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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33화 (133/254)

133 화

크리시스 공작가의 대저택.

오직 크리시스의 혈육만 착석할 수 있는 긴 탁자 앞에 둘러앉은 세 사람에게로 한겨울 칼바람보다 차갑고 날카로운 침묵이 흘렀다.

"오늘로 슈슈가 깨어나지 못한 지 사흘째다."

누군가 무심코 이 공간에 발을

들였다가는 즉각 공기에 압사당할 것 같은 분위기 아래,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카이사르였다.

그 사흘 동안 각자 자신들을 추 스르기 바빴기에, 테러 사건 이후 이제야 처음으로 세 사람이 모여 앉은 참이었다. 카이사르는 그 한 마디 이후 입을 꾹 다물었고, 한 동안 또 긴 침묵이 흘렀다.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깍지 낀 두 손을 입 앞에 둔 채 허공을 응시하던 칼이 느리게 입

을 열었다.

안 그래도 무감정하던 그에게 냉기까지 깃들자 이제 그의 얼굴 은 얼음으로 만든 조각상 같았다.

"어째서 늘 슈슈가 희생해야 하 는 겁니까? 이전에 마수 토벌을 위해 루주 마을로 갔을 때도 그렇 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 의 희생으로만 세상의 안위가 존 속될 수 있는 겁니까? 누군가의 희생으로만 존속되는 세상은...... 애초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거 아 닙니까?"

말은 분명 낮고 침착한 목소리 로 이어졌으나 내용은 조금도 침 착하지 않았다. 빛이 들지 않는 붉은빛 눈동자에 섬뜩한 광기가 일렁였다.

"가장 이해되지 않는 건 그 아 이입니다. 어째서, 대체 왜!"

쾅!

꽉 쥐인 주먹이 탁자를 강하게 쳤다. 탁자 표면이 갈라지며 긴 탁자가 부르르 떨렸다.

아버지와 여동생 앞에서 하기엔 지나치게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카 이사르와 아리아, 둘 다 말이 없 었다. 정확히는 각자의 상념에 빠 져 말을 할 정신도 없는 것 같았 다.

"널리고 널린 인간들의 생사가 뭐가 중요하다고 혼자 나서서 희 생하는 겁니까? 그것들이 우리가 걱정하는 것보다 중요하답니까?"

따지는 듯한 물음엔 거대한 감 정의 파도가 출렁이고 있었다.

"슈슈는...... 우리를 지키기 위 해 수도를 지킨 거야."

팔꿈치를 탁자에 얹은 채 이마 를 짚고 있던 아리아가 중얼거렸 다. 대답을 했다기보단 스스로 세 뇌하듯 되새기는 모양새였다.

탁자 어딘가를 의미 없이 응시 하는 푸른 눈은 소름끼치도록 감 정이 없는 채로 번뜩이고 있었다.

"대체 누가! 그렇게 지켜 달라고 했나! 그 아이가 만신창이가 되어

떨어지는 꼴을 보느니 수도가 폭 탄과 함께 터지는 게 나았어! 그 아이의 희생 따위 원치 않았단 말 이다!"

칼의 언성이 높아졌다. 인간보단 기계나 조각에 더 가깝다고 수군 거릴 정도로 감정이 없던 그는, 그 소문이 무색하게도 가감 없이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공을 바라보던 푸른 눈이 칼 에게로 향했다. 창백하게 죽어 있 던 하늘에 살의가 들끓었다.

"누구는 안 그래? 나도 그래. 나는, 죽고 싶어, 개새끼야."

짓씹듯 내뱉는 목소리는 참혹한 진실만을 담고 있었다.

그 살의는 자신을 향한 것이었 다.

"아무리 필사적으로 달려도 늘 등만 보고 있는 느낌이었어. 절대 앞지를 수 없었지. 너무 빨라서 속도를 맞춰 걸을 수도 없었어. 그 등 뒤를 좇으며 뒤처지지 않는 게 최선이고, 그마저도 버거웠어.

이제야,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 데......

목소리가 심해 아래로 잠겨 들 었다.

아리아의 낯은 금방 눈물을 터 트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참 혹하게 일그러져 있었으나, 구름 낀 하늘은 절대 빗방울을 떨어트 리지 않았다. 빛을 잃고 흐려질지 언정 물이 고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기였고, 자존심이었다.

아리아에게 카슈미르는 이상향

이었다. 절대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추구하고야 마는 이상향.

몸이 나은 뒤 영혼을 갈아 마법 을 배우며 이제야 그 옷자락에 닿 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결국 그 등 뒤에서 벗어 나지 못했구나. 그 몸이 상처투성 이가 되는 꼴을 또다시 봐야만 하 는구나."

비참함과 자기 혐오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아리아는 끊임없이 생

각했다.

나는 어째서 당신보다 강해질 수 없지? 당신과 같은 곳에 서고 싶었는데, 당신은 늘 나를 아득히 앞서 간다. 이렇게까지 나를 비참 하게 만드는가.

나는 끝까지 당신에게 지켜져야 만 하는 걸까.

일대로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 다. 말문이 턱 막힌 표정을 지은 칼이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돌려 버렸다.

칼은 끊임없이 카슈미르를, 미르 를 떠올렸다.

그가 미르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감정은 흥미였다. 사랑같이 비이 성적이고 비논리적인 재난이 아 닌, 가벼운 흥미.

이전까지 칼 크리시스의 인생에 서 인간이란 딱 두 종류로 나뉘었 다. 흥미로운 사람과 흥미롭지 않 은 사람. 미르는 그중 전자에 속 했고, 얼마 없는 흥미로운 것들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것이었

칼 크리시스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우연히 만난 그 흥미로운 존재가 그를 통째로 집어삼켜 버 릴 것이라는 걸.

그 흥미에서 광기 어린 집착이 피어나고, 그 끝에 애정이란 열매 가 달리는 것은 그의 예상 범위 내에 없었던 일이었다.

그 존재는 '흥미로운'이란 형용 사를 집어삼키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가장 깊은 곳에 새겨놓았

다. 칼은 더 이상 카슈미르에게서 흥미를 찾지 않았다.

이제 칼 크리시스에게 있어 '카 슈미르'는 미르도, 크리시스도 아 닌 '슈슈'였다.

이제는 그녀가 흥미롭지 않아도 좋았다. 아주 지루하고, 진부하며, 고루한 데다 무식하기까지 한 사 람이어도 좋았다. 강력한 소드 마 스터가 아니어도 좋았다. 대륙 전 체를 통틀어도 몇 없다는 황금 방 패 용병이나, 사람들에게 칭송받 는 영웅이 아니어도 좋았다.

그의 눈길을 끌던 생명력을 잃 고, 흑암 속에서도 빛나던 진분홍 빛 눈동자가 더는 빛나지 않는다 해도 좋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옆에서 살아 숨 쉬어 주기만 한 다면, 그것으로 좋았다.

"이런 거 원치 않았는데......

한 손으로 눈을 덮은 칼이 먹먹 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 다.

당사자가 원치 않은 구원은 폭 력이 었다.

"......다들, 조금씩 진정하는 게 좋겠군."

탁자 상석에 앉아 칼과 아리아 의 논쟁에도 아무 말 없이 자리만 지키던 카이사르가 이제야 입을 열었다. 연륜이 헛것은 아닌 듯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침착했지 만, 두 눈에 서린 동요까지 지우 지는 못했다.

카이사르는 근 사흘 동안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오직 방에만 머 물며 생각했다.

어째서 카슈미르가 그에게 테러 소식을 알리지 않았는지.

축제에 빠지겠다고 했을 때 뭔 가 일이 생길 것이라는 걸 예상하 긴 했으나, 설마 테러일 줄은 상 상도 못 했다.

아니, 테러 같은 일을 앞에 두고 도 그에게 언질 한번 주지 않으리 라곤 상상하지 못했다는 것이 맞 을 것이다.

이제 카슈미르가 어느 정도 그 에게 의지한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났던 카슈미르는 카이사르를 오 직 '공작'으로 보았던 것 같지만, 이젠 그를 가족으로 보고 있다고 지레짐작했다.

그런데 결국 카슈미르는 또다시 모든 걸 혼자 해 냈고, 그는 아무 것도 도와주지 못했다. 심지어 카 슈미르가 폭탄을 처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 그는 그 자리에 있 지도 않았다.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카이 사르 크리시스는 스스로가 지독히 무능해지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 다.

카이사르는 진창으로 빠지려는 기분을 애써 끌어올리며 카슈미르 가 깨어났을 때를 고민했다.

카슈미르는 현재 몸이 완전히 회복된 상태였기에 곧 깨어날 텐 데, 그 아이와 다시 마주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화를 내야 하나? 왜 말도 하지 않고 스스로를 위험으로 밀어 넣 었냐고?

하지만 그에게 이런 말을 할 자 격은 있는가.

온몸을 희생해 목표를 쟁취하는 것. 그것은 카슈미르가 용병으로 살며 배운 방식이었고, 어렸던 아 이가 용병으로 살아야 했던 건 다 름 아닌 카이사르의 부재 때문이 었다.

카이사르가 어린 카슈미르와 줄

곧 함께해 줬다면, 카슈미르가 용 병이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럼 혼자 모든 것을 무모하게 처리 하려 하는 성향 또한 없었을 것이 다.

카이사르는 차오르는 울분을 억 눌렀다. 이런 격렬한 감정은 익숙 하지 않아,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수습하는 데엔 꽤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면 대체 뭐라고 해야 하 나. 수도를 지키겠다고 혼자 폭탄 을 향해 달려든 아이에게.

잘했다고 격려를 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꾸짖을 수도 없고, 아무 말 없이 지나갈 수도 없었다.

사실은 카슈미르의 얼굴을 보면 사흘 동안 겨우겨우 억눌렀던 감 정이 모두 쏟아질 것 같아 마주할 자신조차 없었다.

자신의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카이사르 크리시스는 아득한 두려움을 느꼈다. 강하게 깍지 낀 두 손이 희미하게 떨려 왔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 언젠간

그 아이가 정말 죽어 버리면 어떡 하지.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인간 인데.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나선 아이 가 어느 날 시체로 돌아왔을 때, 자신은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고 버틸 수 있는가.

수많은 색의 상념들이 뒤섞여 머릿속이 이도저도 아닌 색으로 물든다.

침잠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카이사르는, 느리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혼자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위험한 일이 생길 시 무조건 연락할 것' 같은 규칙 을 만든다고 해도, 카슈미르라면 누군가 위험해지는 순간 망설임 없이 그 규칙을 어길 것이라는 것 을 그는 알고 있었다.

카슈미르 크리시스는 경로를 읽 을 수 없는 폭풍이었다. 잡을 수 도, 어딘가에 가둘 수도 없고, 예 고 없이 몰아치기 시작하는 거대 한 바람.

그는 카슈미르에게 명령하고 싶 지도, 강압적으로 굴고 싶지도 않 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카슈미르 의 의견이었다.

카이사르는 굳은 물감처럼 버적 거리는 상념들을 모두 긁어내고 심호흡을 했다.

"둘 다 생각 정돈해라. 슈슈 보 러 갈 시간이다."

카이사르의 말에 칼과 아리아는 각자의 방식으로 생각을 정리했

모두 하나같이, 오늘은 카슈미르 가 깨어나길 바라고 있었다.

"......어먹을, 의원이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조급하게 굴지 마, 칼 크리시 스. 언니는 내 치유력으로 이미 완벽히 회복했어."

"그럼 왜 여태껏 못 깨어나고 있는 건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개자식

아! 나한테 시비 거냐?"

"둘 다 그만해라."

날카로운 언성이 바로 옆에서 오가며 귀를 따갑게 찔렀다. 익숙 한 목소리들이었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느리게 눈을 떴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어도 잠을 아주 오래 잤 을 때처럼 몸이 노곤하다는 것에 서 내가 오랜만에 눈을 떴음을 느 낄 수 있었다.

나는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눈

을 몇 번 깜빡이다, 메마른 입술 을 달싹였다.

"......아."

갈라지는 목소리를 낸 나는 목 이 턱 막히는 느낌에 다시 입술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사 막을 해매며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여행자처럼 목이 건조했다.

마른기침을 몇 번 하고 있었을 까, 번뜩이는 세 쌍의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이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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