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화
테러가 일어나고 일주일 뒤.
몸은 완벽히 회복되었고, 어제부 로 '카슈미르 크리시스'도 요양을 다녀왔다는 설정 아래 무사히 저 택으로 돌아왔다.
테러로 인해 제국은 완전히 뒤 집어졌다. 폭탄이 북부의 소행이 라는 것이 알려지며 제국민들은 공포에 빠졌고, 귀족들은 회의에
돌입했다.
폭탄에 대한 수사로 인해 이틀 간 축제가 전면 중지되었다고는 하나, 내가 일어난 사흘째 날부터 는 축제가 재개되며 수도는 다시 북적거렸다. 오늘은 축제의 마지 막 날로, 호수 위에 등불을 띄우 는 날이었다.
그리고 라이너와 약속이 있는 날이기도 했다.
'어디 있지.'
나는 광장 입구에서 주위를 두 리번거렸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포니테일로 높게 묶어 올린 긴 머 리가 혼들려 양 뺨을 간지럽혔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나는, 길거리 가게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잠 시 응시했다.
하얀 와이셔츠에 남색 조끼, 하 얀 승마 바지에 검은 부츠. 귀족 들이 사용하는 실크가 아니라 평 민들이 사용하는 투박한 천으로 제작된 옷들.
흡사 길거리 집시 소년을 연상
케 하는 가벼운 복장은 귀족이 귀 족을 만나러 가는 옷차림과는 거 리가 멀어 보였다.
'다른 귀족들이 보면 천박하니 뭐니 소문이 날 것 같다만...... 뭐, 상관없지.'
유리창에 비친 내 입꼬리가 부 드럽게 올라갔다.
귀족들이 축제를 즐기는 방법은 마차를 타고 시내를 구경하거나 산책로를 짧게 걷는 정도가 고작 이었다. 품위를 유지한다는 이유
로 평민들의 노점상엔 발도 들이 지 않았다.
'노점상이야말로 축제의 꽃인 것 O '
축제는 평민으로서 즐겨야 진정 으로 즐겼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내가 평민처럼 입은 것도 그 때문 이었다.
"카슈미르. 여깁니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시간을 확인하며 기웃거리고 있을 때, 익
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유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
끝나가는 봄 무렵의 뜨거운 태 양 아래에서 은회색 머리칼이 달 처럼 빛났다. 햇살을 닮은 황금색 두 눈이 상냥한 빛을 머금었다.
"라이너."
그곳에 그가 있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한달음에 내게 다가온 라이너가 빠르게 내 몸부터 살폈다. 통신구 로 약속을 잡으며 몸은 완벽하게 회복이 되었다고 몇 번이고 말했 건만, 그는 무척 걱정스러운 기색 이었다.
'하기야, 걸레짝이 돼서 하늘에 서 떨어지는 게 마지막 모습이었 으니.'
조금 씁쓰름하게 웃었다. 라이너 에게 무거운 마음의 짐을 안겨준 것만 같았다.
나는 그에게 내 건강함을 증명 하기 위해 이리저리 팔을 돌렸다.
"멀쩡해서 탈입니다. 제 회복력 아시지 않습니까."
'여기서 칼춤도 출 수 있습니 다.' 장난스럽게 덧붙이며 자연스 럽게 라이너의 옆에 섰다. 갑작스 럽게 거리를 좁히자 멈칫하던 그 는 이내 한숨처럼 웃었다.
"......무척 염려했는데 다행입니 다, 카슈미르."
금빛 눈동자로 안도가 물드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 의 걱정에 심장이 조금 물렁해져 머리를 긁적이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살짝 얼굴을 굳혔다.
"근신 처분을 받으셨다고 들었 습니다만."
"아. 그거 말입니까."
내가 착잡하게 물으니 라이너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 다. 나는 혹여 이번 사건 때문에 라이너의 자리가 위태로워진 게 아닌가 걱정스러웠으나, 라이너는
태연했다.
"폭탄의 존재를 상부에게 보고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근신 처분 을 받긴 했습니다만...... 겨우 열 흘 근신입니다. 황가 마차에 설치 된 폭탄을 안전히 해체한 공을 인 정받아 훈장도 받게 되었습니다- 황가 마차 쪽 폭탄은 광장에 설치 된 폭탄과 다르게 위력이 약한 폭 탄이었기에 다행이었죠. 사실 열 흘 근신도 처벌보단 휴가에 가깝 습니다."
하기야, 황제와 황태자를 구한
것은 영웅으로 추대되어야 마땅한 업적이었다.
내가 옅게 안도의 한숨을 쉴 때, 라이너가 날 향해 눈을 휘었다.
"그리고 그 근신을 받았기에 지 금 카슈미르와 함께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무척 만족스럽습 니다."
무심하고 딱딱한 인상으로 다정 을 말하는 것은 처음 보는 이에게 조금 묘한 느낌을 줄 테지만, 내 게는 무척 익숙했다. 허나 익숙하
다 해서 감흥이 없는 것은 아니었 다.
역시 좋았다. 그의 올곧은 눈길 도, 햇살 같은 다정도.
그와 마주할 때면 가슴이 따뜻 하게, 또 이상하게 술렁였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나는 라이너를 향해 마주 웃어 주었다.
나와 라이너는 수도의 거리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축제의 노 점상들은 살짝 어둑해지는 오후에 가장 활성화되는데 지금은 이른 오후였으니, 노점상 거리는 뒤로 하고 꽃이 핀 거리부터 구경하고 있었다.
"옷, 무척 잘 챙겨 입으셨습니 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 속에서 거 리를 거닐던 나는, 문득 라이너의 복장을 보고 넌지시 말했다.
이전에 라이너에게도 평민처럼 입고 오라고 언질을 해 두긴 했지 만, 라이너는 평생 귀족으로 살아 온 사람이라는 걸 감안해 별 기대 를 하지 않았다.
허나 꽤 신경을 쓴 건지 현재 그의 차림은 조금 비싸 보인다는 것만 제외하면 무척 평민 같았다.
'그래도 잘생겼군.'
나는 조금 흐뭇해져서 슬쩍 웃 었다.
아무리 투박하게 입어도 라이너 의 미모는 빛을 잃지 않았다. 오 히려 화려한 제복을 입고 있을 때 보다 깔끔한 지금의 옷차림이 더 잘 어울리는 듯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 감사합니다. 카슈미르도 좋 습니다. 특히 머리 묶은 거...... 잘 어울립니다."
내 칭찬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 답한 라이너가 말을 덧붙였다. 특 별한 미사여구로 꾸며지지는 않은
직설적이고 뻣뻣한 칭찬이었으나, 그 맑음이 기꺼웠다.
난 칭찬을 하면서도 쑥스러운지 내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는 그가 귀여워 턱을 매만졌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머리를 자주 묶고 다닐까요."
나는 느긋한 투로 말하며 망아 지의 꼬리처럼 하나로 높게 묶은 머리칼을 툭 건드렸다. 파란 리본 에 묶인 머리칼이 바람을 따라 살 랑였다.
원래는 그냥 풀고 다닐 때가 많 았는데, 이제 곧 여름이라 묶고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 다.
'그러고 보니 이 리본은 디에고 가 준 거지.'
난 피식 웃으며 라이너를 올려 다보았다.
"이 리본, 황태자 저하께서 사냥 대회 때 주신 겁니다. 저는 눈 색 이 붉은 계열이라 푸른색 리본은
잘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괜찮습니까?"
"......황태자 저하께서요?"
내 가벼운 물음에 라이너가 순 간 멈칫했다. 그의 되물음에 고개 를 끄덕이자, 그의 표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묘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의 감정을 다 읽을 순 없었지 만 슬쩍 좁아지는 미간을 보아 기 분이 좋지는 않아 보였다.
"......그렇습니까. 저하께서 주신
리본을...... 절 만나러 오면서 하 신 거군요."
라이너가 평소보다 한 톤 낮은 목소리로 느리게 내뱉었다. 분명 차분한 목소리였으나, 동시에 으 르렁거리는 것처럼 날카롭게 들려 왔다.
그가 손을 들어 내 머리칼을 한 데 묶은 리본을 느리게 쓸어내렸 다. 푸른 리본을 보는 금빛 눈동 자로 질척이는 무언가가 흘러내렸 다.
"잠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스르륵.
라이너의 딱딱한 손끝이 리본의 매듭을 살며시 잡곤 망설임 없이 잡아당겼다. 매듭이 속절없이 풀 려 나가며 디에고의 두 눈을 닮은 푸른빛이 길게 허공을 수놓고, 묶 여 있던 내 머리칼이 너울거렸다.
나는 놀란 눈으로 라이너를 바 라보았다.
"감히 말씀드립니다만, 이 리본
은 카슈미르에게 어울리지 않습니 다. 너무...... 푸르지 않습니까. 다른 색이 어울리겠군요."
라이너가 눈을 내리깔아 제 손 에 쥔 푸른 리본을 바라보았다. 순간 직감이 짧게 울릴 정도로 위 험하게 번뜩이던 금빛 눈동자가 구름에 태양이 가려지듯 길고 섬 세한 속눈썹에 감춰졌다.
굵은 손으로 리본을 찢듯 매만 지던 라이너가 내게 리본을 돌려 주었다. 어쩐지 내키지 않는 것 같은 손길이었다.
"제 생각엔...... 카슈미르에겐 은회색이나 금색이 가장 잘 어울 릴 것 같습니다."
살짝 상체를 굽혀 나와 시선을 가까이한 라이너가 속삭이듯 말했 다.
마주한 시선으로 퍼지는 미묘한 공기.
끝없는 갈망을 담은 금빛 눈동 자가 파도처럼 울렁였다. 올라간 입꼬리 끝이 조금 딱딱해진 라이
너가 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시내에서 새로운 리본을 하나 사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함께 가 시겠습니까?"
녹아내린 초콜릿처럼 한없이 상 냥하고, 부드러우며, 진득한 목소 리가 물었다.
"......그러죠."
잠시 물끄러미 라이너를 바라보 던 나는, 조용히 수긍하며 라이너 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이내 나
를 단단히 붙드는 큰 손.
분명 그저 다른 리본을 사러 가 자는 말에 불과했으나, 악마의 꼬 드김이라도 되는 양 거절할 수가 없었다.
"거기 두 분! 액세서리 구경하고 가세요"
라이너와 노점상이 들어선 시내 를 거닐고 있었을까, 호객하는 목 소리가 나와 라이너를 불렀다. 여
러 번의 호객에도 이미 많은 노점 상을 지나왔으나 '액세서리'라는 단어가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저기, 구경하다 갈까요?"
"좋습니다."
내가 액세서리로 가득 찬 매대 를 가리키자, 라이너가 고개를 끄 덕였다.
'으음...... 이런 건 잘 모르는 데......
다채롭고 화려한 가지각색의 액
세서리들 앞에서 나는 조금 곤란 한 표정을 지었다.
워낙 심플함만 추구해 왔던 탓 에 액세서리 같은 건 좋아하지도 않았고, 익숙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미적 감각도...... 그다 지 '
부끄럽지만, 나는 미적 감각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패션 센스도 없어서-사실 센스랄 것도 없이, 나는 내 마음대로만 입고 다닐 수 있다면 평생 와이셔츠에
바지만 입고 다닐 거다- 공식적 인 석상에 갈 땐 무조건 시녀들과 아리아의 검사를 받아야 했다.
'이런 건 르웰린이 잘 고를 텐 데.'
문득 천재적인 감각을 가진 친 구가 떠올라 세밀하게 조각된 붉 은 장미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미르가 테러를 막았다는 소문이 대륙 전역으로 퍼진 뒤, 르웰린에 게서 안부를 묻는 편지가 왔었다. 서로 일이 바빠 오랫동안 보지 못
하고 있었던 참이었으니 괜찮다는 것도 보여 줄 겸 한번 만나는 것 이 좋을 것 같았다.
'르웰린한테 선물을 보내면서 연 락 한번 해 봐야지.'
이 펜던트는 보면 볼수록 르웰 린이 떠올랐다. 내가 심미안은 없 지만, 르웰린도 좋아할 거라는 생 각이 들었다.
'사서 선물해도 좋겠지.'
그 외에도 가족들에게 줄 만한
액세서리가 없나 싶어 매대를 뒤 적거릴 때였다.
"카슈미르. 이 리본 어떻습니 까."
나를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고 개를 돌렸다. 리본을 진열한 매대 에서 서성이던 라이너는 금색 물 결무늬가 들어간 은회색 리본을 손에 쥐고 있었다.
"예쁜데요. 저는 좋습니다."
내게 리본을 사 주기 위해 저
큰 손에 길고 가는 리본을 이것저 것 쥐어 봤다는 것이 귀여워 나는 푸스스 웃었다.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이너는, 이내 주인을 불러 리본 의 값을 치르고 내게로 성큼 다가 왔다.
"머리, 묶어 드려도 되겠습니 까?"
라이너의 손이 내 머리칼을 느 리게 쓸어내렸다. 그 손길은 무척 자연스러웠고, 나 또한 기껍게 받
아들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라이너도 나랑 스 킨십이 많이 편해졌구나.'
새삼 이전의 라이너가 떠올랐다.
이전엔 피부만 살짝 닿아도 굳 는 것이 보였는데, 이젠 라이너가 먼저 나서서 스킨십을 시도해 오 곤 하니 그도 내가 많이 편해진 것 같았다.
"물론, 좋습니다."
그만큼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진 것 같아, 나는 기쁜 마음으로 수 긍했다.
옅게 웃은 라이너가 내 뒤에 서 더니 긴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내 머리칼을 빗어 내렸다. 거리가 가까워져서인지 은은한 로즈우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머리칼을 높게 한데 모은 그는 조금 미숙한 손길로 리본을 매듭 지었다. 드러난 목덜미에 닿는 바 람결이 간지러웠다.
"......됐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라이너의 손이 스르륵 떨어지고, 나는 매대의 거울로 묶인 머리를 확인했다.
긴 머리를 만져 본 적이 적다는 것을 티내듯 삐죽삐죽 잔머리가 튀어나온 포니테일. 내가 묶는 것 보다 훨씬 형편없는 결과물이었지 만, 어쩐지 나쁘지 않았다.
'은회색과 금색이면...... 라이너 의 색이네.'
리본을 매만지며 떠올렸다.
햇빛을 받으면 달빛처럼 부스러 지는 은회색 머리칼과 어둠 속에 서도 형형히 빛날 것 같은 맹금류 의 금빛 눈동자를.
"이 리본, 라이너의 일부 같습니 다."
그 색들을 모두 담은 것이었기 에 나는 무심코 말했다.
내 말을 들은 라이너의 두 눈이
커졌다. 일렁이는 금빛이 나를 바 라보았다.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싫습니까?"
주저가 묻어나는 조심스러운 물 음.
나는 눈을 깜빡이다, 사르르 웃 음 지었다.
"그럴 리가. 그래서 좋습니다.
라이너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나를 한참 응시하던 그는, 이내 헛웃음을 뱉으며 웃는 듯 우는 듯 기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한데 묶인 내 머리칼을 뭉근하 게 쓸어내린 라이너는 이내 내 머 리칼 위로 고개를 숙였다.
부드러운 입술이 소리도 없이 머리칼 위로 내려앉는다. 분명 머 리칼은 신경이 없어 입술의 감촉 이 느껴질 리 없었으나, 부드러운 애정 표시가 가슴께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눈을 깜빡이며 라이너를 돌아보 자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숭고하 게 내 머리칼 위로 길게 입술을 내리던 그가 나와 눈을 맞추었다.
"당신은 이게 문제입니다."
황금빛이, 나를 잡아먹을 듯 번 뜩였다.
"내가, 주제도 모르고 손에 쥐고 싶게 하잖아."
그의 입술이 닿은 머리칼 위로 짙고, 깊고, 질척이는 감정의 낱 말들이 퍼져 나갔다.