, 그는 느리게 눈을 감 았다 뜰 뿐이었다.
"......그러게."
답을 달라고 하였건만, 돌아오는 것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중얼거림
이다.
나는 묘하게 속이 울렁거려 살 풋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면, 지그문트는 내게 직접적으로 악의를 드러낸 적이 없어.'
여태껏 그와 세 번 만나는 동안, 그가 먼저 내게 악의나 살기를 드 러낸 적은 없었다.
첫 만남에 내게 단도를 던진 적 이 있긴 하지만, 그건 이전부터
그와 내가 앙숙 같은 악우 사이였 다는 걸 감안했을 때 정말 날 해 하려고 했다기보단 장난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 싸울 때도 지 그문트는 진심으로 싸우지 않았 다. 오러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두 번째 만남엔 레이샤의 유품 을 두고 어쩔 수 없이 싸웠던 것 에 가까웠다. 말로는 사람을 미치 게 하지만, 그 또한 어디까지나 말뿐이었다.
나는 그의 생각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지그문트는 내게 있어 최 고의 난제였다.
"......미치겠군."
지그문트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 다.
당장이라도 내 시선을 피하고 싶다는 듯 곤란한 안색을 하면서 도 나를 더 단단하게 고쳐 안는 그의 팔은 내 상식선을 벗어나 있 었다.
지그문트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비단결 같은 검은 머리칼이 흘러 내려 내 얼굴 위를 살풋 간지럽혔 다. 혼들리는 그의 머릿결에선 어 느 곳의 겨울일지 모를 지독한 추 위의 향취가 풍겼다.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나를 마 주할 때면 묘하게 일렁이는 두 눈 에는, 미묘한 혼란과 자기혐오, 괴로움 등이 얼룩져 있었다.
'••••••젠장.'
난 입술을 짓씹었다.
한 번 도움받았다고 의심이 풀 려 버린 건지, 아니면 온몸이 아 프고 정신은 몽롱해 긴장이 풀려 버린 건지, 나는 지그문트의 시선 이 이전만큼 나쁘지는 않다고 생 각해 버렸다.
한참 나를 바라보던 그는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이 지경까지 왔는데...... 널 마 냥 싫어할 수가 없다면, 대체 어 떻게 해야 할까."
"••••••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정말 희 미한 소리였기에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반문하려는 순간.
쿵.
지그문트가 날 안아들고 있던 손을 훅 빼며 나는 땅으로 뚝 떨 어졌다. 이미 온몸이 지치고 다쳐 감각이 무뎌진 데다 너무 갑작스 러운 충격이었던 탓에, 나는 대비
조차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땅에 부딪쳐 신음을 흘렸다.
"이 새끼가......!"
"떨어지는 널 받아 준 건...... 그냥 변덕이었던 걸로 하자."
내가 화를 내든 말든 무뚝뚝하 게 말한 지그문트가 손을 까닥여 마법진을 펼쳤다. 언제 봐도 경이 로운 마법 전개 속도를 잠시 시선 이 팔렸을까, 그가 작게 중얼거렸 다.
"변덕이 아니면...... 무척 곤란
해지니까."
파앗!
그리고 지그문트는 나타났을 때 와 같이 조용하고 신속하게 사라 졌다. 만남의 여운처럼 주위에 남 은 그의 서늘한 마력만이 그가 여 기에 있었음을 증명했다.
'대체...... 뭔데.'
안 그래도 몸이고 정신이고 지 쳐 있는데 마음 위로 거대한 바위 하나가 더 얹힌 느낌이다.
나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흔들 리기 시작한 시야를 바로잡으며 가까스로 자리에 일어났다.
'우선,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해.'
지그문트고 뭐고, 너무 지쳐 우 선 어디에든 들어가 쉬고 싶은 마 음이 내 생각을 지배했다. 나는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건 멍청한 짓이었다.
"저, 저기 미르다!"
그냥 바로 순간이동 아티팩트를 사용했어야 하는 것을, 나는 멍한 정신에 골목길을 걸어 광장으로 나오며 사람들과 마주치고 말았 다.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낱낱이 파헤쳐지는 느낌 에 당황한 나는 움찔 뒷걸음질 쳤 다.
공포와 경외, 의심과 동경. 수많 은 이들이 각각의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나를 바라보았으나, 나는 그저 스스로가 우리 안 원숭이처 럼 느껴질 뿐이었다.
"미르!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일 어났던 겁니까!"
차마 내게 말을 걸지도 못하고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어떤 용감한 이의 질문을 시작으 로 내게 질문을 쏟아붓기 시작했 다.
"방금 전에 폭탄이 터진 거 맞 죠? 폭탄에서 우리를 구해 주신
건가요?"
"폭탄은 누구의 소행입니까!"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시 끄러운 질문들에 속이 울렁거렸 다.
내게 다가오지도 못하면서 멀리 서 질문을 쏟아내는 사람들은 단 순히 물어보는 것뿐이었지만, 한 계까지 몰아붙여진 내겐 폭력처럼 느껴졌다.
'피곤해.'
몇몇 이들이 영웅이라 칭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의심스럽게 수 군거리는 소리도 따갑게 귀를 울 렸다. 난 그 무엇에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문득 순간이동 아티 팩트를 손에 쥐고 있음을 자각한 나는, 망설임 없이 시동어를 외웠 다.
" 텔레포트."
쉬익!
거센 마나의 돌풍과 함께 속이 울렁거리고, 이내 시야가 뒤바뀌
었다.
이전에 광장과는 다르게 한없이 고요한 주위에 약초 냄새, 옅은 햇빛이 비추는 평화로운 곳.
한때 아리아의 약을 만들기 위 해 고군분투한 곳이자, 레오와 디 에고가 머물고 갔던 숲속 오두막 이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풀썩 쓰러져 기듯이 몸을 옮겨 간 이침대 위에 누웠다.
저택 사용인들 중 내가 미르임 을 모르는 이들도 있고, 이 꼴로 저택에 돌아갔다간 내가 미르일지 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질 수 있었 기에 저택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가족들한테, 연락을......
침대에 눕자마자 급격한 속도로 진이 빠진 나는 곧바로 잠들 뻔했 으나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주머 니에서 통신구를 꺼냈다. 이 오두 막의 존재를 아는 아리아에게 난 오두막에 있다는 짧은 메시지를 보낸 직후 손에 힘이 풀려 통신구
를 툭 떨어뜨려 버렸다.
'이제, 쉬자.'
나는 모든 문제들을 잠시 내려 놓고 눈을 감았다. 깊은 수마가 나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