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34화 (134/254)

134 화

" 언니!"

덜컹.

하늘색 눈동자를 크게 뜬 아리 아가 내게 달려들었다. 약한 간이 침대가 크게 혼들렸다. 나는 내 품에 안겨드는 아리아를 익숙하게 받으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아리아."

목소리가 천파만파로 갈라졌다. 몸은 완벽히 회복된 것 같았지만, 오랜 수면으로 잠긴 목은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내 목소리를 듣고 인상을 왈칵 찌푸린 아리아는 제 검지로 내 아 랫입술을 꾹 눌렀다. 보송한 깃털 이 입술 위로 내려앉는 듯했다.

"입 벌려."

나는 순순히 입술을 열었고, 이 내 시원한 물줄기가 입 안으로 흘

러 들어왔다. 나는 군말 없이 물 을 받아 마시며 천천히 아리아를 살폈다.

'......머리가 짧아졌구나.'

치렁치렁하던 분홍색 머리칼이 맹렬한 화염 아래 불타오르던 순 간을 떠올렸다. 테러 사건이 끝난 뒤 머리를 한 번 다듬은 건지, 삐 뚤삐뚤하게 그을렸던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는 길이로 깔끔히 정돈 되어 있었다.

나는 눈을 내리깐 채 아리아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다, 고개를 들 어 카이사르를 바라보았다.

여태껏 나를 응시하고 있던 붉 은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의 눈 빛에서 깊은 착잡함을 읽어 낸 나 는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잠시 작은 오두막 안으로 무거운 침묵 이 감돌았다.

"일은 잘 정리됐다."

내가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달 싹이는 찰나, 카이사르가 입을 열

었다. 그의 표정은 여느 때와 같 이 단단한 포커페이스였으나 내 눈엔 피부 톤에 맞지 않는 확장을 한 듯 어색하게 보였다.

"네가 쓰러진 지는 사흘이 지났 다. 테러 사건의 정확한 범인은 잡지 못했다. 대외로 알려지진 않 았지만...... 위에선 북부와 고위 귀족이 힘을 합쳐 벌인 짓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북부인들이 큰 검 열 없이 수도 내로 들어온 것 자 체가 권력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 하니. 대외적으론 정체불명 괴한 들의 테러를 미르가 막은 것으로

알려졌다. 카슈미르 크리시스에 대해선 급격한 건강 악화로 인해 잠시 수도 바깥으로 요양을 갔다 고 알렸다. 이 상태인 너를 저택 으로 옮기다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지면 곤란하니 너는 계속 이곳 에 머물게 했고. 너와 함께 폭탄 을 처리한 라이너 아인하르트는 폭탄의 존재를 상부에 알리지 않 았다는 점에서 지위 박탈감이지 만...... 폭탄을 성공적으로 처리했 다는 점에서 근신 처분만 받았 다."

카이사르는 천천히 상황을 설명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눈을 굴려 눈치를 살폈다.

내 옆에 앉은 아리아도, 벽에 등 을 기댄 칼도, 의자에 앉아 있는 카이사르도 말이 없었다. 세 사람 얼굴 위로 짙게 깔린 복합적인 감 정들이 내 심장을 쿡쿡 건드렸다.

'죽여줘......

나는 진심으로 내 목덜미를 쳐 서 엎어져 기절하고 싶었다. 세 사람 다, 버럭 화라도 내면 차라 리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조개처

럼 입을 꾹 다물었으니 어찌해야 좋은지 알 수 없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미친 듯이 눈을 굴리던 나는 이 내 숨을 크게 들이쉬며 침묵을 깨 뜨렸다. 깊은 생각에 잠겨 허공을 표류하던 카이사르의 붉은 눈동자 가 나를 담았다.

그 묵묵한 시선에, 어디까지 말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던 나는 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테러리스트 일당 중 내부 고발 자가 있었습니다. 내부 고발자가 누군지는...... 발설하지 않기로 약 속해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죄 송합니다. 아버지가 나서면 테러 리스트 쪽에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챌 것 같았습 니다. 함께 움직일 가장 합당한 이가 라이너 아인하르트 경이라 생각했고......

"나는."

최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을 때, 카이사

르가 말허리를 뚝 끊었다. 감정을 꾹꾹 억누르고 있는 목소리에 떨 리는 시선으로 그를 마주했다.

입술을 거칠게 짓씹은 카이사르 의 얼굴이 얼핏 일그러졌다.

"네가 좀 더 감정적이고, 네 나 이다워도 좋다."

토해 내듯 터져 나오는 낱말들 엔 모순적이게도 감정이 절제되어 있었다. 절제되어 있었기에 더 슬 프게 들렸다.

"앞뒤 재지 않고 내게 말했어도 괜찮았을 거다. 그랬다면, 내가 어떻게든 도왔을 거다."

나는 침묵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폭탄에 뛰어든 것은 조금도 후 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카이사르 의 반응을 두 눈으로 담으니, 이 전에 말해 주지 않은 것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회의감이 드는 것이 다.

그럴 의도는 없었다고 해도, 내 가 카이사르에게 언질하지 않았다 는 건 어떻게 보아도 내가 그를 불신한 것으로 보였다.

"너를 어쩌면 좋을까."

한탄처럼 입술 새로 새어 나오 는 카이사르의 한마디가 내 심장 을 꽉 조였다. 그의 딸이 된 이후 부터 좋은 모습은 보여 주지 못하 고 계속 비슷한 일들로 카이사르 를 힘들게 하는 것만 같았다.

" 나는••••••

말문을 연 카이사르는, 입만 살 짝 벌린 채 한참 동안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그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너를, 사랑한다, 슈슈."

바다를 막던 댐에 금이 가고, 거 대한 파도가 그 금 사이를 터트리 듯 비집고 나오는 것 같았다. 고 해성사하는 죄인처럼, 비밀을 토 해 내는 사람처럼 뱉어 내는 말 에, 나는 숨을 멈추었다.

"네가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네 가 멀쩡히, 내 곁에 있어 주었으 면 했다. 그래서 애초에 다칠 일 이 없도록 안전한 곳에 그저 머물 기만 하도록 하고 싶기도 한 데...... 너는 그걸 바라지 않겠 지."

카이사르는 모래에서 금을 골라 내듯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의 붉은 두 눈에 집착 에 가까운 무언가가 얼핏 스쳤으 나 금방 사라졌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해 주고 싶다. 그런데 네가 위험한 건 또 싫어.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 다."

조금도 다른 색을 덧씌우지 않 은 투박한 진심이 전해져 왔다. 없는 거 없이 모두 가진 카이사르 크리시스는, 민낯을 보이듯 무겁 게 무지를 고해 왔다.

"넌 어떻게 하고 싶으냐."

피를 담아 고체로 굳힌 듯 짙은 붉은빛의 눈동자가 나를 온전히

담아냈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사람과의 관계는 어려웠다. 해치 운다고 되는 것도, 그저 찍어 누 른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 서 로를 알아 가고, 탐색하며, 아주 다른 와중에 중간을 찾아 서로에 게 맞춰 간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내게 무척 어려워서 차라리 거대 마수 10마 리를 때려잡는 게 더 쉽다고 느껴 질 정도였으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내 가족을 사랑했으니까. 내 멋대로만 할 수는 없었다.

"저는...... 아버지가, 절 조금 더 믿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머뭇거리던 나는, 아주 조심스럽 게, 꽤 이기적인 말을 뱉었다. 처 음 뱉어 봤다고 느낄 정도로 어색 했다.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주저 하던 찰나, 묵묵하게 나를 지지하 는 카이사르의 눈빛을 보고 다시 금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저는 이곳을 지키고 싶습니다. 제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이니까 요. 아시다시피 저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저를 좀 더 믿고 지켜 봐 주셨으면 합니다."

알았다. 내가 위험에 뛰어드는 것은 가족들에게 무척이나 상처가 된다는 것을.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멈출 수 없었기에, 그저 믿 어 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위험에 처했을 때 가능하 다면 꼭 연락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안전한 길을 선택하겠 습니다."

나는 땅바닥만 뚫어져라 쳐다보 며 작게 말했다.

반드시 연락하겠다, 무조건 안전 한 길을 택하겠다곤 말할 수 없었 다. 나는 연락을 해선 안 되는 상 황에 놓일지도 몰랐고, 안전한 길 이 아니라 위험한 지름길을 선택 할 수밖에 없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더 이상 무작정 목숨 을 걸지는 않을 것이다. 최선의

길과 안전한 길 중 고민도 하지 않고 전자를 골랐던 이전과는 다 르게 한 번 더 생각해 볼 것이고, 돌아갈 집과 나를 기다리는 사람 들이 있음을 명심할 것이다.

위험해지는 길을 걷더라도 조심 하게 된 것은 내게 있어 매우 크 게 달라진 점이었다.

"••••••그래."

카이사르의 대답이 바위처럼 내 려앉았다. 그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너를 믿는다."

그것은 허락이었다. 내가 무얼 하든 지지해 주겠다는 뜻. 나는 울컥하고 치미는 감정에 아무 말 도 하지 못했는데, 의자에서 일어 나 내 앞으로 다가온 카이사르가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 다.

"테러 이후에 폭탄이 설치되었 던 장소에서 시체 세 구가 발견되 었다."

그 한마디에 심장이 철렁 내려 앉는다. 무슨 시체를 말하는 것인 지는 자명했다.

'••••••글렌.'

내가 평생 잊지 못할 이름. 내가 죽인 아이.

숨이 턱 막혔다. 나는 떨리는 눈 으로 카이사르를 바라보았다. 속 절없이 요동치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나를 빤히 응시하던 카이 사르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아마, 네가 죽인 모양이더구 나."

속이 마구 뒤틀렸다. 속 안의 장 기를 모두 게워 낼 수 있을 것 같 았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카이사르가 이 말을 꺼낸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다. 그리고 떠오르 는 단 하나의 생각.

카이사르가, 내가 사람을 죽였다 는 것에 실망하면 어떡하지.

창백하게 질린 나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시, 실망하셨습니까?"

"괜찮으냐, 슈슈?"

"••••••네?"

"뭐?"

거의 동시에 말한 나와 카이사 르는 각자의 말에 놀라 서로를 바 라보았다.

"......실망이라니, 그게 무슨 소 리냐."

얼굴이 굳은 카이사르가 되물었 다. 나는 목울대를 울렁여 침을

삼켰다.

"제가...... 함부로 사람을 해쳐 서 실망하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습니다."

우스운 꼴 아닌가. 사람들을 지 키는 것이 신념이라고 말한 주제 에 사람을 죽였으니.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카이사 르가 잠시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짓다 굳게 대답했다.

"나는 네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네게 실망하지 않는다. 내가 이 말을 꺼낸 건 네가 걱정되어서 야."

카이사르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 어 내 뺨을 덮었다. 붉은색 눈동 자가 슬픈 기색을 띠고 반짝였다.

"너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싶어 했잖느냐."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입술을 짓씹었다.

아. 피를 본 주제에 이 다정함에

안위하면 안 되는데.

나를 걱정하는 한마디에 우습게 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울지 않기 위해 얼굴을 일그러 뜨리는 나를 본 카이사르가 한숨 처럼 말을 뱉었다.

"나는 무엇이든 극복해 나가는 네가 무척 자랑스럽다. 하지만 너 는 모든 것을 지나치게 빨리 극복 해 버려. 아물지 않은 상처들을 아무렇게나 덮어 버리는 것 같 다."

카이사르는 알았던 걸까. 죽어 가는 글렌의 잔상이 눈앞에서 아 른거리는데도, 내가 어떻게든 억 지로라도 극복하려 했다는 걸.

필사적으로 표정을 정리하는 내 게 얼굴을 가까이한 카이사르가 낮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어떠한 것은 한바탕 앓고 나서 야만 넘어갈 수 있는 법이다. 어 린 날의 홍역처럼."

앓고 나서야만 넘어갈 수 있다.

그 한 문장이 지독하게 가슴을 울 렸다.

그래. 그런 것도 있을 터인데, 내겐 앓고 있을 시간이 없었던 것 만 기억났다. 아무리 아파도 급히 상처를 지혈하고 바로 다른 상처 의 고통으로 이전의 고통을 잊는 것이 내 방식이었다.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힘들었다, 역시. 의도가 어떠했 든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내게 각인으로 남아 평생 지워지지 않

을 것 같았다.

"그러니 극복하기 전에 충분히 앓아도 좋다. 네가 앓고 갈 품을 내어 줄 테니."

허나 이제 내겐 앓고 갈 수 있 는 품이 있어서, 그렇게 힘들지만 은 않을 것도 같았다.

카이사르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울었다. 젖어 가는 제 옷엔 시선도 주지 않은 그는 끊임 없이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가 내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 다.

"수고했다, 슈슈.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맙다."

아. 이곳이 내가 돌아올 집이었 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